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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21 빛의 신세기 ⓐ ; 빛 ; 기교의 변화 (1)

빛의 신세기 ⓐ ; 빛 ; 기교의 변화 (1)

안전, 위생, 정체성, 유명세, 기억, 합의, 일치, 풍요 등등...이 가치들이 2세기 동안 거쳐간 이후에 이제는 인공조명이 다양한 변화를 거듭하며 실현되고 있다.

 어제의 형태가 내일의 것에 일조할 것인가? 유해성 물질이 만연한 현실에서 이런 문제를 가짐으로써 환경 오염에 대해 자각해본다.


누가 2세기 만에 건축이 일광없이도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가?  야간 통행 금지 제도가 있을 당시 한 무리의 패거리가 지나간 이후에, 도시는 곧 암흑으로 빠져들곤 하였다. 거리에는 《 의관 차림으로 언제든지 왕을 알현할 수 있는》기마 파수병이나 회전등을 들고 호위하는 친절을 베푸는 몇몇의 귀족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작업은 하루의 일조 시간에 따라 달라지거나 촛불에 의존하여 이루어졌었다. 


 조명은 매우 고가였으며 한개만으로는 편리성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밝기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프랑스인 르봉 Lebon [각주:1]이 1816년 윈저 Winsor 경의 자문으로 가스등이 도입되었다. 1822년, 도심지에는 비효율적인 유등에서 이 가스등으로 교체가 되었다. 이렇게 야행성의 형체로 의문의 사람들이 모호한 세상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의 도시는 레스티프 드 라 브레톤느 Restif de La Bretonne [각주:2]  가 전쟁에 비유했듯이 너무도 기이한 지대가 되었다 : 《나는 우울한 구경꾼 같다》,그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2의 도시를 돌아다니는 이는 아직 없었다.
 아주 빠르게, 대중은 중간지대를 지나갔다 ; 다양한 광고가 이를 부추겼다 : 상점들, 레스토랑, 그리고 극장들...(2)[각주:3] 인공 조명 기술은 과도한 리듬으로 이어졌다 : 가스등과 전기등이 공존하다가 최신 에너지를 사용한 조명 등이 바로 전단계의 조명을 갈아치우면서 발명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태양광의 불꽃과 비교하기까지 이르렀다! 1881년, 전기는 그의 승리를 확신시켜주었다 :  에디슨 Edison 이 만든 새로운 타입의 전기등이 월스트리트가를 밝혔다. 오늘날에서야 최후를 맞은 백열등이었다. 보다 확실하게 화재의 위험에서 벗어나 내부 공기가 오염되지 않았기에 이 백열등은 가스등을 대체해나가며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가스등은 50년대 파리에서 사라져갔다.
 

축제이냐  안전이냐

도시를 어떻게 비출 것인가? 처음에는 태양에서 아이디어를 얻거나 하나의 광원에서부터 밝기를 확보하거나 적어도 그보다 약한 광원이 몇 개 있을 거라 생각했다. 샌디에고에서는, 조명의 버팀대는 광장 내부나 건물을 빛나게 하는 위치에 설치된다. 그것이 지탱하는 것은 몇 해 밖에안 남았다. 1889년 전시를 맞아, 쥴 부데 Jules Bourdais 는 파리 전역을 밝히는 콜론느-솔레이유 Colonne-Soleil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19세기 내내 기술적 제한요소로 인해 주요 모델이 정해졌다. 공공 조명은 도시 내 트램안에 적용되고 길 에는 쓰이지 않았다. 두 가지 의도로 시행되었다 : 안전성과 비용면에서였다. 《 가로등이 경찰을 대신한다 》, 라는 속설이 도로의 안전을 시민을 고려한 시각적 제어장치로장한다는 것이다. 차후에 자동차의 안정성까지 생각할 수 있는  조명이 거리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었다.

 한편 내부에는, 공장(작업 환경의 안전성)이나 극장에서도 이러한 안전에의 요구로 인해 전기 조명이 보급되었다. 1845년 캉통 Canton 에서 가스등으로 인한 화재로 수천명의 피해자(1670명의 사상자, 1700명의 부상자 )가 발생한 이후에 점점 더 가스등은 사라지게 되었다. 《빛을 판매하다》, 라는 말처럼, 제조자, 설치자 , 그리고 상인들은 전기조명의 효력을 실감하며 암암리에 거래를 했다. 거대한 전면 유리에서 상품들을 밝히도록 설치되곤 했다. 빛과 축제는 긴밀히 연결되었다. 도시의 가장 밝은 거리는 파리의 그랑 불바드 Grands Boulevards(대로변) 같은, 가장 활발한 상업지구였다. 시의회 의원은 쓸쓸한 말투로 붐비는 지역에 이 조명에 설치를 늦게 한 것을 후회하곤 했다 :  《호화스러운 조명이더라도 쓸모가 있어야지.》
 동시에, 도시의 야경에 관한 문제도 떠올랐다 : 낮 조명을 재사용하는 기술은 부족한데, 야경이 있어야 하는가? 결국, 도시의 조명은 여러개의 조명의 총합으로 되었다 : 안전용 조명, 유사한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진 조명 ; 상업지구 조명, 보다 축제기분에 가까운, 쇼윈도에 쓰이는 조명, 그리고 생동감을  다양하게 전하는 전기조명 등등 ; 그리고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유적지에 쓰이는 조명이었. 거리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고는 주거건물이나 사무건물등을 세우기 어려워졌다.   《 거리는 밝게 빛나야 했고, 가옥들이 더 이상 그 자체가 아니라 거리를 빛내기 위해 조명을 사용하였다 》, Mallet-Stevens이  1932년 발행된 조명전문 잡지 BIP 에 기고한 글이다.

