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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1.28 분열적 사랑, 펠릭스 가타리의 << 황무지 >> 분석

분열적 사랑, 펠릭스 가타리의 << 황무지 >> 분석

테렌스 멜릭의 첫 데뷔작 황무지가 1975년 개봉한 이래로, 6월 15일 재개봉한다. 여기에 펠릭스 가타리[각주:1]의 텍스트를 덧붙이고자 한다.

분열적 사랑

펠릭스 가타리가 본 <<황무지 >>


《펠 릭스 가타리는 영화 황무지의 분석을 보고 역겨움을 느꼈다.》리베라시옹 지에 1975년 7월 17일 실린 인터뷰 중에 실린 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프랑스 버전으로 야생으로의 산책 La Balade sauvage 이란 제목의  기이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 《이상한 비극》(르 몽드Le Monde),《어른이 되기 위한 요정이야기》(파리 마치Paris Match),《불가능한 사랑의 역사》(프랑스 수아France soir)등등...정신분석학자 펠릭스 가타리는 정신분열적 측면에서 이 영화를 보고 마틴 쉰과 시시 스파섹 간의 무기력한 사랑에 주목하였다. 마치 미친 사랑처럼 말이다. 인터뷰는 레볼루시옹 몰레큘레Révolution Moléculaire 를 통해 재편집되어 출간되었다(1977, 탐구 출판사 éditions Recherches). 펠릭스 가타리는 질 들뢰즈와의 공동 작업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반-오이디푸스 L'anti-Oedipe(1972, Minuit ) Mille Plateaux(Minuit, 1980)은 그의 기간이 되는 저서이다. 본 지면을 통해 그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비평가들이 보지 못한 사랑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난 그점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색채, 푸른 색의 요소가 충분히 불안을 자아낸다. 이 광적 사랑의 영화에 사람들은 그런 광기와 사랑을 동시에 보기를 거부한다. 여기에 살인자가 없을 뿐, 관계의 종말(원제 ; Pat Garret &Billy the Kid,1972) ,  위험한 질주 L'équipe Sauvage(원제; The wild one,감독 : Laszlo Benedek),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원제; Bonnie and Clyde,1967,감독; 아서 펜Arthur Penn )[각주:2]등등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정신분석학적으로 실험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즉, 이 영화는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야기는 단지 정신으로의 여행을 지탱하는 하나의 구실일 뿐이다. 매순간, 광기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한계상황은 충분히 생각해 볼 요소이다. 대체로 영화에 쏟아지는 평들은 제임스 딘을 모사했다는 게 전부이다. 하지만 여기서 첫번째로 생각할 요소는, 키트Kit와 홀리Holly를 따로 떨어뜨려놓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두명으로 구성된 합체이다. 홀리는 분열적이지 않지만 그녀의 행동이 키트의 정신을 분열시킨다. 반대로, 키트의 어떤 행동은 홀리에 종속된다. 그래서 우린 둘 모두 병리학적거나 정상적인 차원에서 다시 봐야한다. 역설적으로, 사실 모든 모든 영화는 이러한 광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광기란《그건 이유가 없기 때문》다는 생각으로 그에 대한 환상이 있다. 한편, 홀리는 단정한 소녀로 보여진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 《절대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거야》. 두 번째 로, 광기 이후에는 찾아오는 이 것 : 바로 사랑이다. 영화는 전형적이지 않은 사랑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키트가 홀리의 아버지를 죽이러 왔을 때,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 《걱정하지마》그리고 그를 때린 후, 동시에 안심시킨다. 그리고 처음으로 포옹을 한다. 키트는 전형적인 분열증세를 보이며 손을 내리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 《넌 스스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구나, 내가 느끼는 것을 네가 보여주는 거야 》. 하지만 그녀의 이런 무심함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 그는 그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가 그를 떼어내려할 때, 분노에 차서 권총으로 쏘려 하는 장면은 매혹적이다 ; 결국, 그는 그녀에게 이뤄지지 않을 만남을 약속한다.
 욕망의 정신분석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 개인을 욕망하는 기계로 보는 것 - 강력한 체계, 빛깔, 인상들, 시선의 조직세계-과 개인을 초월하여 보는 방법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나는 이 두 범주에서 몇 가지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길 위에서, 상자를 두드리는 순간의 장면이다 ; 아주 사랑스러운 순간이다 ; 마치 백설 같은 홀리가 오는 것을 보면서 내는 소리이다. 모든 게 《정상적》 으로 보인다. 하지만 물고기를 쥐거나, 타이어를 쥐는 것 등의 행동은 완전히 이상하다- 영화 내내 조약돌 테마도 그렇다. 여기엔 불안에 찬 행동, 광기어린 행위가 있다- 그가 홀리의 아버지를 죽일 때와 동굴에 그 시체와 머물 때, 그는 건배를 외친다 ; 그가 카토의 시체를 그늘에 놓을 때와 완변히 부조화스럽게 군대 행렬처럼 그 주위를 돌 때도 그렇다; 그가 디스크를 틀 때와 그것을 불태울 때도 그렇다.
 한편 여기엔 분열적 사랑의 장면도 있다. 그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린 고물차를 기찻길에 세워서 기차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거야 》. 그리고 카토의 집에서의 믿기지 않은 장면도 있다. 그는 권총 두발을 쏘며 이렇게 말한다 :《넌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난 보여주지 않을 거야.》내가 보기에 영화의 절정은 그가 아무 것도 듣지 못하도록 갇힌 빌라의 주인에 관한 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이 둘을 가지다니 너희들은 운이 좋은거야 》; 당시에, 모든 세부사항을 떠올려보면, 전혀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다른 중요한 주제는, 폐쇄적인 가족에서 목표의 상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큰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으로 추락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그것을 보며 몇년 후에 아마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키트는 상황이 안좋아지면 그의 가방을 챙기며 이렇게 말한다 : 《잃을 게 없어요》그는 아직 소년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그의 크레용, 연필 등을 나눠준다. 그건 그의 세계의 확장이며, 다른 부분과의 충돌이며, 진정한 분열인 것이다! 모든 가치들을 늘어놓으면서 충돌시키는 것이다. 그건 또한 화재라는 분열정 열락, 종말의 열망으로 나타난다.
 개인의 초월적 영역에서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우리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이 장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 《넌 보고 있어, 사람들은 우릴 뒤흔들고 있어.》 이 말은 경찰이나 공권력, 그리고 사회의 무력함을 겨냥한 말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제임스 딘의 말이기도 하다. 우린 핵폭탄, 공산당, 현상금 사냥꾼 등에 대해 비난할 수도 있다...베트남 전쟁에서 메가폰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 선배를 따라가야 한다..등등..

