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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2 기호 F _ 플로흐 인터뷰

기호 F _ 플로흐 인터뷰

알랭 르네에서 마이크 리에 이르기까지, 카이에의 표지를 장식해온 그는 영화계에 30여년 이상 담았다


축약적인 방법으로 깔끔한 선처리를 추구하는 에르제와 에드가 P.제이콥, 플로흐는 현대 주요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세브노악 학교의 랑데뷰와 함께 등단한 프랑수아 리비에르는 친영적인 댄디 스타일 만화로 1977년 유명세를 얻으며 부각되었다. 이 문집은 1983년과 2009년 사이에 발간된 블리츠 3부작 (Blitz, Underground, Black Out )에도 있는, 하딩 사건(1980) 와 말콤 경의 연구(1984) 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현실을 축약하여 표현하며 바로크적 문제제기를 함과 동시에 고전적 인물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 그리고 전통에 따라 단일하게 색을 칠하며 암시를 꾀한다. 플로흐의 이러한 작업 방식은 여타의 그래픽 작업 중에서 신문사(리르, 무슈, 뉴요커 )와 출판사, 그리고 광고업계에서독특한 제 색을 내도록 한다. 이 아르 데코의 대가가 일회적이긴 하지만, 영화계에 행적을 남긴 것은 이해가 간다. 다이안 커리스의 영화 박하향 소다수 ( 원제 :Diabolo Menthe, 1977) 와 3번의 만남으로 이 포스터가 탄생되었다. 알랭 르네의 경우에는 우리는 샹송을 알고 있다 (원제; On connaît la chanson, 1997), 입술은 안돼요(Pas sur la bouche, 2003), 이전에도 스모킹 노 스모킹(1993) 의 포스터를 그렸다. 또, 우디 알렌의 영화 해리 파괴하기(Harry dans tous ses  états ,  1997) , 할리우드식 엔딩 (2002 ) 와 멜린다와 멜린다( Melinda et Melinda , 2004)의 프랑스 버전의 광고포스터를 그렸다. 한편, 파스칼 보니체[각주:1]의 영화로는 작은 상처들 (Petites Coupures, 2003 ) , 위대한 알리바이 (Le Grand Alibi, 2008) 의 포스터를 작업하였다. 57세에 플로흐는 마이크 리의 최신 작, 세상의 모든 계절 (Another Year , 2010) 의 프랑스 버전의 포스터를 그리며 새로운 세계를 열며 현대에 맞서고 있다. 플로흐가 카이에 의 이번 호 표지를 장식하며, 유사 영화의 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당신의 첫 영화 포스터는 무엇인가요?
 다이안 커리스의 박하향 소다수 입니다. 영화는 예기치 않게 대흥행했죠. 영화의 제목에 우선 손녀 나 어떤 장르의 것이라고 붙이려 했었습니다. 제목을 잘 선택했다고 봅니다. 내 포스터 같은 경우는 당시에 이슈가 될 만 했습니다. 하지만 고몽 영화사에선 첫 도안의 3명의 남자 얼굴이 웃지 않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난 맘에 들지 않았었습니다. 난 23세였고, 거기에 따랐습니다. 지금의 난 눈에 띄는 것들을 영화사측에 보내고 있죠! 이어서, 다이안 커리스의 두번 째 영화의 미국판 포스터를 그렸습니다. 정부의 요청으로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영화로 찍었는데, 그들이 말하는 그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난 강력히 거부했죠!

●다이안 커리스와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우린 둘다 신분야 개척자들이란 점에서 함께 하고 있죠. 그녀가 첫 영화를 선보였을 때, 그녀는 영화에서 복합적 경험과 신선함으로 가득찬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했다고 확신했었습니다...하지만 그녀의 두번째 영화 화영볌 에선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박하향 소다수 가 흥행하기 이전에,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습니다 : 프로덕션은 더욱 커지고, 사업상으로 유럽을 1순위로 타겟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난 당시 68년 5월 혁명을 연상시키는 포스터를 그렸습니다 : 학생들의 손에 권총이 들려있는 실크스크린 인쇄였습니다. 흰색 바탕에 흑색과 적색으로 그렸는데, 구상은 좋았지만,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파리에서 산책할 때, 포스터에 흰 색으로 누군가 글씨를 쓴 것을 봤습니다 : 《거기, 플로흐, 넌 실패했어.》

 


