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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01 크리스티앙 볼탕스키_Christian Boltanski_인터뷰

크리스티앙 볼탕스키_Christian Boltanski_인터뷰


 잠깐, 지금 당신 찍혔습니다! 어느 관광객도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카메라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작가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프랑스관을 조직하였다. 그의 작품은 원격 감시라기보다 원격현실에 가깝다. 그는 최근 호주 출신의 데이비드 월스David Walsh에게 그의 인생을 맡긴 셈이다. 그가 숨이 다할 때까지 그를 영화로 계속 촬영하도록 수락했기 때문이다. 이 영상은 그의 사후 8년안에 공개될 것이라고 그의 작품 수집가가 전했다. 다른 이의 죽음으로 무장했던 볼탕스키는 이번에 그의 것을 이용한다. 《아주 걱정됩니다. 기쁜 건 조금이고, 불안과 초조함은 크죠》라고, 현대미술관 보존책임자인 캐서린 그르니에Cathrine Grenier는 말한다. 여기에 베르트랑 라비에Bertrand Lavier는 이렇게 덧붙인다.《볼탕스키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더 복잡하고, 더욱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정확하게 해독하고 있죠》그가 다니엘 뷔렌Daniel Buren처엄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라고 하더라도, 동시에 그는 유태인주의, 현실주의, 표현주의에 모두 해당하는 경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는 개념주의의 계보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0년대 그 취향을 버리고 파토스의 감정을 이용한다.

침울한 집착
세계대전 동안 아파트 문패를 숨겨야했던 유태인 아버지 슬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기독교인으로써 작가이자 장애가 있었다. 볼탕스키는 특이한 유년기를 보냈다. 18세까지, 그는 혼자 밖에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유전적인 이유로 피부질환을 앓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피부병을 가진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전시기획자 해롤드 스지만Harold Szeemann 의 눈에 띈 것이다. 그는 1972년 도큐멘타 카셀Documenta de Cassel(독일)에서 볼탕스키를 섭외하였다. 그보다 이전에 1970년에는 파리의 일레나 소나벤드 갤러리galerie Ileana Sonnabend에서 전시를 했었다. 이 전시로 인해, 작가 사키스Sarkis[각주:1]가 그에게《작은 칼》이란 제목의 전시를 제안했고, 이 전시는 파리 현대 미술관(MAMVP: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에서 열렸다.《난 크리스티앙을 만나고 몸을 숙여 인사했어요. 거기엔 면도날, 흙덩이, 서투른 오브제 등으로 설치가 구성되었어요. 완전히 이상하면서 폭력적이며 감동적이었죠.》수잔 파세, 미술관 보존책임자가 기억하는 바이다.
 그는 다른 동료 작가 아네뜨 메사제Annette Messager와 만나면서, 감정적 단계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아네뜨 메사제는 아르 브뤼Art Brut[각주:2]를 명확하게 찾아간 작가이다. 《예술은 나를 살렸어요. 왜냐하면 그건 정상적인 가운데 비정상적으로 있을 수 있게 하니까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24세까지 그의 작업을 담금질하면서 매우 애쓰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프랑수아 C의 옷(Clothes of Francois C; Habits de francois C)에서 미키 클럽의 일원으로써 말이다. 죽음, 기억의 구축은 그의 작품  참조사항의 진열대Vitrine de référence 의 주요 테마이다.  성유물함을 연상시키는 1970년도 이 작품은, Menschlich(1994)로 여파가 전해지게 된다. 1989년, MAMVP(파리 현대 미술관)에서의 전시 어린이 미술관의 유물Réserve du musée des enfants 가 열렸다. 2010년에 모뉴멘타에서 보여진 작품은 40 000여개의 심장 박동 소리를 추출한 것으로, 2005년부터 그래왔듯이 여전히 존재보다 부재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우울한 집착은 데이비드 월시[각주:3]가 결론을 내렸듯이 파우스트적인 정점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선, 더이상 죽음이나 늙어감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죽는 건, 재앙이 아닙니다 ; 우린 대체 가능하지 않지만, 후대에게 계승할 수는 있어요.》
 볼탕스티의 작품은 개념적인 동시에, 구성적이고 서사적인 독특함을 가진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허버트 마틴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비상한 화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사건이라도 콩트나 우화로 바꿔 표현할 수 있죠. 코드를 합성하면서 말입니다.》 능수능란하게 작가는 그의 기억을 조작하며 허구를 이용한다.《그가 거짓말을 할 때는, 관중에게 보다 청각적인 방법으로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항상 대중을 생각합니다. 작품을 고해성사같은 내적인 면으로 보지 않아요. 그는 하나가 너무 두드러지면, 소통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연극에서처럼, 관객이 보다 잘 듣기 위해서 크게 말하는 것같아요. 작가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감정을 분출해야만 하죠. 》라고 캐서린 그르니에는 말한다.
  볼탕스키는 이를 자발적으로 알아간다 : 작가의 저서 내 유년기의 탐구Recherche et présentation de tout ce qui reste de mon enfance, 1944-1950  에서는 반복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예술가와 고행자의 다른 점은, 고행자는 여러 사고방식을 가져야하지만, 작가는 하나의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하지만 같은 컨셉에서부터, 그는 다른 경험을 창출한다.1980년도 작품, 촌극saynète comédie 에서 그는 비스듬히 무게를 실으며 동시에 유머를 끼워넣는다. 여기에서 쇼아의 지배적인 감정들은 어느 순간 바뀐다. 그리고 특정 절차에 따라 내밀함을 사라지고 이것저것 덧붙이는 취향만 남는다. 이렇게 작품 안에서 감정이 전환되는 것은 한 번이상이다. 우린 그에게 역사를 허구로 가장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리고 비극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고 비난할 수 있다. 여기에 한 미술비평가 장-이브 후아네가 ArtPress 지에 1998년에 기고한 논평에서 이렇게 언급하였다.《볼탕스키가 집단 학살을 묘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아무런 참조하는 기준이 없다.》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덧붙인다 : [영화감독인] 클로드 란즈만Claude Lanzmann[각주:4] 은 촬영내내 홀로코스트에 대해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문서와, 증언들 사이에 한해서 그렇죠. 허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허구는 사방으로 퍼지기 때문이죠. 아우슈비트라는 상징적 지역의 유일한 허구적 요소는 그 인접 관계에 따라, 그리고 서로 침투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마치 중세시대에 교회 주변에 장날이 서고, 그의 흥망성쇠에 따라 주변 건물들이 운명을 같이 했듯이 말이죠.》그를 옹호하는 자는 작품의 다의성에 반대한다. 캐더린 그르니에는 옷무더기 앞에서, 일본인들은 대학살보다 쓰나미를 생각한다고 말한다.