넌 말한다: 《그는 정신분열증이야》. 넌 말한다 :  《그는 반동분자야》.
 정신분열이나 편집증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기호의 세계에서는 그는 반동주의자다. 넌 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개, 혹은 나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너는 홀리와의 사랑, 욕망을 곧바로 나누고 있다. 우린 그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말하는 지 더이상 모른다. 모든 건 상호관계적 , 시선, 행동들에 문제다. 기호의 세계에선, 매일 이렇게 혼잣말한다 :《잡아라, 이상한 거다 ; 잡아, 그래, 좋아, 아직 보진 못했어》, 그리고 다른 것으로 넘어간다. 기호가 이렇게 대체하는 상황에선 이렇다 : 《난 경찰이다, 내 눈앞에서 널 잡겠어, 넌 현상금 사냥꾼이야, 네 목덜미를 잡겠어》, 여기엔 두 개의 통로를 가진 그림, 개인과 그 역활로 나주어지는 그림이 있다. 그는 어느 순간에, 확실히 반동분자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연인을 대칭으로 놓고 살아단다 ; 그는 경찰이나 연인, 아버지에게 비열한 작자이다. 이 분열증이 사회에 무의식적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편집적으로 작용한다 : 《당신은 내가 멈춘거에 화를 내고 있어, 당신이 영웅이 되려고,》 그는 곧바로 붙잡힌다. 그는 다른 이의 무의식으로 들어간다. 그는 미국사회를 간파한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제임스 딘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경찰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제임스 딘과 두번이나 그를 비교한다. 처음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임스 딘을 생각나게 해서 그가 좋아 》 결국, 모든 게 멈추고, 이렇게 말한다 :《마치 제임스 딘 같 군요》
  뭐. 내가 거의 알지 못하는 영웅을 좋아하는거다.

그는 내킹 콜Nat King Cole 처럼 되고싶었다. 전혀 제임스 딘과 닮은 점이 없는데!
 그는 그렇게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주 나약한 인간이었다. 텔레비전 스타를 볼 때처럼, 얼굴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네가 지나갈 곳은, 바다이던, 허공이든, 아주 거친 곳일 것이다. 우린 그 곳이 보다 순수하기 때문에, 모래, 빛깔, 부드러움이 있기 때문에 지나갈 것이다. 그들(비평가)는 그가 마치 동물같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건 틀린말이다. 이건 완벽히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이다.

영화에 대해 꼭 말해야 할 게 있다. 정치적 면이다. 젊은 경찰이 나온다.
 분명히, 그는 그를 겁주려고 했다.

같은 종류의 무기력함인데, 현재를 보면 사회는 완전하게 광기어려간다. 보안관이 도망다니는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고 있다. 군대는 소음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을 지키고 있다. 그녀가 한 말 :  《우리가 러시아인이기 때문이야》는 미국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좀비들의 밤 에서도 보이는 같은 대중적 현상이다. 무고한 흑인을 쏘는 것은 착한 미국인인 것이다...

