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즈워너 David Zwirner_galeriste
□ 65여명의 직원이 일하는 3000m2 의 공간이 2012년 독립하여 2700m2 로 재탄생한다. 뉴욕출신의 갤러리스트 데이비드 즈와이너는 첼시의 거물이다. 레리 가고시안 갤러리Larry Gagosian과 페이스갤러리 The Pace Gallery 사이에 제 3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그는 아주 에너지가 넘쳐요 ; 역사적 거장들과 다른 현대작가들을 아우르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죠. 그는 방대하고 명석하게 접근해요. 상업보다는 예술에 관심있어하죠 ; 그는 시장의 끓어오르는 열기와 유행에 합류하지 않아요. 》그의 뉴욕 동료인 브룩 알렉산더 Brooke Alexander 는 이렇게 말한다. 즈워너는 나는 거래를 어떻게 하는가? 라는 블로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 비평가들이 그의 취향을 하찮게 보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누군가 분노에 차서 그에게 말한다 : 《그라면, 위대한 예술가라도 유행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는 시장에 재능이 없는 게 확실하다. 그는 언젠가 첼시를 죽이고 메리 분 Mary Boone 1 으로 바꿔버릴 것이다. 》 이런 모욕적 언사는 1980년대의 상황과 얽혀있다. 당시, 메리 분은 탐욕스럽고 저속한 상업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 다른 이는 즈워너의 거친 기질을 말하면서 그가 조직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거라고 말한다. 《내가 갤러리에서 히스테리 부리는 일은 없습니다.》 작가인 얀 페이-밍 은 이렇게 말한다. 《 가고시안 같은 큰 조직이 아니예요. 팀 작업방식이기 때문에, 관련 종사자와 총감독간의 마찰은 없어요. 우린 가족같아요. 갤러리가 생길 때부터 일한 사람도 있죠.
퀼른의 거상이었던 루돌프 즈워너 Roudolf Zwirner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60년대부터 지그마 폴케 2, 게르하르트 리히터 3, 게오르그 바실리츠 4 와 함께 일했다. 청년 데이비드는 역동적인 이 미술 세계로 들어올 마음이 없었다. 《아버지가 1990년에 사업을 그만두시고 그 뒤로는 이어받지 않았어요 ; 그리고나서, 난 나만의 갤러리를 1993년에 열었죠》라고 말한다. 그는 재즈 뮤지션을 꿈꾸며, 뉴욕에서 열성적으로 음악 수업을 듣기도 했었다. 이후, 독일로 돌아온 그는 함부르그에 있는 악트 뮤직 플러스 비젼 Act Music+ Vision 에서 1년 반동안 일한다. 당시에, 베르나르 와 필라 베허 5의 작품을 구매했다. 그리고 댄 그래험 6과 한네 다보벤 7. 도 미국에 다시 돌아오면서 그는 빠르게 경력을 쌓는다.
침체된 시장에서의 시작
데이비드 즈워너는 1991년 브룩 알렉산더와 함께 팀을 만든다. 브룩 알렉산더는 도날드 저드 8, 존 발데사리 9, 브루스 나우만 10을 알고 있었다. 《클래스 올덴버그 회고전을 준비하기 위해 데이비드와 함께 간 적이 있어요. 그는 어떤 작품을 선택할 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타고난 거죠. 클래스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 이 청년은 자신이 뭘 하고 있는 지 알고 있군》라고, 브룩 알렉산더는 회고한다. 1993년 그는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기 시작한다. 당시 예술시장은 침체기로, 작품의 가격이 하락하고 다수의 상인들이 파산했다.《시작하기에 좋은 때였어요. 누가 새로 시작하는 지 눈에 띄니까 사람들이 보다 쉽게 알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작가들 사이에서도 경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죠. 》
1992년 얀 호트 11 의 기획으로 카셀 도큐멘타 IX 가 열렸을 때, 대부분 작가들이 참여했다. 거기에서 그는 뤽 튀만 12 를 주장했지만, 그는 이미 유명한 갤러리와 협상이 끝난 상황이었다.
《나는 데이비드와 함께 일하기로 했어요. 뭔가 증명해 보일 여지가 있는 갤러리와 함께 성장하는 게 흥미로웠거든요. 다른 여러 명 중의 하나에 지나는 것보다요. 스탠 더글라스 13, 제이슨 로드 14나 다이아나 세이터 15 처럼 데이비드는 나를 협력의 상대로 보고 접근햇어요. 》작가가 전하는 말이다.
