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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5.11 인터뷰 Nadav Lapid

인터뷰 Nadav Lapid

부당함의 아름다움

Nadav Lapid 인터뷰 

 

Nadav Lapid ; 

영화에 방해가 될 조금 평범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 걱정되네요. 이상해요, 이전 영화들 같은 경우는 잘 쓰여진 서문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담론이 이어지는 것 같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이번은 좀 다른 경우같아요.

 

아마 영화 Synonymes 과 관련한 첫 인터뷰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요. 아니면, 이미 완성된 영화에서 충분히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했거나요...

모르겠네요. 이 영화에 특별히 그런 점이 있었는가 싶은데, 활자나 분석을 믿는 편이니까요. 나는 토론하기를 거부하거나 싫어하는 유형의 감독은 아니예요. Bela Tarr 처럼 네, 아니요,로 일관하거나 하진 않죠...말하고, 읽고하는 걸 좋아해요. 평론에도 관심있고, 당신과 마주하고서 다른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베일에 가려져서 입다물고 침묵하는 유형은 아니예요...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우선 영화 Synonymes 에서 자전적인 이야기가 섞여있음을 짚고 넘어갈 까 하는데요.

이 영화는 자전적 요소가 아주 많아요. 시리아 국경에서 군복무를 했었죠. 3년 반동안요. 그 전이나 후에 큰 도시에 살았다하더라도, 그 누구더라도, 하루 아침에 산간 지역 한 가운데 떨어져서 살 수가 있는 거예요. 가장 이상한 것은, 일단 이런 시기가 끝나면, 바로 군복무를 마치는 당일 이후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입었던 군복, 총기류를 내려놓고,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 후에, 잡지사에 채용 면접을 보러 갔죠. Ari Folman 이 편집자로 있는 주간 잡지사였어요. 결국은 삼년반동안, 늘 같은 얼굴의 15명 남짓한 사람들과 부딪히며 딱히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다가, 마치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한 순간에 하루 종일 세계를 화두로 토론을 하는 지성들 사이에 놓이게 된 거죠. 그런 게 어색하지 않으면, 잘 맞으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는 듯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저의 경우엔, 철학 논문이나, 축구, 하지면 소설 집필 등에 관여했어요. 당시에 작가가 될 생각이었지, 감독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어요. 영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도 했구요. 비록 어머니가 영상편집자였음에도 불구하구요(Era Lapid 는 David Perlov와 Nadav Lapid 의 세 영화의 편집을 맡았으며, 지난 2018년 사망하였다. Nadav Lapid 는 카이에 뒤 시네마 747 호에 어머니에 대한 오마주를 실었다), 프레임이라던지, 신이라던지 그런 영화 용어에 대해 무지했죠. 이스라엘은 영화와 친한 나라는 아니예요. 편견이 있었죠 : 영화는 추상표현이나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라는...그래서 그런 식으로 지낸 거죠. 그런대로 살만 했고, -군복무 할때도 꽤 괜찮았어요, 그 나름대로. 그러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떠나야 겠다고 생각이 들었죠. 단지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심하다 싶을 만큼 급진적으로 끊어버려야 했어요. 어디로 가야하나 란 생각이 들었는데, 문득 유년 시절에 나폴레옹에 집착했던 게 떠올랐죠. 거의 3년간 그에 대해 파고들었는데, 점점 알아갈 수록, 괜히 영국에 대한 증오가 커져갔었죠. 결국 8살에 마담 투소 Madame Tussaud 관에 있는 넬슨 제독 밀랍인형을 공격하기까지 했었어요! 이런 열정이 프랑스로 향하게 했죠, 또 한편으로 출국 한달 전에 고다르 감독의 À bout de souffle 네 멋대로 해라 를 봤는데 ; 아마 처음으로 <<복잡한>>영화를 봤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굉장히 그게 맘에 들었죠...모든 화살표가 가능한 목적지로 프랑스를 가리키고 있었죠.

 

정착지가 파리였나요? 영화에서 주인공은 빈 아파트에 처음 발을 들이고, 거의 추위로 얼어죽을 뻔 하는 경험을 하는데요...