 처음에, 이런 광기를 보리라곤 예상못했다.
 처음이나 결말, 그리고 매 순간이 그렇다.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다. 광기어린 사랑과 광기는 계속 존재해왔다. 그의 대사 중 : 《난, 여자를 때리진 않다. 그들과 잘 지내거든. 하지만 너는 좀 달라》; 혹은 :《날 안아줘, 키스해줘, 그래, 좋아.》 그는 이 스킨쉽에 매달린다. 아니, 사실은 위대한 사랑에 매달리는 것이다. 사랑은 사람으로 생겨난다. 그럼 아버지는 귀찮은 존재인가? 좋아, 그럼 그를 쏴버리면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가 그 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당신은 트릭을 조금 쓰는 것 같다. 처음엔 정상적이었다.
 전혀 정상적이지 않았다!

  가엾은 녀석, 그는 도로청소부이다. 별로 거기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가 그에게 일자리를 이야기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아침일찍 일어나도 괜찮아, 도로청소부일을 할거야》하지만 그는 곧 그일을 그만두고 사람들이 시켰던 일, 소를 키우는 일을 맡는다. 이 일은 나중에 그가 그녀와 함께 떠나는 계기가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떠나길 원치 않았다. 아버지는 그를 싫어했고, 못만나게 하려했다. 그래도 그들은 계속 만났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녀를 벌하기 위해 개를 죽인다. 이 영화의 첫 번째 광기이다. 그렇다. 바로 아버지가 그 불씨를 지핀 것이다. 그이후에 그는 어땠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선생님, 당신의 딸을 무척 존경합니다. 그녀와 나를 왜 못만나게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나중에 그녀가 보길 원치않는다면, 내가 떠날 겁니다. 약속드려요.》 그녀의 아버지는 그말을 무시한다. 나중에, 집에 아무도 없을 때, 그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게 예정된 거야.》

 그는 그녀가 거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장했고 이렇게 말한다 : 《모든 걸 예상했어.》그는 스스로 갇힌 지옥의 문을 열기에 이른다. 모든 게 잘못되었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 모두가 권총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난 미국적 광기를 본다. 하지만 불량한 그만이 권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건, 정당 방위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이렇게 한 말이 있다 :《네가 우리집에 들어오다니, 경찰을 불러서 팔을 분질러주마》 그는 그녀의 아버지를 죽여야 했다.
 죄송하지만,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명확해집시다. 결말부분처럼 시작부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미쳐있었다. 광기가 사랑과 겹치면서 이런 분열증세를 보인것이다. 그가 그녀를 본 이후에, 광적 사랑이 시작되었고 그녀를 갖고자 잠시 누그러진 것이다. 그리고 일자리도 가진 것이다. 그는 그녀를 다시 보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난 도로청서부와 만날 수 없어》, 그는 괜찮은 직업으로 다시 그녀에게 돌아온다.

그의 광기가 누그러진게 아니다! 그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간 것이고,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넌 그만뒀잖아!》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일반적 범주는 공황, 불안감으로 터지곤 한다. 그건 이미 존재해온 것을 다시 드러내는 방식이다.》처음에 그를 상기시켜보라 :《신발 갖고 싶니? 1달러야! 죽은 개를 먹고싶어? 담배하나 줄래?》 그는 이렇게 말하고 냄새를 맡는다. 이 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이게 정상적인가?...모든 게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가  섹스한  뒤 한말을 생각해보라:《오늘 너무 많이 일했어.》자세히 보면 그도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홀리도 그걸 잘 알고 있다. 바로 그와 함께 떠나기로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널 좋아해, 하지만 넌 완전히 미쳤어! 그가 날 대하는 걸 보면, 이상해. 》

그렇다, 종종 그녀가 하는 말이다.
 처음에, 모든 게 앞뒤가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를 처음에는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기와 압박감때문에 연옥에 갇히게 되고 불행히도 그렇게 된 것이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면, 어떤게 되는 지 알것이다. 완전히 돌아버리는 것이다!