즈와이너는 마르셀 자마 16와 1998년부터 일해왔다. 《처음만났을 때부터 계속 믿음이 갑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죠》라고 작가는 말한다. 시작은 4명의 작가였지만, 이제 그는 35명의 작가와 함께한다. 갤러리의 이러한 성장은 2002년 소호에서 첼시로 옮겨가면서부터이다. 2006년 임대료가 3배로 뛰기 전까지 말이다. 그 이후에 고든 마타-클락 17 과 도널드 저드의 대성공으로 목록은 차곡차곡 쌓여갔다.《그는 아주 정확하고 분명한 태도를 지녔다. 갤러리로서 가져야 할 태도로 작가를 격려하곤 했다》미니멀리스트 작가의 아들인 플래빈 저드가 전하는 말이다. 《우린 다른 갤러리에 갈 수도 있었지만, 데이비드에게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세부적 사항에 주의하는 것이 중요했다》
레오 카스텔리 18의 행보를 따라
가고시안이 수집가들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면, 즈워너는 레오 카스텔리처럼 신의있는 작가들과 관계를 중요시여긴다. 사실, 작가 빼고는 잃을 게 없다 : 바로 프란츠 웨스트 이다. 뤽 튀만은, 《데이비드와의 관계는 진지하고 깊다. 우선 전문가의 영역에서 작품의 이해가 우선한다. 그는 제도나 시장에서 그의 위치를 가늠하면서도 창조자의 작업에 합께하며 그를 지지한다.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경매장의 투기로부터 보호하면서 말이다. 》라고 말한다. 수집가 크레이그 로빈스 Craig Robins 는 2차 시장에서 말렌 뒤마 19의 작품을 재판매하여 법정에 서야했다. 이 구매자에 대항해 남아프리카 작가들은 보이코트를 맺었다. 즈와이너는 이 재판에서 승소했다. 여기에서 판사는 갤러리스트와 수집가 사이에 어떠한 비공개 거래도 불허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가 비록 1차 시장인 갤러리에 있지만, 즈워너는 2차 시장의 활동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스위스인 이완 어스와 10년간 , 그리고 2년간 2차 시장의 발전을 위해 일해왔다. 《이완과 함께 일하면서부터 고객의 수가 두배로 뛰었어요. 새로운 아이디어도 2배가 되었고 다른 세대가 선점한 시장에서도 우리의 길을 찾았죠. 우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가까이 가는 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지금 우리들은 작가의 이름이 상표가 되는 시기에 있죠》라고 즈워너는 말한다. 제2차 시장은 아나벨 셀도르프 20 가 진행중인 환경친화적 건물에서 열려야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우린 가장 이기적인 산업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호들 사이에서 조성된 안락한 태도를 가끔 버릴 필요가 있어요. 》이런 마음은 그가 뉴욕의 크리스티에서 9월 22일 아이티 자선경매를 연 동기와 유사하다. 이 경매에서 그는 신디 셔먼 21, 세실리 브라운 22, 아델 압데세메드 23, 네오 라우흐 24 의 작품이 백만 달러에서 천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정한 역사의 건축
2007년 몇번의 괄목할 만한 성공을 기록한 이후, 헬가와 발터 라우프 소장품을 위해 6달의 협상 끝에 6천에서 8천만 달러에 합의하였다. 데이비드 즈워너는 수많은 경쟁자들에 대항했다. 그는 역사적 맥락에서 현대 에술품을 혼합한다. 하지만, 최근에 그는 진정한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신진작가와 만나고 있다.《가고시안은 거대한 사치품의 시장이다. 그의 곁에, 페이스 갤러리도 시간에 맞게 변화하는 법을 모른다》라고 작가 얀 페이-밍은 지적한다. 《데이비드는 작가들과 함께 성장하고 그들에게 비전을 제시한다. 그와 있으면, 현재에 일한다기 보다 내일을 위해 일하는 것 같다. 그는 한 몫 챙기기 위해 작가를 만나지 않는다.》
즈워너는 그의 영역으로 가고시안이 침범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난 진실된 선택을 하고 싶어요. 고유하고 명료한 정체성을 가지고서요. 나는 젊은 작가나 그보다 어린 작가들이 우리 갤러리를 염두에 두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2차 시장에 대해서도 계속 구상할 것이구요 》그의 야심은 5년안에 런던에서 새로운 부속건물로 이어질 예정이다.《나는 유럽인입니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과 함께하죠. 혹자는 유럽에서 적합한 작품 구성이 아니라고 하죠. 앞으로 10년 안에 홍콩에 갤러리를 추가로 열 계획도 있습니다. 》그는 타고난 경주자임에 틀림없다.
퀼른의 거상이었던 루돌프 즈워너 Roudolf Zwirner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60년대부터 지그마 폴케 2, 게르하르트 리히터 3, 게오르그 바실리츠 4 와 함께 일했다. 청년 데이비드는 역동적인 이 미술 세계로 들어올 마음이 없었다. 《아버지가 1990년에 사업을 그만두시고 그 뒤로는 이어받지 않았어요 ; 그리고나서, 난 나만의 갤러리를 1993년에 열었죠》라고 말한다. 그는 재즈 뮤지션을 꿈꾸며, 뉴욕에서 열성적으로 음악 수업을 듣기도 했었다. 이후, 독일로 돌아온 그는 함부르그에 있는 악트 뮤직 플러스 비젼 Act Music+ Vision 에서 1년 반동안 일한다. 당시에, 베르나르 와 필라 베허 5의 작품을 구매했다. 그리고 댄 그래험 6과 한네 다보벤 7. 도 미국에 다시 돌아오면서 그는 빠르게 경력을 쌓는다.
