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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0.30 씨네마테크 CINéMAthèque 는 셀룰로이드 피부를 원하는가 ⓑ

씨네마테크 CINéMAthèque 는 셀룰로이드 피부를 원하는가 ⓑ

....씨네마테크 CINéMAthèque  는 셀룰로이드 피부를 원하는가  ⓐ에 이어....

보존가, 복원가, 영사기사 : 시네마테크의 임무는 디지털의 침략으로 인해 재수정되고 있다.

씨네마테크 CINéMAthèque 는 셀룰로이드 피부를 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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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복원

 작업실( Éclair 는 2011년 사업수익이 35% 줄어들었다 )에서도 모든 면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유산의 가치가 아마도 마지막 구원의 길이 될 것이다. CNC는 2010년 대규모 부채로 인해 장편 복원에 영향을 끼치도록 하기 위해 영화 소유권을 지닌 자에게 접근권한을 부여하면서 디지털을 진행하였다. 이로 인해 문화 유산이 산업으로 추락하였다( 도 역시, 광화학이나 디지털 작업실이 밀집되었다는 의미에서 유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그 곳에서 100여편의 영화가 복원되었다). 영화애호가의 입장에서, 이러한 다양한 복원은 프랑수아 에드 François Ede 같은 전문가에게 과제를 남긴다 : 바로 복원하고 또 복원하는 작업이다.
그에 따르면, 뤼미에르 영화가 최근 볼로뉴 리트로바토 시네마 페스티발에서 상영되었다고 한다. 수평선상에 급변화로 인해 영상이 말도 안되게 불안정하였다고 한다. 《시네마테크나 위작의 미술관으로 변질될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음향은 이 복원과 보존에 주의할 점이다. 프랑수아 에드 François Ede 는  2010년 《과거 영화에 현대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칸에서 상영된 사이코 Psychose 《복원》보전을 보고 분노하였다. 완전히 다른 예로, 10월 15일 시네마테크에서 못말리는 첩보원 L'Homme que en savait trop (1997, Jon Amiel) 를 상영할 당시, 개봉당시의 스크린을 유지하면서 잡음을 지나치게 제거하지 않기 위해 음향 전문가인 장-피에르 베르슈어르 Jean-Pierre Verscheure 가 참여하였다. 
 한편, CNC(1억 7천오백만 유로가 필요함)가 주관하는 복원과 디지털화의 야심찬 계획에 또다른 반대이유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 측면이다 : 이러한 복원과 《거대한》목록(스튜디오카날 StudioCanal, Gaumont, Pathé) 을 완성해가면서, 얼마간의 이윤을 기대할 수 있다. Pierre Braunberger 에 의해 창립된 목요 플레이야드 필름 영화사 Films de la pléiade-Films du jeudi 의 로랑스 브룬베르제 Laurence Braunberger 는 현재 Lola Montès Une partie de campagne 의 소유주이기도 하다. 그는 소유권을 유지하고 있는 영화들을《매우 염려하며》이렇게 말한다 : 예산으로 디지털화와 복원을 지원하는 것은 회사를 번영시킬 이윤을 거부하는 것이다. 디지털로 인해 가치가 떨어진 예술이나 시도로 인해, Laurence Braunberger 는 심각할 정도로 느려진 영화의 순환을 보는 것이다. 왜 DCP 영화로 돌아가지 않는가?
 디지털 마슽본의 증감현상은 여전히 비용이 많이 든다. 문제를 인식한 CNC는《 브뤼셀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영화마다 다른 문제이다 : 우리는 비열한 소송에 얽힌 회사를 도와줄 수 없다》, CNC 의 문화 유산원장인 로랑 코미에 Laurent Cormier 는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의 모든 복원은 페스티발에서 유리하다. 즉, 전방위로《 편집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최근 파테사는 천국의 아이들 Enfants du Paradis 의 복원버전을 재개봉하는 것과 동시에 전시를 열었다. 그리고 이는 2012년 시네마테크에서 열릴 카르네 Marcel Carné [각주:1]전시로 이어진다. SACD 의 오디오비쥬얼 관장인 제롬 Jérôme Dechesne 은 이를 두고 디지털화와 복원으로만으로는 감당하기에 보다 방대한 영화 유산을  보급하기 위한 공공정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장의 입장에서 보면, VoD구독만이 영화에 이윤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시네마테크,상영 미술관?

