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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2.05 신新 이브 ; 내가 사는 피부 La piel que habito

신新 이브 ; 내가 사는 피부 La piel que habito

내가 사는 피부La piel que habito 는 새로운 신체를 우리에게 익숙하게끔 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단골 테마를- 권력의 남용, 성전환, 감금...- 망라한 이 영화는 장엄한 동시에 대담하게 자신을 과시하며 이 스페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한 획을 기록하고 있다.
 감독이 소설을 각색(혹은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티에리 종케Thierr Jonquet의 소설 Mygale(1984)에 이어, 다른 영화에는 프랑쥐 Georges Franju 의 소설 얼굴없는 눈 Les Yeux sans visage (1959) 를 각색할 예정이다 ; 그리고 역설적으로 얼굴과 이미지의 권력에 맞서는 인물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영화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보다 베라의 이미지, 몸에 꼭 맞는 옷과 그녀가 취하는 요가의 동작들, 그리고 외딴 부르주아 저택의 밀실 등이 다(엘레나 아나야 Elena Anaya ).
실험실의 동물 취급을 받는 그녀는 사고로 아내를 잃은 외과의사의 보상물이다. 그녀는 집안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나타난다. 스크린은 완벽한 통제 도구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연극이자 원격조종현실을 연상케하는 네버엔딩 시네마이다. 또, 그녀는 살아있는 회화이다. 관객과 외과의사는 그녀가 자는 동안 그녀의 나신을 관찰하며,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며 웅크리고 자는 그녀를 바라본다. 베라는 남성 창조주를 위해,그리고 그에 의해 만들어진 이상적인 여성의 현신이다. 그녀에게 Talk to her, 2002)에서처럼, 여성은 긴장된 공간 안에서 수동적으로 자신의 존재만으로  매혹시킨다.
 영화의 첫 부분은 성상을 이용하여 영원한 이미지의 덫에 걸린 것같이, 모든 극적 이야기로부터 따로 분리되어있다. 특별히 몇몇의 장면만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요소로 남는다 : 숨겨진 혈족관계, 그리고 베라를 강간하는 사육제의 호랑이 변장을 한 남자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침입 등이 그렇다. 얼굴없는 눈 Yeux sans visage 잃어버린 이미지를 찾아 내러티브는 느슨하게 이어지며 완전히 그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Franju의 영화는 얼굴을 만들 수 없는 불가능성을 표현한다. 그래서 어린 소녀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도록 계속 감추고, 숨기고, 훼손한다. 내가 사는 피부 La piel que habito 에서는 그 반대이다.  계속해서 순진무구하며, 완벽하게 성공적인 베라의 얼굴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베라의 이미지는 거의 추상적으로 신체와 한 쌍을 이루며 반복된다.  이 은유는 형이상학적으로,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드러나고 있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All About of My Mother 와는 다르게, 심장은 병에 담겨 병원으로 옮겨진다. 베라의 변신에서 남은 유일한 신체적 특징은 온 몸에 남은 흉터이다. 그리고 루이스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의 작품을 따라 그녀가 만드는 인형작품에도 천 자국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영혼이 있다는 것 빼고는 베라는 완성된 작품이다. 그리고 베라는 괴물이 아니다. 더이상 바꿀 것이 없어보이기까지 하다.
잠들어 있는 외과의사와 베라의 두 얼굴은 나란히 샴 쌍둥이처럼 이어지다가 한 명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로까지 전해진다. 영화는 이중 플래쉬백으로 넘어가 두 인물이 처했던 감금과 변신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잠든 이의 머리 속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영화는 연출의 비슷한 요소들을 솜씨좋게 채워나가고 있다. 이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 구조는 처음에 비치는 새로운 빛에서 새로이 읽기- 마치 알모도바르 감독이 종종 그러하듯,  영화를 다시 보고, 제2의 시선으로 가늠해보도록 하는-를 유도한다. 내가 사는 피부 La piel que habito 의 구조에서 알모도바르가 얼마나 내러티브의 거장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현대 거장에 오른 조이스[각주:1]나 상드라르 cendrars [각주:2]처럼, 유사 장면-무도장면, 콘서트,  흑백의 짦은 시퀀스(그녀에게 Talk to her)- 이야기를 거침없이 삽입하며 플래쉬백을 솜씨좋게 조율한다. 혹은 총체적인 일관성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시간성과 삽입절이 증가할 때까지 이중적 이야기를 분할한다. 
