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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05 뉴욕 독립 영화의 새로운 바람12_뉴욕 영화인들의 인터뷰(1)

뉴욕 독립 영화의 새로운 바람12_뉴욕 영화인들의 인터뷰(1)

 제작사, 배급사, 비평가들: 5인의 뉴욕 영화인들이 독립 영화의 진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대는 변화한다 The Times They Are a-Changin

테드 홉 Ted Hope,
제작자


 뉴욕 출신인 테드 홉은 80년대부터 60 여편의 장편을 제작하였다. 그중에 3편은 그랑프리를 수상하였고 20여편은 경쟁부문에 진출하였었다. 할 하틀리, 이안, 미쉘 공드리의 첫 장편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특히 토드 솔론즈Tod Solondz를 좋아하여 계속 제작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숨어있는 인재, 예를 들어 숀 더킨Sean Durkin 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한편, Indie Wire의 열렬한 블로거(blog.indiewire.con/tedhope ) 이기도 하다. 그는 네티즌들한테 이런 소소한 영화들이 개봉하는 날 보러가기를 격려하는 것이다. 
  테드 홉은 최근에 뉴욕의 젊은 영화세대들이 지난 15년에 걸쳐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확신한다 : 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어떻게 뉴욕에서 영화들을 제작하기로 하셨나요?
 감독이 한 영화를 찍으려면 뉴욕과 로스엔젤로스 사이, 그리고 예술과 상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죠. 당신이라면 어떤 쪽이 나을까요? 도어즈와 조지 루카스, 루 리드나 마틴 스코세지라면요? 난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와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1984), 그리고 천국보다 낯선(Stranger than Paradise , Jim Jarmusch ), 그녀는 그것을 좋아해(She's Gotta Have it: Nola Darling n'en fair qu'à sa tête ,1986 ), 분노의 저격자 ( Blood Simple : sang pour sang, 1984 )때문에 뉴욕에 왔어요. 
 나도 같은 걸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할 하틀리와 첫 영화를 만들었어요. 믿을 수 없는 진실 L'Incroyable Vérité(1989) 였죠. 할 하틀리는 그때 3년 이상 걸릴 거란 생각해 아주 혼란스러워했죠. 그 떄, 씨티은행으로부터 새 가정용 컴퓨터를 사기 위해 만오천 달러를 대출받았어요. 그의 사촌, 형제들이 모두 대출을 받았죠. 그가 나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 내게 4만5천 달러가 있어요, 시작합시다.》 5만5천을 들여 촬영을 하고, 하비 웨인스타인에게 25만 달러의 가격으로 판매를 했죠. 그리고 스탭들에게 수익을 배분했죠. 우리중 상당수가 장편을 만들었어요 : 켈리 라이하르트는 의상을, 닉 고메즈는 편집을 맡았죠. 항상 이런 생각을 했어요, 《 이게 영화가 될까? 나쁘진 않겠지. 》 우리 앞에 뭐가 닥칠 지 생각할 수 없었죠.
  
●감독님은 젊은 세대들에 대해 아주 열정적입니다. 뭐가 바뀐 걸까요?
 뉴욕은 영화예술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이지만, 상업적 루트는 희박하죠.  예산이 부족하긴 하더라도 숀 더킨 ( Martha Marcy May Marlene ,2011) 같은 감독들은 시나리오를 수정하거나 스타를 기용하거나 하진 않았죠. 영화감독들은 돈을 벌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예술을 지키려고 하죠.