그건, 들은 이야기예요. 내 경우엔 부모님의 지인분들이 살고 있는 일반적인 아파트에 거주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죠. 이스라엘인이나 이스라엘과 관련한 모든 고리를 끊기로 결심했어요. 마치 나병환자를 인도에서 맞닥뜨려서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요. 헤브루어를 말하기를 거부했죠. 당시 프랑스어실력은 기초 수준이었고, 언어 학습에 나는 아주 강박적이었죠. Robert Micro 를 샀는데, 바로 동의어사전을 좋아하게 되었죠. 무엇보다 어휘력을 늘리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죠 : 단지 하나의 단어를 외우기 보다 7개나 8개의 단어를 외우는 거죠. 혼자일 때가 많았는데, 누군가랑 대화하기 시작하면, 하나의 단어에 수많은 동의어를 말하곤 했죠 : <<하늘이 푸르스름하다, 창백하다, 야위었다, 희미하다...>>나로서는 유일하게 이 나라에 섞일 수 있는, 언어에 섞일 수 있는 방법이었죠. 헤브루어를 끊고 나서, 더 이상 말이 없어졌죠.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죠. 프랑스 단어는 프랑스 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다른 나라에서 나오는 출구이기도 했죠. 파리에서 생활은 꽤 우울했어요. 돈도 없었고, 괴상한 일도 많이 했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형편없는 집에 살았죠. 

 

Yoav 는 영화에서 아주 부유한 부르주아 두명과 만나게 되는데요. 

내 경우에는 나중에서야 만나게 되었는데요,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죠. 프랑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환상을 구현하고 있는 친구였죠. 아버지는 작가였고, 어머니는 편집자였기 때문에, 텔 아비브에서 인텔리 부르주아 계층에서 자란 셈이죠. 반면에 그 친구에게서 어떤 야생의 부분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아무튼 그 친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로인해 영화를 사고의 도구로 생각하게큼 되었어요. 영화 용어들도 가르쳐주었구요 : 컷, 프레임, 트레블링, 등등. 그처럼 되고 싶었지만, 동시에 보나파르트에 빠져있던 시기를 생각하면, 이방인이 되고도 싶었던 거죠. 나라를 점령하게 된 코르시카인으로요.

 

그런 시도가 이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데요.

맞아요, 하지만, 어떤 시도란다고 하면, 단어와 행위 사이에 의미 관계성에서 예술적 측면을 찾으려는 시도는 있죠. Yoav 처럼, 말에서 시작해서 행동으로 옮기거나, 그의 이야기를 연극화 해야한다는 거나. 어떤 측면에서 그가 예술가가 되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일화들이나 단어들을 웅얼거리지만, 정작 그는 무엇이 그에 속하는지, 그것들로 인해 작가가 될 수 있는 지에 의식이 없죠. 그래서 그가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Yoav 가 만나는 파리지앵은 반면 무기력한, 혹은 허무주의에 빠져있는 유형으로 비취는데요. 상류층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비판의식이 보입니다. 감독님이 겪었던 상황과는 다른데, 어떤 새로운 점을 추가한 건가요.