●동시에 당신은 디브디 타이틀 표지를 그리지 않았습니까? 
 어떤 면에선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만화라고 느껴지지 않는 포스터를 그리는 것입니다. 마이크 리의 영화 작업에서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난 만화 문집의 효과처럼, 120X160 사이즈의 판 위의 제목의 주변 여백 하늘의 공간에 글씨를 쓰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 사람들은 내가 단색판으로 작업하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일종의 나만의 표식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물의 얼굴 뺨이 더욱 편평해보이도록 컴퓨터로 작업합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곤 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결과를 얻곤 합니다.
 단색면의 사용의 거장은 에르제[각주:2]입니다. 그는 유리잔이나 물병에 그려도 거슬리는 게 없습니다. 만약 샴고양이를 그려야 한다면, 그는 탈색된 회색을 쓸 것입니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의 천재적인 면은 캐릭터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뺨을 칠하는 방식에서 말입니다. 그게 없었자면, 머리는 너무 단순할 겁니다. 탱탱은 너무 추상적인 캐릭터였을 것입니다. 그런 방식이 생명을 불어넣는 겁니다. 표지가 좋다면 같은 이유로 포스터도 좋은 것입니다.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의 350 000으로 펼쳐진 이미지를 하나로 압축하는 것이 포스터의 예술이라 했습니다. 당신이 영화의 한 장면을 선택할 의무는 없습니다. 에드가 P.제이콥스[각주:3]의 노란 표식 (La Marque jaune) 을 보면, 대문자 M의 벽 앞에 두 명의 인물이 있을 겁니다. 프리츠 랑의 M (1931)의 포스터를 연상시킵니다...이런 장면은 영화 앨범에 존재하진 않습니다. 그녀는 이런 효과를 발명했죠.   

알랭 르네와의 작업은 스모킹-노 스모킹 으로 시작된 겁니까?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이 때 내가 포스터 작업을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이안 커리스의 작업 이후에, 영화의 나르시스적인 면에 쉽게 피곤해졌고, 이후에 수많은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알랭 르네[각주:4]가 연락을 해오기 전까지 말입니다. 난 그에게 세브노악의 랑데부 를 보냈습니다. 르네가 구세주 를 촬영할 당시, 난 프랑수와 리비에르와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액자구조의 이야기였습니다. 르네는 내 그림을 받아보고 몇년 후에야 고맙다고 하더군요. 난 거북했지만, 고맙다고 말한 것에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할 때, 난 다시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난 당신에게 다른 것을 원합니다.》 바로 스모킹-노 스모킹 과 관련해서였죠. 

이 화면에 대해 구상해 놓은 것이 있었습니까?
 우선. 영화에 관련해서 인트로를 구상하고, 모든 막의 시작의 서두를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개인적 유토피아와 세상은 겉보기에 서로 멀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해체하려면, 원래의 이야기를 형식적으로 구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독단적인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린 기발한 이야기가 없으면 지루하다고 늘상 말합니다. 알랭이 내게 영화의 모든 도입부를 보여주기 위해 왔을 때, 난 이미 실망한 상황이었습니다. 만화에서 가져올 수 있는 요소는 몸짓의 부재, 정체상황, 고정 관념등이었습니다. 난 항상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실험적 측면이 없이 만화 장르를 가지고 모험하는 걸 싫어합니다. 난 항상 차에 담긴 음료보다 찻잔 주변의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 난, 자유롭게 움직이는 정신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영상 속에서 고정적인 이미지를 좋아하는데, 그 이미지가 투영하는 것을 스스로 반영하며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보통, 난 영화에 열광적인 시네필이 아닙니다.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1959년 하워드 혹스의 영화 리오 브라보 를 끝으로 좋은 영화의 시대가 멈추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에 나온 것은 그냥 맥주 한잔거리였죠...영화에서 불편한 점은. 그것이 읽기의 리듬을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보면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는 소떼같은 기분이 들곤 합니다. 반면에 독자들에겐 상상의 자유와 함축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문학이나 내가 항상 높게 평가하는 만화의 경우에도 그렇죠. 하지만, 피라미드의 최고 계단에 그림을 놓는 것은 나로선 아주 열정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더 이상 포스터를 그리고 싶지 않았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르네에게 사진 포스터를 제안했습니다. 내가 직접 하겠다고 했을 겁니다. 우린 스튜디오를 빌렸죠. 사빈 아즈마와 피에르가 왔습니다. 그들을 그리기에 어떤 잇점도 없었습니다. 알랭은 갈매기를 그려보는게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이런 사소한 꾀로 특별한 분위기의 그림이 되었습니다. 난 이런 야생의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수평선과 풍경을 매우 낮게 그렸습니다. 그래서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의 특별한 것이었죠.

