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타쥬_일본에서 독립영화작가가 되는 것

베테랑. 농업 종사자, 혹은 야간 당직자 : 일본에서, 영화 감독들의 자화상이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영화계에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난 트럭운전수요. 오후에 잠자고, 일하러 가기 위해 밤11시에 일어나죠. 짐은 이미 실려있고, 야만시로 가면 되요. 경제위기 전에는 항상 트럭이 가득했죠. 지금은 옛날 모습을 볼 수 없죠. 》불안한 일본의 경제의 길 위에 서 있는 이 트럭 운전수의 이름은 토미타 카츠야 Katsuya Tomita 이다. 그는 구름 위에서(On the Cloud, 2003, 8mm)와 Off Highway20(20번 국도, 2007, 16mm)를 만든 영화감독이다. 1972년 생인 토미타는 일본에서 가장 전도가 유망한 단편 영화 작가로 손꼽힌다. 그는 이제 세번째 영화를 완성하려한다. HD로 촬영한 Saudade이다. 약 12달간의 제작기간 동안 총 천만엔(8만4천 유로)이 들었다. 3월 11일의 지진 이후에, 그는 운전수를 그만두고, Saudade의 배급을 준비하였다. 그는 현재 지진 희생자를 위한 임시거처를 짓는 데서 일손을 돕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가끔 영화작가들의 《벌이》가 무언지 들춰보곤 한다. 젊은 일본 영화작가들이 이에 자발적으로 답하였다 : 기무라 분요Bunyo Kimura(Good Bye, 2008), 마리코 테츠야Testuya Marico(Yellow Kid, 2009) 는 공사장의 경비원이다 ; 그리고 마츠무라 히로유키Hiroyuki Matsumura(Tochka, 2008)은 슈퍼마켓에서 일한다 ; 또 이타쿠라 요시유키Yoshiyuki Itakura(Hate, Hallelujah! ,2009)는 영화관련기관에서 일한다 ;  후카다 코지Koji Fukada(Human Comedy in Tokyo, 2008)는 영화와 결혼했다. 그리고 야마사키 쥬이치로 Juchiro Yamasaki 는 그의 할머니와 토마토농장을 가꾸면서 첫 장편영화를 찍었다. 그는 일본 직장인들의 연례 휴가기간의 두 시기에 걸쳐15일동안 영화를 촬영했다.  

8mm세대 

 이 영화감독들은 소규모의 배급망을 가지고 있는 아트 씨어터 길드Art Thetre Guild에서 60년대 작업을 했던 독립영화계의 후예이다. 그들은 1970년대 대학에서 일어난 8mm운동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부류 중의 하나이다. 1977년 이런 포맷으로 첫 독립영화제가 생긴 이래로,Pia Film Festival 은 감독들에게 대학의 시네 클럽으로부터 벗어나는 기회가 되었다. 이어서, 영화계에 대형 스튜디오 시스템이 사라지고, 자체제작 시스템으로 돌아섰다. 피아 필름 페스티벌에서 구로사와 키요시 Kiyoshi Kurosawa, 이시 소고 Sogo Ishii , 슈와 노부히로 Suwa Nobuhiro, 나가사키 순이치 Shunichi Nagasaki, 소노 시옹 Sion Sono, 츠카모토 신야 Shinya Tsukamoto 같은 감독들이 나타났다. 비디오보다 장식이 덜 필요한 8mm용 포스트프로덕션으로 독립프로덕션은 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이구치 나미Iguchi Nami 도 역시 이 8mm독립영화 세대 중의 한명이다. 《나 역시 독립영화 현장에 음향담당 어시스턴트로 시작했어요. 》야자키 히토시 Hitoshi Yazaki 의 March Comes in Like a Lion은 1991년 작이다. 네코- 이누 Inu-Neko는 이번 작품의 제목이다: 1997년, 첫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했었죠. 엄마가 내 결혼자금으로 마련해 둔 것을 쓰기로 했어요 : 50만 엔이죠. 난 전혀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 이 자금은 필요없어요. 거의 4년이 걸렸어요. 1년반 동안 매일같이 촬영했죠. 내 제작팀을 전혀 제대로 건사할 수 없었어요 : 미소된장에 오래된 밥을 비벼먹었죠. 모두 그래서 배탈이 나곤했어요. 하지만 모두가 서로 신뢰를 했죠. 난 슈퍼8 카메라로 400롤을 직었어요. 거의 17시간분량의 러쉬필름이었죠. 아마 백만엔 정도 할 겁니다.》 이러한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이누-네코 는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며(cf. Cahiers n#643), 감독이 직접 35mm로 리메이크 할 예정이다. 그녀의  다른 장편 Sex is No Laughing Matter (2007) 으로 다른 세계영화제에서 성공적이었다.


