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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26 Gérard Collomb 제라르 콜롱브 ; 리옹시장

Gérard Collomb 제라르 콜롱브 ; 리옹시장

■ 교수자격증을 가진 제라르 콜롱브는 1977년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리옹시장이면서 2001년부터 그랑 리옹의 위원장이다. 1999년부터는 론 지역의 상원의원이다. 일찍이 사회당에 들어가면서 그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François Hollande 프랑수아 올랑드를 지지하고 있다.

리옹은 2013년 문화도시에 불리한 참가자입니다. 어떤 목표로 여기에 참가하셨나요?
당시에는 융합의 신 지역을 조성하려는 참이면서 보다 넓게는 인구밀집지구의 주변 지역을 재정비하려 하던 때였습니다. 1960-70년대 이후부터 몰락해가던 산업지구였죠. 예술과 특히, 현대예술은 이러한 지역을 혁신하는 데에 큰 힘이 됩니다. 예를 들어, 40만 제곱미터 대지에 세워진 제당공장을 개조하여 현대예술 비엔날레를 위한 장소로 바꿔서 융합을 꾀한 것입니다. 이 결정은 거의 선구적이었습니다.  제 1회 리옹 현대 예술 비엔날레를 위해  Vaulx-en-Velin의 타즈 Tase 단지를 재조성하면서 역사를 다시 쓰고 있죠. 사실, 이 오래된 견직물 제조 공장은 Vaulx-en-Velin 에서 500헥타르의 규모로 진행되었던 프로젝트의 핵심지였습니다. 4년 안에, 이 지역은 동부에서 융합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현대예술과 도시간의 관계에서 혁신을 떠올리는 겁니다. 지역을 개척하는 하나의 방식이죠. 예술을 끌어들이면서, 도시의 거주자들은 주변환경을 다시 볼 수 있는 계기와 새로운 장소가 만들어집니다. 예술은 격리상태의 도시의 일부분을 밖으로 끄집어내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2014년 리옹시의 참가는 이렇게 새롭게 부상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죠. 뭐, 나로선 이런 선택이 문화적 척도를 문제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믿는 편이예요. 다른 도시들, 보르도나 툴루즈도 리옹처럼 불리한 입장이거든요.

리옹시와 도시 조직의《문화부문》예산은 어떻게 정하시나요? 
리옹시는 예산의 20%를 문화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거의 1억 유로정도이죠. 다른 도시와는 아주 다릅니다. 우리에게 부과되는 공공 정책을 아직 이해를 못하곘어요. 비용이 상승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6개의 미술관과 보자르 국립학교가 2천3백만 유로를 차지하죠. 그리고 그랑 리옹 Grand Lyon (도시 조직) 에서는 비엔날레(Biennale de la danse , Biennale d'art contemporain )을 위해 2백 68만 유로를 출자하고, 2012년 영화의 빛 축제 Festival du cinéma Lumière 를 위해 1백1십만 유로를 투자했습니다. 2012년과 변함이 없는 액수이지만, 여러 유럽의 다른 도시들이 예산을 절감한 데 비하면 두드러지는 수치입니다.
 우리가 이런 높은 액수를 문화에 계속 투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효용적인 부분을 위해《나사를 아주 강하게 조였기》때문입니다. 이런 정책으로 인해, 내가 처음 시장직을 맡을 당시 4억3천만 유로였던 부채가 2011년 3억7천만 유로에까지 줄어들었으니까요.
 1유로의 공공요금을 써서 6에서 7유로의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도시를 다시 활성화시킬 무언가를 보는 겁니다.

푸생 Poussin[각주:1]이집트로 피신 La Fuite en Egypte 를 구매할 때, 개인으로부터 후원을 얻은 사실을 기억합니다. 구매에 원칙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계속되고 있어요. 우린 보자르 미술관에 소장하기 위해 피에르 술라쥬 Pierre Soulages 의 1967년도의 유화를 구매하는 중입니다. 1억 7백만 유로의 총 구매액 중에서, Fram [Fonds régional d'acquisition des musées ] 가 200만 유로를, 생-피에르 미술관 Musée Saint-Pierre 에서 57만 유로를, 그리고 시에서도 30만 유로를 지원했습니다.
 이 구매 과정에서 시가 참여하면서 피에르 Pierre Soulages 의 다른 두 점의 작품, Brou de noix sur papier(1947) 과 Peinture(2009) 의 구매가 가능했고, 2012년 3월 초에 미술관의 소장목록에 이 《삼면화》가 등록이 되엇습니다. 현대예술 컬렉션에 새로운 작품이 추가된 거죠. 2012년 10월에 미술관측은 로마에 Villa Médicis 과의 협력 하에 작가의 주요 전시를 열기도 하였죠.