침체된 시장에서의 시작
데이비드 즈워너는 1991년 브룩 알렉산더와 함께 팀을 만든다. 브룩 알렉산더는 도날드 저드 8, 존 발데사리 9, 브루스 나우만 10을 알고 있었다. 《클래스 올덴버그 회고전을 준비하기 위해 데이비드와 함께 간 적이 있어요. 그는 어떤 작품을 선택할 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타고난 거죠. 클래스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 이 청년은 자신이 뭘 하고 있는 지 알고 있군》라고, 브룩 알렉산더는 회고한다. 1993년 그는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기 시작한다. 당시 예술시장은 침체기로, 작품의 가격이 하락하고 다수의 상인들이 파산했다.《시작하기에 좋은 때였어요. 누가 새로 시작하는 지 눈에 띄니까 사람들이 보다 쉽게 알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작가들 사이에서도 경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죠. 》
1992년 얀 호트 11 의 기획으로 카셀 도큐멘타 IX 가 열렸을 때, 대부분 작가들이 참여했다. 거기에서 그는 뤽 튀만 12 를 주장했지만, 그는 이미 유명한 갤러리와 협상이 끝난 상황이었다.
《나는 데이비드와 함께 일하기로 했어요. 뭔가 증명해 보일 여지가 있는 갤러리와 함께 성장하는 게 흥미로웠거든요. 다른 여러 명 중의 하나에 지나는 것보다요. 스탠 더글라스 13, 제이슨 로드 14나 다이아나 세이터 15 처럼 데이비드는 나를 협력의 상대로 보고 접근햇어요. 》작가가 전하는 말이다.
즈와이너는 마르셀 자마 16와 1998년부터 일해왔다. 《처음만났을 때부터 계속 믿음이 갑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죠》라고 작가는 말한다. 시작은 4명의 작가였지만, 이제 그는 35명의 작가와 함께한다. 갤러리의 이러한 성장은 2002년 소호에서 첼시로 옮겨가면서부터이다. 2006년 임대료가 3배로 뛰기 전까지 말이다. 그 이후에 고든 마타-클락 17 과 도널드 저드의 대성공으로 목록은 차곡차곡 쌓여갔다.《그는 아주 정확하고 분명한 태도를 지녔다. 갤러리로서 가져야 할 태도로 작가를 격려하곤 했다》미니멀리스트 작가의 아들인 플래빈 저드가 전하는 말이다. 《우린 다른 갤러리에 갈 수도 있었지만, 데이비드에게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세부적 사항에 주의하는 것이 중요했다》
레오 카스텔리 18의 행보를 따라
가고시안이 수집가들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면, 즈워너는 레오 카스텔리처럼 신의있는 작가들과 관계를 중요시여긴다. 사실, 작가 빼고는 잃을 게 없다 : 바로 프란츠 웨스트 이다. 뤽 튀만은, 《데이비드와의 관계는 진지하고 깊다. 우선 전문가의 영역에서 작품의 이해가 우선한다. 그는 제도나 시장에서 그의 위치를 가늠하면서도 창조자의 작업에 합께하며 그를 지지한다.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경매장의 투기로부터 보호하면서 말이다. 》라고 말한다. 수집가 크레이그 로빈스 Craig Robins 는 2차 시장에서 말렌 뒤마 19의 작품을 재판매하여 법정에 서야했다. 이 구매자에 대항해 남아프리카 작가들은 보이코트를 맺었다. 즈와이너는 이 재판에서 승소했다. 여기에서 판사는 갤러리스트와 수집가 사이에 어떠한 비공개 거래도 불허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가 비록 1차 시장인 갤러리에 있지만, 즈워너는 2차 시장의 활동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스위스인 이완 어스와 10년간 , 그리고 2년간 2차 시장의 발전을 위해 일해왔다. 《이완과 함께 일하면서부터 고객의 수가 두배로 뛰었어요. 새로운 아이디어도 2배가 되었고 다른 세대가 선점한 시장에서도 우리의 길을 찾았죠. 우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가까이 가는 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지금 우리들은 작가의 이름이 상표가 되는 시기에 있죠》라고 즈워너는 말한다. 제2차 시장은 아나벨 셀도르프 20 가 진행중인 환경친화적 건물에서 열려야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우린 가장 이기적인 산업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호들 사이에서 조성된 안락한 태도를 가끔 버릴 필요가 있어요. 》이런 마음은 그가 뉴욕의 크리스티에서 9월 22일 아이티 자선경매를 연 동기와 유사하다. 이 경매에서 그는 신디 셔먼 21, 세실리 브라운 22, 아델 압데세메드 23, 네오 라우흐 24 의 작품이 백만 달러에서 천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정한 역사의 건축
2007년 몇번의 괄목할 만한 성공을 기록한 이후, 헬가와 발터 라우프 소장품을 위해 6달의 협상 끝에 6천에서 8천만 달러에 합의하였다. 데이비드 즈워너는 수많은 경쟁자들에 대항했다. 그는 역사적 맥락에서 현대 에술품을 혼합한다. 하지만, 최근에 그는 진정한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신진작가와 만나고 있다.《가고시안은 거대한 사치품의 시장이다. 그의 곁에, 페이스 갤러리도 시간에 맞게 변화하는 법을 모른다》라고 작가 얀 페이-밍은 지적한다. 《데이비드는 작가들과 함께 성장하고 그들에게 비전을 제시한다. 그와 있으면, 현재에 일한다기 보다 내일을 위해 일하는 것 같다. 그는 한 몫 챙기기 위해 작가를 만나지 않는다.》
즈워너는 그의 영역으로 가고시안이 침범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난 진실된 선택을 하고 싶어요. 고유하고 명료한 정체성을 가지고서요. 나는 젊은 작가나 그보다 어린 작가들이 우리 갤러리를 염두에 두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2차 시장에 대해서도 계속 구상할 것이구요 》그의 야심은 5년안에 런던에서 새로운 부속건물로 이어질 예정이다.《나는 유럽인입니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과 함께하죠. 혹자는 유럽에서 적합한 작품 구성이 아니라고 하죠. 앞으로 10년 안에 홍콩에 갤러리를 추가로 열 계획도 있습니다. 》그는 타고난 경주자임에 틀림없다.
