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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1.21 인터뷰_파울로 브랑코 Paulo Branco-(2)

인터뷰_파울로 브랑코 Paulo Branco-(2)

리스본의 미스테리 Mystère de Lisbonne 이후에, 제 2이의 크로넨버그[각주:1]로 불리는 파울로 브랑코는 프랑스 영화의 제작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담하게!

(1)에 이어

● 《세 가지 통로》(국제영화센터CNC, 텔레비전 방송국, 지역 ) 에서, 어떻게 판도가 변할까요?
 우선 사전제작 지원을 강화해야 합니다 공중파 방송국이나 카날 플뤼가 먼저 앞장을 거는 겁니다. 아르트 방송국도 보다 혁신적이면서 압박감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방송국장이 바뀌어도 20여년간 계속해서 결정권을 가진다는 겁니다. 완전히 경직되 있는 사회죠. 난 그들의 도덕성을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거기에 변화는 있어야 할겁니다. 사전 지원에 대해서도요.
 지역에 관해선, 문제가 보다 복잡해요. 가이엘 모렐 의 영화가 론-알프 주의 덕분에 진행될 수 있었지만, 거의 그쪽과 협력하지 않아요. 두와용Doillon 의 최근 영화를 찍으면서 푸아투-샤랑트 주와 마찰이 있었죠.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지역인 일-드 프랑스에서조차도 원조를 받지 않아요. 거기에 대해선 별로 말하고 싶지 않군요. 시스템의 문제니까요.
 지금 부족한 건 유럽 제작사에 개방성이예요. 아주 중요한 겁니다. 수많은 영화작가들이 거주한지 20여년이 지났어요. 유리마지[각주:2] 는 관료주의 애물단지가 되었어요. 왜일까요? 27개국 나라마다 관료주의가 있고, 그들이 시나리오나 다수의 요소들을 결정하기 때문이죠. 만약 그들이 동양의 영화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표를 거기에 던질 겁니다. 만약 그들이 스칸디나비아 영화를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투표할 겁니다. 거기에서, 포르투칼 영화는 완전히 잊혀진 거죠. 프랑스 영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에서도 영화의 통로는 충분치 않거든요. 

● 그러면 우리는 정말 유럽적 통로를 못찾은 걸까요?
 유럽 영화계에서 큰 오점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유럽 영화비율이 최대한 50프로를 넘지 못한 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도록 한 게 잘못이죠. 권장사항이지 의무사항은 아니거든요. 미국 헐리우드 영화는 거의 전반에 걸쳐 압도적이예요. 그들은 상영관이 없이도 수익을 올리는 법을 알고 있죠. 이 전쟁에서 지면, 모든 게 끝입니다. 프랑스 텔레비전에서 모레티나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보기 위해 몇년을 기다려야 합니까? 20년, 30년요? 몽테이로는 일반 방송에 보여진 적이 없죠. 이렇게 유럽 시장에서 의지가 부족한 점이 유럽 방송을 죽이는 일입니다. 이전에, 독일 방송국, 채널4 Channel4, BBC가 있을 때는 영화가 방영되었죠. 지금 프랑스는 그렇지 않아요. 많은 나라들이 몰락하고 있죠.

●칸 영화제같은 것이 영화적 표현에 도움이 된다고 보시나요?
 이전에, 독립영화 제작사측은 칸에 나서려했어요. 좋은 영화라면, 사람들이 보러 올거라는 믿음이 있었죠. 지금은 너무나 많은 타협이 오고갑니다. 특히 프랑스 영화계에서요. 여기엔 대형 배급사, 대형 제작사, 대형 구매자가 있어야하죠. 그래서 독립 제작사가 설 자리는 없어요. 지난 해는 예외였죠. 왜냐하면 신과 인간 Des Hommes et des dieux 이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거든요. 항상 앞장서서 있는 영화 속에는 뭔가가 있습니다. 한 해에 나는 6편의 영화로 칸에 진출했어요.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죠. 스튜디오 카날, 파테, 고몽 사가 각각 영화를 가지고 있어야 했어요. 앞으로는 프랑스 영화가 불리할 겁니다. 경쟁 부문에 3편으로 프랑스 영화가 제한 될 테니까요. 