1992년부터 오랫동안 일러스트 포스터를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알랭과의 작업같은 경우에 영화 제작자와 배급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만화에 대한 대중의 취향과 그래픽 문화가 있어야 할 겁니다. 다른 영화인들은 두려워 하는 게 많죠. 그들은 사진을 찍는 것 이외에 다른 매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획사는 다른 여타의 해결방법이 없기에 사람들에게 보여줄 포스터를 별로 제작하지 않습니다. 감독들이 메이킹 필름 중의 25개 장면을 사용하기 바라진 않으니까요. 현대의 사진포스터는 더이상 놀라울 게 없죠. 왜냐하면 사진술이 그림보다 더욱 현실에 가깝고, 그래픽적 힘이 약하다는 약점을 가지기 때문이죠.


르네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알랜 에이크번[각주:5]의 세계나 친영적인 측면을 받아들인 것인가요?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에이크번의 발견은 그저 순수한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블리츠 삼부작 이후 작업한 것은 언더그라운드 입니다. 에이크번 스타일의 실험이었죠. 사람들이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영화가 프로파간다적인 면을 가지고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그건 심오했습니다 : 내 그림은 항상 내가 흥미를 가지는 매체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것이 연극이든, 문학이나 사진이든 말이죠. 종종, 영화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했습니다. 웨스트 엔드, 이스트 엔드 라는 제목의 만화 속 영화에서는 두 전철역을 가로지르며 액션이 필쳐집니다. 웨스트 엔드는 세련된 구역이고, 다른 이스트 엔드는 런던의 대중적 구역이죠. 사람들은 두 영화에서 같은 배우가 서로 다른 역활을 연기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게임은 본질적으로 에이크번의 것이죠. 스타일을 가능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 말입니다. 난 그렇게 함으로 기쁨을 느꼈고, 그건 리비에르의 것이라기 보다 플로흐의 것이었습니다. 당시 에이크번의 대담함에 폐부를 찔린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크노의 형식의 실험 은 내가 젊었을 때 강한 인상을 주었고, 항상 난 형식주의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거의 독단론자이죠. 난 감정, 심리학, 감정을 좋아하긴 하지만, 분명 겉으론 그러지 않습니다.

●파스칼 보니체르의 영화 포스터도 역시 흥미롭습니다.
 보니체르의 영화 작은 상처들 을 비공개 상영할 때 보았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난 그에게 영화는 좋았지만, 난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얼굴이 흰 천으로 뒤덮인 연인들을 그린 마그리트의 그림 '연인'을 봐야 할 것 같군요.》그가 내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당신입니다.》내 작업에 대한 책들을 뒤적이며 그 말을 들었습니다. 난 프란시스 스콧 피츠제랄드의 초상을 그린 적이 있어요. 보니체르의 영화에서 멋진 미스테리를 자아내는 산 속의 가옥의 것처럼, 난간에 기대서 있는 자세로, 두가지 색으로 그렸습니다. 그 작업을 하면서 난 돌연 포스터를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겼습니다. 난 마그리트의 그림이나 다른 페인팅에 있는 산을 따라 그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른하임 에 이르러선 뾰족한 형체에 달린 머리들을 그리면서 절정을 이뤘습니다. 그건 너무 재미있는 리바운드였습니다. 포스터에선 판화를 이용합니다. 판화를 할 때는, 일반적으로 가능한한 적은 수의 색을 사용하려 합니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종종 더 진전하고 나아가기 위해 많은 색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흥미로운 부분은 간략성입니다. 우디 알렌의 멜린다 와 멜린다 의 포스터를 그릴 때, 최대한 삭제한 부분이 많습니다. 마이크 리 와의 경우처럼 점점 제거를 하면서 원칙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포스터 작업을 요구하면, 그 다음날이 되서야 현실적으로 구상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이 영화관을 방금 나와서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앞으로 두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 다음이 지난 후에 하는 건 보다 쉽죠...그래서 마이크 리에게 정원일을 마치고 개화를 지켜봐야 하니까 일주일 동안의 여유를 달라고 요구했었죠.    

