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드는 사람, 모방을 하는 사람- 오노레 와 타란티노
지난 칸느 영화제에서 경쟁부문에 크리스토퍼 오노레 1 의 러브송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가 오른 이 두 영화는 유사하게 지난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각자의 작품은 모방이란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공통된 전략의 이면에는 공통된 근심이 있다 : 《영화의 죽음》이라고 결론 짓는 대신에. 2
■최근 수필, 모던에서인가? 어떻게 영화가 가장 두드러지는 예술장르가 되었는지, 자크 오몽은 분명하게 말한다 : 영화는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1980년대에 후기-현대주의보다 기교주의 개념에 보다 영향을 받았다. 오몽은 영화에서 3후기-현대주의는 없었다라고 말한다. 《간접적으로, 이따금》이거나 알아채지 못한 채《다른 이들이 써나가니까》라고 할 수도 있다. 본지에서 말하는 것은 그 분석의 세부사항이나 정황상 증거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오몽의 명제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살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말하는 4《영화의 죽음》에 대해 더욱 명확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작가의 의도를 따라갈수 있다면 영화는 단순히 《죽지》않는다. 동시대에 화가들이 같은 말을 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작자의 의도가 서로 복잡하게 교착되면서, 또 현대성과 고전성이 얽히면서 영화는 두 번 《죽는다》.
우린 영화 분야에서 이런 침울한 생각이 길게 지속이 되는 것은 단지 혼란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그래서 장례를 치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강압적인 단절로 인한 파멸, 규제 시스템의 과잉, 혈통을 뒤엎는 무례함으로부터 나아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영화에 내려진 이런 진단을 두고 논쟁은 쇄신되며 급진적으로 이어진다.
두 전장은 여전히 카이에 뒤 씨네마의 지면에서 맞서고 있다. 엠마누엘 뷔도emmanuel burdeau와 장-피에르 렘Jean-pierre Rehm은 엠.나이트 샤말란의 영화 사인을, 《다네가 여러번 상상했듯이 기교주의 이후에 이어질》바로크 영화에 대한 기도라고 해석한다.《 다른 작품 들 중에서도 영화 고유의 힘을 지닌, 천진난만하거나 투명함이 아닌 힘과 천재적이라 불릴 만한 술수가 있다》 5고 말한다. 올리비에 조야드Olivier Joyard는 마이크 마이어스Mike Myers의 영화 카라오케에서《스크린을 심연이 아닌 표면으로 대하며》, 우리는《유령》의 《복제품》을 더 좋아한다고 진단한다. 6
영화의 죽음인가, 귀환인가?
지난 몇 해동안, 우리는 진정한 해결책 없이, 문제에 소홀해졌다. 현대 영화가 대척되는 점 없이 다양한 형태로 공존하고, 한편으론 예술영화란같은 소수 장르가 다행히 남아 있다. 텔레비전 시리즈가 계속되듯이 말이다. 이론에 충실한 두 감독의 영화는 칸느 영화제에서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부분적으로 이런 징후에 대해 회의를 하면서. 사실 오노레의 러브송과 타란티노
의 데쓰 프루프를 보면, 쉽게《영화의 죽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분명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연모했을 과거 영화사-프랑스 누벨 바그나 1970년대 미국 Z세대-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수차례 원본으로 되돌아가며, 거기에 감독의 스타일을 덧붙이는 방식은 다른 모든 과정들과 구분된다. 그래서 이런 모방의 방법은, 문학적이거나 체계적이면서 안정적이다. 또한, 기교주의이기엔 너무 학자풍이며, 후기-현대주의이기엔 너무 보수적인, 그것은 다른 요소들의 결말 짓기 위해 애쓰면서 유행을 섞는 듯하다. 고단수가 되기 위해, 영화는 동시에 카라오케의 건망증(유령을 복제하면서)과 바로크적 나선구조(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면서)를 거부한다. 그럼, 영화는 이 기나긴 철로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해 두 가지 제안을 해보며, 검증하기를 바란다.