하지만 리스본의 미스테리 Mystère de Lisbonne 베니스 영화제를 거절하지않으셨나요?
 그건 영화제 마지막 날 상영하겠다고 해서 거절한 겁니다. 예전에야 영화제 참가만으로 충분했지만, 현재는 그것만으로는 사람들로부터 쉽게 잊혀질 수 있어요. 이탈리아 언론은 세계적 스타 밖에 이야기하지 않죠. 뭐, 조지 클루니 George Clooney이 해리바에 갔다느니, 나탈리 포트만 Natalie Portman이 임신을 했다드니 하면서요. 경제적인 이유로 많은 세계 언론이 영화에 할애하는 지면은 아주 적어요. 바타스Bartas 슈뢰터Schoroter 의 최근작이 묻히는 거죠. 베니스 심사위원으로 있을 때, 지아장커 Jia Zhang-ke 감독의 스틸 라이프 Still Life 에 상을 수여했습니다. 어떤 이탈리아 언론도 그 영화를 보지 않았죠. 그들은 늘 황금종려상 수상을 재촉해요. 마르토 뮐러Marco Muller 는 영화를 선택할 때 큰 용기가 필요했고, 그것이 가져올 영향도 봐야했죠. 이전에 우린 영화제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어요. 지금은 두 번 심사숙고하죠. 난 라틴 아메리카나 스페인의 성 세바스티앙 영화제나 토론토 영화제에 가는 걸 더 좋아해요.
 유감이죠. 좋아하는 영화가 있어도 잘 볼 수 없다는 것이요 : 애커만 Chantal Akerman감독의 갇힌 여인 La Captive 가 예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남죠. 나중에, 돈 드릴로의 찬사에 찬 서신을 받았어요. 그 영화를 보고서요.  

아주 도발적인 여러 영화의 계획을 발표하셨어요 : 샹탈 애커만의 신작,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그리고 레리 클락이요.
 애커만은 그의 벨기에 제작사와 영화를 찍고 싶어해요. 그래서 취소됬고, 하지만 기뻐요. 영화는 나올 테니까. 크로넨버그는 5월 말부터 토론토에서 촬영을 시작했어요. 아주 신선한 모험이죠. 앵글로-색슨의 시스템은 아주 실용적이지만, 모든게 승인이 되야해요. 처음 구상한 사람으로써, 돈 드릴로를 만나서, 그의 저서 Cosmopolis 를 읽었죠. 아주 영화적이었어요. 일년 반동안, 꼼짝않고 매달릴 만했죠. 올리비에 아싸야스Olivier Assayas가 돈드릴로를 좋아한 단 걸 알고 만나려했지만, 그가 카를로스Carlos 를 찍을 때였죠. 그래서, 하루는 용기를 내서 토론토로 갔고, 크로넨버그를 에스토릴 영화제에서 만났어요. 실례였죠. 난 영화화 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는 다른 영화계획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난 그 책을 놓고 갔죠. 그리고 48시간 이후에, 그가 내게 전화해서 책을 읽었는데, 벌써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문제는 독립영화 제작사에게 예산확보가 가능하단 걸 어떻게 설득하냐는 거였어요.

● 그럼 어떻게 하셨나요?
 크로넨버그는 얼만큼의 성공을 예상하는 지 묻더군요. 난 천5백만 유로라고 했죠. 그리고 그렇게 해냈구요. 예산의 3분의 1은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칼에서, 3분의 1은 캐나다에서,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해외구매자로부터 충당했어요. 크로낸 버그는 진정한 도박사예요. 그는 예산을 천5백만을 넘지 않았죠. 배우들에 대해서 항상 나와 토론했구요.
 레리 클락의 경우는 더 어려웠어요. 예산이 그보다 적었음에도(백만 유로) 한푼도 지원을 찾을 수 없었거든요. 레리 클락의 영화는 16세나 18세 미만 관람금지였어요. 모두가 내게 말했죠 : 《일단 영화를 만들어요, 그럼 그 다음에 투자할 께요》. 미국에서, 두 달 먼저 예산이 있었기 때문에 촬영을 할 수 있었어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 이해가 안가는군요.
 캐스팅 만큼이나 더 한 거예요 : 레이 리오타Ray Liotta  와 드보라 언제Deborah Unger. 그들이 와일드 차일드L'enfant sauvage(프랑수아 트뤼포,1970) 와 테오레마Théorème 를 동시에 찍었을 때였죠. 크로넨버그를 보러 갔을 때, 로스 엔젤로스에서 레리 클락이 제작사를 찾고 있더군요. 난 아무것도 모를 때였죠. 난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반대였죠.
 어떤 무리는 이렇게 내게 말했을 거예요 :《레리 클락을 위해서 2백만 투자할 거요.》 그게 나였어요.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지금은 용기가 없어요. 모두가 마지막에 7만이나 8만 유로의 손실을 보고서라도, 레리 클락에게 투자하기 보다 3천만 유로를 실패작에 쏟아부어요. 재정 손실의 위험은 없었어요. 잭팟을 터트릴 수도 있었죠.
 모든 걸 상대적으로 바꾸는 순간입니다. 제작사로서 변화가 필요해요. 목록에서 제외되면서 난 기쁩니다. 영화는 그 감독들이 끊임없이 보충하기에 돌고도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목록을 다 살피자면 그 구조때문에 너무 심각해져버려요. 지금은 내가 믿는 영화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어요.  

