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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01 오마주 ; 라울 루이즈 Raoul Ruiz

오마주 ; 라울 루이즈 Raoul Ruiz

라울 루이즈가 8월 19일(2011, 70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그는 생전 123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상상의 해결 

 라울 루이즈 Raoul Ruiz의 국적은 어디인가?  Dialogues d'éxilés(1974) 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첫 영화이다. 이 영화는 도청 대기실에서 만난 젊은 알제리인과 칠레 이민자가  긴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칠레 이민자는 화가 제르망 아레스티자발 German Arestizabal 이 연기했다. 알제리인은 상대방이 어디에서 왔는지 캐묻는다. 시실리? 루마니아? 조심스럽게 추측한 것에 상대방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 《더 멀리서》, 그리고나서 그 둘은 함께 세상 여행을 떠난다. 시골에서의 나날들 Dias de campos (2004) 은 《유목민의 정서》라 불리운다 : 《 다양함의 취향이다. 서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여정을 나 자신에 이를 때까지, 그리고 가장 이국적인 곳에 다다를 때까지 해야 한다. 》피노체트 쿠데타가 일어난 후, 루이즈는 이런 종류의 기나긴 여정을 떠나 30여년간 모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미지들을 반사 굴절시키면서 사람들을 축소시켰다 :《보다 멀리》는 그가 추구한 극한의 탐구 원칙이 아니었다. 베르너 헤르조그 Werner Herzog 같은 한계를 시험해보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이, 혹은 말 그대로 엉뚱함이 그에 가깝다. 이를 완성하기 위해, 루이즈는 La noche de enfrente 를 임종 전에 연출했다. La expropriacion(1974) - 진실의 무게를 담은 방랑의 정서를 전하는 방식의 영화- 이후로 처음으로 칠레에서 만든 장편영화였다.
 바닷사람, 신부, 그리고 아이들은 루이즈식의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3인의 수호자이다. 선원은  종종《보다 먼》위험 지역에서부터 구출당한 위독한 병자로 나온다 : 이야기는 끝도 시작도 없이, 《 넘치는 끝과 넘치는 시작 》에 의해, 루이즈의 방식대로 영화의 시 처럼 진행된다.
 여기에는 거친 바다에 던져진 진정한 선원이 있다. 80년대 만든 두 편의 걸작, 항해사의 세 왕관 Les Trois Couronnes du matelot (1983) , 해적들의 도시 L'île au trésor(1984) 처럼. 한편, 도시나 방에 있는 선원도 있다 : ㅣ'éveillé du pont de l'Alma(1985)의 불면증 환자나 , 세번의 삶과 한번의 죽음 Trois vies et une seule mort (1995) 에서 마스트로이아니 Mastroianni 는 어느 아침에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가족을 떠난다. 한편, 멜비  푸포 Melvil Poupaud 과 엘자 Elsa Zylberstein 은 영화 꿈 속의 사랑싸움 Combat d'amour en songe(2000) 와 반대되는 이야기로 영화를 오가며 배역을 맡는다. 감독이 바다를 배경으로 펼치는 이야기에서, 선원은 모호한 이야기를 가로지르는 방랑자( 해적들의 도시 L'île au trésor 에서 간수와 수감자가 뒤바뀌는 것처럼 )이거나 다른 이로 전환이 가능한 것( 영역 Le Territoire, 1981에서 어느 순간 겨울에서 갑자기 여름으로 바뀌는 장면 )으로 나온다. 