속도와 방향
크리스토프 오노레의 이전 영화, 파리에서를 보면 영화적 맥락에서 신마다 의도를 실현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도에 있는 루이스 갸렐을 보면, 다른 영화에서의 느꼈던 속도감에 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 바로 장-뤽 고다르의 떠나는 한패Bande à part 속 새미 프레이, 클로드 브라쉐, 안나 카리나이다. 하지만 이런 차용은 이동의 아이러니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젊은 이들이 오늘날 그들의 속도감을 느끼기 위해 이쓰는 곳이 바깥이라면, 그 접점인 파리는《미술관의 도시》에 머무를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영화 미술관의 도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길 가마다 누벨 바그의 장면들이나 그러한 움직임들이 내비친다. 마치 걸작이 공기 중에 떠다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세 명의 고다르주의자들 중에서도, 루이스 갸렐은 그의 영역을 확보하는 데 월등하다. 이런 점을 《오노래의 원칙》이라 부르자 : 문자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소멸을 위해 등을 돌린다. 7
러브 송 은 이런 직감을 따르며 이에 보다 복잡하게 침잠한다. 두 명의 소녀와 한 명의 소년이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은 장 으슈타슈<산타클로스는 파란 눈을 가졌다><폐삭의 처녀>">의 엄마와 창녀의 유명한 장면과 닮았다. 침대 위에서 각자 책을 읽고 있는 장면 역시, 프랑수아 트뤼포 8<쥴 앤 짐><훔친 키스>등등">의 영화 부부의 거처(원제:Domicile conjugal)중 유명한 장면을 떠오른다. 이런 방식은 어떤 공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편집기술은 유사하다. 《파리, 미술관의 도시》과는 달리, 단순히 차용하는 방식으로 내적 의미가 전복되지는 않는다. 그런 방식은 당대에 9진보하는 성과 영화적 혁신을 말했던, 거부와 반항하는 유행의 향수를 떠올린다. 신파적 요소를 표현하려면 사실 연출가는 특별히 매혹적인 요소없이 단순히 시각적 요소를 이용하면 된다. 다른 몇몇의 씬들에서 이런 욕구를 투영된다.
오노레가 만약 이런 욕망을 시각화하는 데에 그쳤다면, 수백번 거장들의 작품이 모사되듯이, 진부한 전형으로써 미술관의 유물에 그쳤을 것이다.엄마와 창녀를《 결합시키는 것》은 마치 셀룰로이드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리는 것과 동등하다. 뒤샹이 그랬듯 이런 조작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둘 다 패러디로써, 이미지에 억눌리는 현상을 보여준다 : 장르 간에 혼동이 있다기 보다, 마치 두명의 커플, 세명의 커플이 자유로이 어우러지듯이 자유로움이 강하게 작용한 다는 점이 유사하다. 장면은 비극 영화의 결말처럼 닫힌 것이 아니다 : 갸렐은 파리 주택의 코니스 위에 서있는 젊은 소년을 껴안는다. 관객은 3인 혼음에서 벗어난 듯한 동성애자를 보면서 놀랐을 지도 모른다. 이 장면이 사회적 현실이나 예술적 실험에 의한 반영이라고 볼 수 없다. 그보다는, 급격히 추락한 누벨 바그 영화들에서 이러한 동성애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오노레의 영화들이 단순히 옛 작품을 베낀 것이라면 예측불가능한 여정을 기록하기엔 더 좋았을 것이다. 파리에서가 신체에 다른 속도감을 부여했을 때, 그 역시 러브 송에서 방향을 바꾸며 제2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조작은 배우의 캐스팅에서도 특별하다. 루이스 갸렐을 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한 요소의 해석과 다른 요소의 실현이 결합되지만, 이 두요소는 대조적이다 : 모방과 오마주(루이스는 감독이자 배우인 필립 갸렐의 아들이다). 이
두 요소는 서로 대척하기 때문에 하나를 따르면 다른 하나가 희생된다. 우리가 마치 다른 영화를 너무 모방한 감독을 비난하듯이, 또한 장 피에르 레오의 주인공.">를 닮으려는 그도 비난한다. 그것이 비록 《구별되기 위한》모방이었음에도구하고 말이다. 첫 원본의 기준을 바꾸고 두 번째 작품이 독특하도록 집착하는 사이에, 생기는 괴리감은 이들의 헛점이 아니다. 또, 둘 사이의 시간차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노레의 영화에서 이러한 변환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러브송 에는 부부의 거처/엄마와 창녀로 이어지는 여정이 《갸렐_레오》라는 공식으로 작용한다. 또한 이런 공식은 동성애의 유희로 이어지는 것이다. 10
시계, 그리고 혜성
데쓰 프루프는 커트 러셀이 분한 연쇄 살인범이 그의 차에 붙인 이름이다. 엔진은 죽음을 향해 돌진하도록 개조되었다. 그는 젊고 아름다운 운전자들을 연쇄충돌의 희생자로 만드는 아비규환에서 유유히 빠져나온다. 그가 단지 죽음에 맞서는 것은 시간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 강압적인 질서와 기억에 대한 의무감으로부터 빠져나온 것이 분명하다. 어떤 면에서 타란티노의 영화는 데쓰 프루프가 되려 애쓰는 것같다. 그가 경력을 쌓기 시작할 즈음부터 퇴폐적인 기질을 발휘했다. 더 설명하자면, 펄프 픽션에서 보듯 그것은 무서운 동시에 익살스럽다. 베트남전 생존자로 분한 크리스토퍼 월큰이 간수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엉덩이 밑에 숨긴 시계를 어린 고아에게 건네주는 장면을 보라.