연극의 차용
 개인사에서부터 집단역사에까지, 볼탕스키는 스펙타클을 이용하여 연극적 요소를 끌어들이며 조형적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크리스티앙은 내가 시선을 바꾸도록 했죠. 연극의 세계는 피상적이고, 기교가 드러납니다. 조명을 이용하면 아름답겠죠. 하지만 왜 우리가 거기에 조명을 놓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건 정신성에 대한 문제거든요》, 조명기사인 장 칼만Jean Kalman 은 강조한다. 이 장면에서 볼탕스키는 빛, 음향 뿐만 아니라 관객의 움직임또한 제어한다. 그랑 팔레에서의 2010년 전시에서의 일이다.
 이런 스펙트럼은 베니스 비엔날레의 프랑스 관에서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다. 기회Chance라는 제목의 설치작품의 분위기는 그랑 팔레의 겨울의, 차갑고 쓸쓸한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파빌리옹의 유리창 너머로 격자창을 뚫고 들어오는 빛의 무늬가 그려진다. 볼탕스키는 여기에서 문법을 바꿔서, 죽음의 집착에서 운명의 것으로 지나간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발간된 폴란드 저널에 사진이 실린 400명의 아기 이미지를 이용하였다. 8분마다, 모니터에 비춰진 얼굴은 예측불가능하게 프레임으로 둘러싸인다. 《그들의 인생은 글로 쓰인 것이다. 아기들은 중립적이다. 그들은 사회계층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모의 성교로 생긴 완벽하게 우연한 산물이다. 》볼탕스키는 항상 우연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비엔날레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기서 우린 과연 파빌리온이 이미 잘 알려진 작가들을 기용하는 것에 지나치진 않는지 자문한다. 프랑스는 젊고 활동적인 작가들에게 승부를 걸 수는 없는걸까?《너무 구식이라는 생각이들면, 멈춰야겠죠. 마티스에게 우리가 말했듯이 말입니다 : "종이를 자르는 거 너무 구식같아.". 우리가 보는 것을 작가는 새롭게 하는 방법을 알고 창조적인 문구로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그의 첫 작품들에서 표시처럼 작용했던 페티쉬와는 거리가 멀다. 일시성과 파괴의 교차점에서 창조성이 겻들여진다. 》라고, 장-허버트 마틴은 말한다.    
   
