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시 에민_ 인터뷰
본지는 트레이시 에민이 루이스 부르주아 1와의 전시를 가진 후 : 날 버리지 마세요 카롤리나 니치 갤러리, 뉴욕(2010. 9.3-11.13), 그와 인터뷰를 싣는다. 그는 이 후에 런던에서 전시(2011. 2.18-3.12)를 가질 예정
■ 트레이시 에민과의 대화(1) 2는 매우 촘촘해 보이게 바느질한 작품에 대해 설명을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내 질은 매우 촘촘합니다, 라고 그녀는 대답한다. 마치 그 말을 들으니 질을 꿰멘 모습이 상상되었다. 《맞아요, 난 내 질을 매우 촘촘하게 꿰맵니다》이런 말은 그의 유명한 《에르곤 쉴레의 계보》를 잇는 듯하다. 아직 그녀를 말할 때 등장하는 《트라우마적》인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신체를 부풀리거나(임신하거나 발기되어있는 신체), 불규칙적으로 붉은색 과슈를 종이에 칠하여 침투되도록 하였다. 트레이시 에민은 《가능한한 비밀스러운》심정을 보인다 : 《난 가벼움과 섬세함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난 그렇게 작업을 합니다. 내가 얼마나 특별한지 느낄 필요가 있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잉크의 분출할 때의 색, 통제불가함입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도 역시 비밀스럽다.: 그녀는 붉은 실로 매 작품의 오른쪽 하단에 바느질을 한다. 이런 합작은 루이스 부르주아가 트레이시 에민에게 전한 과슈연작으로 시작되었다. 내 《그녀의 것들 위로 내 이미지를 위치시키기》전, 2년이 걸렸다. 작가는 루이스가 그녀와 합작을 하며 편안히 용기를 북돋았다는 사실에 매우 감사하고 있다.《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만이 아닌,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만이 아닌, 단지 작품을 실현하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에민은 부르주아의 이미지나, 그녀의 주제, 그녀의 연작 제목을 선택하지 않았다. 날 버리지 마세요 는 단번에 완결작을 제시하였다.
십자가형
트레이시 에민이 하는 십자가형의 대상은 발기된 성기이다. 날 버리지 마세요 라는 제목은 특별하게 여운을 남긴다. 난 그녀에게 예수 수난의 길(Via Dolorosa)의 연작을 계획하고 있는 지 물었다. 여인의 신체가 십자가형 당하는 곳으로 향하는 길인지 말이다. 그녀는 자신은 예수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녀에게 《사랑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고통이 없는 사랑이란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매우 행복하게도, 그리고 고통스럽게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상징은 단지 감정이 아니다. 여기 그녀가 자서전에 기록한 문구가 있다. 이상한 땅 : 《난 의식이 몽롱해질 때까지 그리고 더이상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을 때까지 키스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상상하며 내가 십자가에 있는 것을 실감합니다. 예수가 나를 건너뛰는 것입니다. 난 충실한 신도는 아니지만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막을 건너는 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테러리스트이거나 그의 지지자가 있는 사랑에 빠진 자입니다. 물론 그의 지지자는 마리아-막달레나이겠죠(2) 3》
프랑스식 제목으로 번역하여 발음하자면, 그것은 예수에 대한 회의에 관한 말로 들린다. 영어로는 조금 명확하지 않다 : 왜 당신은 나를 버리십니까? 그리고 날 버리지 마세요. 라고 말이다. 전도사로써 이 초석에 새겨진 두 문장은 무덤과 연관지어진다 : 《넌 날 무덤으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부활을 약속함과 동시에 《예수는 나를 무덤 위로 버리지 않았다》라는 말이 된다. 이 독특한 연작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는 아들과 상관이 없다(예수와 여호와). 하지만 이 두 여성 작가는 탄생의 순간에 죽음을 가리키고 예수의 시련의 순간에 자궁을 가리킨다. 결국 죽음은 단순히 삶의 결말이 아니다. 《십자가형, 그것은 사랑을 하는 상징이다.》라고 트레이시 에민은 여전히 말한다. 그녀는 사실 페니스를 껴안는 형상을 그리거나 정액을 뿌리기 위해 무릎을 꿇는 형상을 그린다. 《단지 성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단계적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더욱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말이다. 그녀의 태도는 예수의 발을 향한 마리아-막달레나를 연상시킨다. 마치 기도자(3) 4의 형상을 연상시키듯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그러하다.
