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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린 만나, 영화《버닝》_리베라씨옹_20180518

zamsoobu 2018. 5. 20. 06:54

실종에 잇따른 혼란에 빠진 러브스토리, 감독 이창동 의 방황하는 존재들의 영화가 이번 71회 칸 영화제에 경쟁부분에 상영되었다.


경쟁부문


감독 이창동/배우 유아인, 전종서, 스티븐 연


경쟁부문의 하루 전날, 이미 한시간즘 지난 저녁즈음. 이창동의 영화가 2시간 30여분의 러닝타임으로 성배를 드는 듯하다. 지난 12여일 동안 영화를 포식한 관객들, 그리고 듬성 듬성 바쟁 상영관을 채운 이 관객들은

이 영화가 별볼일 없어보인다고(그야말로 단순히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생각할 지도 모른다.  

아마 영화로 포식한 듯한 관객을 상대해야 하는 게, 이 감독에게는 불리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한국인 감독의 제스처는 그와는 별개로 유연하고 근엄해보이기까지 하다.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지만,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는 이야기를 하기에.


영화 버닝은 느린듯 혼란을 가중시킨다. 희미한 빛이 가득한 가운데 비밀스런 음향들이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영화가 계속 이어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날 밤, 아마 세큐리티 직원들은 졸았을지도 모르겠다. 조용하지만 거대한 화재가 정신적 공간을 채웠다고 할까? 관념적이면서 여백이 있는 이야기와 겉치레 없이 유연한 구성이다. 


젊은 청년 종수(유아인)는 파주에서 아버지의 농가에 일하던 중, 비밀스런 여인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해미는 포르세를 몰고 다니는 벤(스티븐 연), 일종의 비밀스런 개츠비 타입-과 더 행복해 보인다. 암묵적인 사회적 폭력이 깔린 곳에서, 불안한 움직임들이 시작되고, 해미는 곧 실종된다. 종수는 이를 쫓는다.



《상류층》

영화는 초반부 복잡한 장터 한가운데 관객을 던져놓으며 이 셋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슨일이 벌어지는 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두명의 여인이 소리지르며, 전단지를 나누어주고있다( 심지어 무엇을 판매하는 지도 모른다). 버닝은  설명해주지 않는다. 긴장감을 잘 유지하며, 차곡차곡 장면들을 붙여간다. 고급스럽고 거대한 외관의 아파트의 빈 공간이나 시골풍경을 뒤로 한 석양을 보여줄 때조차도 마찬가지이다 : 무언가 관객이 놓치고 있거나 숨겨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마치 먹이를 줄 고양이가 있는 데, 어디 있는 지 모르는 것처럼. 온실은 불투명하다. 마치 현대 자본주의에 모호한 돈의 마그마 물결처럼 근원지를 알 수 없다.


사건의 열쇠를 캐려하는 관객처럼, 종수도, 대략 얼빠진 인상의, 단서를 좇는다(화재, 실종). 마치 이 일련의 사건들이 의도하에 이루어 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해독하려한다. 배우 유아인은 그의 얼굴을 읽을 수 없이 연기해서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벤은 반대로 태평스럽고 무기력하며, 단지 기분을 풀기 위해 온실에 불을 질렀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이 두 인물을 대척점에 놓고, 빠르게 종수의 편에 서서 이야기한다 : 그는 벤의 거만함에 무시당하고 무너진 루저이다.


글쓰기의 문제는 이 영화 내내 거론된다. 왜냐하면 종수란 인물 자체가 작가로써 묘사되기 때문이다. 비록 컴퓨터 모니터 앞에 있는 장면이 두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처음은 아버지의 서류작성을 도와주는, 두번째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는다. 마치 실종을 더 이상 해결하지 못하고, 상실감과 실패 앞에서 무언가라도 써야하는 것처럼. 등장인물은 점점 혼란에 빠진다. 감각과 경험들에서 어떤 논리가 그를 마치 피해가듯,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의 단어를 말한다. 이제 알겠어. 


《가려움》

감독 이창동은 전직 소설가였다. 하지만 그만의 방식이 있다. 굴곡진 길을 따라가듯, 절대 쉽게 출구를 찾을 수 없는 혹은 불가능한 뫼비우스의 띠처럼 은유와 주제에서 빗나간 여담이 곳곳에 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보면, 공포가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다. 화상으로 입은 상처가 끔찍하게 가려운 것처럼》 종수와 벤 사이의 대립 장면에서 미국 작가 포크너의 책, 반 버닝 Barn Burning에서 차용된 문구이다. 숯을 보면서 종수는 아버지의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가출한 엄마의 옷을 기억한다. 그리고 벤의 기이한 협박에 그는 벤이 온실 중에 한 곳에 방화를 저지를 것이라 확신한다. 타워의 그림자에 고정된 눈길을 차단하는 햇빛. 산재한 불화의 씨, 폭발하는, 그리고 암묵적 실망, 모든 것들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끔찍한 가려움》을 번지도록 한다.


《파장

영화 버닝의 분명하게 존재하는, 믿을 수 없이 농도짙은 이 정신적 힘은 그것이 별다르지 않은, 평범한 순간과 공간에서 이뤄지도록- 카페에서 친구들의 대화, 시골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감독 이창동이 구성했다는 데에 있다. 마치 극적 구성에 반기를 드는 것처럼, 혹은 아주 느리게 마취제를 투여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마치 《조금씩 조금씩 구멍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처럼》이 영화의 원작인 하루키Harouki 의 헛간을 태우다(1983) 에 나오는 구절이다. 심사위원단은 (2010, 시나리오상)과 밀양(2007,여우주연상) 에 이어 다시 한번 황금종려상을 받을 만한 이 영화의 긴 파장에 손을 들어 줄 것인가? 우리의 소망이 꺾인다면, 축제장내에 있는 모든 플라스틱 텐트를 태워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인 듯하다...  


엘리자베스 프랑크-뒤마 ÉLISABETH FRANK-DUMAS

디디에 페롱 DIDIER PÉRON

불한번역 잠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