 밤에 의한 건축
 여러 방법으로 자연광을 채취할 수 있다면, 인공조명은 기술적 문제이다. 빛의 확산은 제작 산업 구조, 보급망, 그리고 에너지의 상업화, 유망 산업으로써 시장에의 도입과 기술의 상업화 등에 달려있다.
 1920년과 30년 사이에, LED조명이란 현대적인 대안을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광물질의 강도는 색계가 점차 계속 논란의 대상이었다. 2년전만 해도 이러한 가까스로 양도된 설치는 실현되기 힘들었다. 도시의 조명이 보편적으로 되면서 빛은 점점 어떠한 상징이 되어 갔다 : 인생, 그리고 풍요의 정점을 상징하였다. Paul Morand 는 인공조명을 가리켜 20세기 신 지대에 접근할 수 있으며 가장 휘황찬란한 것이라 이야기했다.
 인공조명은 건축 자재로 변모하였다.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고유의 가치로써. 하지만 건축가들은 이를 점령하기를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미국에서, 레이몽 후드Raymond Hood는 《빛의 건축(3)[각주:4]》이라며 찬양하는 글귀를 브로셔에 실었다.  프랑스에서, 인공조명에 가장 익숙한 건축가들은 UAM[각주:5]과 장식미술에 연관있는 사람들이었다 : Mallet-Stevens , Chareau [각주:6], Pingusson [각주:7]등등. 그들은 내부 조명의 설치를 위한 시스템- 조명들, 인공 창문 등-을 개발하고, 부차적으로 《조명 기술자》라는 새로운 직업군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분야에 가장 재능이 뛰어난 자는 바로 앙드레 살로몽 André Salomon 이었다. 현대 건축이 개발되면서, 규정들로 인한 효과는 점차 진화하고 있다 : 매끄러운 벽면을 사용하거나 아방가르드적으로 설치하거나 파사드의 개방 등등. 동시에, 지하 도시의 문제-Bernard Utudjian 에 의해 1936년부터 이론화 된-  도 대두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공공 장소에서 인공조명이 없이는 불가능해보였다. 마치 메트로폴리탄의 복도처럼.

                빛의 신세기 ⓐ ; 빛 ; 기교의 변화 (2) 에서 계속.............

출처        : D'ARCHITECTE. 2011. 10 , Nº203

불한번역  : PLONGEUSE ( 잠수부 )
  1. 1. Wolfgang Schivelbusch 의La Nuit désencbanitée, Paris, Le promeneur, 1993.참조. [본문으로]
  2. Nicolas-Edme Rétif or Nicolas-Edme Restif (23 October 1734 – 2 February 1806), also known as Rétif de la Bretonne, was a French novelist. The term retifisme for shoe fetishism was named after him. [본문으로]
  3. 2. 밤 생활에 대해선, Simone Delattre 가 쓴, Les Douze Heures noires, La nuit à Paris au XIX siècle, Paris, Albin Michel, 2001 참조. [본문으로]
  4. (3) Dietrich, 'Neumann, Architecture of the Night. The Illuminated Building, Prestel, 2002. 참조 [본문으로]
  5. L'Union des artistes modernes, abrégé par le sigle UAM, est un mouvement d'artistes décorateurs et d'architectes fondé en France en 1929 par Robert Mallet-Stevens et ayant eu une activité jusqu'en 1958.Ce mouvement veut exploiter les nouveaux matériaux et les nouvelles techniques pour l'adapter à une vision moderne et revalorisée des arts décoratifs. [본문으로]
  6. Pierre Chareau, né le 4 août 1883 à Bordeaux et mort le 24 août 1950 à New York, est un architecte et designer français.Pierre Chareau fut avec Le Corbusier, en France, l'un des premiers architectes modernes utilisant de nouveaux matériaux, tels que le verre ou l'acier. Il était membre du Congrès international d'architecture moderne. [본문으로]
  7. Georges-Henri Pingusson (né à Clermont-Ferrand le 26 juillet 1894, mort à Paris le 22 octobre 1978) est un architecte, urbaniste, enseignant et ingénieur français.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