트레이시 에민은 이러한 해석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각각의 문구를 나타내는 두 개의 이미지에 집중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하였다 : 난 널 더 사랑하길 원해 그리고 더 다가가길 원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어떤 형상을 더 좋아하십니까?》
트: 내가 더욱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겠죠.
나: 인형은 여성의 배 안에 있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인가요?
어느 순간에 우리의 대화는 매우 긴장감이 돌았다. 난 뱃 속에 있는 듯한 다른 연작들의 형상을 파악하는 데 실수를 범하곤 했다. 그래서 트레이시는 뎃셍을 돌려놓고 더이상 뒷 배경으로 신체의 옆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풍경에 형상을 놓는 것이었다. 난 임신한 여성으로 보는 실수를 계속 했다. 이미지는 풍경의 그것이며 작가는 그것을 신체, 그녀 자신의 신체로 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작업과 연작에서 임신과 관련한 요소는 아주 중요하다(그녀의 설치작업 임신 상황을 느끼는 것 ). 임신하거나 최대한으로 축소된 작은 여자 형상이 일으키는 불균형을 생각하면, 《세상에 두는 것》이 바로 《세상에 신체를 두는 것》임을 추론케한다. 영어 표현에서 세상에 두는 것 과 세상 속으로 가는 것 을 구분하지 않으니, 이러한 해석은 틀릴 수가 있겠다.
나 : 당신은 탄생에 대해 말하는 것 같습니다.
트 : 아닙니다 ! 난 아이(더 이상은)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난 세상에 아이를 두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난 사람을 세상에 두고, 사람으로 세상에 뛰어들고 싶습니다! 난 세상 속에서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바깥에서가 아니고요.
나 : 그러면 이 연작에서 임신한 여인 형상부터 살펴볼께요.
트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잘못 본겁니다 ! 임신한 여성의 신체는 어머니의 것입니다. 어머니를 창조한 것은 루이스예요. 난 어머니에 관한 것을 만들었습니다. 유기, 그것에 루이스는 이렇게 말하겠죠 : 난 내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이해하겠나요? 둘 간의 합작입니다. 난 루이스편에서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말한 사람은 그저 형상입니다. 이제 아시겠나요?
나 : 당신이 그렇게 화를 내니 죄송합니다.
트 : 난 당신이 명확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잘 이해하고,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말이죠.
나 : 뱃 속에 있는 것을 잘 못 읽으면서 오류가 생긴 것 같습니다. 당신이 분명 배를 향한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트 : 아마도 루이스의 맥락에서 탄생은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 그것은 탄생이 아니예요. 그 부분이 이 작업을 특별하고 흥미롭게 하는 부분입니다. 우린 같은 언어로 말하지만, 이미지보다 훨씬 복합적이죠.
나 : 당신은 이미지의 층위가 생기는 것에 대해 동의하시나요?
트 : 네, 그것들 간에는 층위와 다른 층위가 분명 존재합니다.
삶과 죽음의 혼합
층위에 대해 말한 후(언어유희의 의도 없이 5), 대화읭 어조는 한층 차분해졌다. 대화에서 나의 오해가 한 번 일어난 이후에 모든 게 나아진 셈이다.