데쓰프루프 에서는 반항이 비호감의 얼굴로 나타난다는 점이 신선하다. 마치 살인충동에 휩싸인 자처럼 해롭고 무익한 반복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상포인트는 분명히 변하고 있다. 그의 열정적인 면은 감독이 되기 위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엉덩이 밑의 시계》로부터, 그러한 죽음의 요소들을 재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11, 타란티노 스타일의 딜레마라고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재키 브라운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우린 이 감독이 과거의 유산(《뉴 헐리우드》라고 불리는 1970년대 영화에 앙코르를 부르며)을 부분적으로 차용하면서 진지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영화사적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도 진행중인 반-문화의 조류와도 확실하게 닿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드러나는 것은 그의 최신작 뿐만이 아니다. 《피에르 메나드Pierre Ménard, 돈키호테의 저자》속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말을 빌자면, 그것의 필수적인 요소를 가리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확고하게 시대에 역행하는 노하우》다. 이러한 노하우는 디지털 시대에 뒤처지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패러디로써 그가 가진 진지함과 기교적인 면이다. 감독이 구시대적 발상을 기교로 발전시키면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평범한 접근을 할 수 없고 단순히 괴리감을 느끼는데서 그치지 못한다. 그 반대로 완전히 새로운 제2의 독자가 된다. 또 타란티노는 데쓰 프루프에서 1970년대의 Z시리즈의 이중구조를 차용하고 역행하며 성인 페티쉬를 이용한다. 또, 이를 위험한 상황에서 되풀이한다. 사실, 이
렇게 페티쉬적 충동이 치명적 상황에서 직접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오늘날 영화에 대해 무엇을 말하겠는가? 《마이크는 난봉꾼》이라는 것?
방탕과 SMS
이런 연출로 평가가 뒤바꾸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화적 현실로 인도한다. 예를 들어, 현대 걸작의 몇몇( Mullholland Drive )처럼 분열과 내러티브적인 분절로써 심각한 편집증적 증상을 보여준다. 그의 캐스팅도 또한 주요하다. 타란티노는 1970년대에 범람했던 영화적 시도와
맥락이 닿아있다. 그의 취향대로, 중고등학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서브 컬쳐의 일환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뉴 헐리우드를 따르는 감독(스코세지, 코폴라 12)이기보다 《나쁜 백인》대신에 소수주의(여자, 흑인, 아시아계) 요소를 끌어들인다. 그는 재키 브라운Jackie Brown과 킬빌Kill Bill의 연장선으로 성과 인종을 섞는다. 이런 사회적 다양성은 그의 영화의 또다른 주요점이다. 13
사실, 이 연쇄 살인범은 두번째 살해시도가 실패한 뒤 희생자들의 가장자리를 살필 수 있다 : 조 벨. 그래서 그녀는 성별이나 인종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직업(스턴트우먼)때문에 캐스팅되었다. 그녀는 정식 연기수업을 받지 않았지만 킬빌에서 우마 서먼의 역활로 캐스팅되어 싸움신을 소화한다. 데쓰 프루프 는 페티쉬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비전문 배우-전문 배우를 대조시키며, 변변찮은 소극의 곡예신과 진정한 곡예를 대조시키며 내막을 폭로한다. 만약 감독이 드러나지 않는 음지의 영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이런 실험영화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라면, 아마추어 연기자들이 자발적으로 등장하는 현대영화(예를 들면 키아스토라미의 텐Ten에 나오는 마니아 아크바리 14:) 15도 다시금 평가받을 것이다.
그래서 조 벨이 주는 효과는 여전히 크다. 데쓰 프루프에서는 시대를 역행하는 스타일로《해석》하기 때문에,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신체는 특이하다. 그런 점도 어김없이 관람객이 거리를 두게하는 것이다. 또, 현대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인 시간의 비선형으로 인해 더욱 거리감이 생긴다. 영화계에서는 부분적으로, 감소된 형태로 이런 예시가 진행되고 있다. 물론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SMS의 사용이다. 일렬로 늘어선 다른 영화 들 중에서, 영화는 현재를 사는 우리와 한가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 은밀하게 초기 영화에 대한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무성영화에서 어떻게 SMS가 기능하는지를 보라. 동시에 조 벨의 신체는 앞과 뒤가 떨어질 수 없다.TV-현실에 열광하는 《인물/등장인물》의 전형이라면, 그녀의 여정은 동시에 헐리우드 스타를 상기시킨다. 직접 액션활극을 펼쳐보였던 인물(말에 올라탄 개리 쿠퍼Gary Cooper의 경우) 말이다.