실패작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독립영화사를 운영한지 20년이 됬지만 어떤 영화도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과의 문제겠죠. 시간에 대한 기회비용을 치르지 않으면, 회사에 의지하게 되고 내 자유를 잃게되겠죠. 대중적 흥행작은 없어요. 단지 40만 관객이 든 여러편의 영화가 있을 뿐입니다 : 새로운 이브 La Nouvelle Eve(카테린느 코시니Catherine Corsini, 1999 ), 되찾은 시간 Le Temps retrouvé(라울 루이즈 Raoul Ruiz), 권태 L'ennui(세드릭 칸 Cedric Khan 1998)  , 사랑의 노래(Les Chamsons d'amour) 이 세편이죠. 문제는 백만 관객이 들만한 프랑스 영화를 어떻게 만들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시나리오를 보고 내 수중에 두죠. 난 달리 만들어질 방법이 없는 영화를 하기 위해 있어요. 당신이 20만 관객 영화를 만든 누군가와 일을 할 때, 그가 하고싶은 대로 하려 할겁니다. 세드릭 칸이나 오노레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파스칼 코체튜스 Pascal Caucheteux 는 가장 독립적인 사람이예요. 그는 데플레신 Deplechin, 보부아 Beauvois, 클레르 데니스 Claire Denis 의 영화를 제작했죠...내가 보기엔 어떤 연장선상에서 작업하고 있어요.

● 젊은 작가들로부터 많은 프로젝트를 제안받으시나요?
 아주 많이요. 불행히 거의 다 못읽어요. 몇 해동안 17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지냈죠. 이번 년도에도, 6편을 만들었을 뿐이예요. 루이즈의 다음 영화로 포르투칼에서 프랑스의 저력을 보여줄 겁니다. 포르투칼에서 평화의 전쟁 Guerre de Paix을 보여줄 셈이죠. 시리즈물로 구상했어요. 또, 화니 아르당 Fanny Ardant[각주:3] 의 프로젝트도 있어요. 난 그녀에게서 작가로써 흥미로운 점을 보았어요. 이후에 난 젊은 영화작가들을 지원했어요. 3명 혹은 4명 사이에서 망설였죠. 영화를 찍는 건, 호화로운 일입니다. 영화가 되려면, 특별한 기회가 있어야되요. 그걸 위해 투쟁해야하죠. 뚜렷이 존재감을 나타내야 합니다. 모두가 재정적으로 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있어요.
 난 이러한 안정성이, 13클럽Club des 13 이 찾는 그 안정감이 오히려 혁신의 독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게《중심의 핵인 영화》주변에서 부패하고 있어요. 그건 이미 다른 이가 차지한 부분을 가지려고 해서입니다. 심각해지는거죠. 그들은 제도적으로, 공무원이길 자처합니다. 하지만 창조적 영화는 그 반대편에서 나타나죠. 사람들이 제도를 바꾸려고 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자유가 생기는 것. 이 두가지가 핵심이예요. 나로선, 현재 영화에서 필수적 요소라고 보는 건 이 두가지예요 : 대담성과 욕망 입니다.

