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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30 4편의 프랑스 영화_(2)

4편의 프랑스 영화_(2)


비평가주간과 감독주간 에 두각을 나타낸 프랑스 영화가 있다. 이 젊은 감독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본지에 소개하고자 한다.


4편의 프랑스 영화

프랑스 제작사는 칸느를 북쪽지방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칸느 영화제 채택된 작품들이 어떻게 비춰지는가? 어떤 영화도 공식부문에 선정되지 못했다. 하지만 감독주간에 3인의 감독(남쪽을 지나(원제; après de sud) 의 장-자크 조프레, 침묵의 끝(원제; La Fin du silence )의 롤랑 에쟈드, 도시에서 (원제; En Ville)의 발레리 므레장 과 베르트랑 쉐이퍼)과 비평가주간에 두명의 감독(17명의 소녀(원제 ; 17 filles ) 의 쿨랭 자매 와 마리 리틀 프린세스(원제 ; My Little Princess)의 에바 이오네스코)가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인 프레데릭 보에는 이번 해 프랑스 영화의 질적인 향상을 이야기한다. 영화제때문만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소설작가, 예술가, 단편영화감독이며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발레리 므레젠의 영화를 보며 이 프랑스 영화들이 어떤 여정을 가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겠다.

《(1)에 이어》

침묵의 끝 La FIn du silence
롤랑 에쟈드Roland Edzard


롤랑 에쟈드는 2005년 13분 가량의 짧은 단편인 평야( La Plaine )로 주목을 나타냈다. 조형적인면과 드라마가 모두 호평을 받았다. 그러부터 6년 뒤에, 우리는 첫 장편으로 그의 진가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한 가정의 이야기를 보주Vosges지방의 숲 속의 어두운 곳으로 변환시킨 영화다. 바이러스같이 폭력, 범죄, 돌발상황들이 퍼지는 상황에서 롤랑 에쟈드는 이런 무거운 주제를 조율하며 잘 드러나지 않는 소재들을 발굴한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의 독특함은 가치의 추상화와 더불어 그가 주창하듯이 길 위에서 다양한 속박에 맞서는 능력과 인내심이다. 그는 높거나 낮은 곳에서 끝까지 그만의 영화의《침묵의 끝》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 어떻게 연출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18세에, 화가가 되기 위해 작업대, 테레핀, 캔버스를 들고 스트라스부르 아르-데코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학교에서 영상을 발견했죠. 처음엔 실험영화를 찍다가 연출과 이야기야 빠졌죠. 프레노이 학교L'école du Fresnoy은 그 다음에 선택한 겁니다. 창작의 산실로 여겼어요. 2005년에, 브뤼노 뒤몽Bruno Dumont은 내 프로젝트에《초청 감독》으로 왔습니다. 그는 29그루의 야자수TwentyNine Palms 의 러쉬필름을 보여줘죠. 그리고 플랑드르Flandres 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난 독특한 그의 방법을 따라 캐스팅하고 지원했죠. 예를 들어 법정이 열리는 날, 건달을 찾기 위해 우릴 보냈어요. 난 브뤼노 뒤몽에게 스타일적 영향을 받았다고 하진 않아요. 그보다 영화의 이야기가 그렇죠.

● 어떻게 장편을 찍게 되었나요?
 내 단편인 ,La Paline은 프레노이에서 찍고 2005년 영화재단에서 상영된 겁니다. 거기서 필립 아브릴Philippe Avril을 만났죠. 그는 비묵티 자야순드라(15인의 감독에 버섯Chatrak 으로 선정됨.ndlr.)의 버려진 땅La Terre abandonnée 로 받은 황금카메라상을 들고왔었죠. 2006년 말에, 카페에서 3시간만에 15페이지를 썼어요. 구상한 무대가 있었고, 인물들과 그 관계, 고립된 가옥, 추격신들과 3개의 중요한 신 등을 썼죠 : 한 가족이 깨어나서 폭력에 놓이게 되고, 화재신과 밤 신이후에 클라이막스로 가는거였죠. 그 장면들은 수정되었어요.
 시나리오를 쓸때, 내가 자란 곳의 일부를 반영합니다. 풍경과 집에 대한 시나리오를 쓰면서 동시에 카드에 그림을 그렸죠. 집, 길, 숲, 산들 그리고 인물들의 동선등을요. 거의 일년동안 했습니다. 내 제작자에게 프랑수아 제니와 함께 일하도록 해달라고했죠. 그는 보쥬를 잘 알고 있었고, 현장에서 배우들을 지휘한 경험이 있었죠. 우린 그 시나리오를 9달동안 마쳤고 협조를 얻기 위해 발송했어요. 그리고 2007년 12월 허가를 받았죠.
 