출처 : 42쪽, Le Journal des Arts,
기사 : Roxana Azimi
번역 : PLONGEUR ( zamsoobu )
기사 : Roxana Azimi
번역 : PLONGEUR ( zamsoobu )
- Mary Boone (born October 29, 1951) is the owner and director of the Mary Boone Gallery and was instrumental in the New York art market of the 1980s. Her first two artists, Julian Schnabel and David Salle, became internationally known and, by 1982 she had earned a cover story on New York magazine tagged "The New Queen of the Art Scene."[1] The Mary Boone Gallery has represented notable artists including Jean Michel Basquiat, Barbara Kruger, Eric Fischl, Ross Bleckner, and Brice Marden. Originally based in SoHo, Boone currently has two galleries, one in midtown on Fifth Avenue, the other in Chelsea [본문으로]
- 지그마르 폴케 [Sigmar Polke, 1941.2.13~] 요약 독일의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 화가이자 사진작가. 신표현주의 예술가. 전통 회화기법과 재료를 부정하고 특정한 양식에 종속되기를 거부한 시각적 혁명가이다. 국적 독일 활동분야 회화, 사진 출생지 폴란드 질레지아(Silesia) 주요작품 《스파이더맨 Spiderman》(1971~74), 《파가니니 Paganini》(1982), 《분열된 지배 Break Domination》(1998), 《서부에서 가장 빠른 총 The Fastest Gun in the West》(2002) 본문 1941년 폴란드 질레지아(Silesia)에서 태어나 구동독의 튜린지아(Thuringia)에서 자랐다. 1953년 가족을 따라 서독으로 이주한 후 위치(Wittich)에 정착하였다.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뒤셀도르프 카이제르베르트에서 유리회화를 배웠으며, 1961년부터 1967년까지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1963년 쿤스트 아카데미의 동료인 게르하르 리히터(Gerhard Richter)와 함께 광고에서 사용하는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어 '자본주의 사실주의 Capitalistic Realism' 이론을 전개하였다. 이는 구동독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Socialist Realism'에 대한 구서독의 대응책으로 팝 아트의 독일적 변형으로 볼 수 있으며 '반형식 미술'로 설명될 수 있다.폴케의 작품은 팝 아트나 개념 미술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단순히 팝 아트나 개념 미술이라는 용어로 한정될 수 없다. "오직 회화를 위한 시간만이 존재한다 There is no time, only for painting"는 그의 말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회화라는 장르 속에 그 뿌리를 둔 채 수많은 경험과 실험의 장으로서 회화를 고안하였다.폴케는 전통 회화기법 및 재료를 부정하고 특정한 양식에 종속되기를 거부하였다. 대중매체와 영화, 혹은 과학적 영상 기술 등에서 채택한 기본 이미지들을 의도적으로 변형시키거나 가정용품, 페인트, 라커, 염료, 벨벳 등을 혼합하여 여러 층의 화면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모더니스트 회화의 물신 숭배적인 화면을 조롱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의 냉소주의와 절망 밑에는 시간의 흐름과 변화, 축적되는 이미지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는 1984년 취리히에서 열린 자신의 대규모 전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언젠가 좋은 그림들-좋은 이미지들-이 그려질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 일을 맡아야 한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간과하지도 않고, 그것에 휩쓸려 가지도 않으면서 동시대 예술의 시각적 혁명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주요 작품에는 《여자 친구들 Girlfriends》(1965), 《스파이더맨 Spiderman》(1971~74), 《파가니니 Paganini》(1982), 《분열된 지배 Break Domination》(1998), 《서부에서 가장 빠른 총 The Fastest Gun in the West》(2002) 등이 있다.[출처] 지그마르 폴케 [Sigmar Polke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회화의 새로운 획을 그은 현대미술의 거장. 사진과 회화, 추상과 구상, 그리고 채색화와 단색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회화라는 매체를 재해석하고 그 영역을 확장시켰다. 국적 독일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독일 드레스덴 주요작품 《하이드 씨 Herr Heyde》(1965), 《색채 차트 Colour Chart》(1966), 《도시 풍경 Townscape》연작 (1968~1973), 《추상화 Abstraktes Bild》(1990) 본문 1932년 옛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광고디자인과 무대배경을 그리는 일을 했던 그는 1951년 드레스덴 아카데미에 입학해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 서독으로 이주하여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회화 공부를 계속했다. 이곳에서 그는 피셔-루엑(Konard Fischer-Lueg), 폴케(Sigmar Polke) 등과 교우하며 플럭서스 운동 및 팝아트에 영향을 받고 '자본주의 사실주의(Capitalist Realism)' 운동을 전개하였다. '자본주의 사실주의'란 동독의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대응책으로 당시 미국에서 선풍을 일으킨 팝아트의 독일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독일의 팝 아티스트로 불리기도 했다.팝아트의 영향은 그가 대중 잡지의 사진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62년 그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가져온 사진을 소재로 흐릿하고 형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일련의 추상회화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사진이 갖는 리얼리즘적 요소와 여기에 붓질을 가해 얻어지는 추상적 요소가 합해져 새로운 회화 양식을 선보였다. 1965년부터는 일상적이고 통속적인 사진 이미지를 단색조로 옮겨 그리며 변화를 모색하였다. 1960년대 말에는 극사실주의적인 풍경사진화와 기하학적인 색채 차트 그림을 그렸고, 1971년과 1972년 사이에는 유명 인물사진화를,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다채로운 색채의 추상회화를 제작하였다. 1980년대에는 정치 문제를 다루기도 했으며 1990년대에는 보다 완숙한 추상의 세계를 보여주었다.