시장님은 문화협력 공공 건물( EPCC : établissement public de coopération culturelle )이란 맥락에서 시립미술관 재편성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예술학교école d'art 는 이미 1년전부터 그 계획을 수행 중에 있어요. 우린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았어요. 우리는 관리를 보다 유연하게 하면서 질적인 향상을 하려는 게 목표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미술관을 공공 건물로써 재편성하려는 계획은 없어요. 지금 두 명의 책임자가 너무도 잘 하고 있는데, 왜 바꾸겠습니까? 반대로 어떤 기관에는 재편성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시너지효과를 내기 위해 함께 협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리옹 비엔날레가 2015년에 열릴 파리 트리엔날레 Triennale de Paris 와 경쟁 관계에 놓일 것이 두렵지 않으신가요? 
 물론이죠! 하지만 동시에 베니스 비엔날레도 개최되기도 합니다. 세계 유수의 언론에 모든 기사들을 보면서 리옹이 그렇게 나쁜 출발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베니스와 비교를 하는데, 파리는 왜 아니겠어요?  경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2007년에는 비엔날레가 자리잡기 전이라 아주 불안했었습니다. 지금은 현대예술계에 무사히 안착했죠. 나는 사실  리옹이 이 범주를 바꾸어놓았다고 봅니다. 세계화의 물결을 탔어요. 대중은 세계 전지역에서 이 곳을 찾아옵니다. 우리의 성과는 유럽 도시들을 교차하면서 세계적입니다. 세계적이 되기 위해 국민성의 범주를 초월했다고 봅니다. 실비 레이몽 Sylvie Ramond 이 순수예술 미술관장이 된 이래로, 대규모 전시를 개최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른 미술관들과 꾸준한 교류를 하면서 중요한 준비를 해온 덕분이죠.

그래서 보다 복잡해졌나요?

파리와의 복잡한 관계는 부차적인 겁니다! 이뤄지고 있는 것과는 반대상황이죠. 리옹출신은 파리에서도 시적인 감흥을 가지고 작업을 합니다. Anne-Sylvie Schneider[파리시의 정보통신부장] 에 의해 만들어진 백야 La Nuit Balnche 도  리옹의 빛 축제 Fête des lumières 로 전해졌으니까요. 파리의 벨리브Vélib도 리옹에서 벨로브Velo'v로 전해졌죠. 프레데릭 미테랑[문화부장관]이 최근에 리옹을 방문했을 때, 《식도락의 도시》  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면서 개진해볼 것을 제안했죠.
 그런 주제로 몇 차례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이 있고, 리옹에는 분명히 훌륭한 식도락의 유산이 있기 때문이죠. 여러 곳이 물망에 올랐어요. 오텔-뒤hôtel-Dieu 는 융합의 새로운 장소로 검토하는 중이고, 파르-뒤 Part-Dieu는 백만 평방미터 너비의 지역을 재건축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당시에 시장님은 미술관이 지역에 융합된다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나요?
 나 스스로 호의적이었다고 절대 말하진 않겠어요. 단순히, 거기에 아마 그런 타입의 미술관을 지을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 진행중이던 두가지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하나는 거대한 볼륨감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보다 미니멀한 성격이었죠. 내 생각에는 풍경에 자연스럽게 묻히는 게 좋았어요. 건축을 유도하는 것은 풍경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죠. 렌조 피아노 Renzo Piano 를 보면서 생각한 겁니다. 현대의 미술관은 거의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듯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러한 점을 극복하고 융합을 이루는 겁니다. 무용의 집 Maison de la danse 도 그런 의미이죠.


다른 시장들과 대조적으로 시장님은 문화계에 적극적인 듯 합니다. 심사숙고한 결과인가요? 
 그래도 혹자는 반대로 나를 혹평하기도 해요.  주요한 문화 정책에 너무 관여하는 바가 크다는 거죠. 최근 사례를 들자면, 도미니크 에르뷔 Dominique Hervieu 기 다메 Guy Darmet 에 이어 무용의 집( maison de la danse : 프랑스 무용 전문 극장 ) 의 후임자로 임명이 되었어요. 난 문화가 나만의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리옹에는 문화적 경쟁력이 있는 조력자가 많습니다 ; 그들이 전방에서 이끄는 겁니다. 기관의 책임자자리도 그런 점을 존중하죠. 우리는 모든 분야에 훌륭한 인재들이 포진해있어요!
 시장이란 자리는 무엇보다 이런 겁니다 : 각각의 영역에서 최고를 자부하는 사람들에 둘려싸여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내게는 좋은 자질이 있어요 : 바로 호기심이죠. 난 전세계에 노선들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리옹에 훌륭한 건축가가 있다면, 그건 내가 유럽의 도시들을 지켜봐왔기 때문인 겁니다. 건축가들이나 화가들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참조를 합니다.

