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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10 Jacque Lacan ⓑ

Jacque Lacan ⓑ


Jacque Lacan ⓐ 에 이어...


《자서전은 항상 자기소설이다》라고 자크-알랭 밀러 Jacques-Alain Miller 는 말한다. 그리고 Aragon 에게 라캉의 인용구를 쓰며 이렇게 쓴다,《나는 타인에 대해 잘 말할 수 있다, 그게 바로 내 이야기니까.》
  물론 사람들은 라캉의 이야기, 그의 삶, 그의 저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많은 성공적인 사례를 남겼다. 불필요하면서도 결함이 있는, 가장 좋은 것 다음에 가장 나쁜 것이 이어지는, 그리고 라캉의 작품으로 인도하는 사례들말이다. 묘사하기에는 너무나 불규칙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라캉의 이야기에서, 현재 출간된 도서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저자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그와 함께 이야기해야되는 것이다 : 정신분석학자의 이야기, 역사학자의 삶, 그리고 철학자의 삶.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또한 art press 또한 항상 라캉과 함께 하였었다. 정신분석학적 방법이나 역사학, 혹은 철학적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만의 방법이 있었다. 새로운 저서인, Art press에서  카트린느 앰까지 D'art press à Catherine M. 에서 카트린느 밀레 Catherine Millet 는 단편에서 구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의 회화작품인 세상의 기원 Origine du monde이 오랫동안 모습을 감추었다가 환상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앙드레 마송 André Masson  의 작품 이면에 라캉이 감추고 있는 것도 말한다. 《Obscénité》의 1982년 커버를 장식한 이 회화작품은 원작임을 증명하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다. 장-폴 파지에 Jean-Paul Fargier 가 찍은 Le Trou de la Vierge 에서 언급되었던 이 작품의 가치는 필립 솔레 Philippe Sollers가 자크 앙릭 Jacques Henric과 나눈 담화에서도 언급이 되었다. 그의 소설 중 하나인 영원한 흠모 Adorations perpétuelles 에서 쿠르베의 그림을 다룬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필립 뮈레 Philippe Muray,카트린느 밀레 Catherine Millet , 자크 앙릭 Jacques Henric 은 1991년 오낭 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에서 발견하였다. 하지만 작품은 표면에 덧칠을 한 듯보였고, 이후에 일본의 개인소장가가 구입하면서 프랑스 국경을 넘게 되었다. 그 이후에 오르세미술관에서 다시 그 작품을 볼 수 있었다.
 하나의 일화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자크 알랭 밀레 Jacques Alain Miller 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는 라캉이 카페에 점원을 부르던 방식이나 도로에서 적색등에 차를 멈추던 방식을 기억할 뿐이다. 라캉과 함께했던 일화들이다. 이런 10여개의 일화들보다 누가 더 그 이상을 말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 이유를 설명할 것인가- 세속적이며, 너무나 명확한 : 비판적이며 소설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항상 오차없이 지지와 호기심으로 표현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분석적 면에서, 라캉이 1977년 생전에 했던 방식대로 표현되었다. 10여개의 논문들은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필립 라카데 Philippe Lacadée , 샤를 멜만 Charles Melhman , 카트린느 밀로 Catherine Millot 는 물론이고 줄리아 크리스테바 Julia Kristeva 도 마찬가지이다. 


벽을 너머 저편에

 

 