데쓰 프루프는 1970년도와 2000년도 사이에 동등하게 두드러지는 것이 있다. 두번째로 1920년도와 현재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런 평행선은 영화의 처음이 그랬듯이, 몸과 스크린의 영화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런 수미쌍관식의 구조는 여전히 영화의 주요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또 영화는 구식처럼 보이기 위해, 필름의 튐현상을 흉내낸다. 이 튐현상은 웃음을 유발하고, 반복적으로 보이면서 우리는 영화를 달리 보게 되는 것이다. 한편, 여기엔 또다르게 반복되는 것이 있다 : 실험적인 점프컷들이다. 이 컷들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영화인의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듯하다. 이전에 네멋대로 해라(원제:à bout de souffle)에서 고다르가 그랬듯, 현대적 방식과 단순한 방법을 뒤섞으며 소재와 주제를 변화시킨다. 여기 죽음으로써 만들어진 타란티노의 새로운 조항이 있다 : 더이상 시간을 버리지 않고, 거기에 종속되지 않고 단호히 나아가는 것이다.
현재 크리스토프 오노레와 쿠엔틴 타란티노가 모방하는 것 이면에는 아주 다른 점들이 감춰져 있다. 우리가 단순히 표면적인 것에 집중한다면 오류를 범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때로는 절대적으로 그것은 《영화의 죽음》과 관련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프랑스 문화를 따르든, 미국의 것을 따르는 지에 따라 혹은 후기-현대주의나 기교주의를 따르는 지에 따라 간단하게 결론지을 수 없다. 물론 이 두 영화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전략만큼이나 목표는 뚜렷하다. 각자가 반환지점까지 초기의 논리를 밀어붙인다. 오노레가 모방을 하며 계보를 부정할 때, 타란티노는 퇴행을 체계화시키며 상황을 역전시킨다. 타인을 향한 사악한 모방과 퇴행으로 이 두 감독은 영화 밖으로 해로운 물질, 역설적 페티쉬즘 등의 을 흘린다. 그리고 그것들은 죽음의 수평선에서 나타난다. 연이어 새로운 신체의 출현으로
붕괴현상은 더욱 힘을 얻고 배가된다. 러브송과 데쓰 프루프의 행복한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그보다 상징이란 단어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영화에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현대 영화라는 퍼즐의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았다 : 그것은 현재에 과거로 돌아가 역사적 특이성을 다시 묘사하는 것, 그리고 두개의 대조적인 조류를 연합하는 것이다.
출처 : 57-62page, Artpress #339 , 2007.11
기사 : Patrice Blouin
번역 : zamsoobu
- Christophe Honoré(1940.4.10-) [본문으로]
- Quentin Tarantino(1963-) [본문으로]
- Jacques Aumont [본문으로]
- Jacque Aumont, Moderne? Comment le cinéma est devenu le plus singulier des arts, collection é&e siècle ; édition Cahiers du cinéma, 2007, 84-87 [본문으로]
- Emmanuel Burdeau et Jean-Jacque Rehm ((Les nouvelles vacanse d"Hercule) ), in les Cahiers du cinéma , Internet et cinéma ,hors-série, novembre 2001,p.28 [본문으로]
- Olivier Joyard, ((Contre la mort du cinéma)), in the Cahiers du cinéma, n574, décembre 2002; p.54 [본문으로]
- sur ce point, voir l'article décisif de Jean-Marc Lalanne dans les Inrockupitibles, n566, p.46-47 Ce rapprochement n'étant pas sans évoquer par ailleurs le titre du projet littéraire de Thomas Clerc, Paris, ?usée du é& siècle(édition Gallimard, coll, L'Arbalète) [본문으로]
- "Jean [본문으로]
- "Francois [본문으로]
- "Jean-Pierre [본문으로]
- L'expression est de Pascal Bonitzer dans son article sur Tarantino, ((De la distraction)), in Traffic, n13,p.41-49 [본문으로]
- New Hollywood(1967-1982)일명 American New Wave라고 불리며, 1960년대 중반(Bonnie and Clyde, The Graduate)에서 1980년대(Heaven's Gate, One from the Heart)까지 젊은 영화감독으로 이루어졌다. 기존의 영화 방식인 세트촬영을 지양하고 야외촬영으로 현실감과 생동감을 추구. 연극적이며 인위적인 영화에서 현실적인 요소를 도입하였다. [본문으로]
- Martine Scorsese(1942.11.17-)Francis Ford Coppola(1939.-) [본문으로]
- Abbas Kiastorami(1940-) [본문으로]
- http://soobu.tistory.com/script/powerEditor/pages/Mania%20Akbari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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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21. 0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