난 그녀에게 삶과 죽음의 혼합에 대한 사색이란 의미로 작업을 하는 지 질문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출생을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다. 그녀의 자전적인 요소는 여기에 밝힌다 : 《내가 태어났ㅇ르 때, 그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쌍둥히 남자형제가 태어난 이후에,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난 동그랗게 말린 상태로 나왔습니다. 아주 작고 노란빛이었으며 눈이 감겨져 있었다고 합니다.》이 일화의 끝에, '나'란 용어의 사용은 또한 이렇게 이어진다 : 《난 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으로 나온 순간에, 뭔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난 울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고, 내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습니다. 난 생명이 다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난 내가 나온 곳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4) 6》[내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새롭게 이 문구를 결론짓는 것은 뱃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이해하도록 한다. 문자 그대로 아이가 말할 수 있다면 작가는 연약함의 영역을 펼친다. 작은 크기의 형상은 아마 여성의 신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4개의 넢적다리를 다진 발기된 상태의 성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 뎃셍을 큰 성기 작은 소녀 라고 제목이 붙여진 작품과 연관지어 생각했지만, 그녀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단번에 알게 하였다. 《그것은 작은 소녀도, 여자도 아닙니다. 둘 사이엔 아주 다른 점이 있어요. 작은 소녀는 임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하지만 그 둘 다 강간할 수는 있겠죠. 》
트레이시는 날 곤란하게 하였다. 난 생각에 잠겼다 : 내가 이 부분에서 틀린 것인가? 어떤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인가? 난 하루나절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리고 친구 한명을 불러 그녀가 보는 것을 물었다. 그래, 난 한 여자가 보여. 《내부에》-그녀는 더 잘 말할 수 있었다-그녀는 임신한 여성이 보인다고 했다. 난 트레이시 에민이 보다 해석에 있어 거대한 도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그녀가 옳다고 하고 싶다.
어떻게 루이스 부르주아가 묘사한 출생 이미지인 임신한 여성위에 대문자로 쓰여진 트레이시 에민의 글을 읽을 것인가? 적어도 제목처럼, 그리고 어떻게 출생하는 동시에 죽을 수 있을까?
내게 더이상 주어진 공간은 없었다[...] 넌 내가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처럼 내 자리를 뺏었다. 마치 내가 당신의 영혼을 해하는 것처럼 나는 너에게 사실 너의 일부를 요구하지 않았어 나는 내가 그것을 거의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것은 단순히 태어남과 동시에 죽는 것이었어 난 내가 너무 노란색이었다는 것, 작은 크기였다는 것, 새로운 지옥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후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태어나면서 세상에 놓이는 것에 장애물이 많았다 내 두려움은 천사의 날개로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난 지금 내가 자유롭다는 것을 안다 자유로이 세상을 떠나고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핏더미가 없이 세상은 수없이 희롱을 한다. 난 이 빛의 한 입자가 될 것이다. [필자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상황이 바뀌었을 때, 그러니까 그녀가 출생할 때 세상에 나올 때 여전히 유산의 가능성이 있었다. 작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 《네게 부탁할께. 난 다시 보내지마, 이렇게 부탁한다. 여기 이 세상에서 너와 함께 머물고 싶어(5 7).》
순수한 빛
《세상 속으로》,그리고 너의 속으로가 아닌, 하지만 너와 《함께》인 말이다. 뉘앙스는 여기서 중요하다. 하지만 비극적으로, 《아기》는 그가 죽을 세계에 남아있다 : 그녀가 뻗은 팔 안에서 발견한 것은 죽음이다. 장례식에서 트레이시 에민은 어머니가 될 것이다. 자서전에서 보면 이 조산된 태아는 《어떤 것》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녀의 경우를 가리킬 때에는,《태아》가 되며 이후에 그녀의 손을 거치면서《아기》가 된다.
《5일여만에, 난 병원에 갔습니다. 내 친구 갈리는 택시를 부르고 내가 앉을 수 있도록 부축했었습니다. 난 꽃무늬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난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 횡설수설했습니다. 난 조금 화가 났습니다. 떨고 있었습니다. 택시가 온 이래로, 난 내 밑이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 다리 밑으로, 그리고 한 곁으로 말입니다. 난 내 손으로 그것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런던에서 아기의 요람을 흔들었습니다-내 아기는 죽었습니다- 내 다리와 손바닥 사이에서 말입니다. 어떤 확신이 듭니다 : 나를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6 8) 》
이 유산의 경험을 드라마적으로 표현한다(7 9> 의 주제">)여기에 의사는 없다(!) 런던의 길가에서 당시 그녀는 아기와 함께 있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동시에 엄마로 존재할 수 있게 할 수도 있었던 아기를 유산한 순간이다. 끔찍한 경험을 하면서 그는 이 연작에서 더 이상 세상에 살아있는 신체를 놓지 않게 되었다. 그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분만한 것은 죽음이었다. 그녀의 탄생이 다시 돌아가고픈 욕구와 닮아있었다고 반복해서 말하듯이, 그녀는 태어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로써 그것은 자궁이 아니라 신체로부터 떨어진 곳이며, 순수한 빛으로 묘사한 곳이다. 그녀는 대화 중에 내게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을 말했다. 그녀는 세상 속에 형상을 놓으려 했으며 그녀가 살기를 바랬으며, 종위 위에 현존하기를 바랬다. 왜냐하면 삶도 죽음도 그녀에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원고는 이 두 상태가 서로 상충되지 않고, 복합적으로 서로 섞이는 것을 보여준다.