 Art press 는 항상 라캉과 성장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변화의 명분이 없다. 나는 어떻게 세 개의 라캉의 문장이 항상 다른《훌륭한 사도》의 완벽한 작품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지 설명하길 바래왔다. 그리고 해냈다! 로트레아몽 Lautréamont 을 읽은 것처럼. 확실한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직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잘 설득할 것인가, 변하는 것을 잘 볼 것인가? 진실은 당장 손안에 쥘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라캉을 놓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를 읽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장시간의 호흡이 필요하며 고심의 시기를 거쳐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자크-알랭 밀레를 비난한다. 그의 저서 Séminaire 의 리듬이 처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는 정신분석학자들이 자신의 노트, 이전의 리뷰나 프린트로로 구성된 텍스트를 좋아하며 거기에 열중하는 것을 싫어한다. 세속적이지만 의지가 충만한 독자들은- Vie de Lacan 에 대해 이러한 《명확한 의견》을 표현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지나갔으며 그 리듬을 좇기에 너무 어려웠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뒤처지곤 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리고 두세번이나 Écrit 를 이해하기 위해 읽고, éminaire 만큼 두꺼운 Sinthome 을 조이스를 좋아해서 그의 텍스트를 읽은 것처럼, 두세번 읽었던 적이 있다. 율리시즈 Ulysse 의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보다 평범한 방법으로, 나는 라캉 도서를 여러권 수집하면서 도달하지 못할 끝을 향해 나아갔다.

 그에게 완전히 몰입하면서도 인생은 충분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라캉이 전하는 기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변명이 되지는 못했다. 물론, 라캉과 그의 행보를 좇다가 까다로운 암시들(의 19세기 버전에서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Frege, Peirce, Cantor 등 이래로 수많은 철학자들 )에 길을 잃었다. 마치 미궁의 막다른 벽 앞에서 조금 실망한 듯 하다. 최대한으로 모든 것이 밝혀진 것 처럼 말이다. 바로 이 것처럼 : 《여기에 성적인 이야기는 없다》라는 문구에서 각각 문장의 뜻을 다르게 생각하듯이, 나로서는 프루스트의 유명한 구절을 기대하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가지려 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다.  
 

 라캉은 진실이란 도중에 말해질 수 없다는 것만을 반복하곤 했다. 만약 원한다면 : 도중에 속으로는 말할 수 있따> 이러한 공식으로 두 가지 시도와 두 가지 대조적 신화가 있다 : 투명함(헛된 세속화)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공허한 난해함)이다. 모든 것은 표현된 형식과 멀지 않다. 진실이 그런 것처럼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모든 것에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 -클로드 밀네의 최근 도서의 제목이 여운을 남기는 것처럼, 사고의 과정에서 항상 형식이 분명하도록 하였다는 점을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빛의 철학에서 첫 번째 할일은,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암흑 속에서 아주 미미한 빛을 보면 알 수 있다.

 라캉의 두 권의 저서가 현재 출판되었다- 그가 40년간 고수해왔던 원칙들을 말하면서- . 새로운 독자들은 이제 새롭게 그 이해냐 이해불가능이냐의 모든 사고의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내가 구성했던 것, 나는 진실과도 같이 전혀 구성할 수 없다. 당신의 운명이라면, 차례대로, 아니면 보다 정확하게, 어떻게 흘러가는 지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흔들리는지, 사람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흔들리는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모든 오류들을 준비하고 있는 듯한 불안정한 점을 보는 것이다.》아니면 이런 것이다 :《의미가 없다, 하지만 보통의 것도 아니다. 아마도 같은 의미를 공유하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한편 그런 의미에서, 그 과정이 전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했기 때문에, 그것은 치료의 일환으로, 건전하고 이로운 분비이다.》 내가 보기에, 이 것보다 더 명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보다 더 도리에 맞는 교육일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무르곤 했다 :《간접적인 소통》 

《나는 벽보고 말한다》,라캉은 말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벽 중에서, 생-안느 병원의 것일 게다. 옛 교회였던 그곳의 오래된 복도일 것이다. 그 곳에서《울리는 것이다》. 그리고 벽을 보면, -레오나르도가 보았던 성모마리아같은 흔적- 5월의 슬로건도 보일 것이다. 이미지와 단어들 모두. 부질없는 것일까?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그래도 사람들이 벽에 아무 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 되었던, 그리고 누가 한 것이든, 적혀있는 것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벽 너머로 무언가 있다...벽 너머에는, 우리가 알기로는, 현실은 단지 불가능을 상징한다. 벽 너머의 것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렵사리 더 잘 말할 수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출처        :   ARTPRESS N"384. 2011.12
기사
불한번역  :   PLONGEUSE (zamsoobu) 작성일 : 2012.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