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클로드 카리에 와 피에르 에테 , 담화

1984년, 장-클로드 카리에[각주:1]와 피에르 에테[각주:2]는 오페라를 위해, 인간을 지옥으로 초대한 악마의 이야기, 파우스트를  공동으로각색하였다.
  
포스트의 기원


                      장-클로드 카리에와 피에르 에테 의 담화

2011. 5.30., 파리에서, Thierry Méranger & Joachim Lepastier


피에르 에테( P.é ) 1978년도 부터, 작은 성에서 오페라 파우스트를 쓰고 싶었어요. 오페라 전문 배우나 광대, 곡예사 없이요. 오페라는 회상으로 하고 거기에 마술적 요소를 투입하고 싶었어요. 발코니가 무너지거나  연극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넣는다던가요... 1983년 프란세스코 로시Francesco Rossi 가 카르멘Carmen 을 연출할 때, 제작사 직원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죠 : 《한번 더 오페라를 영화로 각색했으면 좋겠어! 》난 그동안, 다른 영화 시나리오를 모두 퇴짜를 놓았었어요. 신의 이름 이나 그리고  제목은 잘 기억안나지만...이렇게 생각했죠 : 《난 나의 파우스트를 쓸거야, 그걸 영화로 찍겠어! 》그리고 나서 장-클로드 카리에를 불렀어요 : 《내게 생각이 있어요, 파우스트를 쓸건데, 철자에 '오ô '를 넣는거예요.》 보통 장-클로드는 이런 아이디어를 반기죠. 이건 편집이 없는 유일한 공동 시나리오입니다. 편집이란, 음악과 같죠. 우린 오페라 카달로그에 예고편이나 대사가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대신 음악적인 그림을 넣었죠.

장 클로드 카리에( J-C.C ) 포스트 는 비극-오페라입니다. 행위들은 구노Gounod의 파우스트가 펼쳐지면서 시적 연극에서 내면으로 옮겨가죠. 메피스토텔레스의 역활을 맡은 악마가 너무 우스꽝스러워야 한다는 게 아이디어였죠. 어느날 그는 오페라에 노래를 부르기로 하고 돌아옵니다. 그는 가수들을 제거하려하죠. 물론 그 가수는 피에르가 연기하구요. 포스트 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완벽한 시나리오였죠. 1984년 8월에 끝마쳤죠. 우린 항상 같은 방에서 글을 썼어요. 비밀이란 없었죠. 한 명이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한명이 웃곤 했습니다.
 
P.é  희극의 특별함은 이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J-C.C.
우리가 서로 말을 맞춘 부분보다 훨씬 더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그자리에서 곧장 연기를 하곤 했어요. 또 설명하기 보다 그림그리는 게 쉬웠죠. 서술 작업은 가능한 단순하게, 우리가 보는 것을 어떤 특별함없이 진행했습니다. 부뉴엘[각주:3],과는 하루 종일 함께 뎃셍작업을 했죠. 참고할 만한 것들이요.

P.é. 난 타티와 작업할 때도 그랬듯이, 각각의 요소들마다 그림그리는데 익숙했죠.

J-C.C. 문제는 어떠한 도구나 장비없이 영화를 찍는 거였습니다. 카메라나 배우들 등등이요...음향이나 이미지, 단어들로 시도하는 수 밖에 없었죠. 마치 공작수업처럼요. 가능한 영화의 형태를 가지도록 했어요.

 P.é. 제작자의 사기를 꺾은 건 이미지로 보여질 때 어떠한 잇점이 없는 요소들을 읽어야 할 때 였습니다. 

J-C.C.  난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는 것보다 읽는 게 더 힘들다고 종종 말했죠. 

 P.é.  오디아드[각주:4]가 희극에 대해 이런 말을 했죠.  《오리를 쫓다가 강에 빠진 사냥꾼 이야기를 제작자가 읽는다 해도, 그는 별로 안 웃을 겁니다. 》대부분, 제작자는 대사만 읽곤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진 더이상 읽지 않았죠! 

J-C.C. 당시엔 영화를 만드는 게 불가능했어요. 제작자 없이 시나리오를 썼죠.하지만 세르쥬 실버만[각주:5]이 있었죠. 그는 자금여건상 포기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요 :  《시나리오에 암시된 음악가들을 다시 써야할 겁니다. 그걸 쓰는 것만으로도, 일이 너무 커질 거예요. 》 후시 녹음때 노래를 부르거나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배우, 반드시 시인일 필요는 없는, 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했죠.

J-C.C. 난 그때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었어요. 하지만 그건 해결책이 아니었죠.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장식도, 기존의 연극을 했던 극장도 없었죠. 낡아빠진 곳을 황금으로 뒤덮기 위해 개조해야만 했습니다.