트레이시 에민과 루이스 부르주아의 합작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창조와 선-창조사이의 평행선을 긋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수없이 대화를 나누며 여러 경험들을 한 결과 어떤 관점을 제시한다 : 두 개의 강간, 두 개의 낙태, 그리고 자궁내막증의 병환(신체에 퍼지는 자궁의 세포) 는 아마도 이 연작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그녀가 인정했다. 이런 주제로 어떤 도전을 한 것인가! 트레이시 에민의 말을 따르면 이렇다 : 《그녀는 내 작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날 선택했고, 합작도 그녀의 아이디어였습니다.》 날 버리지 마세요 는 루이스 부르주아가 96세에 발표한 작품이자, 트레이시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그녀 역시 뎃셍에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일까?(8 10) 에민은 합작에 쏟아지는 무수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홀로 탐험을 이어가고 있다 : 풍경의 그것이다. 그녀는 또한 루이스 부르주아의 전시를 구성하는 프로젝트를 다음년도에 부르클린 미술관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
이다. 2년간 이 가장 젊은이는 텍스트, 뎃셍, 과슈로 옆모습을 표현하였다 ; 총합은 18개의 화폭으로 이뤄졌다. 이 인터뷰 이후에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새로운 전시인 다른 신에게 기도하기 를 위해 떠났다.
■ 트레이시 에민과의 대화(1) 2는 매우 촘촘해 보이게 바느질한 작품에 대해 설명을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내 질은 매우 촘촘합니다, 라고 그녀는 대답한다. 마치 그 말을 들으니 질을 꿰멘 모습이 상상되었다. 《맞아요, 난 내 질을 매우 촘촘하게 꿰맵니다》이런 말은 그의 유명한 《에르곤 쉴레의 계보》를 잇는 듯하다. 아직 그녀를 말할 때 등장하는 《트라우마적》인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신체를 부풀리거나(임신하거나 발기되어있는 신체), 불규칙적으로 붉은색 과슈를 종이에 칠하여 침투되도록 하였다. 트레이시 에민은 《가능한한 비밀스러운》심정을 보인다 : 《난 가벼움과 섬세함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난 그렇게 작업을 합니다. 내가 얼마나 특별한지 느낄 필요가 있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잉크의 분출할 때의 색, 통제불가함입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도 역시 비밀스럽다.: 그녀는 붉은 실로 매 작품의 오른쪽 하단에 바느질을 한다. 이런 합작은 루이스 부르주아가 트레이시 에민에게 전한 과슈연작으로 시작되었다. 내 《그녀의 것들 위로 내 이미지를 위치시키기》전, 2년이 걸렸다. 작가는 루이스가 그녀와 합작을 하며 편안히 용기를 북돋았다는 사실에 매우 감사하고 있다.《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만이 아닌,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만이 아닌, 단지 작품을 실현하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에민은 부르주아의 이미지나, 그녀의 주제, 그녀의 연작 제목을 선택하지 않았다. 날 버리지 마세요 는 단번에 완결작을 제시하였다.