●젊은 제작자들을 양성하지 않으셨나요?
 난 제작이 개인적 모험이라고 생각해요. 험버트 발산 Humbert Balsan과 아주 가까웠지만, 우린 아주 달랐죠. 각자가 자신만의 제작을 했어요. 거기에 무슨 학파란 건 없죠.
 내가 페미Femis에 갔을때, 학생들은 나를 우주인보듯 하더군요. 내가 그들에게 말한건, 그때까지 그들이 알고있던 것과 정반대였으니까요. 왜냐하면 난 영화광이었으니까요. 발견하는 게 기쁨이거든요. 우린 영화가 진정한 혁명(누벨 바그 Nouvelle Vague , 스콜리오모우스키 Skolimowski , 카멜로 벤Carmelo Bene, 파솔리니 Pasolini ...)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당시의 영화같은 겁니다. 우린 모든 준비가 되어있어요.
 루이즈의 영역 La territoireFrancisca 막바지에 촬영되었어요. 우린 흑백필름을 원했죠. 어느 학파로서가 아니라요. 지금 제작자들은 학위를 가지고 있어요. 우린 하루하루 살아가요. 모레티 Moretti 감독이 3롤의 필름을 안고 파리로 와서 내게 보여주려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하루는 슈뢰터Schroeter가 리스본에 막달레나 몽테즈마 Magdalena Montezuma 와 함께 와서 자신이 살 날이 6주 남았으니 영화를 꼭 찍어야한다고 하더군요. 난 그때, 한푼도 없는데 불가능하다고 했죠. 하지만 Le Roi des roses 를 찍었어요. 어떻게 했는 지 기억도 안나요. 후버트발스 Hubert Bals-로테르담 영화제에 젊은 작가들을 위한 기금- 와 벤더스Wenders 가 도움이 되었어요. 토마스 할란Thomas Harlan이 나서서 코닥 사가 영화를 사도록 했고 영화를 계속 찍을 수 있도록 무료로 증정했어요. 어떤 협정서나 계약서도 없었죠. 얼마나 많은 영화가 그렇게 완성되는데요! Loin de Manhatton(1982) 에서는 장-클로드 비에트에게 제작을 맡겠지만 3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죠 : 해외에서 촬영할 것, 한달에 한주를 촬영할 것, 그리고 촬영감독으로 마리오 바로소 Mario Barroso 를 음향감독으로 장-폴 미구엘Jean-paul Mugel 를 기용할 것. 왜냐하면 프란시스카 때문에 한 달에 한주만 그들이 스케줄이 되었거든요. 비에트는 이 세가지 조건에 맞추어서 만들었어요.  시엔느섬의 보물Trésor des îîles Chiennes(1990) 에서 에프 제이 오상F.J Ossang 은 일부장면을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려 했어요. 그때 스튜디오 대관료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시골의 허름한 집이 좋겠다고 했죠. 다리우스 콘쥐 Darius Khondji[각주:4]는 너무 많은 조명을 바랬었는데,  만다린 조명(가벼운 조명)으로 타협하도록 말했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단지 시스템을 개발시키고, 어떤 실마리를 제공하는 겁니다. 나역시 확신하지 못해요. 하지만 움직여야죠. 프랑스 영화의 번영의 시기가 끝난 걸 잘 알아요. 영화의 질에 대해 말하지만, 흥행도 중요합니다. 국립영화센터CNC 가 내린 칸느에서의 공식 성적는 아직 이례적이죠. 중요한 영화라도 나중에 못 볼 수 있어요....그래도 최악의 해는 아니죠. 하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겁니다. ■

-인터뷰
2011. 4.25, 파리에서, 니콜라 아잘베르 와 스테판 들롬


출처 : 110- 112쪽, Cahiers du Cinéma
기사 : 니콜라 아잘베르 와 스테판 들롬 Nicolas Azalbert Sthéphane Delorme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David Cronenberg, 1943. 3. 15.~] 요약 캐나다의 영화감독. 《열외인간》, 《스캐너스》, 《플라이》등의 작품을 만들면서 공포영화 장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신체 해부 등의 혐오스러운 장면들 아래 인간다움의 가치를 규정한 서구의 통념에 대해 비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외《데드 링거》,《크래시》등의 작품을 만들었다.[출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David Cronenberg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2. Eurimages; 유럽 국가간 영화 지원기금 [본문으로]
  3. 1949년생. 프랑스 여배우. [본문으로]
  4. 1955년생. 이란 출신 영화감독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