 루이즈 Raoul Ruiz 는 현실의 이중성과 대조를 좋아하고 그와 대화하는 위대한 작가였다. 그리고 그는 영화에서 이 두 모순되는 상황을 개발시켜나가는 데 뛰어났다 : 죽음-삶, 성인-아이, 꿈-현실. 그리고 또한 : 연결고리가 풀린 뒷배경과 전경, 흐름과 조직들, 바로크적 연출과 평면적인 순간들- 그리고 심지어 영역 Le Territoire에서는 적색필터를 사용해 프레임 밑부분에는 녹색을 윗부분에는 적색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는, 꿈 속에서의 사랑싸움 Combat d'amour en songe 에서 초반부 젊은 신학도가 이론에 논쟁을 펼치면 장면에서 이런 대조적인 요소들을 사용하여 거리를 두면서도 동시에 코믹적 요소를 삽입하곤 하였다. 루이즈식의 신부는- La Vocation suspendue(1977) 와 거짓말하는 눈 L'Oeil qui ment (1992) 에서와 같이 독실한 종교인이거나 훌륭한 정신분석학자 ( 범죄의 계보 Généalogies d'un crime, 1996 )이다. 혹은 영상 해설자의 말마따나 (Divisions de la nature, 1978, 도둑맞은 그림에 관한 가설 L'Hypothèse du tableau volé 의 《가이드》목소리 ) 그것은 마음 속 깊은 신념이라기보다 사고의 전환이면서 모든 종류의 의심의 목소리이다. 신념에 찬 간수, 그들은 법제도 아래에서 끊임없이 타인을 감시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뒤흔든다. 그리고 비밀과 신념, 과학등을 위반한다. 리스본의 미스테리 Mystère de Lisbonne 의 디니의 멋진 아버지같이 조금은 사기성이 짙은 인물들로, 그들은 때로는 익살스럽게 마술을 부린다.   
  《다양함의 취향》은 루이즈 Raoul Ruiz 에게 있어 주요한 방랑의 정서에의 원칙이다. 그리고 호기심에 차서 즐겁게 상상의 해결책을 펴나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박식한 영화인 부류를 생각하면, 같은 제목의 텍스트( Poétique du cinéma )에서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각주:1] 버드 보에티쳐 Budd Boetticher [각주:2]를 떠올리거나, 동일한 장면( 해적들의 도시 L'île au trésor )에서 오손 웰즈Orson Welles, 혹은 마리오 바바 [각주:3]Mario Bava 를 떠올릴 수 있다. 상상의 해결책은 거대한 영역을 가지고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라울만이 유일하게 아비뇽 페스티발 festival d'Avignon ( La Présence réelle , 1983  )에서 허위 다큐형식의 이러한 상상의 시도를 처음 하였다. 그리고 정의할 수 없는 장르의 단편에서는 거위게임(거위 게임은, 지도술을 가르칠 때 쓰이는 이야기이다)법칙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도록 연출하기도 하였다.
 아이의 부분을 보자면, 자유롭고 만족을 모르며, 거대한 광기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아직 아이는 미지의 영역이다 : 유령과 대역배우처럼, 불안한 기억을 바탕으로 역설적인 결말로 영화는 끝나곤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Le Temps retrouvé 에서는 아이침대와 임종의 침상을 뒤섞거나, 방 주변을 맴도는 기나긴 여정으로 바뀐다. 루이즈 Raul Ruiz 의 최고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이야기, 상황, 가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가운데에서 갑자기 지연되는 듯한 느낌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가설이란 아이와 청소년의 강박관념이 가장 강력하고 감동을 주는 표현중의 하나라는 생각이다. 텍스트 Poétique du cinéma  에서, 감독은 이러한 상황을《성 그레고리 saint Grégoire 의 역설》이라 한다 : 《 정신이 움직이면서 가만히 머물러있을 때, 마치 태풍처럼 수직적인 선회를 한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라진다  》. 물론 현재도 멀어지고 있다. 그의 선원, 신부, 아이는 여전히 여행을 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그의 말을 빌어, 진정한 《 루이즈의 역설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CAHIERS DU CINéMA #671. 2011.10
기사  :  CYRIL BéGHIN
번역  :  PLONGEUSE ( 잠수부 ).[작성. 2012.02.07]
  1.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1623.6.19~1662.8.19] 요약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종교사상가. '파스칼의 정리'가 포함된 《원뿔곡선 시론》, ‘파스칼의 원리’가 들어있는 《유체의 평형》등 많은 수학·물리학에 대한 글들을 발표하고 연구를 하였다. 또한 활발한 철학적·종교적 활동을 하였으며, 유고집 《팡세》가 있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과학, 철학 출생지 프랑스 오베르뉴 클레르몽페랑 주요저서 《팡세》(1670) ↑ 생자크탑 / 프랑스 파리. 1552년에 건설된 후기 고딕양식의 탑. 1648년 물리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기압실험을 한 곳이다. 본문 오베르뉴 지방의 클레르몽페랑에서 태어났다. 3세 때 어머니와 사별하고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왔다. 학교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독학으로 유클리드기하학(幾何學)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16세에 《원뿔곡선 시론(試論)》을 발표하여 당시의 수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정리'는 이 시론에 포함되어 있다. 1640년 아버지와 함께 루앙으로 옮겨, 아버지가 하는 세무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계산기를 고안, 1642년 성공하였다.루앙에 있을 때 얀선주의의 신앙혁신운동(信仰革新運動)에 접하여 최초의 회심을 경험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토리첼리의 실험을 행한 이래, 진공(眞空)에 관한 문제, 유체정역학(流體靜力學)에 관한 문제에 흥미를 가졌고, 마침내 《진공에 관한 신실험(新實驗)》을 발표하였다. 