시스템 D
 이런 영화들을 배급하기 위해, 감독들은 자체제작된 영화를 상영하는 도쿄의 독립영화관과 매개체들을 생각해야만 했다.  핑크 필름[각주:1] 의 시나리오 작가인 이즈치 키슈 Kishu Izuchi 는 이미 두편의 장편을 만들었다 : Hundred Year of Desaperate Singing (1998, 8mm) 와 Left alone(2005, 일본의 68학생 운동을 다룬 다큐)이다. 그의 3연작인 Lazarus (2007)까지 모두 다른 도시(쿄토, 도쿄, 그리고 이즈)에서 아마추어들, 학생들과 촬영하였다. 이즈치와 그의 제작팀은 이 러시아 작가 레오니드 안드레이프Leonid Andreiev 의 기사에 영감을 받아 이러한 논란을 일으킬만한 영화를 만들었다. 이 러시아인은 자신의 젊은 시절 범죄자로서의 운명을 고백한 사람이다. 그들은  도쿄의 히가시나카노 폴폴Higashinakano Polepole 영화관에서 일하는 요시카와 마사후미Masafumi Yoshikawa 의 원조를 받아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십시일반하여 제작하고 있다 : 《우린 인쇄실이나 무보수의 자발적으로 15명이 일했고, 모두 이즈치 영화의 팬이었어요. 그들은 각자가 후원하고 있었죠. 우리가 알게 된 건, 미디어가 독립영화를 외면한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102개의 좌석이 있는 히가시나카노에서 상영되었지만, 관객이 3000명이 들었죠. 결국 제작팀은 천5백만 엔의 수입을 번 셈이예요. 아주 성공적이었어요.  》, 요시카와가 그때를 회고하며 말한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요시카와는 히가시나카노 폴폴을 떠나 독립영화를 후원하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동료들을 격려하며, 마츠무라 히로유키 Hiroyuki Matzmura 의 Tochka 처럼 Lazarus를 지원한다. 후나하시 아츄시 Atsushi Funahashi의 Deep in the Valley(2009), 이타쿠라 요시유키Yoshiyuki Itakura의  Hate, Hallelujah!, 프랑스 출신의 세드릭 듀피르 Cédric Dupire 와 가스파르 쿠엔츠 Gaspard Kuentz의 음악 다큐멘터리인 We Don't care Music Anyway...(2009)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카츠야 토미타의 새 영화,Saudade 에 전념하고 있다. 자체배급은 이제 인터넷으로 인해 가능하지만, 앞으로 경제침체로 인해 영화관의 프로그램으로 더 이상 설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위기와 개방
 super 8카메라를 수시로 쓴다는 걸 보면 이 영화작가들의 독립성이 곧 언더그라운드 영화 나 예술적 인 위상과 동일어는 아니다. 그 반대로, 8mm와 다른 포맷으로, 여느 또래 감독들처럼 상업적인 성공을 열망하며 그러한 배급망을 갖추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형 스튜디오나 V-Cinéma(비디오 영화 시장)가 점차 사라지면서 젊은 작가들과 창작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제작사들의 입장에서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비록 대기업이나 텔레비전방송국이 망가나 대중소설의 극화를 위해 거대 자본을 투자하지 않는다해도.
 일본 영화의 위기는 명백하다. 그리고 이번 년도(2011) 칸 영화제에 선정된 세 작품(Kawase & Miike 는 경쟁부문에 , sion sono는 감독주간에 )은 세 그루의 나무로 그러한 일본영화라는 숲을 간과하게 할 수 있다 : 물론 일본에는 재능있는 영화감독들이 많고, 자체제작을 하지만, 세계적으로 지난 세월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수많은 원조로 만들어지고 D시스템을 필요로 하는 이 열악한 독립영화들이 보다 적합한 보상(터무니 없이 많은 게 아니라 제작 구조를 유지할 만큼의)을 받는 것이 어려워보인다. 정부차원의 원조가 없이( 7백60만 유로 상당의, 9억6백만 엔을 보조기금으로 했을 뿐), 이런 취약성을 완화할 조처가 없다면 말이다. 여기에 카츠야 토미타 는 말한다 : 《Saudade 를 만들기 위해, 문화부에 보조금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우린 그럴 권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최소한 5천만 엔보다 큰 예산의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즉, 보조금이 자체 배급망을 가지고 있는 상업 영화만을 위한 거라는 겁니다. 우린 1천에서 5천만엔 가량이 필요했죠. 우린 현상소 갈 비용조차 없었어요. 정부의 입장은 이런 거였죠 "우리는 현상소를 갈 돈이 없는 제작팀에게는 지원을 할 수 없어요" ! 》
 혹자는 천만엔으로 여러편의 영화를 제작했던 AGT의 부활을 말한다. 하지만 확실한 해결책은 정부가 쥐고 있다. 그리고 영화작가들의 혁신도 마찬가지이다. 독립영화작가들은 상업영화에 의해 거부된 주제( Saudade 에서처럼, 감독은 그의 고향에 버려진 공장지대를 촬영했다. 그곳은 정부에 대항하는 힙합그룹과 브라질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를 다룬다. 그리고 해외로부터 큰 원조를 받기도 한다.
 내수시장이 탄탄하다면, 일본 작가들은 자금을 원조받기 위해 유럽으로 가려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카와세 같은 예외도 있다.
 하지만 아마 이런 연유로 그들의 영화에 관심있어 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오사나이 테루타로 Terutarô  Sanaï 
 


출처  : 57-59쪽, CAHIERS DU Cinéma. 2011.5
기사  :  Terutarô Sanaï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핑크 영화(일본어: ピンク映画)는 일본에서 시발된 영화 장르로 남녀의 정사를 주로 다룬 영화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