그의 작품은 당대에 유행했던 팝아트와 모노크롬 회화, 추상표현주의와 포토리얼리즘 등과 연결되면서도 이와 상반된 리히터 자신만의 양식을 표현해내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미술계는 회화의 종말을 예견했지만 리히터는 당대의 일반적인 목소리를 뒤로 하고 회화를 고집하면서 다양한 양식을 통해 회화라는 매체를 재해석하고 현시대에 회화가 가지는 본질과 가치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묻고 그 답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회화는 더 큰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었으며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0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은 그의 작품이 견지한 전통 장르로서의 회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주목하게 했다.주요 작품에는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 Woman Descending the Staircase》(1965), 《하이드 씨 Herr Heyde》(1965), 《색채 차트 Colour Chart》(1966), 《도시 풍경 Townscape》연작 (1968~1973), 《추상화 Abstraktes Bild》(1990), 《강 The River》(1995) 등이 있다.[출처] 게르하르트 리히터 [Gerhard Richter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독일 신표현주의의 선구자. 힘있는 붓터치와 강렬한 색채로 1980년대 회화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특히 '거꾸로 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국적 독일 활동분야 회화, 조각 출생지 독일 도이치바젤리츠 주요작품 《하수구 아래에서의 진한 밤 The Big Night Down The Drain》(1962~63), 《누드 엘케 2 Nude Elke 2》(1976), 《안녕 Adieu》(1982), 《우는 얼굴》(1986) 본문 본명은 한스 게오르그 케른(Hans-Georg Kern). 1938년 독일의 드레스덴 외곽 도이치바젤리츠에서 태어났다. 1956년 동베를린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사회정치적 미숙함'이라는 이유로 두 학기만에 퇴학당하고 서베를린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1961년 자신의 출생지에서 이름을 따 게오르그 바젤리츠로 개명하였다. 1963년 동베를린에서 열렸던 첫 개인전에서 외설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항간에 물의를 일으켰고 결국 두 점의 작품 《하수구 아래에서의 진한 밤 The Big Night Down The Drain》(1962~63)과 《벌거벗은 남자 Naked Man》(1962) 가 경찰에 의해 압수되었다. 동독에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 미술을, 서베를린에서는 국제적 서정추상을 모델로 삼아야 했던 바젤리츠는 이 모두를 거부했다. 그는 "내가 만든 물건은 어떤 이념도 표현하지 않고... 회화는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펼쳤다.1969년 거꾸로 된 그림인 《머리 위의 나무 The Wood On Its Head》를 발표하면서 풍경, 정물, 누드, 초상 등을 거꾸로 그리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전통을 비웃는 듯한 뒤집어진 그의 작품은 관습에 대한 부정이고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저항이었다. 또한 대상이 갖는 본래 의미를 제거하고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주고자 하는 이같은 작업은 회화의 순수한 시각성과 추상성을 맞닥뜨리게 하였다.바젤리츠의 회화는 힘있는 붓터치와 강렬한 색채, 단조로운 감정 표출로 놀데(Emil Nolde)나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와 같은 다리파 화가들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는 1980년대를 강타한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의 기수로 부상하면서 새로운 회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회화뿐만 아니라 나무 조각을 깎고 채색하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그의 회화처럼 원시적이고 이교도적인 분위기를 풍긴다.주요 작품에는 《하수구 아래에서의 진한 밤 The Big Night Down The Drain》(1962~63), 《누드 엘케 2 Nude Elke 2》(1976), 《안녕 Adieu》(1982), 《우는 얼굴》(1986) 등이 있다.[출처] 게오르크 바젤리츠 [Georg Baselitz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독일의 부부 사진가. 산업 건축물을 주제로 독일 유형학적 사진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로서 '베허 학파'로 불리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슈트루트, 토마스 루프, 칸디다 회퍼 등 걸출한 사진작가들을 길러냈다. 국적 독일 활동분야 사진 출생지 베른트:독일 지겐, 힐라:독일 포츠담 주요작품 《(구형의) 가스탱크 Gas Tanks (Spherical)》(1963~92), 《냉각탑 Cooling towers:Wood N B》(1976), 《열두 개의 급수탑 Twelve Water-towers》(1978~85) 본문 베른트 베허는 1931년 독일 지겐(Siegen)에서, 힐라 베허는 1934년 독일 포츠담(Potsdam)에서 출생하였다. 두 사람은 1958년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만나 이듬해인 1959년 공동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1961년 결혼하였으며 평생을 예술적 동지이자 부부로 살았다.베허 부부는 사라질 운명에 처한 낡은 공장과 산업 건축물들을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그들은 1963년 지겐의 갤러리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고, 1970년 『익명의 조각-산업 건축물의 유형학』이란 제목으로 첫 번째 작품집을 출판하였다. 발전소, 물탱크, 가스탱크, 냉동고, 고압선 철탑 등 다양한 건축적인 구조물들을 엄격한 격자구조로 찍은 이 흑백사진들은 빠르게 사라져가는 산업적 유형들과 공업 발전이 낳은 파괴와 붕괴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진은 너무 차갑고 계산적이며, 예술답지 않다는 이유로 미술계의 반응은 냉담하였다.이들의 작품에 주목한 것은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에 관련한 작업과 글쓰기를 병행해온 솔 르윗(Sol LeWitt)과 칼 안드레(Carl Andre) 같은 미국 작가들이었다. 1972년 칼 안드레는 베허 부부의 작업에 대하여 사진이 아닌 개념미술의 맥락에서 해석한 글을 발표하였다. 이후 이들의 작업은 개념미술과 연관하여 논의되었으며, 같은 해 뉴욕의 소나벤드가 베허 부부를 갤러리 소속 작가로 영입하면서 뉴욕 미술시장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베허 부부의 사진은 대상이 원근감에 의해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수평 앵글을 사용하였고, 최대한 중립적인 외관을 보여주기 위해 흐린 광선을 선택하였다. 