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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1.07 이사오기 전 짐을 줄이기 위해 버린물건 # 연회색 플랫슈즈

이사오기 전 짐을 줄이기 위해 버린물건 # 연회색 플랫슈즈

연회색 발레리나 플랫슈즈

너를 처음에 보았을 때 그런 상상을 했다.

너와 함께라면 선머슴 같은 나도 한 떨기 가녀린 수국같은 소녀가 되는 마법. 그리고 뭉게구름. 그리고 허공에서 빛을 받아 반짝이는 가루들.

뾰로롱.

그런 상상만으로 너와 곧바로 만날 순 없었다. 수많은 고심 끝에 너를 장바구니에서 삭제하였던 기간은 끔찍할 만큼 길게 느껴졌었지. 그렇게 너를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던 어느 날, 동대문부자재상가에서 재료들을 수집하던 중 정말 우연하게도 너가 있는 구두도매 매장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반가움에 소리까지 지를 지경이었지.

너를 데리고 있던 그 주인장은 자신감에 넘쳐 너의 몸값을 말했고, 나는 시중가보다 5000원 더 싼 사실에 온 몸이 떨렸다. 곧바로 내 왼손은 너의 연회색바디를 어루만지며 오른손은 지갑의 배춧잎을 더듬고 있었다.

그렇게 너를 검은 비닐 봉다리에 감싸 집에까지 무사히 데리고 왔지. 행여 빗물에 모양이 쉽게 망가질까 봐 몇 백만원 짜리 구두 못지 않게 궂은 날씨를 가려가며 너와 함께 바깥을 나가곤 했었다. 하지만 너는 내게 아주 큰 비밀을 숨기는 엉큼함을 보였어.

그것은 아주 커다란 아픔이었다. 발목이 끊어질 아픔. 너의 주름들은 내 아킬레스건을 죽어라고 무차별 공격하고 나섰던 거야. 어째서 내게 이렇게 잔인했던 건지.

나는 행여 닳을까 고이고이 숨결조차 아꼈겄만, 너는 인정사정 없는 냉혈한 독이 뿌리끝 부터 수술 끝 하나의 가루알갱이까지 가득찬 장미였다. 그래도 너를 포기할 수는 없었어.

아주 부들부들한 질감의 가죽을 모양대로 조각 내어 내 뒷꿈치가 닿는 부위에 오공풀로 붙여 넣었고 조여 들며 아픈 너의 주름들에 대항하려 나름 애썼다. 하지만 너는 덧댄 가죽만큼 공간은 줄였고, 오히려 내 발 뒷꿈치 뿐 아니라 발가락 끝까지 오그라들게 하며 큰 고통에 찬 한 방을 보기 좋게 날렸다. 그래도 나는 너를 끊을 수 없었다. 너는 내게 정숙한 여인이란 가면 의식을 주었고, 그를 즐길 수 있을 때까지 누리고 싶었다. 대신 너를 궂은 날에도 데리고 나가며 빗물에 맞서도록 하였지. 배신감을 느꼈을 지 모르겠지만, 이제 나도 조금 거리를 두고 지내기로 한 거다.

관계에 있어 처음 인상이란 이토록 중요한가 보다. 30분이라도 신으면 여지없이 내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곤 했지만, 그래도 1여년간 함께 할 애정이 있었던 거야.

아마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한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