1647년 질병의 진단을 받기 위해 파리로 돌아와, 그 무렵 귀국 중에 있던 R.데카르트의 방문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 처남 페리에에게 부탁한 퓌드돔 산정(山頂)의 실험에 의해 대기의 압력을 확인하였다. 1651년 아버지가 죽은 후 여동생 자클린이 포르 루아얄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과는 달리, 파스칼은 로아네스공(公), 슈발리에 드 메레 등과 친교를 맺고 사교계에 뛰어들어 인생의 기쁨을 추구하였다. 노름에서 딴 돈을 공정하게 분배해주는 문제에서 확률론을 창안하여, 《수삼각형론(數三角形論)》 및 그 《부대논문(附帶論文)》을 썼다. 파스칼은 이 논문으로 수학적 귀납법의 훌륭한 전형(典型)을 구성하였으며, 수의 순열·조합·확률과 이항식(二項式)에 대한 수삼각형의 응용을 설명하였다. 또 물리실험의 결과를 《유체의 평형》 《대기의 무게》라는 두 논문으로 정리하였다. 초등 물리학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원리’는 《유체의 평형》 속에 포함되어 있다. 1654년 여름부터 사교계에 대한 혐오감이 점점 싹텄고, 11월 23일 깊은 밤, 결정적인 회심의 환희를 체험하고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객원(客員)이 되었다. 이 점은 수녀인 여동생 자클린에게서 입은 감화가 컸다고 한다. 《죄인의 회심에 대하여》 《초기의 그리스도 신자와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의 비교》 《요약(要約) 예수 그리스도전》 등의 소품은 바로 그 무렵의 저작이다. 또 포르 루아얄 데샹에서는 《드 사시씨(氏)와의 대화》를 남겼다.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예수회와 포르 루아얄에 모인 얀선파 사이에 신학상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파스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논쟁에 말려들었다. 그는 《시골 친구에게 부치는 편지(프로뱅시알)》라는 제목의 서한체(書翰體)의 글을 익명으로 속속 간행하여 예수회 신학의 기만을 폭로하는 한편, 그 오만불손한 윤리를 공격하였다. 1656년 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8편의 서한문을 발표하였다. 파스칼은 이 서한문에서 구사한 경쾌하고 솔직한 표현에 의해 프랑스어에 새로운 문체(文體)를 도입한 결과가 되었다. 1658년 우연한 동기에서 사이클로이드 문제를 해결하고 적분법(積分法)을 창안해 냈다. 《사이클로이드의 역사》 《삼선형론(三線形論)》 《사분원(四分圓)의 사인론[正弦論]》 《원호론(圓弧論)》 《사이클로이드 일반론》 등 일련의 수학논문 속에 그 이론이 나타나 있다. 그 외에도 《기하학적 정신에 대하여》 《설득술(說得術)에 대하여》 《질병의 선용(善用)을 신에게 비는 기도》 등의 소품을 쓴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변증론(辨證論)》을 집필하기 위하여, 단편적(斷片的)인 초고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병고로 인하여 완성하지 못한 채, 39세로 생애를 마쳤다. 사망 후 그의 근친과 포르 루아얄의 친우들이 그 초고를 정리·간행하였는데, 이것이 《팡세 Pensées》의 초판본(1670)이다.[출처]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2. Oscar "Budd" Boetticher, Jr. (July 29, 1916 in Chicago – November 29, 2001 in Ramona, California) was a film director during the classical period in Hollywood most famous for the series of low-budget Westerns he made in the late 1950s starring Randolph Scott.Known for their sparse style, dramatic rocky locations near Lone Pine, California, and recurring stories of a lone man seeking vengeance amidst a brutal and abstract landscape, the films have, decades after their release, come to be known as some of the most important Westerns ever made,[citation needed] often compared to the works of existential writers or to narratives from the Old Testament.[citation needed]Until 2008, only Seven Men From Now had received a special edition DVD release, and the remainder of Boetticher's most acclaimed films, including Ride Lonesome, The Tall T, Comanche Station, Decision at Sundown, and Buchanan Rides Alone, which were once unavailable, had a DVD release on November 4, 2008 as the Budd Boetticher Box Set. [본문으로]
  3. Mario Bava (31 July 1914 – 25 April 1980) was an Italian director, screenwriter, and cinematographer remembered as one of the greatest names from the "golden age" of Italian horror films.Contents [hide] 1 Biography2 Filmography3 References4 Sources5 External links [edit] BiographyMario Bava was born in San Remo, Liguria, Italy. The son of Eugenio Bava, a sculptor who became a pioneer of special effects photography and subsequently one of the great cameramen of Italian silent pictures, Mario Bava's first ambition was to become a painter. Unable to turn out paintings