그리고 위대한 알리바이 에서는요?
 솔직히 말해 보니체르의 작품에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각색과 포스터는 나로선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내 포스터는 덜도 아닌 더도 아니게 내 아들 클루에도의 놀이에서 착안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재미있었던 건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는 체스 말의 색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각각의 체스엔 인물의 얼굴이 달리도록 했죠. 판단하기에 모든 색깔들이 《심리적》 
이면서 이유없이 아름답기만 하면 안되었습니다. 포스터의 공간은 너무 제한되어 있기에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로 빠르게 지나칠 때 조차도, 이 체스말들과 장갑을 끼고 총을 든 손 이미지들은 먹혀들 수도 있었으니까요. 난 영화의 주요 장면을, 예를 들면 수영장의 살인씬같은 장면을 발설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뉴요커 의 작업에서도, 항상 텍스트의 정수를 그리고 아직 보여지지 않은 영화의 신비로움을 내버려두도록 했죠. 당신이라도 아마 포스터에 베스트씬을 그리면서, 생동감을 뺏을 순 없을 겁니다. 그 영화 자체에서 표지를 추출하는 편이죠.


●우디 알렌의 경우는 어땠는지요...
 당시 사람들은 내게 우디 알렌이 마치 펠리니가 그의 영화포스터에 많은 그림을 사용한 것처럼 일러스트레이터를 찾고 있다고 알려줬습니다. 해리 파괴하기 의 미국판 포스터는 정말 너무 안좋았습니다. 그래서 난 미안하지만, 자만감이 생겼죠. 그가 간략하게 접근하며 영화의 정수를 너무나 잘 요약해줬기에 아주 멋진 포스터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우디 알렌이 아주 기뻐했고, 미국인 제작자에게 이렇게 말했다더군요 : 《봐, 이게 영화 포스터야.》그가 내게 별도로 《고맙다》고 했죠. 그런 경우는 드물다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난 해리를 그리면서 일러스트레이터로써 어떤 단계를 밟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만화의 삽화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  완벽하게 간략화하기 위해, 장식을 배제한 것입니다.

● 영국 감독 마이크 리 의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 을 보기 이전에 그런 작업 원칙을 세우신 겁니까? 
 아닙니다. 난 영화를 보기 전에는 포스터를 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배급사측은 내게 상영이 끝난 후,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냐고 묻곤 하죠. 거기에 난 문제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냐가 아니라, 내가 포스터를 그리고 싶냐의 여부이다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가끔 영화가 재미없으면, 아니라고 답합니다. 난 나만의 영역이 있고, 나만의 개인적 유토피아가 있는 사람입니다- 알다시피 : 인생은 명백한 논리나 대 영제국 없이도 흘러간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난 스모킹- 노 스모킹 때처럼 매번 영화가 흥미롭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없이 포스터를 그리는 것은 불편하죠. 그게 알랭 르네의 경우라도 말이죠! 그는 최신작에서 내게 대본 콘티를 그려줄 일러스트레이터 몇명을 찾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본이 극히 재미없었기 때문에, 난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샹송을 알고 있다 를 작업할 당시 우리집에서 저녁 식사 후에 논의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무성영화에 대한 프로젝트를 말했습니다. 난 웅장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 르네는 무성영화의 영상 편집예술의 대가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열렬히 빠져들었지만, 아직 이 영화를 보진 못했습니다.