손Saône 강 정비를 보면 풍경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프로젝트도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요?
 손 강둑을 재정비하고 싶어 계획을 세운 겁니다. 북쪽으로 25킬로미터까지 도시의 경계선에까지 융합하고자 한 거죠. 예술가들과 조경전문가들이 함께 작업하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제롬 상 Jérôme Sans 이 카와마타 타다시 Tadashi Kawamata , 파스칼 마틴 타요 Pascal Marthine Tayou , 장-미셀 오소니엘 Jean-Michel Othoniel  같은 작가들과 함께 협력을 한 겁니다. 그건 우리가 종종 목격하곤 하는 불시착한 작품들이 아닙니다. 대지는 예술작품으로 한껏 고양되는 겁니다. 첫 《시퀀스》는 2014년 봄에 대중에게 선보일 예정입니다.

시장님은 프랑수아 올랑드와 같은 당에 있습니다. 사회당의 문화 정책 개발은 아직 거의 미미한 상황인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렐리 필리페티 Aurélie Filippetti [Moselle 의 사회당 위원 ]나 다른 위원들이 곧 개발에 참여할 거라 생각합니다. 프랑수아 올랑드는 도시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겁니다. 이탈리아 도시들을 보면, 예술과 도시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죠. 경제적으로 성장한 대도시들은 문화적으로도 두각을 나타냅니다.
 보세요, 16세기에, 제네바가 장악하더니, 앙베르, 파리, 런던...그리고 지금은 아시아의 도시들이 그렇죠. 그래서 이런 도시들은 그 나라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도 이와 관련해서 활동을 장려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일이죠.
 


출처 : LE JOURNAL DES ARTS #
기사 : Jean-Christophe Castela
번역 : PLONGEUSE ( 잠수부 )
  1. 푸생 [Nicolas Poussin, 1594~1665.11.19] 요약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며 프랑스 근대회화의 시조. 신화·고대사·성서 등에서 제재를 골라 로마와 상상의 고대 풍경 속에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고전적 인물을 등장시킨 독창적인 작품을 그렸다. 장대하고 세련된 정연한 화면구성과 화면의 정취는 프랑스회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프랑스 노르망디 레장드리 주요작품 《계단 위의 성가족》《아폴론과 다프네》 ↑ 포키온의 유골을 모으는 그의 아내 / 푸생의 작품 본문 1594년 노르망디의 레장드리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 고향에서 Q.바랭에게 배우다가 1612년 파리로 나가 F.엘 및 G.랄르망에게 사사하였다고 하나, 이 시기까지의 일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1621년 뤽상부르궁(宮)의 장식에 필립 드 샹파뉴와 함께 고용되었다. 이 때 왕궁에 소장된 라파엘로의 작품을 알게 되었고, 원래 이탈리아 고전(古典)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더욱 로마를 동경하게 되었다. 1624년 로마로 가서 당시의 유행작풍이었던 카라치파의 작품을 배우고 도메니키노의 아틀리에에서 제작하였다. 그가 지니는 명쾌단정(明快端正)한 구도와 약간 차가운 듯한 색조는 이 시기의 수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네치아파에서도 영향을 받아 라파엘로 등 고대에 심취하였고, 로마와 상상적인 고대풍경(古代風景) 속에서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고전적 인물을 등장시킨 독창적인 작품을 창출하였다. 1628년 성베드로대성당의 제단화를 그릴 무렵부터 명성이 높아져, 1639년 마침내 고국 프랑스의 루이 13세로부터 수석화가로서 초빙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화가들과 잘 맞지 않아, 1642년 다시 로마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신화(神話)와 고대사(古代史), 성서 등에서 제재를 골라, 그것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독특한 이상적인 풍경 속에 그렸는데, 그 장대하고 세련되고 정연한 화면구성과 화면의 정취는 그 후 프랑스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며, 프랑스 근대회화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작품으로 《예루살렘의 파괴》(빈미술사미술관) 《아폴론과 다프네》(뮌헨미술관) 《바커스제(祭)》 《플로라의 승리》 《아르카디아의 목자(牧者)》(이상 루브르미술관) 《양치기들의 경배》 《계단 위의 성가족》 등이 있다. [출처] 푸생 [Nicolas Poussin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