십자가형
트레이시 에민이 하는 십자가형의 대상은 발기된 성기이다. 날 버리지 마세요 라는 제목은 특별하게 여운을 남긴다. 난 그녀에게 예수 수난의 길(Via Dolorosa)의 연작을 계획하고 있는 지 물었다. 여인의 신체가 십자가형 당하는 곳으로 향하는 길인지 말이다. 그녀는 자신은 예수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녀에게 《사랑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고통이 없는 사랑이란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매우 행복하게도, 그리고 고통스럽게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상징은 단지 감정이 아니다. 여기 그녀가 자서전에 기록한 문구가 있다. 이상한 땅 : 《난 의식이 몽롱해질 때까지 그리고 더이상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을 때까지 키스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상상하며 내가 십자가에 있는 것을 실감합니다. 예수가 나를 건너뛰는 것입니다. 난 충실한 신도는 아니지만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막을 건너는 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테러리스트이거나 그의 지지자가 있는 사랑에 빠진 자입니다. 물론 그의 지지자는 마리아-막달레나이겠죠(2) 3》
프랑스식 제목으로 번역하여 발음하자면, 그것은 예수에 대한 회의에 관한 말로 들린다. 영어로는 조금 명확하지 않다 : 왜 당신은 나를 버리십니까? 그리고 날 버리지 마세요. 라고 말이다. 전도사로써 이 초석에 새겨진 두 문장은 무덤과 연관지어진다 : 《넌 날 무덤으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부활을 약속함과 동시에 《예수는 나를 무덤 위로 버리지 않았다》라는 말이 된다. 이 독특한 연작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는 아들과 상관이 없다(예수와 여호와). 하지만 이 두 여성 작가는 탄생의 순간에 죽음을 가리키고 예수의 시련의 순간에 자궁을 가리킨다. 결국 죽음은 단순히 삶의 결말이 아니다. 《십자가형, 그것은 사랑을 하는 상징이다.》라고 트레이시 에민은 여전히 말한다. 그녀는 사실 페니스를 껴안는 형상을 그리거나 정액을 뿌리기 위해 무릎을 꿇는 형상을 그린다. 《단지 성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단계적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더욱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말이다. 그녀의 태도는 예수의 발을 향한 마리아-막달레나를 연상시킨다. 마치 기도자(3) 4의 형상을 연상시키듯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그러하다.
트레이시 에민은 이러한 해석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각각의 문구를 나타내는 두 개의 이미지에 집중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하였다 : 난 널 더 사랑하길 원해 그리고 더 다가가길 원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어떤 형상을 더 좋아하십니까?》
트: 내가 더욱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겠죠.
나: 인형은 여성의 배 안에 있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인가요?
어느 순간에 우리의 대화는 매우 긴장감이 돌았다. 난 뱃 속에 있는 듯한 다른 연작들의 형상을 파악하는 데 실수를 범하곤 했다. 그래서 트레이시는 뎃셍을 돌려놓고 더이상 뒷 배경으로 신체의 옆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풍경에 형상을 놓는 것이었다. 난 임신한 여성으로 보는 실수를 계속 했다. 이미지는 풍경의 그것이며 작가는 그것을 신체, 그녀 자신의 신체로 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작업과 연작에서 임신과 관련한 요소는 아주 중요하다(그녀의 설치작업 임신 상황을 느끼는 것 ). 임신하거나 최대한으로 축소된 작은 여자 형상이 일으키는 불균형을 생각하면, 《세상에 두는 것》이 바로 《세상에 신체를 두는 것》임을 추론케한다. 영어 표현에서 세상에 두는 것 과 세상 속으로 가는 것 을 구분하지 않으니, 이러한 해석은 틀릴 수가 있겠다.
나 : 당신은 탄생에 대해 말하는 것 같습니다.
트 : 아닙니다 ! 난 아이(더 이상은)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난 세상에 아이를 두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난 사람을 세상에 두고, 사람으로 세상에 뛰어들고 싶습니다! 난 세상 속에서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바깥에서가 아니고요.
나 : 그러면 이 연작에서 임신한 여인 형상부터 살펴볼께요.
트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잘못 본겁니다 ! 임신한 여성의 신체는 어머니의 것입니다. 어머니를 창조한 것은 루이스예요. 난 어머니에 관한 것을 만들었습니다. 유기, 그것에 루이스는 이렇게 말하겠죠 : 난 내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이해하겠나요? 둘 간의 합작입니다. 난 루이스편에서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말한 사람은 그저 형상입니다. 이제 아시겠나요?