 내가 사는 피부 La piel que habito 는 완전히 Vertigo 나Yeux sans visage 의 리메이크가 아닌, 주제를 완전히 전복시킨다. 감독은 영화 이면의 주제를 위해 이미지를 탐구하는 것 이상으로, 이미지를 경이롭게 중첩시킨다. 외과의사가 베라라는 여성을 다시 만드는 이미지는 다소 폭력적이며, 개인의 파괴이자, 성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실 환상이상으로, 베라의 이미지는 남성, 비센테 Vicente의 성적정체성을 왜곡한 것이다. 그리고 외과의사의 광기와 잔인한 복수로 인해 인공적으로 창조된 벤야민 신드롬으로, 그는 그의 것이 아닌 신체 안에 감금되어 통제를 받아들인다. Nip/Turk 시리즈의 외과의사와는 달리, 그리고 Femmes au bord de la crise de neufVolver 와는 달리, 폭력은 좀더 길게 연장되어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잔인한 현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사이 베라의 눈에 저항의 빛이 나타나기도 한다. 아주 인상적인 예는 외과의사가 아직 남성의 외모를 지닌 비센테에게 여성의 질 시술을 알리면서, 새로운 기관에 적응하도록 의례적인 말투로 거세여부를 설명 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무절제한 권력에 휘둘려 존재/ 출현, 그리고 그 자신 안에 갇힌다는 이중적 이야기이다. 알모도바르는 《M to F》로의 변신에서 아무것도 사실적인 증거를 내보이지 않고 비센테의 기질을 바꾸는 것만으로 간략하게 은유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비센테/베라는 거의 형이상학적 여성이다.  남녀양성으로, 남성의 생식기를 은유하는 칼로 무창한채, 흰 가면을 쓴 베라의 이미지는 루이 푀이야드 Louis Feuillade감독의 Vampires의 흑백화면이나, 이 이마 베프 Irma Vep(Olivier Assayas,1996)의 분위기를 연상케한다. 행동- 걷는 방식, 웃거나 움직이는 방식-은 여성이지만, 여전히 비센테의 남성성이 그 안에 갇혀서 가련하게 떨고 있다. 그와 동시에, 알모도바르는 우리 관객에게 비센테를 학대하는 역을 떠맡긴다 : 우리의 시선, 우리는 그의 성전환을 스크린 밖에서 통제하고 있다. 영화감독은 베라의 이미지를 보다 모호하게 보여주며, 외과의사를 조물주적 위치에 놓아 완벽한 여성상이란 환상을 창조하고 그를 믿게끔 만든다.