J-C.C. 역사 속에서. 연극을 살리기 위해 장소를 개조한 사례는 있죠. 그리고 텔레비젼이 그 역활을 대신하게 되었어요. 아주 매력적이면서 심오하게요.

J-C.C. (타자로 친 텍스트를 읽으며) 《아름답고 오래된 연극으로 들어오는 문》첫 문장만 있으면, 이루기 어렵죠.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더 필요해요! 우린 끝까지 가기를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다면 투쟁했죠. 그런데 하루는 더 이상 그게 불가능해졌어요. 지금에서야 디지털로 훨씬 만들기가 쉬웢ㅆ죠. 다른 이가 이런 생각을 가진다면, 우린 기꺼이 넘겨줄 겁니다!

J-C.C. 우린 항상 함께 일했어요. 이 이야기의 주제는 현대성과 지상낙원에 관한 거죠...그리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천국이예요. 영화는 아직 미완성의 여러 부분이 남아있어요.

P.é. 오늘날 영화를 하는 어려움은 그게 제 7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모든 영화는 언젠가 텔레비전의 전파를 타게 되죠. 이제 텔레비전용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극장에서 상영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영화를 만들 때 큰 차이를 보이죠.

J-C.C. 또 이런 부분도 있어요 : 우린 희극영화를 만들어야했다고 말하곤 했어요.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있죠. 침묵 속에서 상대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 
《자네가 보기에는 이게 이상한거 같나?》난 영화의 메이킹 필름을 좋아합니다. 완성된 영화없이요!
 
출처 : 92- 93page, CAHIERS DU CINéma, 2011.07 
기사 : 요아킴 레파티에 & 티에리 메랑제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Jean-Claude Carrière (1931프랑스 출생-) 극작가이자 배우. 생 클로드 고등 사범학교 졸업. 루이스 뷔누엘과 공동작업. 프랑스 영화학교장. [본문으로]
  2. Pierre Étaix : 프랑스의 영화감독 겸 배우. R.브레송 감독의 《Pickpocket》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Jour de Fete》에서 주연으로 출연했다. 1961년 단편 《Rupture》를 처녀감독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단편 《Heureux Anniversaire》, 《Insomnie》, 장편 《Le Soupriant》, 《Yoyo》등이 있다.[출처] 피에르 에테 [Pierre Etaix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3. Louis Buñuel(1900.2.22-1983.7.29)스페인 출신 영화감독. 멕시코 시민권 취득. 미국, 프랑스, 멕시코, 스페인 등에서 촬동.-Salvador Dali, Carlos Saura, Arturo Ripstein, David Lynch, David Cronenberg에게 영향을 줌.아라곤 출생. 마드리드대학 졸업. 청년시절 프랑스로 이주, 사일런트 말기의 전위영화 전성기에 장 에프스탱의 조감독을 하다가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초현실주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1928)를 감독하였다. 1930년 반동정치와 종교를 규탄한 전위적 걸작 《황금시대 L’Age d’or》(1930)를 제작했다. 에스파냐에 돌아와서 만든 기록영화 《빵 없는 땅 Terre sans pain》(1932)은 너무 사실적이라 4년 후에야 공개가 허가되었다. 그는 프랑코에게 쫓겨날 때까지 마드리드에서 영화활동을 계속하였으며, 그 후 미국·멕시코로 옮기며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1950년 비행소년들을 다룬 사실영화(寫實映畵) 《잊혀진 사람들 Los Olvidados》(1950,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로 재기하였다. 그 후 활동범위를 멕시코 ·에스파냐 ·프랑스로 넓혀 《로빈슨 표류기》(1952) 《나사렛사람 Nazarīn》(1958) 《비리디아나 Viridiana》(1961,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몰살하는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1962, 칸 영화제 입상) 《하녀의 일기 Le journal d’une femme de chambre》(1964) 《사막의 시몽》(1965, 베니스 영화제 입상) 《메꽃 Belle de jour》(1967,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부르주아지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1972, 1973년 아카데미상 수상) 등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은 현대 리얼리즘 영화의 첨단으로 평가된다. 엄격한 상징적 사실문체(寫實文體)를 써서 철저하게 객관화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군더더기를 없애버린 영상에는 종전의 영화가 바로 보지 않으려고 했던 인간의 악행(惡行)과 약점까지 그대로 드러냈다. [출처] 루이스 부뉴엘 [Luis Bunuel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4. Jacques Audiard(1952.4.30-)프랑스 영화감독. 소설가.1981년 프로페셔널로 데뷔. [본문으로]
  5. Serge Silberman(1917.5.1-2003.7.22)프랑스 영화 제작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