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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19 디지털 혁명은 끝났다

디지털 혁명은 끝났다

대부분의 영화가 디지털로 촬영되고 있다. 그리고 필름 영화 상영은 미술관에서 이뤄질 뿐이다.
안녕 35, 널 참 좋아했었다.

             디지털 혁명은 끝났다.

 

그것은 혁명이자, 몇년 동안 지속되고 있지만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 이제는 필름 상영이 어땠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며, 더 이상 디지털과 필름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이는 촬영 때도 더욱 그러하다. 영화는 이제 그 탄생부터 고유의 근간을 포기하고 있는 중이다 : 바로 음화 필름이다. 이 과정은 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필름을 사용하지 않고 영화를 상영할 수 있도록 컴퓨터 프로그램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비디오 테이프로 촬영된 영화, 그리고 이후 디지털이 도래했다. 결국, 몇년 후, 영사실에서 필름은 소홀히 다뤄졌고, 그 자리를 DCP가 대신했다. 한 롤을 대신하는 하드디스크에 정보들을 담는 것이다.
 영화에 혁명을 말할 때, 두 가지 정신이 있다 : 음향의 출현, 그리고 색채의 출현이다. 이 두 가지 출현은 디지털 혁명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상은 그 본질과 인지적 면에서 변화하였다. 영화가 계속 35mm로 촬영될 지라도, 이제는 필름에 안녕을 고할 시간이다. 적어도 영사실에서 만큼은.


2 K 의 삶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는 이러한 현상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미 10년이 지났지만, 이 혁신에 따른 결과와 성격을 묘사한 적이 없다. 하지만 왜 지금에야 말하는가? 시작은 이번 해 (2011) 칸느 영화제에서 지원방식에 대해 이례적인 논쟁이 있었고, 35mm 상영이 이제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해부터 분명히 사라질 것이며, 동시에 영사실 장비의 디지털화가 일년안에 완수될 것) . 제2장에서는, 이번 여름, Nº 669 에서는 촬영감독이 거듭 이러한 현상에 항변하였다. 음화 방식과 디지털 혁명에 관련된 노하우를 토대로 이 둘의 공존을 지지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더욱 디지털 방식이 독점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반대했다. 디지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무엇이 바뀌는가? 필름에서 디지털로뀌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 2K(이미지 해상도 : 2048 X 1080 pixels ) 에서 4K( 이미지 해상도 : 4096 X 1080 pixels )로의 변모에서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점은 그 차이를 체감하는 기술자들에게 물어야 할 질문일 것이다 : 촬영감독, 카메라 개발자, 영사기사, 검시관 등.
  이번 기사에서는 시네마테크Cinémathèque 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필름 영화가 계속되도록 지지하는 데 절대적인 동의를 보였다(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영사기사인 Laura Koeppel 은 이 만남에 참여하여 《 공룡을 대해 논하는 일 없이》영상의 입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에 안도감을 표했다. 사실, 우리는 이 분야에 충분히 투자한 결과 기술적으로는 풍부한 것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미래가 없는 발명품으로써 증기기관차 개발에만 달려오면서 한계를 드러낸다는 위험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35mm 영사실과 연결지점을 가지는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선-인터넷 새대라고 알려져있는 것처럼. 하지만 사람들은 디지털이 영화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기술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서 분명한 건 이제 35mm에 안녕을 고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두 가지를 고려하면 그렇다 :  영화와 관련하여 사고의 근간과 내면적 경험이다.