 후안 페드로 로드리게즈 Joao Pedro Rodrigues의 남자로 죽다 Mourir comme un homme (2010)와는 반대로, 신체에서부터 양성의 주인공은 의학적 이유때문에 다시 남성이 되고 강요된 성을 따른다. 내가 사는 피부 La piel que habito 에서는 Yeux sans visage 를 연상시키는, 거의 추상적인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내러티브에 대한 강요나 공포를 누그러뜨리지 않고도 모든 것이 이 영화에서는 가능해보인다. 알모도바르는 대사를 많이 사용하기보다 배우의 표정이나 행동에 초점을 두어 보다 긴장감있게 연출한다. 그리고 브로큰 임브레이스 Los Abrazos Rotos, Broken Hugs, 2009 에서와 같은 팝적인 칼러를 영상에 풍부하게 담는다. 그래서 내가 사는 피부 는 불가결하게 알모도바르의 피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감독은 자기-재생 방식에 안주하기보다, 친숙한 주제들로  전작에 이어지는 변주곡을 연출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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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AHIERS DU CINéMA # 669. 2011.8
기사         :   ISABELLE ZRIBI
불한 번역  :   PLONGEUSE ( 잠수부 )

  1. 제임스 조이스 [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2.2~1941.1.13]요약아일랜드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20세기 문학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작가이다. 37년간 망명인으로서 국외를 방랑하며 아일랜드와 고향 더블린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집필하였다. 대표작에 《더블린의 사람들》, 《율리시스》 등이 있다.더블린 출생. 20세기 문학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세계적인 작가이다. 예수회 계통의 학교에서 교육받고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졸업하였다. 그리스·라틴·프랑스·이탈리아·독일 등 각국어에 통달하였고, 일찍부터 입센, 셰익스피어, 단테, 엘리자베스왕조 시인, 플로베르 등의 작품을 탐독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 T.아퀴나스, 비코 등의 철학을 흡수하였다. 아일랜드의 문예부흥 기운에 반발하여 학교 졸업과 동시에 파리로 갔으며, 1904년 벌리츠학원의 영어교사로 러시아의 폴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 등지에서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취리히로 피난, 1920년부터 파리로 옮겨 새로운 문학의 핵심적 존재가 되어, 주변에 각국의 시인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침입을 받자 다시 취리히로 가던 도중 병으로 죽었다.그는 고향 더블린을 버리고 37년간이나 망명인으로서 국외를 방랑하였다. 빈곤과 고독 속에서 눈병에 시달리면서, 전인미답의 문학작품을 계속 집필하였는데, 작품의 대부분이 아일랜드 ·더블린 ·더블린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젊었을 때 한때 신문발행과 영화관 경영을 계획한 적도 있었지만 둘 다 성공하지 못하였다. 1907년 고전적 아취를 지닌 연애시를 모은 시집 《실내악 Chamber Music》을 발표하고, 1914년에는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을 출간하였다. 그 대부분은 이미 1905년경 이전 탈고로 발표된 것도 몇 가지 있었다. 그 후 1914∼1916년에 《에고이스트》지(誌)에 연재된 자서전적 요소가 많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1917)은 ‘의식의 흐름’을 따른 청신한 심리묘사로 크게 주목받았다. 이어 3막의 희곡 《유인(流人)》(1918)을 간행하는 한편, 1918년부터 《율리시스 Ulysses》(1922) 일부를 미국의 잡지 《리틀리뷰》에 발표하여 풍기상 유해하다는 이유로 고소당하기도 하였으나, 조이스라는 이색작가의 존재를 널리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1922년 파리에서 대본업을 하던 미국인 여성 실비아 비치의 희생적 노력으로 《율리시스》가 간행되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은 훼예포폄(毁譽褒貶)이 엇갈렸으나, 출중한 문학적 재능에는 한결같이 경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은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연구 해설서도 잇달아 출간되었다. 마지막 작품 《피네간의 경야 Finnegan’s Wake》(1939)는 진일보한 실험적 작품으로서 《율리시스》에서 사용된 ‘의식의 흐름’의 수법이 종횡으로 구사되었다. 오늘날의 소설은 매스컴에 용해되어 있으나, 조이스는 그것을 거부할 수 있었던 최후의 예술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시인적 작가였다. [본문으로]
  2. [Blaise Cendrars, 1887.9.1~1961.1.21]요약20세기 전반 프랑스의 시인·소설가. 시의 코스모폴리터니즘(세계주의)을 확립했다. 작품은《노브고로드의 전설》,《완전한 세계》, 《전달된 손》등이며,《에펠탑》(1914)은 20세기 초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