우선 내 경험에선, 이런 류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죠. 그다음엔 마치 사랑이 식는 것처럼, 실망과 환멸을 하게 되죠. 모든 단어들, 기한들이 지나고 나면 남는 정수같은 겁니다. 거기엔  마치 흡혈귀같이 타인에게 빌붙어 기자분이 언급한 것처럼 본인의 허무함이나 무기력을 채우려는 면이 있죠. 관객이 두 가지 측면을 다 보도록 원했죠. 프랑스와 이스라엘간에 관계, 혹은 프랑스와 타국가 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법이기도 했죠. 프랑스와 이스라엘 간의 공동 제작 합의를 하기 위해 각국 제작자가 모이던 날이 생각나네요. 한 프랑스 제작자가 이야기하더군요 : <<당신은 이스라엘인이라, 운이 좋은 거예요. 거기에 전쟁도 있고, 사상자도 있고, 이야기할 게 투성이잖아요...>>뭐 프랑스로부터 받은 혜택이라던지 지지를 잊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 감독으로써 재단에 상처나, 부상을 가져와서 바치는 기분이 들죠. 아니면 춤을 춰야한다고 하는 상황에서 춤을 추거나, 당신의 상황이 심각한 정도에 따라서 돈을 지급받는 그런 기분이요. 최악이던 최선이던, 프랑스는 태양이죠. 하지만 차가운 태양이죠. 그 주변을 돌며 촬영하지만, 누구를 찍는지, 왜 찍는 지 자문하죠. 프랑스 영화는 로마제국 같아요. 외국인 감독으로써, 야만인에 불과하죠. 그래서, 프랑스 감독은 제국의 시인같은 존재죠. 프랑스는 내 인생에 차지하는 부분이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침체되어 있는 내 삶을 구제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닫힌 문앞에 직면하게 하기도 했고,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느끼게 했죠. 격렬한 관계들이었지만, 그런 충돌에서 효과가 있는 치료제는 없죠.

 

충돌에 대해서 변증법적으로 말할 수 있을 텐데요. Yoav 처럼 : 이스라엘을 피해왔지만, 프랑스를 향해 머리를 부딪히는 데요. 그는 한 장소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듯 하는데요. 마치 그가 처한 장소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거죠. 늘 수위에 머물러있죠. 그래서 영화가 계속 움직이는 인상인데요,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이요. 

이 인물은 떠도는 상흔같은 겁니다.  벌어진 상처가 머무르지 않는 한, 계속 머물러 있을 순 없죠 : 그게 이 영화에선 집인 거죠. 상처는 몸과 단어 사이에, 몸은 과거에 머물러있고, 단어는 미래에 머물러 있죠.  그래서 단어들 자체가 변하는 겁니다. 에밀이나 카롤린과 같은 프랑스어를 말하는 것도 아니구요.

 

 

가끔 너무 강한 어조로 말해서, 에밀이나 카롤린처럼 안정적이거나 정확한 문장이 아닌데요. 새로운 나라만큼이나 새로운 언어로 사는 것은 힘들죠. civil center 에서 La Marseillaise 를 부르는 장면에서 고의적으로 크게 부르는 데요.

그건 Yoav 가 Rouget de Lisle 이 La Marseillaise 를 썼을 때와 같은 정신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죠. 흥분되고 고양된 정신이 그런 노래를 나오게 한거죠.  이 수업에서 오직 그 만이 <<오염된 핏물이 밭고랑에 스며든다>>고 말하는 외국인이죠. 프랑스의 핏줄을 더럽히는 게 외국의 정복자, 혹은 패배자인가? Yoav 는 보나파르트와 Paul Pogba 의 엽서를 사죠. 둘다 프랑스인이지만, 외국인이기도 하죠. 결국, 나도 확실친 않지만, 상징을 하고 싶진 않았는데, Yoav 가 가졌던 야심이기도 하죠. 마치 그가 초반에 했던 말처럼요 : <<나는 페르-라쉐즈 묘지에 묻힐 거야>>

 

왜 이 civil center 에 유머러스한 코드를 넣으셨나요, 교사의 캐릭터도 그렇구요.

그건 경험에서 나온겁니다. 교사에게 일종의 존경같은 마음이 들었었죠. 수업 중에 문제없이 이렇게 말하곤 했죠 : <<종교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일종의 거만함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프랑스에 대해 존경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영웅심 같은...이스라엘에서는 아무도 감히 그렇게 말을 할 수 없죠. 나도 그렇구요. 레아 드뤼커 Léa Drucker 에게 열번넘게 테이크를 갔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도 인정하는 부분이죠.

 

 

바로 그런 점때문에 장면이 유머러스해지는 거네요.

맞아요. 굉장하죠.

 

Tom Mercier 에 대해 말하자면, 아주 눈에 띄는 신체를 먼저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요. 창백한 부르주아들이 살고 있는 무기력한 도시에 그의 근육질 몸이 더 두드러지는 데요...