얕은 피부

  35mm의 소멸로, 전문 용어들의 구성이 흔들렸다. 뤼미에르 [각주:1], 바쟁[각주:2]를 창간하여 리얼리즘 영화이론과 작가주의 영화이론을 주창하며 프랑스 누벨바그운동을 주도하였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영화평론 주요저서 <영화란 무엇인가?> <장 르느와르> <오슨 웰스의 영화미학> 본문 191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앙드레 바쟁은 1940년대에서 50년대 후반까지 활동한 영화 비평가이자 이론가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영화비평지로 평가되는 <까이에 뒤 씨네마(Cahiers du Cinema)>를 창간하였고,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이론들을 정립하여 영화 비평의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몽타주(montage)'로 대변되는 형식주의적 영화 이론에 반하는 '리얼리즘(realism)' 영화 이론을 펼쳤고, '작가주의(auteurisme)'를 주창하였다. 앙드레 바쟁은 현재까지 세계 영화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이론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40세의 젊은 나이인 1958년 11월 10일 백혈병으로 사망했다.그는 1951년 창간된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영화비평가로서 자신의 이론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장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영화의 큰 조류인 리얼리즘 영화미학의 정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와 끌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장뤼크 고다르(Jean Luc Godard) 등은 1960년대에 세계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작가주의' 논쟁을 이끌면서 과거에 묻혀 있던 훌륭한 감독들을 재평가하였다. 할리우드의 상업적 시스템에 의해 제작되는 영화들은 물론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ergei Eizenshtein)과 같은 소비에트 몽타주 감독들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특히 그는 몽타주는 본질적으로 현실을 조작하고 왜곡시키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리얼리즘 정신과는 배치된다고 주장했고, 편집을 최대한 절제하고 화면 구성(미장센, mise en scene)을 통해서 다층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장 르누아르(Jean Renoir), 오슨 웰스(Orson Welles)와 같은 감독들의 작업을 높이 평가했다. 영화감독이란 단지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전체 영화작업에 불어넣고 제작 과정을 제어하면서 질서를 부여하고 독특한 특징을 만들어내는 사람, 바로 '작가(auteur)'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영화제작은 한편의 예술적 창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영화에는 그것을 창작한 사람의 개성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제작이 감독 한 사람만의 작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나 제작자, 여러 가지 기술적 작업이 종합적으로 통합되는 것이므로, 한편의 영화를 감독의 창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촉발시켰다[출처] 앙드레 바쟁 [Andre Bazin ] | 네이버 백과사전 ">, 로셀리니 [각주:3]가 처음 만든 용어들이었다. 바쟁이 처음 구상한 영화 이미지 존재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 바로, 세상을 향해 난 창, 현실의 흔적, 폭로, 인상, 망막의 지속성, 등등. 이 단어들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존재론적 담화에서 기술적인 용어를 아우르는 것이다 ( 필름을 개발시키면서, 밝혀낸 것이다 ). 이 단어들은 더 이상 과정에 머무르지 않는다. 촬영하고/ 상영하는 것은 더 이상 필름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빛 더미가 스크린에 드러나도록 비밀스럽고 화학적인 변화를 꾀하였다. 이제 디지털 시대에는, 수많은 정보를 한 범주에 저장하거나 자료(데이터)들을 단일화시킨다. 영상이 더 이상 화학적 변화에 기반하진 않지만, 빛의 조건은 여전히 기계적 산출에 있어서 주요한 요쇠다. 35mm 상영에 종용은 다시 말해, 이런 이미지와 관련한 구성조직을 잃는 것이다. 피부로 느낄 만큼, 세포 하나하나 깊숙히. 관객들과 영상의 구성, 이 모두에 반응을 일으키며 그 관계가 진동하며 움직이고 있다.


역사없는 이미지

  다른 상실은 무엇보다 상영관에서 각자가 겪는 상황이다. DCP 는 영사실을 너머로 원본의 복사가 가능하다. 이 것은 명확한 장점이다 : 더 많은 수의 손상된 카피본, 고르지 못한 색깔이나 영사시의 사고들(거의 없지만)에 비교하면 그렇다. 여기에 기술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한 점도 있다. 그러면서 특별 상영에 대한 기억도 지워지게 마련이다.
 기억들은 머릿 속에서 비슷해진다. 마치 같은 연극의 다른 버전처럼, 거의 다른 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들은 영화를 기억할 때,n 적 시간에서 t 적 시간으로 기억을 바꿀 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론적으, DCP 복사본이 다른 장소에서(극장, 영사실, 그리고 우스갯 소리로 회사 회의실에서도 가끔 ) 원본과 같다면, 맹목적인 물신숭배에 잘 대비할 수 있겠다. 영화에 대한 열렬한 애호는 이렇게 재생산이 불가능한 경험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입자들이 불규칙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영상이 고정되지 않은 채 흔들리기 때문에 보다 운치가 있으면서 단 한번이라는 일회성이 있다. 이 입자들은 이제 전자적으로 유사하게 흉내( 《소음》 )내어진다. 마치 살갗에 와닿는 태양처럼 화학적 반응은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상영의 고유성은 규제로 드러나곤 한다. 디지털이 점점 은화방식에 가까워지고 있는 (최고 성능의 디지털 카메라는 기존의 필름 카메라의 성능에 버금가는 민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 가운데 완벽함에 대한 회의가 든다. 사람들은 단순히 이렇게 자문할 수 있다. 완벽성이란게 과연 절대적 가치인가. 우리의 주변에 퍼진 신조들과 혼동하고 있지는 않는가 : 고정성, 광택, 압축성, 무결점, 안정성, 그리고 늙지 않는 이미지의 불멸성, 이런 것들은 이제 더 이상의 이야깃 거리가 아니다. 폐쇄되고 탈색된 영상은 기본적으로 불결한, 불확실한,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신체와 정신에 모순된다.



