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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의 남자_복수극의 그로테스크한 뉘앙스

zamsoobu 2012. 6. 10. 14:06

[적도의 남자]가 지난 5월 24일 마지막 20부로 종영하였다.

 

 

거의 4부를 넘어서 우연히 보게 된 이 드라마의 첫 인상은 굉장히 '어두운' 듯했고, 낮고 굵게 읖조리는 듯한 분위기여서 크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당시 그냥 넘겨버렸었다.

 

 

 

 

히틀러는 연설을 할때 석양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 대기의 빛과 색이 주는 감정적 고양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적도의 남자 의 장면장면은 이러한 하늘의 표정과 같이 한다. 사쳇말로 셀카질을 부르는 이런 석양은 인물 들 간의 긴장감과 서사에 더욱 힘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선이 굵은 드라마에 다시 빠져버렸고, 팬이 되었다. 그럴 만한 이유는, 우선적으로 이야기가 어느 한 인물이 튀는 상하관계에서가 아닌, 다양한 인물 군상들 사이에서 복합적으로 이뤄진 다는 점이다.

 

물론 김선우(엄태웅 분)와 이장일(이준혁), 그리고 한지원(이보영), 최수미(임정은)이 주축이 되기는 하지만, 그 주변 인물들의 혼을 쏙 빼는 연기에 더욱 드라마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장일의 아버지인 이용배씨(이원종 씨), 진노식(김영철 씨), 그리고 최수미의 아버지(이재용 씨) 등은 오히려 주연배우들(호연을 펼치긴 하였지만, 왠지 자아와 배역 간의 간극이 느껴지는 )의 주변에서 드라마를 빛이 번쩍번쩍 나도록 한 장본인이지 아닐 까 싶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동경하는 동시에 존중한다.

 

'빛나는 조연'이란 말은 너무 상투적이면서, 어느 프로그램 제안서에 그럴듯하게 '색다른 아이디어'처럼 보이기에 적절한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느끼는 것을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뱉자면 이 말일 것이다.

 

 

 

악역 임에도 뭔가 매력적인 인물이다. 왜? 그의 욕망과 냉혹한 성정이 나에게도 일부 있기 때문일까.

 

 

 

배우 이원종. 같은 인물임에도 극중 캐릭터에 따라 다른 헤어스타일이나 기타 외모의 변화가 얼마나 인상에 크게 작용하는 지 새삼 느낀다.

적도의 남자 에서 아들의 인생에 자신을 옭아매어 결국 자멸하고 만, 진심으로 '못난' 인물이었 던 반면에, 최근 방영 중인 닥터 진 에서는 호방하면서 뻔뻔한 기질의 괴수를 연기하고 있다. 그의 웃음이 유난히 밝아보인다...나라도 적도의 남자 속 이씨 같은 인물을 연기하자면, 평소에도 그 그늘에 짓눌려 어두운 나날을 보낼 것 같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복수극'이라는 점이다. 나는 '복수'이야기를 좋아한다. 아니 그보다, '재기'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하는 게 맞겠다. 한 인물이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어느 한 시점을 계기로 기적같이 소생한다는 점, 포기를 했다가도 어느 강한 내적인 불꽃이 붙어 그 티끌같은 희망을 간신히 붙잡고 일어난다는 점.

그래서 나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GLADIATOR ,2001]의 막시무스 장군을 그렇게 연호했던 것이다.

 

인간은 본래 나약한 존재이지만, 의지는 그 인간을 초월하여 생기며 작용한다. 그래서 의식일 때보다, 무의식일때 사람은 가끔 무한한 능력을 체험하는 경우도 있다.

 

이야기가 잠시 딴데로 흘렀지만, 아무튼, 그런 배신(가장 친한 친구의 배신이란 설정이 안방드라마의 한계여서 너무 아쉽긴 하지만...)을 겪은 후, 재기하여 돌아온 이야기는 언제나 통쾌함과 동시에 나같은 잡초들의 욕망을 대리충족시켜준다. 데이빗 김이란 버터냄새나는 이름이 우습긴 했지만, 어쨌든 김선우는 사업가로 성공하여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보며 내내 한 켠으로 불편했던 진실은 바로 이장일과 이용배, 이 부자지간의 역학이다. 주어진 형편에 터무니 없게 공부 잘하는 아들, 그리고 그를 보며 늘 죄책감에 대한 보상으로 과잉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버지, 거기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그런 아버지를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이용하는 냉혈한 아들, 그러는 과정에서 아들과 자신이란 존재를 분리시키지 못한 채 아들에게 예속된 삶을 사는 아버지...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와 부모님의 상황과 닮았다는 생각이었다. 가난한 형편에 터무니 없는 예술이라는 꿈. 그 [대단한 예술]이란 무용하며, 재고의 가치도 없을 분명한 제외목록인데도 나는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는 버리는 것도 상당한 용기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자면, 참 비겁한 사람이다.

 

 

 

주의 깊게 본 인물 중 한명이 최수미 이다. 자신의 첫사랑(고등학교 때 호의로 시작하여 잠시 품었던 풋풋한 감정을 그토록 오래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그로테스크 하게 보인다. )을 위해 비이성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그녀는 화가이다. 예술은 도덕의 경계를 나누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한 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예술가는 오히려 그런 경계선을 경계한다.

 어찌됐든, 직접 범죄자는 아니지만, 일종의 방관자이자 목격자로써, 단지 대상에 대한 반응을 유지해나가는 그녀의 삶의 방식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그녀의 작업할 때 의상이다. 물론, 드라마에서 실제의 리얼리티의 생리를 기대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지만, 화이트 핫미니스커트에 형광색 슬리브리스, 그리고 치렁치렁하고 블링블링한 악세사리를 풀착장하고 작업하는 모습은...너무나 생경하면서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대체, 그렇게 자신을 잘 꾸미면서 차려입고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실제로 보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까지도. 어쩌면. 이런 감정들이 못난 질투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