●포스터 작업을 하기 전에 마이크 리의 영화를 알고 있었나요?
솔직히 말해서 그의 영화를 전혀 보지 못했고, 많이 알지도 못했었습니다. 난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동시에 극도로 혐오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판도라 상자를 여는 사람》이 되기에 좋은 명분이죠. 70년대에, 난 맨발의 귀부인 에 몇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당시 지인들은 판도라 를 좋아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귀부인들 을 좋아하지 않았죠. 난 거의 예술지상주의에 가깝도록 예술을 상위에 놓고 싶습니다. 삶을 초월하는 예술 작품을 하길 원합니다. 르네의 영화 중에서 좋아하는 작품은 예술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서술구조가 화려한 프로방스(Province) 나,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L'année dernière à Marienbad .1961) 입니다. 마리앙바드를 좋아하는 것은 매일 그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이스의 피네간스 웨이크[각주:6]를 파리에서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60여개 언어가 동원되고 가능한 모든 기법과 문체, 신조어가 실험된 장대한 드라마로 인류의 언어를 경신했다는 평을 듣는 작품이다. 조이스의 경우처럼, 모호한 존재로 읽기 힘든 작품이죠.
 그래서 마이크리와 그의 영화는 그의 인생, 일상과 매우 가깝습니다. 난 거기서 아무것도 찾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쁠 것 같다고 미리부터 걱정을 했었습니다. 내 나이 때문인지, 가끔 어떤 면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며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당시 난 57세였고, 영화는 인생의 문제에 맞닥뜨린 한 연인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변을 맴도는 것만으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을 살릴 수도 없습니다. 이 연인은 사람들이 그들의 연민을 이용하려 하지 않는 한, 타인의 불행을 감수합니다. 난 평상시와는 다른 행동을 했습니다. 마이크리에게 일러스트를 보낼 때, 편지를 동봉했습니다. 그 편지에 내가 왜 간단히 표현된 빗 속에서 연인이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도록 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난 인생의 희열에 강조하고 싶었고, 볼록거울과 오목거울의 양면을 가진 포스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였죠 : 《알다시피, 이 포스터를 그리는 내내 칼 질[각주:7]이 가지는 유희의 정신을 가지도록 했습니다. 난 따뜻하고 생동감있는 분위기를 위해 많은 세세한 사항을 배려했습니다.》 질은 영국인이 사랑한 훌륭한 뎃셍화가입니다. 그는 50여년동안 풍부한 묘사력으로 영국인들의 생을 맛깔나게 그렸죠. 그래서 난 마이크 리가 질을 재발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스모킹-노 스모킹 과의 유사하게 보이지 않나요? 연인이 있고, 하늘, 오두막과 영국식 풍경이 있으니까요...
 물론입니다! 난 당신 말처럼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르네가 말하는 것처럼《검토》를 거쳤죠! 그건 스모킹-노스모킹의 인물들의 머리만 바꾸면 일치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르네나 마이크 리의 두 경우 모두 어떤 그늘을 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리악은 이렇게 말하곤 했죠 : 《풍족할 때 우리가 바뀌어야 할 필요는 없다, 상황이 안좋을 때도 마찬가지다. 아니, 특별히 상황이 안좋을 때 그렇다.》이 포스터가 12월의 파리에 우울한 회색조로 걸린 다고 상상해보세요. 그 영화가 실제로 우울한 어조더라도, 신경증에 걸린 등장인물의 위치가 그대로 노출되기 보다 기쁨에 차있도록 단순화 시켜서 보이도록 감독이 요구했을 겁니다.

●크로키나 사진에서 작업을 시작하시나요?
 내가 그림을 보여주는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은 종종 배우의 사진을 내게 보냅니다. 내가 포스터에 그리는 인물들이 배우와 닮아야 하기 때문이죠. 다음에, 그것을 내 방식대로 만듦니다. 구상한 정원사에 중첩시키거나 하지만, 영화와 닮아야 한다는 고집은 없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본질은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묘사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길가의 포스터는 보자마자 알아채야 하니까요. 


●포스터로 앞으로 해보고 싶으신게 있나요?
 난 내가 상상하는 영화인들이 더 이상 세상에 없을까봐 아주 두렵습니다. 미쉘 파울, 에른스트 루드비히, 샤샤 기트리 같은 감독에서 행복을 발견하곤 하니까요!

                                                                        -티에리 메랑제 , 2010.11. 파리에서-



출처 : 77-82쪽, 까이에 뒤 시네마 . 2011.01
기사 : 티에리 메랑제 Thierry Méranger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Pascal Bonitzer (1946.02.01-) 카이에 뒤 시네마가 배출한 프랑스 영화 비평가. 영화 감독. [본문으로]
  2. 에르제(Hergé, 1907년 5월 22일 ~ 1983년 3월 3일)는 벨기에 브뤼셀 출신의 만화가다. '에르제'는 필명이고 본명은 조르주 프로스페 레미(Georges Prosper Rémi)이다. 만화 《탱탱의 모험》시리즈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며, 초기 유럽 만화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에 "유럽 만화의 아버지" 라고 불린다. 출처: 위키백과 [본문으로]
  3. 본명: Edgar Felix Pierre Jacobs (1904-1987) 벨기에 만화가. 대표작 블레이크와 볼티어 [본문으로]
  4. Alain Resnais (1922-) [본문으로]
  5. Alan Ayckbourn (1939-, 런던 출생) 영국 극작가. [본문으로]
  6. "제임스 [본문으로]
  7. Carl Giles (1916-1995) 영국인 삽화가. 데일리 익스프레스에 연재했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