at a profitable rate, he went into his father's business, working as an assistant to other Italian cinematographers like Massimo Terzano, while also offering assistance to his father who headed the special effects department at Benito Mussolini's film factory, the Istituto LUCE.Bava became a cinematographer in his own right in 1939, shooting two short films with Roberto Rossellini. He made his feature debut in the early 1940s. Bava's camerawork was an instrumental factor in developing the screen personas of such stars of the period as Gina Lollobrigida, Steve Reeves and Aldo Fabrizi.Bava completed filming I Vampiri (aka The Devil's Commandment) for director Riccardo Freda in 1956, now referred to as the first Italian horror film. Bava was originally hired as the cinematographer, but when Freda walked out on the project midway through production, Bava completed the film in several days, even creating the innovative special effects that were needed. He also handled the cinematography and special effects on the 1957 Steve Reeves classic Hercules, a film credited with sparking the Italian peplum genre.Bava co-directed Le morte viene dallo spazio (The Day the Sky Exploded) in 1958, the first Italian science fiction film. Because he had no earlier credited experience as a director, it was credited solely to Paolo Heusch. In 1959, Bava completed Caltiki, The Immortal Monster, again for Riccardo Freda. In 1960, he directed Black Sunday, which made a horror genre star out of Barbara Steele. His use of light and dark in black and white films is widely acclaimed along with his use of color in films such as I tre volti della paura (Black Sabbath) (1963) and La Frusta e il corpo (The Whip and the Body) (1963).His work has proved very influential: Bava directed what is called the first Italian giallo film, La ragazza che sapeva troppo (The Girl Who Knew Too Much) (1963), and his 1965 sci-fi horror Terrore nello spazio (Planet of the Vampires) was a probable influence on Alien (1979). Although comic books had served as the basis for countless serials and children's films in Hollywood, Bava's Diabolik (1968) brought an adult perspective to the genre. 1971's Reazione a catena/ Bay of Blood (also known as Twitch of the Death Nerve)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earliest slasher films, and was imitated in the first two American-made Friday the 13th movies. Many elements of his 1966 film Operazione paura (Kill, Baby... Kill!), regarded by Martin Scorsese as Bava's masterpiece, also appear in the Asian strain of terror film known as J-Horror.Mario Bava was very disappointed with the distribution of some of his later films (which caused him to retire in 1978 at age 63). Lisa and the Devil (1972) was never picked up by a distrbutor, and had to be later re-edited (with new 1975 footage) into an Exorcist-clone retitled House of Exorcism in order to get released. Bava's Semaforro Rosso (1974) was never released theatrically during his lifetime; the film only appeared on DVD in the late 1990s, re-edited a bit with some new footage, as Rabid Dogs and then released again in 2007 in a slightly altered version under the title Kidnapped. Bava retired in 1978 after co-directing his last horror film Shock with his son Lamberto (although he did some special effects matte work on Dario Argento's movie Inferno). Bava died of natural causes in 1980 at age 65.Mario Bava's son, Lamberto Bava, worked for 14 years as Bava's assistant director, and went on t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