 앞으로 어떻게 오래된 영화를 볼 것인가? 영화 아카이브는 상영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 랑글루아의 교훈에 따르면, 이 두 방향의 갈림길에서 열렬한 지지자는 디지털화에 과격하게 반응할 수 있다. 35mm 애호가인 시네필들은 이 매끈한 디지털 영상으로의 복원에 만족하지 않는다- 매끈한, 왜냐하면 보비알라가 말한 것처럼,《 이미지 n+1 는 이미지 n 의 입자로 된 동일한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 디지털에서 뇌의 작용은 그래서 영구적으로 활동적이다, 살아있는 피부를 가진 인물은 사라졌지만》. 이 상이한 영상에 이미 우리의 시각은 적응하며 상영만큼이나 촬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극장의 현지 전문가들조차  씨네마테크CINéMAthèque 에서 2011년 10월 14일 상영된 택시드라이버 Taxi Driver 의 소니 콜롬비아 Sony Columbia 의 4K버전에 압도적인 수가 편을 들었다. 상영만큼이나 보존 매체로 필름이 만장일치한다- 현재 2K는 산업단계에 적합하지 않다.  《필름 상영은 보다 금속 박편을 제작하는 자들에게서부터 비행사로 옮겨가는 것과도 같다, 어떤 지역(영국, 헐리우드, 이집트 극장, 브래드포드 국림 미디어 박물관)에서만 이런 노하우가 전수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사기술들의 숙련된 솜씨가 사라지면서, 35mm영사기도 점점 소멸할 것이다...》라고, 영국 출신 연구원인 레오 엔틱납 Leo Enticknap은 예측한다. 비엔나 영화박물관 Filmmuseum de Vienne 의 알렉산더 호바트 Alexander Horwath 는 16mm로 사영ㅇ을 계속하고 있다. 그것이 이전에 어떤 포맷이었던 상관없이, 그리고 시장의 적합한 포맷이냐에 상관없이 말이다. 시네필의《수직적인 민주화》가 강조되는 시점이다. 
 현대의 관객들은 유투브를 이용하며, 동시에 35mm를 볼 수 있다. 는 이렇게 비엔나 시네마테크 CINéMAthèque de Vienne 를 영화박물관 Filmmuseum 이라 부르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

《 수많은 서류나 영화용 의상을 전시하는 영화 박물관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 미술관은, 극장을 음악적 장소로 규정지으며, 영화를 시간예술로 정의내리는 곳이다. 나는 "구식"이란 말을 쓰지 않겠다. 혹은 35mm 의 "디지털 변환"이란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 그것은 상업적 영역이다. 필름 영화는 단지 미학적 이유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자, 이제 공공자금은 값미싼 디지털 복원에 의해 쓰여질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필름을 제작하거나 35mm사영 매체에 사용되었을 자금이다. 유일하게 산업, 정부 정책자, 예술가, 그리고 기관 및 제도 들이 이러한 문제를 고찰하며 소통하는 것 만이 앞으로의 이런 작업을 체계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천공 아세테이트 띠에 감정적으로 순수한 애정을 보였던 이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  CAHIERS DU CINéMA #672. 2011.11
기사  :  Charlotte  Garson
번역  :  PLONGEUSE ( 잠수부 ).[작성. 2012.02.029

  1. Marcel Carné (August 18, 1906[1] – October 31, 1996) was a French film director.Contents [hide] 1 Biography2 Partial filmography as director3 References4 External links [edit] BiographyBorn in Paris, France, the son of a cabinet maker whose wife died when their son was five,[2] Carné began his career as a film critic, becoming editor of the weekly publication, Hebdo-Films,[3] and working for Cinémagazine and Cinémonde between 1929 and 1933.[4] In the same period he worked in silent film as a camera assistant with director Jacques Feyder. By age 25, Carné had already directed his first short film, Nogent, Eldorado du dimanche (1929). He assisted Feyder (and René Clair) on several films through to La kermesse héroïque (1935).Feyder accepted an invitation to work in England for Alexander Korda, for whom he made Knight Without Armour (1937), but made it possible for Carné to take over his project, Jenny (1936), as its director.[4] The film marked the beginning of a successful collaboration with surrealist poet and screenwriter Jacques Prévert. This collaborative relationship lasted for more than a dozen years, during which Carné and Prévert created their best remembered films. Together, they were involved in the poetic realism film movement of fatalistic tragedies.Under the German occupation of France during World War II, Carné worked in the Vichy zone where he subverted the regime's attempts to control art; several of his team were Jewish, including Joseph Kosma and set designer Alexandre Trauner. Under difficult conditions they made Carné's most highly regarded film Les Enfants du paradis (Children of Paradise, 1945) released after the Liberation of France. In the late 1990s, the film was voted "Best French Film of the Century" in a poll of 600 French critics and professionals. Post war, he and Prévert followed this triumph with what at the time was the most expensive production ever undertaken in the history of French film. But the result, titled Les Portes de la nuit, was panned by the critics and a box office failure and was their last completed film.By the 1950s, Carné's reputation was in eclipse. The critics of Cahiers du cinéma , who became the film makers of the New Wave, dismissed him and placed his film's merits solely with Prévert.[5] Other than his 1958 hit Les Tricheurs, Carné's postwar films met with only uneven success and many were greeted by an almost unrelenting negative criticism from the press and within members of the film industry. In 1958, Carné was the Head of the Jury at the 6th 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6] Carné made his last film in 1976.Carné was gay and made little secret about it. Several of his later films contain references to male homosexuality or bisexuality. His one-time partner was Roland Lesaffre who appeared in many of his films.In 1989 a book was published by Edward Baron Turk as part of the Harvard Film Studies that told his story under the title Child of Paradise: Marcel Carné and the Golden Age of French Cinema.Marcel Carné died in 1996 in Clamart, Hauts-de-Seine, and was buried in the Cimetière Saint-Vincent in Montmartre.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