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비평/까이에 뒤 시네마/2023.12

나폴레옹  리들리스콧

번역의 변명; 우선, 한국관련 문화기사도 아닌, 특별히 애착하는 영화나 감독에 대해서도 아닌, 이 헐리우드 노장리들리 스콧의 블록버스터 까이에 뒤 씨네마 영화리뷰를 번역하게 된 것은, 특유의 프렌치 기질이 영화비평에서도 뚜렷이 드러나는 게 재미있어서이다. 자국의 영웅을 다른 나라, 특히 그들이 견제해마지 않는(미국의 자본주의를 경멸하고 작가주의 영화를 지지하는, 혹은 그런 경향이 있는 프랑스의,) 미국이 ‘실수’로 건드리면 어떤 평가를 받게 되는 지, 프렌치가 이 악물고 바득바득 어금니가 부서져라 작정하고 쓴 글이기에…흥미로운 것이다. 글 행간 마다 너무 빈정 상한 속내가 뻔히 드러나보이면서도 타당한 명분과 논리적 구성을 가지고 쓴 글이다보니, 새삼 놀라우면서도 이렇게까지 했어야 하는 정도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정작 리들리 스콧 감독은 콧방귀도 안 뀔것이다. 이 글의 여파로 프랑스 대형멀티플렉스가 리들리스콧 감독의 영화를 보이콧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그런 일은 더더욱 없겠지만) .프렌치 글쟁이들이 헐리우드 상업영화의 거물에게 타격감을 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차피 스콧 감독이 신경쓰지 않을 것을 잘 알면서도 굳이 이렇게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예술적 재능이 없다‘는 수준이 아니라  예술 범죄자로까지 깎아내리는 글을 썼어야 했을까. 

하지만 이런 가정을 해본다. 우리는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일본이 영화로 이렇게 저렇게 썰을 멋대로 풀면 우리는 이렇게 명분과 이성을 갖춘 글로 반박할 수 있을 것인가. 감정에 붕기탱천하였지만, 사사로움은 뒤로하고 영화적 예술적 헛점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을 것인가. 상대의 말문을 막히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군다나 까이에 뒤 시네마 집필가 중에서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하는(비평가로써의 정치적으로 중립적 입장, 문학적으로 짜임새있는 구조, 미학적으로 현학적이지 않고 명확하며 구체적인 서술, 그리고 그러한 객관적 사실들을 포착하여 주관적 사상에 귀결되도록 하는 통찰 등등) 마르코스 우잘이 펜대를 쥐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곱씹어보고자 이 글을 번역하게 되었다. 마르코스 우잘 씨에게 다시 한번 존경심을 표한다…

 

낡은 공식주의

 

마르코스 우잘

 

영화 나폴레옹은 리들리 스콧감독의 영국식 빈정거림으로 역사적 엄격성이 부족한 듯 해보이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국적 비판적 시선,(아듀 보나파르트 Adieu Bonaparte 유세프 Youssef Chahine, 1985)에서처럼, 은 덜한 것은 사실이다. 나폴레옹을 입체감없이 평편한 일일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역사적 쟁점은 제쳐놓고서라도, 이런 묘사는 뒤마식의 매력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서사극을 한낱 통속극으로 변질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야기는 종종 너무 압축되고 (애플티비에서는 4시간 30분 버전을 이미 예고했지만), 전장과 그의 개인사를 단순히 반복하고있으며, 그나마도 전투신보다 가정에서 무력한 모습에 더 초점을 맞추는데 만족하고 있다. 힘없는 정복자, 잠자리에 꽝인 인물로 묘사하고, 오히려 조세핀(바네사 커피 Vanessa Kirby)에 초점을 맞추며 현시대의 페미니스트적 시점을 차용하고 있다. 호아킨 피닉스, 나폴레옹 역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는 그 고유의 자페적 성향을 발현시키며 감독이 빈약하고 지루한 서사를 펼치는 동안, 걱정에 억눌린 인물을 표현하고 있다. 전투씬에 대해서, 모두 다른 방법으로 촬영하였지만, 나폴레옹의 전술보다 전투의 미장센적 극적연출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내가 입맛 사라지게 하는 음식과 소스들을 소개하는 것에 독자들이 용서해주길 바라며, 한편 이 것은 이 영화가 얼마나 시각과 입체적 관점이 부족한지 보여주고 있다 : 잘못 계량된 요소들을 열의없이 뒤섞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회화적으로, 이런 아카데미즘 스펙타클은 하나의 명칭을 연상케 한다 : 공식주의. 이미 우리는 스콧 감독이 장-레옹 제롬 Jean-Léon Gérôme을 동경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글래디에이터 Gladiator 에서 충분히 확인을 하였고, 이 영화에서는 그의 작품 ,스핑크스 앞에 선 보나파르트 Bonaparte devant le Sphinx 를 영화로 옮겼다고 볼 수 있다. 보들레르 Baudelaire 가 제롬에 대해 쓴 글을 상기해보면 이 영화에 완벽히 들어맞다 : 화가 제롬은 <<미미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단으로 주제를 재탕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통속적이고 평범한 삶을 그리스나 로마의 프레임으로 변형하고 있을 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스콧 감독은 작은 디테일에 대한 집착을 역사의 의미와 혼동하고 있다. 그에게 형식은 그저 묘사에 그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부족한 점 중에 하나는, 자주 나타나기도 하는데, 오스트랄리츠의 꽁꽁 언 호수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병사들이 익사하는 씬이다. 흰 유니폼과 백색의 얼음은 붉은 피와 대조를 이룬다. 감독은 이 장면을 슬로우로 보여주며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 발포장면이 연이어지고, 우리는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는 지, 병사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 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바로 이 것이다, 순수한 공식주의 예술이다: 키치가 아니라면, 스펙타클로 요약되는 사건, 감각을 자극할 뿐 단축적으로 묘사된 역사적 순간이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스콧 감독의 이러한 공식을 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흥미로운 것도 아니고, 사상이나 형식또한 관심이 없다. 단지 이미지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는 유명한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 의 명화(나폴레옹의 대관식 )를 참조하면서, 그가 얼마나 그림의 작은 디테일까지 스크린에 충실히 묘사를 했는지 입증하고 있을 뿐이다 : 회화의 아카데미즘은 먼지쌓인 묘사밖에 이룰 것이 없다. 공식주의의 다른 예시는 : 단 하나의 인물만이 주요하고 이미 알려진 사실들만이 공식적으로 인정될 뿐이다. 혁명군과 민간병들의 무리는 이름없고 얼굴없이 희화화된 무리로 밖에 묘사되지 않는다. 오스트랄리츠 호수에서 죽어간 병사들을 담았지만, 그건 그들 자체의 육체때문이 아니라 대포의 존재때문 일 것이다. 스콧 감독은 단 한명의 병사에게도 줌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몇백만의 병사를 나폴레옹의 전장에서 사상케 한 셈이다. 

 

마르코스 우잘 Marcos Uzal

출처; 까이에 뒤 시네마#804. 2023.12

불한번역; 잠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