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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1.02 4편의 프랑스 영화 _(3)

4편의 프랑스 영화 _(3)



비평가주간과 감독주간 에 두각을 나타낸 프랑스 영화가 있다. 이 젊은 감독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본지에 소개하고자 한다.


4편의 프랑스 영화

프랑스 제작사는 칸느를 북쪽지방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칸느 영화제 채택된 작품들이 어떻게 비춰지는가? 어떤 영화도 공식부문에 선정되지 못했다. 하지만 감독주간에 3인의 감독(남쪽을 지나(원제; après de sud) 의 장-자크 조프레, 침묵의 끝(원제; La Fin du silence )의 롤랑 에쟈드, 도시에서 (원제; En Ville)의 발레리 므레장 과 베르트랑 쉐이퍼)과 비평가주간에 두명의 감독(17명의 소녀(원제 ; 17 filles ) 의 쿨랭 자매 와 마리 리틀 프린세스(원제 ; My Little Princess)의 에바 이오네스코)가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인 프레데릭 보에는 이번 해 프랑스 영화의 질적인 향상을 이야기한다. 영화제때문만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소설작가, 예술가, 단편영화감독이며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발레리 므레젠의 영화를 보며 이 프랑스 영화들이 어떤 여정을 가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겠다.

《(2)에 이어》

내 작은 공주님My Little Princess
에바 이오네스코 Eva Ionesco


사진가이자 연극배우인 에바 이오네스코는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 그녀의 첫 장편을 완성했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그녀의 개인사를 선정적인 제목의 무궁무진한 광산으로로 변화시켰다 : 그녀의 딸을 에로 배우처럼 사진찍었다. 마이 리틀 프린세스 의 힘은 이렇게 공공연히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냄으로써 내면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다. 에바 이오네스코는 관객의 도덕적 판단을 뒤로하면서 엄마-딸 간의 섬세한 관계에서 드러나는 욕망, 질투, 초조, 그리고 광기, 그리고 그보다 드물게 드러나는 부드러움등을 그린다. 이 영화가 설득력이 있고 가끔 감동까지 선사한다면, 그건 이 두 배우의 뛰어난 연기때문일 것이다 : 엄마 역의 이자벨 위페르와 딸역의 안나마리아 바톨로메이 다.

●감독님은 어떤 유년기를 보내셨나요?
 우리 엄마는 내가 4살 때부터 나를 사진모델로 세웠어요. 그 이후로 10여년간요. 점점 더 과감한 방법으로요. 내가 16살 때, 연극배우 수업을 받기 시작했는데, 안토니 비테즈Antonie Vitez에게서였죠. 그다음엔 파트리스 쉐로Patrice Chéreau 에게서요. 10여년동안 또 사진도 찍어왔는데, CNC(프랑스국립영화센터 Centre National de la Cinématographie)와 계약이 불발된 이후에 이 영화가 만들어진건 우연적입니다. 

 ●자전적 이야기를 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웠어요. 특히 시나리오를 쓰면서요. 아주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감을 느낄 만한 무언가를 끄집어내기 위해 내 깊은 곳의 상처를 건드려야했죠. 한번은 시나리오 쓰는 걸 마치고, 촬영하는 게 더 쉬웠다고 말한 적이 있죠. 마치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것처럼요...

●한나역에 이자벨 위페르를 생각하고 쓴건가요?
 아뇨, 하지만 캐스팅을 할 때, 그녀가 유력한 배우로 물망에 올랐어요. 베르너 슈레터[각주:1] 의 Two(2002)와 미하엘 하네케를 감독의 피아니스트(La Pianiste, 2002)에서 그녀를 보고 영화에 엄마 역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자벨 위페르는 아주 대단한 배우입니다. 지적이면서 동시에 직관적이죠. 내 어머니에게 주저하며 말했던 과거에 비춰보면, 그녀는 그런 점을 아주 잘 표현했어요. 그녀는 아주 난폭한 괴물같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그녀 스스로의 행동을 지각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녀를 용서하죠.