그의 몸은 그를 폭력적이게 혹은 약하게 하죠. 그의 몸은 또한 그의 과거입니다. 그는 이 몸에 형벌을 가하도록 하죠 :ㅈ 추위에 얼리고, 배고픔에 시달리게 하고. 매춘하도록 하죠. 더욱 말을 배울수록, 더욱 몸을 고통스럽게 하죠. 하지만 몸은 지탱하죠. 마지막 콘서트 장면에서, 그는 아직 팬티바람에 야생에 가깝죠. 이전 영화에서 배우가 쉽게 화해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지 자문하곤 했어요.  감독의 시각을 흔들어놓도록 하는 거요. 톰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영화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었어요. 내 인생을 통털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놀라운 사람입니다. 감독의 테두리도, 배우의 테두리도 벗어나는 인물이죠. 제 3의 길을 간다랄까요. 그가 말하는 방식을 보면, 이상하지 않나요? 내가 디렉션한 것도 아닌데요. 나는 그냥 프레임을 제공하고, 몇가지 디렉팅을 주었을 뿐이지요. 

 

그를 어떻게 찾아내셨습니까?

캐스팅이요. 그는 연기학교 2년차였고,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죠. 캐스팅 디렉터와 함께, 특별한 인물, 무언가를 말한다는 의식이 없는 인물을 원했어요. 왜 매혹시키는지 모르는 채 매료시키는 사람을요. 그의 연기를 보면서, 영화에서 맡은 바보다 나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구성하는 장면이요. 내가 본 것중에 가장 디테일에 집착하는 사람이었고,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었죠. 그는 시나리오를 만오천번도 넘게 읽었어요, 끊임없이 노트를 했죠. 한편 그는 시나리오와는 반대로 연기를 하기도 했어요. 그는 내가 겪었던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야했죠 : 프랑스에 와서, 아무도 모르고, 프랑스어는 못하지만, 단어사전은 읽구요, 그저 살아있는 거죠. 여기에서. 마지막에 그가 한말은 : <<모든 것이 결국은 닫힌 문으로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라고 말했어요. 그는 나보다 더 깊게 영화를 이해하고 있었죠. 그의 자유로움이 보다 이해를 더 쉽게 하도록 한 겁니다. 톰의 몸짓은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나은 해석이예요. 프랑스 배우들과 마주해서 정말 큰 도전이었죠. 그들은 위협받는 느낌마저 받았어요. 그가 연기하는 방식이나, 동선이 프랑스 배우들과 너무 달랐거든요. 대화에 여지를 두지 않는 점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더 나았어요.

 

Desplechin 에 의해 발굴된 배우 Quentin Dolmaire 와 Garrel 에 발굴된 Louise Chevillotte 를 캐스팅했는데요, 좋아하는 영화에 따른 겁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감독에 따른 겁니까? 

같은 얼굴에 같은 몸이지만 다르게 움직이죠. 다른 춤사위에, 다른 수사학에 속해있어요. 마치 La Marseillaise 를 다른 톤으로 부르는 것처럼요. 두 배우 모두 좋아하는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죠. 이런 류의 영화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완전히 반대의 것을 해보고 싶다는 겁니다.

 

<<완전히 반대의 것>>이란 어떤 의미이죠? 좋아하는 감독인 Arnaud Desplechin이나 Philippe Garrel 과 대화할 때, 뭐라고 하실 건지요?

내 의견으로는 그들의 영화는 매우 다양한 층들이 겹쳐져있어요...나는 그것을 벗겨버리고 싶은 겁니다. 날것의 뭔가를 끄집어내j죠. 아마 내 안의 야만의 습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Trois Souvenirs de ma jeunesse, 서 보면 작은 몸짓에더 뛰어난 솜씨가 숨어있는 게 보이죠. 개인적으로는 이런 거대한 표면보다 작은 장식적 장치들에 덜 이끌리는 편이죠. 마치 폴록의 그림처럼요. 그 위를 쓸어버리고 싶어지죠. 영화작가로서 프랑스에서 보다 편안한 건 사실이예요. 이스라엘보다 확실히요. 길거리의 소음을 창조해낸 이 나라에서, 보다 내가 내는 소리나 야생의 외침이 주의깊게 들리거든요. 굉장한 영광이죠. 하지만 그 영광에 의해 삼켜지기보다, 그 영광의 행위를 해야하는 거죠.

