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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nd Humour (1) 20세기 이전의 유머 _ ⓓ 19세기

캐리커쳐  : 이미지로 보내는 야유

프랑스 혁명은 결코 즐길거리가 아니다. 가볍든 무겁든 모든 이미지를 만든 죄로 인해 굶어죽거나 길로틴 처형대로 갈 위험이 있었다...충돌이 커지면서, 혁명은 웃음의 거대한 실험실로 바뀌었다. 캐리커쳐와 블랙유머는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고, 과감한 취향, 권위와 부당행위등을 표현하였다. 왕권에 대한 대항, 영국군, 타락한 풍습이나 공화국의 몰락에 대한 등도 입에 올랐다 : 모든 일에서 ; 틈새가 벌어진 것이다. 풍자 예술은 급소를 찌르곤 했다. 판화의 기술이 점점 개발되고 신문과 편집기술이 늘면서 대량 보급이 이뤄졌다. 대중은 이런 이미지들을 빠져들었다. 그리고 뎃셍화가들을 스타로 추앙했다 ; 대부분 무명이었지만. 연필을 놀려 사회의 단면- 특히 엘리트 사회를 -을 간결히 그려내는 그들은 말보다 이미지로 즉각적으로 비판정신을 드러냈다. 우스꽝스러운 과녁들을 향해서.

캐리커쳐의 4가지 법칙


1. 강자에게 《제길》이라고 말할 것.
라 퐁텐만큼 검열에 익숙해지며 모두가 알만한 사람을 암시하는 상징을 써라. 루이-필립에서는 배를,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묘사할 때는 군국주의의 경찰이나 포스탱의 변을 사용하라...

2. 부르주아를 모욕할 것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점령하는 부르주아들은 19세기의 승리자였다. 하지만 풍자화가들은 그들의 승리에 축배를 들 마음이 없었다. 대신, 전문가집단- 변호사나 의사들- 속물적 취향, 가식적인 태도, 무기력함등을 연필로 짚어냈다.
헨리 모니에 Henry Monnier ( 연극작가이자 배우였던 )도 역시 이 움직임에 동참하였다. : 가소롭게 위엄을 부리는 남자의 우스꽝스러운 태도였다. 거울에 비친 혐오스러운 형상과 순응주의자의 비장한 태도는 지금에도 자주 사용되는 주제이다.

3. 성적 열망을 만족시킬 것
아직 근엄하였던 시대에는, 캐리커쳐는 에로틱한 판타지를 제공하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거대한 남근, 엄청난 크기의 엉덩이, 그리고 희화화된 순수함은 코믹하게 재현되었다. 수많은 패러디는 Pass-Tems 에 실렸다. 이 앨범에는 젊은 여인들이 발기한 음경의 숲 한가운데를 은밀하게 산책하거나 정액을 뚝뚝 흘리는 머리를 가진 남자와 함께 춤을 추는 그림이 속해있다.

4.예술과 예술가들을 조롱할 것
 캐리커쳐는 조각과 회화를 가장 격렬하게 모욕하는 장르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19세기의 매번의 전시에서 뎃셍화가들 - Cham -은 그 취약함과 기이함을 강조하는 방향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그들은 시대의《거장》들을 혹독하게 평가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 앵그르 Ingre 의 거만한 태도. 쿠르베 Courbet 의 촌스러움, 인상주의 화가들의 광기등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대중과 비평가, 수집가들에게도 비판도 계속 이어갔다...캐리커쳐로 인해 예술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키곤 한다.

도미에 DAUMIER
풍자화의 미켈란 젤로 Michel- Ange

콜레주 드 프랑스 (프랑수와 1세에 의해 세워진 공개강좌제 고등교육기관) 에서는 거부당했지만, 1851년 쥴 미슐레 Jules Muchelet 는 도미에에 관해 이렇게 기술하였다 : 《당신은 외톨이요, 당신은 아무것도 없소. 사람이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바로 당신에 의해서요.》 마르세이유 중심부에서 건너온 이 작가는, 늘 그만의 고집을 지켜오곤 했다. la Silhouette 에서, 그리고 이후 Caricature 와 Charivari 에서, 그는 강자들을 단칼의 이미지로 처단하면서 소시민들의 풍속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중은 포복절도하였다. 반면, 정부는 그를 심판대에 불러, 협박하고, 창살에 가두었다. 가르강튀아 Gargantua 에서 황금 주머니를 게걸스럽게 먹는 루이-필립 왕이나 , 징벌로 뭉개진 시계침을 묘사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화 앞에 도비니 Daubigny [각주:1]회화를 놓고 모두가 쌀쌀하게 말한다 : 《 도미에가 낫겠는데 ! 》


1871년 11월 26일, 에클립스 l'éclipse 에 수록된 캐리커쳐.


검열과 소멸  l'éclipse et la Censure
기네의 앙드레 고시 André Gosset 가 앙드레 질 André Gill 에 대해 말한다.


도미에의 영향을 받은 앙드레 질은 샤렁통Charenton 에서 최후를 맞았다. 검열에 맞선 그의 투쟁도 무력했다. 그는 끊임없이 조롱하고 거부했다. 이클립스의 삽화가였던 그는 금기시된 주제들의 알을 피해 발걸음을 옮긴다. 우연히도, 현대의 금기시되는 것들과도 매우 닮아있다. 


출처  :  Beaux Arts Magazine N.326 , 2011.8
기사  :  Thomas Schlesser
번역  :  PLONGEUSE ( zamsoobu )
  1. Charles-François Daubigny (15 February 1817 – 19 February 1878) was one of the painters of the Barbizon school, and is considered an important precursor of Impressionism.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