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다가타 Antoine D'agata



리베라씨옹 2016.11.17


카미카제의 눈


앙투안 다가타


30년 동안 사진작가는 혼란스러운, 길을 잃은, 그리고 다소 충격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신체의 내부로 침투해 규정지을 수 없는 작업 세계를 보여주었다.



11월 2일 10시 30분 우리는 파리 20구의 한 카페에 자리 잡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바쁘다, 강아지를 산책시키어야, 장을 보거나, 일을 하러 가거나. 그


와중에 나는 갑자기 이 미팅에 의문이 들었다. 이 모든 일상의 반대편에 사는


다가타를 만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파토라도 나는 게 아닐까?


말단 병사의 침상의 사각보다 더 모가 난 계획들에 익숙한 기자들이나 부르주아들


사이를 오가면서. 그가 현재 신분 상승의 단계에 있다면 ( 아틀라에서의 사진 전시,


화이트 노이즈 출판, 미디어 설치전시), 고전적인 방법에서 벗어난 것은 확실하다.


마르세이유 출신의 앙투안 다가타는 폭력적이고 무법의 세계를 가로지른다 ; 전쟁,


매춘, 마약. 여기까지는 별다른 게 없다. 나이트클럽에 난봉꾼이 그 전형이다. 하지만


그를 여타의 작가와 구분짓는 것은 그 후폭풍이나 아우라이다. 다가타는 침투-용해 의


방식으로 접근한다 ; 그는 직접 섹스나 마약, 매춘, 이민자들, 사회의 낙오자들 사이로


들어가 촬영을 한다. 다가타는 거리낌없이 말한다. 이 [타락한] 일간지(아마 심야


사건에 집중 보도하는) 의 심연으로 빠진다고. 그의 이미지들, 황폐한 장소나


피폐해진 존재들, 격앙된 감정의 신체들, 타나토스로 가는 에로스들은 희미한 동시에


흐릿하고, 살아있는 기관이면서 쇳소리가 나는 듯 날카롭다. 고야 나 베이컨을


연상시킨다. 다가타는 그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극도로 예민한 감각과


환각적인 뒤범벅의 상황 사이에서 쓴 혼돈의 글이라고. 아틀라에서 인용하자면 ; [[


욕망은 욕망을 산다. 그리고 복종은 복종을 품는다. 난교는 슬픔과 냉정이다.


고통스러운 휴머니티, 그것이 무엇인지 흘려버리는 건 불가능하다. 열린 관계에서


생기는 내밀한. 메타멤타민의 유리와 같은 투명함]] , 예술 비평가 레아 비스무스 Léa


Bismuth -다가타가 참여한 전시 {불안과 두려움을 가로질러}를 기획한 - 는 이렇게


비유한다 ; [[내가 보기엔 현존하는 작가들 가운데 가장 규율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는 사진작가인 동시에, 영화작가이고, 퍼포먼스 아티스트,


작가로써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그는 미팅에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다소 건강하게 보이기까지(창백하고 피곤한


기색임에도 불구하고)했으며 괜한 트집(55세의 흔한 중년 남성 처럼)을 잡지도


않았다. 그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리고 담배를 끊었다. 그가 이렇게 설명한다 ;


[[선택을 했어야 했어요. 17세부터 뭔가 접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해본 것 같아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몸이 안좋아지는 게 느껴졌죠. 얼마전부터 나는 정신적인


“내리막길”을 염두에 두고 신경쓰는 있어요 이곳 파리에서요.]] 다가타가 프랑스에


머문지 이제 4개월이다. 그는 다시 12월에 떠난다 ; 캄보디아, 일본, 페루. 그에게 사진


작업 공간을 제공하고, 비행기 값이나 숙소 비용을 대신하는 곳이다. 이런 연이은


여정에서 그는 작업을 이어나간다.