 

영화 구상을 어떻게 하는 편인가요?

씬 마다 씁니다. 내러이션은 선형으로 써가죠: Yoav 가 파리에 도착해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그리고나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롭게 삶을 이어나가죠. 시나리오에 쓰지 않은 장면도 있는 데, 파리 길을 걷는 장면이죠. 프리프로덕션을 위해 파리에 왔을 때, 처음 도착했을 때, 어떻게 생활했나를 다시금 돌이켜보았죠. 고개를 들지않고 내내 길만 걷던 적이 있었죠. 그때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요. 촬영 크랭크인하기 전에 이 장면을 따로 찍어서 나중에 편집 때 삽입했어요. 배우랑 카메라감독과 나, 혹은 그냥 배우와 나 단독으로 촬영했죠.

 

다리 앞에서 두 인물이 결혼하기로 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카메라영상이 갑자기 바뀌면서 그들의 삶이 변하는 게 보이는데요.

맞아요, 두번째 카메라는 보다 원시적이죠. 보다 거친 질감에 덜 다듬어진 인상이죠. 이번에는 영화적 언어를 끝까지 밀어붙이려고 했어요. 조금 상투적인 말이긴 하지만 정말 그랬어요. 예를 들면, 클럽에서 춤을 추는 장면에서 내부 장면 색보정을 하나하나 손보았죠 : 점점, 장면이 붉게 변했고, 마지막에 급기야 지옥처럼 보였죠. 그렇게 변한 장면이 많아요. 장면마다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부족함을 느꼈고, 장면 내부에서 무언가 진동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이 영화는 떨리는 영혼, 떨리는 시선을 담는 영화니까요.

 

맑음과 흐림의 조율은 마치 Luise Chevillotte 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에서도 나타나는 데요.

정확히 맞아요. 음향도 마찬가지이죠. 산택신에서, Yoav 는 고개를 숙이고 파리를 보지 않도록 하죠 : 그가 보지 않는 다면, 무엇을 듣고 있나? 음향편집자에게 말했더니 : 우리가 보는 방향으로 마이크를 향하기 때문에, 보는 것을 듣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늘을 보면, 길거리를 들을 수 없고, 땅을 보면 발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식이죠. 나로선 이부분에 작업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카메라가 바뀌는 것 없이 인물이 감정상황이 바뀌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거든요.

 

미장신에서 상당히 고민한 부분이 역력한데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예요. 진실인 듯 꾸미는 것을 조롱하는 듯- 두 남자가 다리 위를 걷을 때-한 부분이 굉장히 스크린에 강하게 나타나요: 스크린에 따라 선택을 달리 한 것같은데요.

나에게 그게 바로 영화예요. 카메라가 있고, 마이크가 있고, 세상이 있고 배우가 있죠. 그리고 그것들을 다 조합하지 않는다면, 달리 뭘 하겠어요? 마치 기타를 쓰지 않는 록그룹같은 거잖아요! 이 Synonymes 을 준비하는 기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어요. 너무나 많은 아이디어들이 떠올라서 다 구현하지 못할 까 겁이 났죠. 슈퍼마켓에 갔다가도 갑자기 서너개의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돌아오곤 했죠. 마치 아이디어의 사슬이 끊이지 않는 인생이었죠. <<미장센 mise en scène >>은 내가 프랑스에서 배운 단어 중에 가장 주요한 단어입니다. 헤브루어로는 그러한 <<미장센 mise en scène >>단어가 없어요. 내 여정에서 건진 보물이죠.

 

편집에서 보면, 평범함, 일상적인 것에 저항을 하는 듯 해보여요. 일반적 영화공식 champ-contrechamp 이 아닌, 행위나 사건으로만 나뉘는 게 아닌데요. 예를 들어, Yoav 가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은 평범해보이지만, 갑자기 짠! 하고 장면의 마지막에서는 머리를 받아 치면서 문을 여는 걸로 이어지는 식으로요.