나 : 당신이 그렇게 화를 내니 죄송합니다.
트 : 난 당신이 명확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잘 이해하고,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말이죠.
나 : 뱃 속에 있는 것을 잘 못 읽으면서 오류가 생긴 것 같습니다. 당신이 분명 배를 향한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트 : 아마도 루이스의 맥락에서 탄생은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 그것은 탄생이 아니예요. 그 부분이 이 작업을 특별하고 흥미롭게 하는 부분입니다. 우린 같은 언어로 말하지만, 이미지보다 훨씬 복합적이죠.
나 : 당신은 이미지의 층위가 생기는 것에 대해 동의하시나요?
트 : 네, 그것들 간에는 층위와 다른 층위가 분명 존재합니다.
삶과 죽음의 혼합
층위에 대해 말한 후(언어유희의 의도 없이 5), 대화읭 어조는 한층 차분해졌다. 대화에서 나의 오해가 한 번 일어난 이후에 모든 게 나아진 셈이다.
난 그녀에게 삶과 죽음의 혼합에 대한 사색이란 의미로 작업을 하는 지 질문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출생을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다. 그녀의 자전적인 요소는 여기에 밝힌다 : 《내가 태어났ㅇ르 때, 그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쌍둥히 남자형제가 태어난 이후에,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난 동그랗게 말린 상태로 나왔습니다. 아주 작고 노란빛이었으며 눈이 감겨져 있었다고 합니다.》이 일화의 끝에, '나'란 용어의 사용은 또한 이렇게 이어진다 : 《난 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으로 나온 순간에, 뭔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난 울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고, 내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습니다. 난 생명이 다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난 내가 나온 곳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4) 6》[내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새롭게 이 문구를 결론짓는 것은 뱃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이해하도록 한다. 문자 그대로 아이가 말할 수 있다면 작가는 연약함의 영역을 펼친다. 작은 크기의 형상은 아마 여성의 신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4개의 넢적다리를 다진 발기된 상태의 성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 뎃셍을 큰 성기 작은 소녀 라고 제목이 붙여진 작품과 연관지어 생각했지만, 그녀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단번에 알게 하였다. 《그것은 작은 소녀도, 여자도 아닙니다. 둘 사이엔 아주 다른 점이 있어요. 작은 소녀는 임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하지만 그 둘 다 강간할 수는 있겠죠. 》
트레이시는 날 곤란하게 하였다. 난 생각에 잠겼다 : 내가 이 부분에서 틀린 것인가? 어떤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인가? 난 하루나절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리고 친구 한명을 불러 그녀가 보는 것을 물었다. 그래, 난 한 여자가 보여. 《내부에》-그녀는 더 잘 말할 수 있었다-그녀는 임신한 여성이 보인다고 했다. 난 트레이시 에민이 보다 해석에 있어 거대한 도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그녀가 옳다고 하고 싶다.
어떻게 루이스 부르주아가 묘사한 출생 이미지인 임신한 여성위에 대문자로 쓰여진 트레이시 에민의 글을 읽을 것인가? 적어도 제목처럼, 그리고 어떻게 출생하는 동시에 죽을 수 있을까?
내게 더이상 주어진 공간은 없었다[...] 넌 내가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처럼 내 자리를 뺏었다. 마치 내가 당신의 영혼을 해하는 것처럼 나는 너에게 사실 너의 일부를 요구하지 않았어 나는 내가 그것을 거의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것은 단순히 태어남과 동시에 죽는 것이었어 난 내가 너무 노란색이었다는 것, 작은 크기였다는 것, 새로운 지옥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후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태어나면서 세상에 놓이는 것에 장애물이 많았다 내 두려움은 천사의 날개로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난 지금 내가 자유롭다는 것을 안다 자유로이 세상을 떠나고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핏더미가 없이 세상은 수없이 희롱을 한다. 난 이 빛의 한 입자가 될 것이다. [필자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상황이 바뀌었을 때, 그러니까 그녀가 출생할 때 세상에 나올 때 여전히 유산의 가능성이 있었다. 작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 《네게 부탁할께. 난 다시 보내지마, 이렇게 부탁한다. 여기 이 세상에서 너와 함께 머물고 싶어(5 7).》
순수한 빛
《세상 속으로》,그리고 너의 속으로가 아닌, 하지만 너와 《함께》인 말이다. 뉘앙스는 여기서 중요하다. 하지만 비극적으로, 《아기》는 그가 죽을 세계에 남아있다 : 그녀가 뻗은 팔 안에서 발견한 것은 죽음이다. 장례식에서 트레이시 에민은 어머니가 될 것이다. 자서전에서 보면 이 조산된 태아는 《어떤 것》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녀의 경우를 가리킬 때에는,《태아》가 되며 이후에 그녀의 손을 거치면서《아기》가 된다.