어떻게 안나마리아 비올레타 역의 바톨로메이를 발견하셨나요? 이런 민감한 주제에 어린 소녀와 일하는 게 어렵지 않았나요?
 거의 500여명의 어린 소녀들을 오디션에서 봤죠. 안나마리아 바톨로메이는 루마니아 신문을 보고 캐스팅을 결정하게 됬어요. 나처럼, 할머니에게서 길러졌더군요. 그녀의 예민함, 똑똑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런 그늘이 느껴지는 게 좋았습니다. 그녀,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과 만나서 작업하는 방식에 대해 오래 이야기했어요. 부모님께는 절대 벌거벗은 장면을 찍거나 강요하면서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녀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상처를 받기를 원치않았어요. 모든게 부모님이 지켜보는 데서 진행됬죠. 우린 무도회, 서커스, 연극이 뒤섞인 작업실에서 반복적으로 찍었죠. 촬영이 끝나고, 그녀는 그 역활에 맞설 준비가 되있었습니다.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되는지 이해했죠.

●장면 연출에서 참고로 하신 게 있으셨나요?
 이 영화는 자신의 이미지를 빼앗긴 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얼굴, 몸, 그녀의 유년기까지요. 이 이야기는 공포영화나 고딕적인 분위기가 있어요. 또,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 palma나 마리오 바바Mario Bava[각주:2] 의 특정 영화에서 시각적 영감을 받았죠. 예를 들어, 엄마가 딸의 사진을 찍는 스튜디오는 매음굴이나 성지, 그리고 무덤을 동시에 연상케 연출했죠.

엄마-딸의 전형적인 역활이 이 영화에서는 전복됩니다 : 비올레타가 엄마보다 성숙하고, 이성적으로 그려지는 듯한데요...
 네, 비올레타는 그녀의 엄마가 비도덕적이고 광기어린 데 반해서 직관적으로 생각하죠. 타락한 행동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게 여러번 영화에서 드러납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세계는 영화의 세계와 비슷합니다. 권위나 질서로 상징되는 부모의 형상이 없죠. 권위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나 예술계에선 개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예요. 대부분이 엄마의 무책임과 이기주의로 결정되는 거죠.   

●엄마의 타락한 행동, 그녀의 광기에도 영화는 도덕적 판단을 보류합니다. 그런 책임을 영화에 지우고싶진 않았나요?
 난 단지  관객들이 자유롭게 생각하면서 그들만의 의견을 가지길 원했어요. 그리고 비올레타의 시선으로 이미 고정적인 관점의 어머니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길 바랬죠. 아직 미성숙한 그녀의 시선으로요.

●그럼 감독님은 80년대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어떤 데 주안점을 두셨나요?
 그 때에 에이즈가 발병하기 전에, 섹스와 몸이 자유를 외치던 때였죠. 그리고 무의식, 자아의 망각의 시대이기도 했는데, 그건 이 영화의 주요한 테마입니다. 축제를 하면서 변장하기를 좋아하는데, 나의 그런 취향도 그렇고,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 그리고 고딕적 취향을 반영했어요. 촬영감독인 잔 라푸아리Jeanne Lapiorie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어요. 그리고 의상담당인 카트린느 바바Catherine Baba와 음향담당인 베르트랑 버갈라 Bertrand Burgalat 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인 한나는 그녀의 광기에도, 비올레타의 어떤 예술적 재능, 지적호기심, 어떤 창조성을 일깨운다고 볼 수도 있어요. My Little Princess에서 왜 그런 점은 잘 드러나지 않나요?
 아마 나의 엄마가 내 예술적 재능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왜냐면 누구도 이런 매개체로 시작하고 싶진 않을 거예요. 배우나 사진가로서 내가 성장한 이후에 내가 있는 거죠. 당신이 완전히 틀렸다곤 할 수 없어요. 그건 비올레타가 성장한 이후의 인생을 다룰, 나의 다음 영화의 주제 중의 하나가 될겁니다. ■
                                                            -인터뷰
                                                             2011.05.01, 파리에서, 아리엘 슈바이처


출처 : 32-39쪽, CAHIER DU CINéMA
기사 : Ariel Schweitzer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Werner Schroeter (7 April 1945 – 12 April 2010) was a German film director and screenwriter,[1][2] who some consider among the most important German writer-directors of the post-war period. [본문으로]
  2. (July 31, 1914 – April 25, 1980) was an Italian director, screenwriter, and cinematographer remembered as one of the greatest names from the "golden age" of Italian horror films.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