네, 하지만 진실에 바탕해서 쓴 것들이예요. 모두 이 영화의 진실에서 나오는 거죠. 편집은 아주 내밀하고 감정적인 부분이예요. 순간에 정수를 포착하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유일성을 흐리게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피하려고 했죠. 평범한 장면, 일상적 프레임, 내겐 흠이자 장애물이였어요. 다시 말하자면, 순간에 내밀함을 찾는 데 실패했다는 겁니다...기교의 문제가 아니예요, 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죠. 어떤 걸 말하고 싶었냐면, 나 스스로 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내가 뭔가를 보는 순간, 처한 상황, 가지고 있는 것, 느끼는 것 모두가 시선으로 나타나는 거죠. 편집에서 이런 시선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었고 <<지금 보는 대로 그런 거야>>라는 식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깊이 느낄 수 있는 데요, 관객으로써 아주 흥분되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오토바이씬에서요, 누가 운전자인지 알 수 없는데 누구인가요? 누가 노래하는지? 갑자기 등에 타블렛 피씨를 들잖아요! 

촬영하면서 재미있었던 점이기도 하죠. 내가 실제로 살았던 장소를 영화를 통해 재조명하는 거 어찌나 재미있고, 축제이고, 카니발이죠. 영화의 한 장면이, 손에 쥐어진 요소들을 이용해서 춤을 추도록 할 수 있는 겁니다 : 카메라, 신체, 목소리...오토바이신을 보면 재밌고 아름답죠: Henri-IV 길가 한 가운데 군인이 Ipad를 들고있는 장면이요...그리고 갑자기 프레임 안에 튀어나오는 거죠. 큰 소리로 외치는 겁니다 : <<프레임 안에 튀어나오는 이미지>>, 그리고 자르는 거죠. 가끔 재미있는 아이디어라도 순간 자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상과 음향을 균열시키기도 하는데요. 편집하는 도중에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겁니까? 

아니요. 그보다 이전이죠. 영화나 예술이 삶보다 덜 자유롭다고 생각해요. 영화에 단지 삶의 유연함을 적용하기만 하면 되는되요. 예를 들어, 우리가 이야기하는 여기를 보면, 소음이 있잖아요...

 

참기 힘든 소음인데, 고다르Jean Luc Godard 밖에 감히 그런 소음을 사용한 감독이 없잖아요?

맞아요! 우리가 영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한 쪽에서 셀카를 찍는 여자가 있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는 사람도 있고...그게 삶이죠. 절대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순간이 없잖아요. 영화에서밖에 고립되는 순간이 있죠. 왜냐하면 무언가를 말하고, 그것을 듣도록 해야되니까요. 가끔 나는 영화가 쑥덕이는 교실에 들어와 조용하게 하고 강의를 시작하는 재미없는 교수같단 생각을 해요...

 

 

Yoav 와 Émile 이 빵집에서 대화를 하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두 사람의 대화도 들리지만, 엑스트라가 케잌을 사는 소리, 다른 엑스트라들ㄹ의 소리 등이 같이 들리잖아요. 보통 영화에서는 주의가 분산될 우려 때문에, 주변을 조용하게 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아마 지금 언급한 부분을 우리가 촬영이나 편집을 할 때 얼마나 의논했는 지 상상도 못할 겁니다. 3,4명의 엑스트라로 신을 꾸밀 수도 있겠죠. 주인공들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충분히 빵집에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엑스트라들이 제 역활을 하도록 말이죠. 어시스턴트가 장면에 무기력함을 부여하고 싶었는지, 엑스트라들에게 주인공들을 가리면서 움직일 수 있는 지 요구했죠. 이스라엘 엑스트라들은 카메라 앞에 드러나기를 좋아하니까요(웃음). 하지만 프랑스 엑스트라들은 동선에 보다 신중하며 뒷편에 머무르기를 원했어요, 정작 우리는 그들이 더 존재감을 드러내도록 원했는데 말이죠. 그게 엑스트라들의 역활이었는데도! 이 장면에서 그들이 숨도록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나서 믹싱을 할 때도 엄청나게 토론을 했죠. 음향작업자는 대화장면이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대화소리 뿐 아니라 주변의 소음도 충분히 들리길 원했어요. 그게 진실이고, 아름답고, 재미있고, 슬프다고 생각했죠. Yoav 가 이스라엘의 유대인 이야기를 할 때나 아버지와 마주친 후 이야기 하는 순간에요, 그 빵집에 손님들이 뺑 오 쇼콜라를 사려고 들락날락 하며 어수선한 가운데 말이죠. 왜냐하면 그게 삶 자체이니까요. 항상 엑스트라들에게 말해요 : 이게 당신의 영화이다. 삶을 묘사하는 거다. 타인의 삶에 임시로 연기하며, 지나치는 거다. 프레임 안에 모든 삶을 한번에 담으려 하는 순간마다, 일종의 축제같았어요. 비록 그게 기술적인 몇가지를 무시하는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아주 시적인 장면도 보이는데요, 예를 들면 Yoav 와 Émile 이 함께 음악을 듣는 장면이요. 그러다가 갑자기 Caroline 이 나타나고, 불을 키면서 관계에 끼어드는 데요...