 광기어린 사회가 그를 더욱 미치게 하는 것, 그리고 법을 존중하는 완벽한 경찰도 그에 동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안하지만, 오역은 피해야 하겠다. 편집증이 반드시 반사회적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왜 편집증이 반사회적이지 않은가?
 왜냐하면 반사회적이라는 건 잔다르크나, 히틀러 같은 인물등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는 사회에 하나의 징후를 상징한다 ; 《형 머리를 뽑아버리겠어》나 《엄마를 죽이고말거야》라고 내뱉는 철부지보다 덜 반사회적이다. 사람들은 그가 반동분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편집증적 리비도는 분열적 리비도의 아주 미세한 부분에 의해 촉발된다. 그것이 착한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혹은 반사회적이냐 순응적이냐 와는 상관이 없다. 철부지는 등에 히틀러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그가 파시스트는 아니다 ; 파시즘, 그것은 행동이며 구조적 유기체인 것이다. 아마 우리의 무의식에서 파시즘적 요소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역겨운 꿈을 꿀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린 사회에 대해 상상하며 품어왔던 바를 모두 바깥으로 표출하진 않는다. 단지 파시스트적 생각을 했다고 해서, 파시스트는 아닌 것이다,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으니까!

그가 아버지를 죽일 때, 그는 분명 광기에 몰려있다. 아버지가 죽지 않고, 여자는 말한다 :
《의사를 부를께요. 》그러자 그는,《아니 ,그러지 마라》. 그러자 그녀는 :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말할 께요》. 여기서 암시가 깔려있다. 만약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범인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 《소용없을 거야. 》이 말은 아무도 그녀를 믿지 않을 거란 걸 이야기한다. 연쇄적인 악순환이다.

 그렇다. 하지만 이미 처음에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또 거기엔 뒷 이야기가 있다...
  ..왜냐하면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트는 사실 냉혈한이다. 매번 다른 상황에서, 그가 매우 체계적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를 처음 죽였을 때 공황상태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계획했었다면, 무장을 했을 것이기에. 그는 일이 그렇게 될 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로 그는 세부사항을 이야기한다. 거기엔 항상 예상치 못한 부분이 있지만, 꼭 필요한 것은 우연으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여기에 영화가 던지는 농담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도 그가 체계적으로 철저하게 권총을 다룰 지 예상하지 못했다. 카토에겐 두번째였다. 처음엔, 누군가 그에게 누명을 씌워 격분케 한 때였다. 그는 끔찍한 분노에 휩싸였고, 여기엔 홀리의 아버지가 한 몫을 했다. 살해사건은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는 강한 동인이다.

 이 영화가 분열증에 관한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분열된 영화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분열적 영화이다. 나는 다른 비평문에서 이런 점을 언급한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떤 부분을 이야기 하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감독과의 인터뷰가 있다... 
 그럼 한번 보자.

  명백히, 《분열》이란 단어가 한 번 이상 나온 것 같다.
 광인을 보여주는 단어가 한 번 나왔을까? 세어보지 않았나?

 그렇지 않다. 그의 대사 중:《난 요정 이야기 속 아이들을 대하듯 그와 그녀를 생각한다; 보물섬, 허클베리 핀,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에서는 그같은 유형을 찾을 수 없다 : 그들은 본성을 잃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모른다. 그들은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이 무엇을 생각하는 지 모른다. 이렇게 그들이 감정이 없거나 감각이 마비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닐텐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끔찍하게도, 이건 타르트가 아니다! 정말 역겨우면서, 날 어지럽게 해.■ 



출처 : 28-31 page, Cahiers du Cinéma
기사 :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Felix Guattari (1930-1992)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학파의 철학적, 정치적 지평을 넓힘.가타리와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분리하여 욕망의 정치사회학을 수립하였다. [본문으로]
  2. 1960년대 후반 미국 사회는 물리적인 폭력이 난무한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이래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지난 역사에 대해 의식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는데 서부 개척시대의 갱을 빼놓고 논의할 수 없는 것이 자신들의 역사라고 생각하였다. 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클라이드(워런 비티)는 차 주인인 보니(페이 더너웨이)가 알아챈 것도 모른 채 차를 훔치려고 한다. 거세게 달려드는 보니에게 클라이드는 매력을 느끼고, 보니도 같은 감정이다. 공범 관계로 급속도로 가까워진 보니와 클라이드에게 클라이드의 형 벅(진 해크먼)과 모스(마이클 J.폴라드), 블랑슈(에스텔 파슨스)가 합세한다. 일행이 많으니 범행 수법도 대단해지는 반면 말도 많아진다. 어느 날 경찰에 붙잡힌 블랑슈를 구출해내자 오히려 그는 자기 몫을 내놓으라고 우긴다. 불화를 원하지 않아 할 수 없이 요구에 응하는 클라이드를 보니는 못마땅하게 여긴다. 꼬리가 길면 잡히듯이 경찰에 포위된다. 포위망을 뚫고 모스의 농장으로 피하기 위해 차를 몬다. 그러나 모스 아버지의 밀고로 이미 농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경찰의 기관총 세례를 받는다. 종래의 갱 영화와는 전혀 다른 작품으로, 아메리칸 뉴 시네마(American New Cinema)의 효시이다. 196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에스텔 파슨스)과 촬영상을 수상하였고,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페이 더너웨이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출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