● 거의 3년 이상걸렸네요...그 사이 다른 일이 일어났나요?
 처음엔 모두 잘 되어갔어요. 첫번에 알자스, 로렌 지방의 촬영 협조 승인을 받았구요. 세트나 영화장르적으로 사회적 영화도 아니고, 심리적 드라마도 아니었어요. 그보다 주인공의 동기가 뭔지 말해주기를 요구하면서 초조함과 불안을 일으켰죠. 프로젝트는 불명확해지는 데 말이죠. 우선 캬날플뤼Canal+ 가 두번에 걸쳐 예산을 감축 (1800만 유로에서 90만 유로)했어요. 그리고 촬영을 여러번 연기하고, 매번 캐스팅을 번복하고 새로운 팀원을 합류시켰죠. 결국 우린 텔레비전 방송국의 원조없이 하기로 했어요. 예산은 오스트리아 제작사와 갤러리스트인 세바스티앙 하인Sébastien Heine 이 공동으로 부담했어요. 세바스티앙은 아르-데코에서 내 비디오작품을 구매한 사람이죠.
 크랭크인은 2009년 11월에 했죠. 49일동안 촬영할 분량을 29일 안에 해야했기 때문에 확고한 연출계획이 있엇어요. 내 단편은 아주 조직화된 시퀀스를 기초로 했지만, 또다시 그렇게 할 순 없었죠. 카메라를 어깨에 매고 하는 건 첨에는 전혀 예상못했지만 필요하다면 했어요. 그래서 영화가 에너지가 생겼죠. 이미 깊어진 병세처럼 위기에 몰린 가족의 모습을 강조하면서요.
     
●영화에 대한 감독님의 기준은 뭔가요?
 난 미국 영화의 광활한 공간과 테시가하라 히로시 의 모래의 여자La Femme des sables(1964)의 배열을 섞고 싶습니다. 히로시의 영화는 내면성과 사회적 문제, 그리고 변화하는 문명에 대한 것들을 조합했어요. 집단 무의식을 건드리면서 모든 문제가 드러나있죠. 난 내 상상력을 그리 믿지 않아요. 겨우 가족, 이웃, 친구들의 이야기로 성경이나 세익스피어, 혹은 포크너의 신화에 맞설 뿐이죠. 심리학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인물들을 설명하는 데 심리를 꼭 따라야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단지 인물의 연기로 보여주면 되죠.
   

● 편집이 촬영보다 쉬웠나요?
 포스트프로덕션은 너무 복잡했어요. 촬영이 2009년에 끝났는데, 이후에 돈 한 푼없이 편집을 해야했죠. 일정이 빠듯했지만 2010년 칸 영화에를 위해서 소홀히할 수 없었죠. 편집은 한달 반 동안, 2010년 1월에 끝났어요. 맘이 편해지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고, 압박감이 너무 강했어요. 우린 가을에 다시 시작하지 않기 위해 더이상 편집하지 않았어요. 그 사이 몇 테이크를 주요 배우들과 재촬영했죠(내가 카메라를 들고 동생이 음향을 맡았어요).  영화의 날카로움과 밀도의 균형을 맞춰줄 고요나 고독한 순간이 부족했어요.
 포스트프로덕션에서 어려운 점은, 내가 원했던 바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결국 처음에 품었던 필수적인 요소들을 지키려고 했어요. 내가 썼던 처음 세장면들, 5년 동안 나를 지탱해준 등대와 같죠. 과정에서 생기는 사건들은 그 원인을 살펴보면 해결책도 나옵니다. 난 브레송이 기발함에 대해 한 이 말이 좋아요. 우리가 다른 이처럼 하기 원하면, 결코 독창적일 수 없다. ■
 
                                                                                                 -인터뷰
                                                          요아킴 르파티에, 2011.05.1, 파리에서


출처 : 32-39쪽, CAHIER DU CINéMA
기사 : Joachim Lepastier
번역 : PLONGEUR ( zamsoob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