애정신이기 때문에, 아주 은밀한 거죠. 그들이 듣는 음악에 대해 관객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죠. 그래서 Caroline 이 이 둘의 관계를 깨면서, 그 방편이 조명이 되는 거죠. 이후엔 마치 오페라 같이 되는거죠, 음악과 함께요. 한 여인이 보면 안 될 장면을 목격하고,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나고 등등이요. 그런 순간을 만드는 게 좋은데, 특히 설치물같이요. 마치 <<우리 사랑에 빠졌어요>>란 설치물같이 두 청년이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서로 바라보는. 그러다가 카롤린이 오면서,  방해자가 나타난 셈이 되고, 극은 <<배신당한 여인>>, 혹은 <<질투>>, <<내가 여기 있다>>이런 식으로 되는 거죠. 클럽신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데, 회전장치처럼요, 음악과 같이요. Elgar 의 콘체르토를 듣지만, 카롤린은 보호구처럼 조명으로 유희를 하는 거죠. 

 

한편 리듬이나 음향을 구축한 신,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군인이 포복훈련을 하다가 프랑스 노래를 부르는 장면인에요.

음악과 리듬은 형태와 비형태를 동시에 주죠. 말하자면 정치-문화적인 코드로 장면을 추리할 수 있겠죠. 반-전쟁 같이 너무나 뚜렷한 아젠다로 비춰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리듬 자체로 보면 아름답다고 보는 거죠. 부당함에 아름다움을 부여해야 해요. 틀린 것이 또한 아름다울 수 있는 거죠. 거기에서 축제가 시작되는 거구요.

 

틀린 것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극 중에 누가 생각나시나요?

예를 들면, 테이블 위에서 싸우는 두명의 남자요. 웃기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둘 사이에도 어떤 카리스마가 있는 아름다움이 있죠. 마지막 씬에서도 생각한 부분인데요. Yoav 가 음악가들 사이에서 연설조로 말할 때요, <<당신은 당신이 저항하는 것들을 위해 싸울 모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나는 그렇다,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고 들을 수 있죠. 이 작품에 내적으로 호전적인 행위를 추구했어요.

 

Le Policier (Cahiers n 676) 에 대해 인터뷰 할 당시가 떠오르는데요 : 군 복무 당시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돌로 채운 배낭을 메고 해변을 달리면서 군대를 저주했다고 했는데요. 당시 감독님이 저항하는 것에 매료된 것 같아요...

영화는 부정한 것, 불의에 편을 든다는 게 가능하기도 해요, 오히려 강조하는 것도 가능하죠. 내게 있어 불편한 영화는 옳은 소리를 하는 영화예요. 딱히 할말도 없으면서. 합리적인 것을 찍을 수록, 대화의 여지는 적어지죠. 부당한 것을 옹호하는 편이라면, 보다 흥미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거죠. 그게 옳다는 말은 아니예요. 합리적 이성의 명목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진실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나쁜 생각이던 옮은 생각이던, 나쁜 이유든 좋은 이유든 하나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있는 그대로 사용하면 되는 겁니다. <<잘못된 것>>을 재료로 사용하되, 좋은 연출 방법으로, 다른 재료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면 원재료를 살리면서 무언가 창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변증법적인데 이상적인 합은 아니죠. 일종의 방법, 시도, 존재의 본질이나 진실을 나타나게 하는 구실이 되는 거죠.