●왜 이토록 영화 사업이 잘 안될까요?
 헤지펀드로 자금줄을 끌어당긴 게 불과 6,7년 되었어요. 이 투자자들은 왜 배급사측에서 수익이 나기전에 30프로를 먼저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해요. 그들은 15프로의 배급권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배급사 쪽에서는 어떠한 보장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들은 항상 몸을 사리는  편이예요. 하지만, 중요한 건 펄프 픽션( Pulp Fiction , 1994 )현상 같은 겁니다 : 대부분의 독립영화사가 거대 상장회사로부터 점령당했죠.
 그것때문에 모든 영화비평에 매달리게 된 겁니다. 잡지 가장자리에 쓰여진 문구에, 인터넷에 올라온 평가에, 대중들은 더욱 영화를 보지 않게 된 겁니다. 너무 많은 선택사항이 있죠. Netflix[DVD대여 서비스] 에 위시리스트로 2500편이 있어요. 왜 그 영화들을 보러 극장에 가지 않나요? 지금의 영화 감독들은 쿠로와사와는 달리, 관객을 자신의 내러티브로 끌어들이기 위해 새로운 수단을 생각해내야 할 겁니다. 아마 장편과는 거리가 먼 무언가가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젊은 영화감독들의 변화무쌍함에 사로잡혀있어요 : 보더라인 필름의 감독들 말이죠...
 네. 그래요. 이런 집단의 현상은 충분히 특별해요. 제작자와 감독들 간에는 오래된 전통이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스탭들이 서로를 지지하느라 시스템을 거부하죠. 당신이 장편을 찍고, 내가 단편을 찍고, 이런 식의 같은 시스템이죠. 하지만 각자 고유의 스타일이 있어요.

하지만 이런 집단에 대한 생각도 환상아닐까요? 로날드 브론슈타인은 다음 영화의 자금을 아직 찾지 못했거든요.
 미국적인 문제지요. 우린 독특한 작품을 던져주는 예술가들과 배급자들에게 좀 더 많은 돈을 벌어다주는 기업들에게 더 많은 박수를 보내죠. 나는 프라운랜드 Frownland 과 관련있는 무명의 영화들을 월마다 뉴욕에서 상영하기로 결정했어요. 독립영화계에는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가시적인 건 아니었죠.  

●사프디나 브론슈타인과 일해오면서 어떤 다른 경제적 문제가 있지 않았나요? 
 그들과 일하는 게 좋아요. 내 근심은 먹고 사는 문제예요. 65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62편은 수익을 올렸어요. 하지만 내 몫은 얼마 없었어요. 나는 판매해야 할 작품을 선택해야 했어요. 그래서 예를 들어, Martha Marcy May Marlene 때에는 영화를 제작하는 입장도 아니었고, 촬영 당시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투자처를 수소문하였고, 편집실에 찾아 갔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던 것 같아요. 

미국 사회에 단면을 그린 Kids( Larry Clark , 1995 ) 같은 작품은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인들은 정치와 충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요. 그때문에 예술 영화를 판매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겁니다 : 독립영화는 소수 지지층이 있어요. 영화는 섹슈얼한 방향, 장르, 그리고 종교, 인종 등에 의해 나눠지죠. 존 세일즈[각주:1] 이후에는 별로 다뤄지지 않은 주제예요. 그러다가 마이클 무어 [각주:2]가 유일하게 정치를 다루는 감독이죠!
 또한 자가검열이 있죠 : 시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NYU나  Columbia 대학을 나온 감독들은 선댄스 영화제의 작가랩Sundance Screenwriters Lab 에 초청받기를 원해요. 그들은 똑같은 이야기와 장르에 대한 의심없이 선댄스에서의 성공을 바랍니다 : 독특한 상황에서의 개인이 변해가는 이야기들이죠. 하지만 어떤 감독들은 이런 영화제보다 작품의 배급에 더 집중합니다. 예산이 극도로 절감되었다는 이야기죠. 난 독립 영화 배급을 원할하게 하도록 기관들을 격려하고 있어요. 개봉을 앞둔 감독들을 위해서죠. 그들 홀로 스스로 서기는 힘들어요. 10년이 걸릴지도 모르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야해요.

많은 뉴욕 영화인들이 35mm나 16mm를 고집합니다.
 토드 솔론즈Tod Solondz 의 신작을 촬영할 때, 파나비젼은 우리에게 35mm를 제공했어요. 아무도 그걸 사용하지 않았거든요. 코닥은 전체예산에서 필름부문을 50%로 삭감했죠. 내 최근 두편의 영화, 토드 솔론즈의 작품과 Super( James Gunn , 2010)는 3백만으로 찍고 디지털 효과를 많이 추가했어요. 토드 솔론즈의 작품에 디지털 효과가 이상할 것 같나요? 하나 정도 발견할 순 있겠지만, 전체는 아닐 겁니다. 우린 시선 방향이나 정지 시간등을 바꿀 수 있었죠. 또 길 위에 초록색 트럭도 지울 수 있었어요. 내가 처음 디지털 효과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미쉘 공드리Michel Gondry 때문이었죠. 그가 어떻게 이미지들을 조작하고 조형성을 따지는 지를 보면서요-그는 마치 해방자같았죠. 뉴욕 영화감독들이 아무리 순수함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디지털 효과로 뭐든지 가능하다는 걸 알게되면, 매료될 게 분명합니다. 지금 시대엔, 10만 달러로 디지털 효과를 하려고 합니다. 