배경은 되도록 아무 것도 없는 지점을 택하였으며, 노출 시간이 길기 때문에 대상 외에는 움직이는 어떠한 것도 포착되지 않았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또한 시간과 장소가 달라도 사진 속 흑백의 톤은 일정하게 유지했으며 심지어 부부가 각각 따로 찍어도 누가 찍었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작가의 개성이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들의 사진이 갖는 엄격성과 획일성, 규칙성, 통일성, 정형성은 독일 유형학의 특징이며, 이것은 현대사진의 국제적인 양식이 되었다.베허 부부는 탁월한 교육자로도 명망이 높다. 1976년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 교수로 초청된 베른트는 독일의 미술 대학에서는 처음으로 사진 강좌를 만들었다. 그는 1996년까지 교편을 잡았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뒤셀도르프 회화 학파에 맞서 예술로서 사진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이제는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한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슈트루트, 토마스 루프, 칸디다 회퍼, 악셀 휘테 등은 그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베허 스쿨' 1세대 작가들로 독일 유형학적 사진을 통해 현대 사진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한편, 베른트는 2007년 6월 22일 로스톡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던 중 사망하여 76년의 생을 마감하였다.주요 작품에는 《(구형의) 가스탱크 Gas Tanks (Spherical)》(1963~92), 《냉각탑 Cooling towers: Wood N B》(1976), 《열두 개의 급수탑 Twelve Water-towers》(1978~85) 등이 있다.[출처] 베허 부부 [Bernd and Hilla Becher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Dan Graham (born March 31, 1942), is a conceptual artist now working out of New York City. He is an influential figure in the field of contemporary art, both a practitioner of conceptual art and an art critic and theorist. His art career began in 1964 when he moved to New York and opened the John Daniels Gallery. Graham’s artistic talents have wide variety. His artistic fields consist of film, video, performance, photography, architectural models, and glass and mirror structure. Graham especially focus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his artwork and the viewer in his pieces. Graham made a name for himself in the 1980s as an architect of conceptual glass and mirrored pavilions. [본문으로]
- Hanne Darboven (born 29 April 1941 in Munich, died 9 March 2009 in Hamburg) was a German conceptual artist. She became best known for her large scale minimalist installations consisting of handwritten tables of numbers. [본문으로]
- 도널드 저드 [Donald Judd, 1928~1994] 요약 미국의 미니멀아트 미술가·이론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수한 오브제'라는 개념을 만들고 이 오브제를 캔버스의 표면과 형태, 색채의 본질적인 단위로 간주하였다. 국적 미국 활동분야 미술 출생지 미주리주 엑슬시어 스프링스 본문 1928년 미국 미주리주 엑슬시어 스프링스(Exelsior Springs)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초부터 3차원 오브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수한 오브제'라는 개념을 만들고 이 오브제를 캔버스의 표면과 형태, 색채의 본질적인 단위로 간주하였다. 채색된 나무와 금속의 단순한 입체물, 즉 상자들을 제작하였는데, 이 상자들은 가로 또는 세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열된 형태를 띠었다.[출처] 도널드 저드 [Donald Judd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존 발데사리 [John Baldessari, 1931.6.17~] 요약 미국 출신의 개념주의 예술가. 초기에는 텍스트만으로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이후에는 문자와 사진을 결합하여 언어와 시각성의 상관관계를 주제로 삼았다. 1980년대부터는 사진만으로 구성된 '복합사진' 형식을 취해 자유로운 연상을 통한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국적 미국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미국 캘리포니아 내셔널시티 주요작품 《커블러를 위한 그림 Painting for Kubler》(1967~68), 《피의 선데 Bloody Sundae》(1987), 《폰트 Font》(1987) 본문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내셔널시티에서 태어났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1954년과 1955년에는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을 다녔다. 1955년 샌디에이고 주립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1957년 졸업하였다. 이어 1957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오티오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수업을 받았다.그는 1953년 8월부터 1966년까지 13년 동안 그린 그림들을 태워버리는 '화장 프로젝트 Cremation Project'라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기존 미술의 죽음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미술가의 수공의 흔적을 담은 물질 혹은 형식으로서의 미술과의 결별을 의미하며, 개념미술로의 이행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의 명칭을 '포스트 스튜디오 아트'로 바꿔 캔버스로 가득 찬 스튜디오를 떠나 삶 속에서 작업이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1967년에서 1968년에는 주로 텍스트만으로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자 문자와 사진을 결합한 형태를 취하였다. 그는 언어와 시각성의 상관관계를 주제로 삼으며 문자와 형상에 대한 언어학적, 철학적 고찰을 이어갔다. 1980년대 이후에는 사진만으로 구성된 '복합사진 composite photowork'을 통해 형상만으로도 글과 같은 서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잡지나 신문, 광고 등에서 오려낸 사진을 재료로 이를 재구성하여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원색의 기하학적 형상을 사용하였는데, 사진의 일부를 가리거나 특정 형상을 단색의 평면으로 지움으로써 비현실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인물의 얼굴 위에 노랑, 빨강, 파랑 등 원색 동그라미를 그려 익명성을 부여하였다. 