 

영화를 통털어, Yoav 는 이렇게 말합니다 : <<군 복무 할 때 좋았다>> 어떤 영화에서도, 인물이 군대에 있을 당시를 좋게 말한 기억이 없는데요.

그래요. 마치 악몽이었다라고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요. 마치 모두가 행복했다고 말하는 거와 똑같아요. 하지만 그는 타인에게 이렇게 질문하죠: <<내가 군 복무 할 때 좋았다고 말하는 데도, 아직도 여전히 나와 같이 있기 바랍니까?>>

 

논리를 보자면, 어떻게 반대-반대의 구성으로 의미가 지나치게 중립화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가요, <<세상이 각자의 이유가 있는 법>>처럼요?

논리에서 핵심이 흐려지거나, 타협을 하는 경우가 골치아픈 경우인데, <<각각의 이유가 있다>>와 <<각자가 옳다>>는 구분이 되어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내 경우에는 <<각자가 옳다>>주의예요. 반대와 대립을 자제하는 시스템을 거부하는 겁니다. 이런 거부는 예를 들면,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자와 가장 추한 노래를 하는 자 가운데 선택을 할 위치에서 타협으로 끝날 위험은 없는 거죠. 사람들이 말할 때 꼭 상대방을 지목하면서 하진 않아요, 그저 본인에 대해 주장할 뿐이죠. 내세우죠. 대화를 하면서 저어하는 부분이 그겁니다. 타협과 순응이요.

 

극 속에서는 Yoav가 그런 타협을 거부하는데요, 안정적이고, 부동의 흔들림없는 부르주아지들이요. 그들이 잠자코 있는 반면에, Yoav 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객은 그의 편에 선다고 볼 수 있지않나요.

그들은 새로운 것을 향해 떠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들이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떠날 수 있어요. 아마 그들은 충분히 그런 상황이 아니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떠나기를 강요하기 힘들어요.

 

한편,  Émile 을 보면 저주받은 젊은 작가란 생각이 드는데요. 절망스러운 모습 아닌가요.

하지만 그렇다고 우스꽝스럽진 않죠. 상황이 위급하게 심각하다고 느껴질 만한 절망인가 혹은 구조요청을 할 만큼의 절망인가? 여러 종류의 절망을 보아왔죠. 조용하지만 강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싶지만, 주요한 무언가를 조롱하는 셈이죠. 그들의 믿음에 대해 농담을 하는 게 아니예요. 그들을 향한 분노나 전투적인 증오가 느껴지지만, 패러디가 아니예요. 어리석은 무능함으로 타락해가는 것 처럼 보이는 부르주아들의 세계는 실상 훨씬 단순할 겁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모두가 알고 있죠. 동시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영화나 작품에 당신의 삶을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면서 : <<실상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해, 그래서 말을 할 수 없는 거야>>라고. 그건 위험한 생각이예요. 무기력한 밤 Nuit d'inertie 란 제목의 책을 쓰는 젊은 부르주아작가를 그리면서, 42 페이지에 막혀서 더이상 써내려가지 못하는,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힐책을 받는, <<니가 빅토르 위고 Victor Hugo 의 절반, 아니 반의 반이라도 따라갈 것 같으냐?>>것처럼, 개인적으로는 그게 농담에 지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실상 그런 류의 고통이 있는 것도 사실이예요. 공허와 허무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슬픔이고, 충분히 좌절할 만하지 않을 만큼의 좌절감이죠.

 

 

 

글 ; STÉPHANE Delorme & Jean-Philippe  TESSÉ 

출처; page10-16, CAHIERS DU CINEMA, Mars 2019 #753

번역 ; plongeuse 잠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