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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2.18 그럴 만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럴 만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아침 나절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눈으로, 그리고 같이 내리기 시작하는 일요일이었다.

이 곳에 온지 10일째, 아침에 눈이 오면 그 날 하루 꼬박 찌푸리는 한국과 달리 이곳은 금새 표정을 바꾸어 버리곤 하는 지라, 곧 날이 나아지겠지 은근한 기대를 하였다.

 

이 곳에 와서 외출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하나 있다. 말끔하게 단장하기도 아닌, 밥먹기도 아닌, 길과 지하철 경로를 미리 찾아두기 이다. 아직, 엉뚱한 역에서 그리고 거미줄같이 아니, 오히려 불규칙적으로 꼬인 실타래같은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꼬부랑꼬부랑 눈빠지라 쳐다보며 당황하기 일쑤이다.

 

 다행인 것은 지하철 노선마다 색깔과 숫자가 크고 뚜렷하다는 일관성이 있어,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마저도 아직은 지도와 눈싸움을 벌여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일요일 아침 동네 근처에 쏘(sceaux)공원, 이른바 제 2의 베르사이유 궁전이라는 별명을 가진 공원을 산책하고, 얼마전에 발견한 대형마트인 오샹(auchan)을 둘러보리라 생각하고 나왔다.

 

눈발이 휘날리는 것이 못내 찜찜했지만, 그래도 어쩌면 나아질 것이다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공원으로 가는 15분 내내 눈발은 이제 45도가 아닌 거의 30도로 강풍과 함께 불어닥치기 시작했고, 눈을 가끔 찌르는 터라 우산도 안 챙겨온 나의 부주의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나온 길을 다시 돌려서 가기는 싫었다. 어둡고 어두운 숙소로 다시 돌아가자니 차라리 이 추위와 눈과 마주하는 게 나은 것 같았다. 거리에는 유독 사람이 없었다

곧 표지판을 따라 가다보니, 공원입구로 가는 기다란 길이 나왔다. 메타세콰이어길 같이 병사들의 행렬처럼 다소 장엄하기까지 보였다.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꺼내서 포커스를 맞추는 순간, 나는 순간적인 아찔함을 느꼈다. 양 옆으로 줄지어 선 나무들의 끝이 정확히 일점 투시도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었다. 정원사가 직접 다듬었어도 놀랄 일이고, 직접 다듬지 않았어도 놀랄 일이었다.

 

이백여미터를 걸어가자, 철문 너머로 조그만 성이 보였다. 그리고 점점 그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바로, 조깅하는 프랑스인들이었다. 나는 이 눈발날리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저들은 무릎까지 오는 레깅스를 입고, 헤드폰을 끼고, 하얀 입김을 날리며 달리고 있다.

 

 

주차장에 빼곡한 차들은 이 성을 배경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사진찍거나, 관광을 하러 온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다. 이 멋진 성을 배경으로 '달리기'위해서 이 곳까지 온 사람들의 것이었다.

내 옆에 어떤 남자는 이제 막 트렁크에서 꺼낸 운동화를 갈아신고, 달릴 참이었다.

 

점점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자, 한 두명이 아니라 몇 십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코트를 입고, 워커를 신은 사람, 공원의 조약돌 길이 아니라 아스팔트에 어울리는 여자는 바로 나뿐이었다.

 

공원은 한창 공사중이었다. 아니, 새롭게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이 궂은 날씨 와중에도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이 공원에 '공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조경은 여러 식물의 잎과 꽃봉오리을 모티브로 한껏 멋을 부리고, 공원의 조약돌은 이런 장식적이고 섬세한 '자수'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오커색에서 라이트브라운까지 톤 조절을 하였다.

 

전체적으로 성은 마을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해있었고,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공원과, 그 너머로 마을의 지붕들이 어깨를 나란히하고 있다. 이제 공원도 봤겠다 돌아갈까 하다가, 왠만하면 더 둘러보자는 생각에 밑으로 내려갔다. 계속 눈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이제는 정말 숙소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공원 샛길로 빠져나와서 가려는데, 순간 방향을 잃었다.

어쩔 수 없다. 그냥 표지판이 나올때까지 가보는 수밖에. 그런데, 길거리에는 왜 이리 사람이 없는 것인지, 공원을 나오는 순간 마치 영화 셋트장처럼, 그럴 듯한 집과 그럴 듯한 차들이 있을 뿐, 정말 사람 한명, 개도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는 것인가.

여유롭게 장을 보겠다는 생각은 터무니 없었다. 한참을 둘러서 20분 거리인 공원을 2시간여만에 걸쳐 겨우 숙소에 다다러서야 사람들 이 없는 이유를 알 듯 했다.

이런 날씨에는 집 안에 콕 들어박혀 있는 것이 상책인 것이었다. 날씨, 그것을 너무 쉽게 여긴, 타지에서 온 관광객은 괜시리 욕심을 내서 나선 까닭에 이런 꼴인 것이었다. 이미 현지인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바였다. 그들이 나올 때는, 조깅복을 단단히 차려입고 '나 운동할거야'라는 의지 하나로 나설 때 뿐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살 것 같았다. 입술에 델 정도로 뜨거운 커피도 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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