그는 특히 인공과 자연, 군중과 개인, 남성과 여성, 혼란과 질서, 과거와 현재, 사랑과 미움 등을 대비시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의 작품은 사진과 회화, 구상과 추상 등 매체와 양식의 다양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자서전적이면서도 역사와 사회, 문명을 아우르는 중층적 내러티브를 구성한다.주요 작품에는 《커블러를 위한 그림 Painting for Kubler》(1967~68), 《피의 선데 Bloody Sundae》(1987), 《폰트 Font》(1987) 등이 있다[출처] 존 발데사리 [John Baldessari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브루스 나우먼 [Bruce Nauman, 1941.12.6~] 요약 미국 동시대 작가 가운데 가장 혁신적이고 도발적인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개념 미술가, 후기 미니멀리즘 작가로 분류되기도 하나 특정한 양식에 한정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주제와 기법, 그리고 예술적 의도를 포괄하고 있다. 국적 미국 활동분야 조각, 설치, 비디오, 영화, 사진, 드로잉, 퍼포먼스 출생지 미국 인디애나주 포트웨인 주요작품 《샘으로 표현한 자화상 Self-Portrait As a Fountain》(1966), 《실패할 수밖에 없는 헨리 무어 Henry Moore Bound to Fail》(1967), 《복도 Corridor》(1968~70) 본문 1941년 미국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에서 태어났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고,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나우만은 화가로 미술계에 입문했지만 1965년 이후 회화를 버리고 퍼포먼스에서 조각, 설치, 비디오, 영화, 사진,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섭렵해 나갔다. 그는 완성된 작품보다 제작되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겼으며, 물질의 생성과 변화과정을 중시하였다.1968년 뉴욕에서 가진 첫 개인전에서 네온사인 조각을 선보이며 신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신체를 오브제로 취급하였고, 신체의 움직임 또한 행위 자체에만 주목하였다. 1970년대에는 대상으로서의 신체가 아닌 지각의 주체로서의 신체로 주제를 확장하였다. 특정한 상황이 인간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지각되며 어떠한 행동을 유발시키는지에 대한 접근이 이 시기에 보여졌다.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 강화되는데 나우만은 이를 대중문화의 이미지와 매체를 통해 전달하였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에 영향을 받은 그는 누구보다 언어에 관심이 많았다. 단어와 철자를 재구성하거나 동음이의어에 의해 발생하는 예기치 않은 문구들을 만들어내 익숙해진 단어로부터 전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였다. 1980년대 중반에는 권력과 성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그는 말한다. "나는 작가이고, 그런 내가 작업실 안에 있다면, 그곳에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예술이어야 한다. 오늘날 예술은 생산품이기보다 활동에 더 가까운 것이 되었다" 뒤샹의 개념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발상에서 출발한 나우만은 개념미술의 대표자가 되었지만, 그의 작업은 특정한 양식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것이 아니며, 개념미술로 한정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주제와 기법, 그리고 예술적 의도를 포괄하고 있다.주요 작품에는 《샘으로 표현한 자화상 Self-Portrait As a Fountain》(1966), 《실패할 수밖에 없는 헨리 무어 Henry Moore Bound to Fail》(1967), 《복도 Corridor》(1968~70), 《스튜디오 지도제작(가망없는 존 케이지) Mapping the Studio(Fat Chance John Cage)》(2001) 등이 있다.[출처] 브루스 나우먼 [Bruce Nauman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Jan, Knight Hoet (born June 23, 1936 in Leuven, Belgium) is the founder of SMAK (Stedelijk Museum voor Actuele Kunst or City Museum for Contemporary Art) in Ghent, Belgium.[1] [본문으로]
- Luc Tuymans (born 1958) is a contemporary artist who lives and works in Antwerp, Belgium. Tuymans is considered one of the most influential painters working today. His signature figurative paintings transform mediated film, television, and print sources into examinations of history and memory. [본문으로]
- Stan Douglas (born October 11, 1960) is an artist based in Vancouver, British Columbia. He has exhibited internationally, including Documenta IX, 1992, Documenta X, 1997, Documenta XI, 2002 and the Venice Biennale in 1990, 2001 and 2005. Douglas' film and video installations, photography and work in television frequently touch on the history of literature, cinema and music, while examining the "failed utopia" of modernism and obsolete technologies. Art collector Friedrich Christian Flick, in the foreword to the Stan Douglas monograph, describes Douglas as "a critical analysis of our social reality. Samuel Beckett and Marcel Proust, E.T.A. Hoffmann and the Brothers Grimm, blues and free jazz, television and Hollywood, Karl Marx and Sigmund Freud haunt the uncanny montages of the Canadian artist."[ [본문으로]
- [/footnote], 프란츠 웨스트[footnote]Franz West (born 1947 in Vienna) is an Austrian artist [본문으로]
- Diana Thater (born 1962, San Francisco) is an American artist, curator, writer, and educator. She has been a pioneering creator of film, video, and installation art since the early 1990s. She lives and works in Los Angeles, California.[1] [본문으로]