●9.11 사태가 영화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좋은 예가 있어요 : 2001년 11월 개봉한 In the Bedroom ( Todd Field )이죠. 여태껏 보지 못한 영화였죠. 영화는 거대한 슬픔이 우리를 어떻게 망가트리는 지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영화는 주인공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라 이야기하면서 끝나요. 하지만 관객은 그 인물이 아들을 죽인 범인에게 살해당하는 걸 보게되죠. 결과적으로, 그 3백만 예산으로 만든 영화로 미국에서만 3천2백만의 관객을 모았어요. 하지만, 9.11사태 이후로, 관객들이 줄었죠. 영화에는 전쟁을 비판하는 요소들이 없었고, 고통에 찬 영화는 아니었으니까요. 모두 이렇게 말하더군요 : 《우린 하나야.》아니면 이렇게요:《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할 지도 몰라.》 미국 영화계가 다른 세계를 보이지 않은 건 오래된 일이예요. 관객이 이런 대안적 시선을 받아들일 지 알 기 힘들죠. 그걸 보여 준 적 조차 없으니까요.

2011.10.12, 뉴욕에서
스테판 들롬 & 니콜라 엘리오    



출처 : 88 - 90쪽, cahiers du cinéma Nº 2011.9
기사 : Stéphane Delorme
불한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보스턴에 있는 윌리엄스대학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소설 《빌보스의 자부심》(1975), 《노조의 권리》(1977)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첫 발을 내디뎠다. 저예산 상업영화를 제작하는 로저 코맨의 시나리오를 틈틈이 각색해 주며 영화일을 배워 1980년 《세코서스 7인의 귀환》을 감독하였다. 1985년에는 맥아더 재단이 주는 천재상을 받아 해마다 3만 4000달러의 상금을 5년 동안 받았다. 1987년 《메이트원》으로 재능을 인정받았고, 독립영화계 출신들이 할리우드로 들어오는 가운데 독자적인 작업에 긍지를 가지고 자신의 제작사를 운영하였다. 미국 독립영화 2세대로서 사회 참여 성향이 강한 자연주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 노동계급이라는 주제와 미국신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폭로하는 사건들에 관심이 많으며, 인종간의 화합과 경제 정의에 대해 호소한다. 영화작가로는 드물게 O.헨리상을 받았다. 1960년대 학생운동을 한 친구들이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나 과거를 회상한다는 《세코서스 7인의 귀환》(1980)으로 그해 로스앤젤레스비평가협회 최우수각본상을 받으며 인정받는 독립영화작가가 되었다. 1983년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하는 한 기혼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따라간 《리아나》를 발표하여 좋은 평을 받았다. 이듬해 인종과 마약 문제를 코미디 형식으로 다룬 공상과학영화 《다른 별에서 온 형제》를 발표하였다. 1987년에는 미국 독립영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메이트원》을 발표하였는데, 1920년대 웨스트버지니아의 탄광마을 메이트원에서 실제 있었던 노조설립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을 다루었다. 1991년에 발표한 《꿈꾸는 도시》는 도시재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타락한 도시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제목과는 정반대인 절망의 도시를 그려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인생의 의미와 정열을 두 여성의 우정을 배경으로 다룬 《패션 피시》(1992), 텍사스의 인종문제와 사회적 갈등을 풀어낸 《론 스타》(1996), 《림보》(1999) 등이 있다.[출처] 존 세일즈 [John Sayles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2. Michael Francis Moore, 1954년 4월 23일 - )는 미국의 영화 감독이자 작가이다. 세계화, 다국적기업, 총기 소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는 사회 개혁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2003년 3월 20일, 칸 영화제 시상식에서 발언한 조지 W. 부시 정권에 대한 독설로도 유명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