《5일여만에, 난 병원에 갔습니다. 내 친구 갈리는 택시를 부르고 내가 앉을 수 있도록 부축했었습니다. 난 꽃무늬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난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 횡설수설했습니다. 난 조금 화가 났습니다. 떨고 있었습니다. 택시가 온 이래로, 난 내 밑이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 다리 밑으로, 그리고 한 곁으로 말입니다. 난 내 손으로 그것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런던에서 아기의 요람을 흔들었습니다-내 아기는 죽었습니다- 내 다리와 손바닥 사이에서 말입니다. 어떤 확신이 듭니다 : 나를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6 8) 》
이 유산의 경험을 드라마적으로 표현한다(7 9> 의 주제">)여기에 의사는 없다(!) 런던의 길가에서 당시 그녀는 아기와 함께 있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동시에 엄마로 존재할 수 있게 할 수도 있었던 아기를 유산한 순간이다. 끔찍한 경험을 하면서 그는 이 연작에서 더 이상 세상에 살아있는 신체를 놓지 않게 되었다. 그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분만한 것은 죽음이었다. 그녀의 탄생이 다시 돌아가고픈 욕구와 닮아있었다고 반복해서 말하듯이, 그녀는 태어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로써 그것은 자궁이 아니라 신체로부터 떨어진 곳이며, 순수한 빛으로 묘사한 곳이다. 그녀는 대화 중에 내게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을 말했다. 그녀는 세상 속에 형상을 놓으려 했으며 그녀가 살기를 바랬으며, 종위 위에 현존하기를 바랬다. 왜냐하면 삶도 죽음도 그녀에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원고는 이 두 상태가 서로 상충되지 않고, 복합적으로 서로 섞이는 것을 보여준다.
트레이시 에민과 루이스 부르주아의 합작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창조와 선-창조사이의 평행선을 긋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수없이 대화를 나누며 여러 경험들을 한 결과 어떤 관점을 제시한다 : 두 개의 강간, 두 개의 낙태, 그리고 자궁내막증의 병환(신체에 퍼지는 자궁의 세포) 는 아마도 이 연작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그녀가 인정했다. 이런 주제로 어떤 도전을 한 것인가! 트레이시 에민의 말을 따르면 이렇다 : 《그녀는 내 작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날 선택했고, 합작도 그녀의 아이디어였습니다.》 날 버리지 마세요 는 루이스 부르주아가 96세에 발표한 작품이자, 트레이시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그녀 역시 뎃셍에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일까?(8 10) 에민은 합작에 쏟아지는 무수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홀로 탐험을 이어가고 있다 : 풍경의 그것이다. 그녀는 또한 루이스 부르주아의 전시를 구성하는 프로젝트를 다음년도에 부르클린 미술관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
- Louise Bourgeois (1911.12.25- 2010.5.31) 프랑스 조각가. 설치미술가. [본문으로]
- 2010.10.25 일 유선상 이뤄진 대화 중에서 [본문으로]
- Strangeland, Hodder and Stoughton, 2005 [본문으로]
- 자서전 Preying for a penis 중에서 [본문으로]
- 프랑스어로 couche ; 층위는 '잠자리'란 뜻도 가진다. [본문으로]
- lbid., p.3 [본문으로]
- lbid., p.157 [본문으로]
- lbid., p.158 [본문으로]
- "1990 [본문으로]
- 1999, 저런 판타스틱 이름 [본문으로]
- 예술비평가이자 번역가 미국에서 열린 뒤샹과 초대전시에서 저술한 바 있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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