우리 시대의 미

  물론, 여기에서 디지털로 인한 전복현상을 단지 후회만 하고 있을 수 없다. 또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거부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 시대의 미학을 묘사하며 명명하는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난입으로 새롭고 열의에 찬 미학이 등장하는 것도 불가피하다.  특별한 디지털 영사기구(4K 형식이 도래한 이후에도)에서 필름 영사 방식과 다른 특징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점점 그 차이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영화감독의 손 안에서 벗어난 선택으로 영상들이 규격화되고 규제되는 산업 구조 속의 제조품같이 영화를 느끼게 되었다. 기술적으로 재정적인 명목하에서 말이다 ; 그것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 혹은 잠재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카롤린 샹프티에 Caroline Champtier는 이번 여름 회합에서, 일회성의 순간과 특권적 순간에서 음화 방식과 디지털 방식의 장점들만을 혼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강조하였다. 일회적인 것은, 여전히 35mm 영화를 찍는 감독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권을 이용하면서, 혁명은, 다른 이의 말을 빌자면, 끝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프랑수아 퓌레 François Furet 는 영화사에서 디지털과 화학의 두 시대가 교차하면서 손을 맞잡으며, 모든 게 다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



출처  :  CAHIERS DU CINéMA #672. 2011.11
기사  :   Jean-Philippe tessé
번역  :  PLONGEUSE ( 잠수부 ).[작성. 2012.02.07]
  1. The Lumière (pronounced: [lymjɛːʁ]) brothers, Auguste Marie Louis Nicolas [oɡyst maʁi lwi nikɔla] (19 October 1862, Besançon, France – 10 April 1954, Lyon) and Louis Jean [lwi ʒɑ̃] (5 October 1864, Besançon, France – 6 June 1948, Bandol),[1][2] were among the earliest filmmakers in history. (Appropriately, "lumière" translates as "light" in English.) [본문으로]
  2. "앙드레 [본문으로]
  3.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으로 기록적인 수법을 활용한 새로운 리얼리즘적 수법의 묘사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무방비 도시》, 《로마에서의 밤이었다》 등이 있다.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영화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주요작품 《무방비 도시》(1945) 《로마에서의 밤이었다》(1960) 본문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무솔리니 치하의 파시즘 시기에는 주로 기록영화 제작에 종사하였다. 파시스트 정부 몰락 후, 독일군 점령하의 로마의 생생한 현실을 수록한 필름을 바탕으로 《무방비 도시 Roma città aperta》(1945)를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전화(戰火)의 피안(彼岸) Paisà》을 제작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두 작품 모두 독일점령군에 대한 이탈리아 민중의 저항운동을 그렸다. 기록적인 수법을 최대로 활용한 새로운 리얼리즘적 수법의 묘사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고, V.데 시카와 더불어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창시자로 일컬어졌다. 그 후의 작품으로 《프란체스코신(神)의 어릿광대 Francesco, giullare di Dio》(1950) 《고독한 여인 Viaggio in Italia》(1953) 《로베레장군 Il generale della Rovere》(1959) 《로마에서의 밤이었다 Era notte a Roma》(1960) 등이 있다. 1964년 이후 영화계를 떠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텔레비전 연출가로 활약하였다. 여배우 안나 마냐니와의 이혼 및 잉그리드 베리만과의 결혼과 이혼 등, 사생활로도 자주 화제에 올랐다. 1968년부터 영화인 교육기관 ‘영화실험센터’의 소장이 되었다. [출처] 로베르토 로셀리니 [Roberto Rossellini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