- Marcel Dzama (born 1974 in Winnipeg, Manitoba, Canada) is a contemporary artist who lives and works in New York. His work has been exhibited internationally, in particular his ink and watercolor drawings [본문으로]
- Gordon Matta-Clark (June 22, 1943[1] – August 27, 1978) was an American artist best known for his site-specific artworks he made in the 1970s. He is famous for his "building cuts," a series of works in abandoned buildings in which he variously removed sections of floors, ceilings, and walls. [본문으로]
- Leo Castelli (born Leo Krausz; September 4, 1907 – August 21, 1999) was an American art dealer.[1] He was best known to the public as an art dealer whose gallery showcased cutting edge Contemporary art for five decades.[2] Castelli showed Surrealism, Abstract Expressionism, Neo-Dada, Pop Art, Op Art, Color field painting, Hard-edge painting, Lyrical Abstraction, Minimal Art, Conceptual Art, and Neo-expressionism, among other movements. [3] [본문으로]
- [Marlene Dumas, 1953. 8. 3~] 요약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여성 화가. 1976년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암스테르담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80~1990년대 유럽 현대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물 초상을 통해 인종과 성, 죽음 등을 탐구한다[출처] 마를렌 뒤마 [Marlene Dumas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Annabelle Selldorf FAIA, is a German-born architect and founding principal of Selldorf Architects, a New York City-based architecture and interior design practice. Her notable projects include Neue Galerie New York: Museum for German and Austrian Art; renovation of the Sterling and Francine Clark Art Institute in Williamstown, Massachusetts; as well as 200 11th Avenue and 520 West 19th Street, two high-rise residential buildings located along New York’s High Line. [본문으로]
- Cindy Sherman (born January 19, 1954) is an American photographer and film director, best known for her conceptual portraits. Sherman currently lives and works in New York City. In 1995, she was the recipient of a MacArthur Fellowship. She is represented by Sprüth Magers Berlin London in Europe and Metro Pictures gallery in New York. Through a number of different series of works, Sherman has raised challenging and important questions about the role and representation of women in society, the media and the nature of the creation of art. [본문으로]
- Cecily Brown, born 1969 in London, is a British painter. She has a great respect for art history and her works reveal her reverence and high regard for artists such as Francisco de Goya, Nicolas Poussin, Willem de Kooning, and Joan Mitchell while incorporating into her works her distinct female view point.[1] [본문으로]
- Adel Abdessemed (born 1971 in Constantine, Algeria) is a conceptual artist who lives and works in Paris, France. He is represented by David Zwirner, New York and Dvir Gallery, Tel Aviv. Abdessemed attended the École des Beaux-Arts in Algiers, Algeria from 1987 to 1994. Due to political unrest in Algeria, he moved to Lyon, France in 1994. He continued his fine arts education at the École des Beaux-Arts in Lyon, before completing his studies in Paris, France in 2000. The following year, he enrolled at the International Studio Program at the P.S.1 Contemporary Art Center in New York. [본문으로]
- Neo Rauch (born 18 April 1960, in Leipzig, East Germany) is a German artist whose paintings mine the intersection of his personal history with the politics of industrial alienation. His work reflects the influence of socialist realism, and owes a debt to Surrealists Giorgio de Chirico and René Magritte, although Rauch hesitates to align himself with surrealism. He studied at the Hochschule für Grafik und Buchkunst Leipzig, and he lives in Markkleeberg near Leipzig, Germany and works as the principal artist of the New Leipzig School.[1] The artist is represented by Galerie EIGEN + ART Leipzig/Berlin and David Zwirner, New York. Rauch's paintings suggest a narrative intent but, as art historian Charlotte Mullins explains, closer scrutiny immediately presents the viewer with enigmas: "Architectural elements peter out; men in uniform from throughout history intimidate men and women from other centuries; great struggles occur but their reason is never apparent; styles change at a whim."[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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