파리, 이 시실리아의 아들에게는 (아버지쪽은 도축업, 어머니쪽은 어업)은 더이상


주소가 없다. 아니면 그가 2004년에 소속해 있었던 매그넘 일 것이다. 가끔 그는


여기에서 머문다. 아를 지역 에 매입한 한 스튜디오가 있다 ; [[창문 없는 35평방 미터,


진드기가 우굴거리는, 독초가 가득한]] 그가 웃는다. 마치, 매독이란 무기를 가진


죄악처럼. 아가타는 [[전투]],[[힘의 이야기]] 라는 말을 쓰며 관객을 동요시킨다. 물론


단말마가 아니라, 긴호흡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투사처럼 말을 한다 ; [[다시 떠나는 게


쉽지는 않죠, 에너지를 되찾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멈추면 내 원동력에 대한


배반이겠죠.]]


열광적인 마초, 카미카제는 그의 삶이다 ; 그가 기꺼이 그렇도록 만든 것이다. 길게


혹은 짧게 관계를 맺은 매춘 여성 3명과의 사이에서 생긴 딸들, 9살부터 21세까지를


보면 그의 개인사는 적나라하게 파헤져진 셈이다. 과연 ; 모든 것들이 예술의


십자가를 진 자기 희생인 것인가, 다시 웃는다 ; [[내 가족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래도 14살 까지 나는 신부가 되고 싶었죠...무언가 절대성에 대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평범함, 범속함을 거부해봤죠.]] 바쿠스


Bakounine,카뮈Camus, 사르트르 Sartre, 무신론의 추종자이자, 상황주의자,


독립주의자 (그는, 메스린의 암살 l’assassinat de Mesrine 과 바다의 무리 예로 든다)


의 그룹에 속하는, [[밤, 구역, “백야” 순수의 경험]]에 침전하는 그이다. 17세에 그는


런던에서 인도까지 중앙 아메리카에서 스페인까지 독에 스스로를 노출시켜왔다.


그리고 80년대에 방랑집단을 오가며 사진을 찍었다. 재료면에서 보자면, 더이상 빠질


것이 없어보인다. 그보다 투사, 유격대, 파괴자이다. 작가는 유혹에 반대의 의미로,


반란과 폭동의 [[무기]]라는 말을 한다. [[사진의 갈래에서 벗어나길 원했죠. 뭔가


이야기를 전달한다기 보다, 강한 인상을 전달하려고 했어요. ]] [[일반적]]인 세계의


[[수동성과 게으름 ]]을 겨냥하면서, 그의 외설성은 [[발가벗은 신체나 감정의 그것


이상이다.]]


그의 작업을 염두에 두자면 놀라운 점은 바로 이것 이다 ; 앙투안 다가타는 부드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강력함, 위기의식, 자존성 등이 느껴진다. 1981년 PFN 신


나치주의 항의 시위에서 경찰의 최루가스에 의해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은 이래로, 그는


집착적으로 분류되어지는 것을 거부해왔다. 낸 골딘 nan goldin 과 래리 클락 Larry


Clark 의 수업을 들었다. 그의 <<지인>>으로 가정된 <<가족>>에 대해, 편하지 않다.


[[난 그런 단어들을 경계해요. 어떤 익명으로 남기 원하고, 어떤 소비자의 위치를


거부하죠. (...) 영화관에 안간지 10년도 더 되었어요]] 연극적이면서 간편한 태도 ;


창녀는 그들의 몸을 팔죠, 몸은 일종의 매개체입니다. 고객과 그 자신을 연결짓는


거죠. [[완전한 순수란 없다]]그는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적극적 참여]]을 말한다 ;


[[난 모든 것을 요구하는 법을 배웠죠,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주는 것도 배웠어요.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어요, 모두 설명하니까요.]] 무거운 분위기에서 그가 덧붙인다 ;


[[존중하며 경외하는 그런 감정이 있어요.]] 아틀라의 딸들의 증언이 효과적으로


이어졌다. 레퀴엠처럼.


인터뷰어 사브리나 샴프노아 sabrina champenois


사진 앙투안 다가타. 매그넘 magnum.


1961/11.19


마르세이유 출생


1981.3.19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음


1987


처녀 전시;


살바도르 내전


1998


처녀 출판;


말라 노체 mala noche


1994,1995,2000,2007


4명의 딸의 출생


2016


아틀라


;전시 및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