《베니스에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앞으로 다시 해야할 겁니다. 내 모뉴멘타의 목록을 만들고 싶어요. 코메디 프랑세즈[각주:5]의 목록이 있는 것처럼요. 그리고 50년 안에, 그걸 다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새롭게 다시 구현해야할 겁니다. 마치 피아니스트가 그의 악보에 힘을 불어넣는 듯이 말이죠. 》여전히 그리고 항상, 그는 《작은 기억》을 저장하는 데에 질문을 던진다.

  

출처 :  34page, LE JOURNAL DES ARTS
기사 :  Roxana Azimi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Sarkis Zabunyan, known as Sarkis, (born September 26, 1938 in Istanbul, Turkey) is a Turkish-born Armenian conceptual artist living in France.[1] [본문으로]
  2. Art Brut:The term outsider art was coined by art critic Roger Cardinal in 1972 as an English synonym for art brut (French: [aʁ bʁyt], "raw art" or "rough art"), a label created by French artist Jean Dubuffet to describe art created outside the boundaries of official culture; Dubuffet focused particularly on art by insane-asylum inmates.[1]While Dubuffet's term is quite specific, the English term "outsider art" is often applied more broadly, to include certain self-taught or Naïve art makers who were never institutionalized. Typically, those labeled as outsider artists have little or no contact with the mainstream art world or art institutions. In many cases, their work is discovered only after their deaths. Often, outsider art illustrates extreme mental states, unconventional ideas, or elaborate fantasy worlds.Outsider art has emerged as a successful art marketing category (an annual Outsider Art Fair has taken place in New York since 1992). The term is sometimes misapplied as a catch-all marketing label for art created by people outside the mainstream "art world," regardless of their circumstances or the content of their work [본문으로]
  3. David Walsh (b. 1961[1]) is a Tasmanian millionaire, entrepreneur and owner of a large private art collection.[2] [본문으로]
  4. Claude Lanzmann (born 1925 in Paris) is a French filmmaker and professor at European Graduate School in Saas-Fee, Switzerland.Lanzmann attended the Lycée Blaise-Pascal in Clermont-Ferrand. He joined the French resistance at the age of 18 and fought in Auvergne.[2] Lanzmann opposed the French war in Algeria and signed the 1960 antiwar petition Manifesto of the 121.[3]Lanzmann's most renowned work is the nine-and-a-half hour documentary film Shoah (1985), which is an oral history of the Holocaust, and is broadly considered to be the foremost film on the subject. Of particular note is that Shoah is made without the use of any historical footage, and only utilizes first-person testimony from Jewish, Polish, and German individuals, and contemporary footage of several Holocaust-related sites. [본문으로]
  5. Comédie-Française (French pronunciation: [kɔmedi fʁɑ̃sɛz]) or Théâtre-Français (IPA: [teatʁ fʁɑ̃sɛ]) is one of the few state theaters in France. It is the only state theater to have its own troupe of actors. It is located in the 1st arrondissement of Paris.The theatre has also been known as the Théâtre-Nautique, the théâtre de la République and La maison de Molière. It inherited the latter name (English: House of Molière) along with the dramatic venue of the best-known playwright associated with the Comédie-Française, Molière. He was considered the patron of French actors. He died seven years before “La maison de Molière” was rechristened the “Comédie-Française,” and it continued to be known popularly by the former name even after the official change of name.[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