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 프랑스
과연 최고의 프랑스 영화가 이스라엘 출신 감독에게서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인가 촬영하는 것이, 또 외국어를 차용하는 것이 전략이라면, 아름다운 풍경과 부딪히는 냉혹한 시선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이방인이 이스라엘이라면 더욱 그 간격은 거칠 것이다. 여기, 나다브 라비드의 영화, 시노님 Synonymes 을 보면 단순히 이방인 출신의 감독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볼 수 있다.
또한 나다브 라피드Nadav Lapid 의 전작인 The Kindergarten Teacher 인스티튜리스 L'Institurice 이래로 5년 만이다. 아마 이번 영화가 있기까지 주요한 두 부분이 무르익기까지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 부분은, 가녈픈 꼬마 Yoav 가 조각 같은 몸의 청년으로 충분히 성숙하기까지 말이다. 또 다른 한 부분은, 차분하고 명확한 미장센으로 기억되는 감독의 초기작들에 비해 이번 영화에서 다소 에둘러 말하거나, 심지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지러운 연출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 사이에, Yoav 는 어른이 되었고, <<훌륭한 이스라엘인>>으로써 군복무를 마쳤다. 건장하고, 강하고, 운동신경 있는, 전쟁과 열락을 위해 맞추어진 몸으로 단련되었지만, 그는 더 이상 모국을 견딜 수 없게 되었고, 프랑스에 이주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가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이상향적 세계인 프랑스와는 다르게, Yoav 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딴판이다.
단언컨데, Synonymes 은 놀랄만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건 비단 파리의 길거리들이 보이는 방식이, 소형 시안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이라서가 아니라, 주관성과 객관성이 혼잡해서라고 할 수 있다. 매 장면이 새로운 상념과 결합되고, 매 연결 부분이 예기치 않게 일어난다. 이러한 생동감 넘치는 미장센이 아주 드문 경우는 아니지만, 감독 Nadav Lapid 가 관객을 어떻게 이야기로 끌어들이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영화 Synonymes 은 센강 좌안의 고급스러운 파리지엔 건물에서부터 시작된다. Yoav 는 현관 앞 발판 밑에 숨겨둔 열쇠로 휑한 아파트 내부로 들어가고,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이 괴이한 실내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관객은 Yoav의 전라의 몸과 불쑥 맞닥뜨리게 된다. 발가벗은 채, 물건을 도둑맞은 채로 이집에서 저집으로 미친듯이 뛰어다니는 그를 보여주는 이 시퀀스는 픽션적 효과를 누릴 뿐 아니라, 오래된 커플인 에밀 émile (Quentin Dolmaire) 와 카롤린 Caroline ( Louise Chevillotte) 를 만나는 것으로 이어진다 ; 또한 관객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바로 주인공의 캐릭터 때문이다 : Yoav 는 스크린에 큰 존재감이 있지는 않았다. Tom mercier 가 분명 더 큰 존재감이 있는것은, Nadav Lapid 가 가산하는 방법이 아닌, 감산하는 방법에 의해 인물을 묘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어떠한 사회적 계층을 부여하지 않고, 그의 과거에 대해서도 크게 묘사하는 바가 없다. 단지, 몇가지 단서들( 테러리스트로 몰려 영국정부에 의해 사살된 할아버지 이야기, 아버지가 행군 중에 동상에 걸려 사망할 뻔 한 이야기)을 친구인 에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려는 듯,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식이다. 에밀은 지루한 일상으로 인해 더이상 영감을 받지 못하므로. 반면, 기부에 가까운 교환, 무용담과 화폐의 교환, 아니 말과 화폐의 교환은 이어지는 데, 만약 말들이 교환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Yoav 는 그것을 차곡차곡 모으기보다, 다시 천재의 재능으로 다시 환산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은 시적 가치가 있는, 혹은 빵 따위로 보상을 받거나; 그것도 아니면 코믹하게도, 동의어 사전에서 프랑스어로, <<겁쟁이>>,<<착한 사람>>을 배운다거나 하는 따위이다. 이런 부분이 대사에 유머러스함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잠깐, 영화 제목인 Synonymes 을 짚고 넘어가자. 왜 셋도 아닌, 다섯, 열 단어도 아닌 한단어인가? 잘 선택한 한 단어는 열 단어보다 효과적이다. 마치 에밀이 요아브에게 이스라엘을 묘사하기 위해 한 개만 고르라고 했을 때처럼. 하지만 Yoav의 말은 정확하다거나, 효율적인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겹쳐지는 말들의 힘. 이 Synonymes 동의어 의 게임은 오히려 의미와 개체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거나 해체하는 데에 있다. 언어학자 Josette Rey-Debove 의 말처럼, 동의어는 언어 체계 내부에서 <<의미와 세상의 언저리를 어렴풋하게 차지한다 >>. 이 것이 바로 이 영화의 덕목이다. Synonymes 동의어 가 언어의 의미를 무한대로 순환 시키듯, 독자들이 익숙하게 가지게 마련인 프레임과 도표를 벗어나면서.
예를 들면, 우리는 이스라엘 에 관한 질문을 <<인터뷰>>시에 던지지 않을 것이다. Nadav Lapid 의 구상은 보다 독특하고 강력하다. 헤브루어로 말하지 않는 다거나, Yoav 가 모국을 거부하고 국가정체성을 버린 것처럼, 뺏셈의 구상이다. 더군다나 같은 나라 사람들, 대사관 동료 Yaron 를 만났을 때에도, 프랑스어가 모태어인 것처럼 꾸미는 것도 그렇게 놀랍지 않다. 비록 대화신에서 한명은 헤브루어로 말하고, 다른 한명은 프랑스어로 대답을 하는 것이, 그러면서 서로가 이해를 하는 것이 이 영화의 독특한 아이디어이다. 반면에, 이국풍에 빠진 한 프랑스 작가( L'Inconnu du lac, Alain Guiraudie 에서 불안한 킬러를 연기했던) 가 나오는 씬은 냉소를 자아낸다. 발가벗은 Yoav 는 타블렛 렌즈 앞에서, 헤브루 어를 내뱉는다. 이 Synonymes 동의어 에서 프랑스에 대해, 보도록 하는 것은, 낯선 몸을 대하는 흡혈적 습성, 가혹한 착취 등이다. Quentin Dolmaire 와 Louise Chevillotte 오래된 커플이 가지는 복합적 관계도 여기에 한몫한다 : 창백한 낯의 부르주아, 300m2 의 유령의 성채같은 공간에서 오보에를 연주하는, 칼롤린과 에밀은 Yoav가 그 사이에 들어오면서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처음에는 환대하는, 동정하는, 이후로 그가 가진 격렬함에 매료되는. 영화에서 이러한 감정들이 어느 부분에서부터 오는 지 정확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흐름과 재흐름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감정들은 변화를 이어간다.
Nadav Lapid 는 전작 The Kindergarten Teacher 인스티튜리스 L'Institurice 에서 대화를 구성할 때 시어의 투명성에 많은 부분을 기대었다. 보다 변증법적인 방법을 위해서. 의미들은 는 보다 Yoav 의 행보에서 드러나는 모순적인 아이러니, 충돌, 갈등을 통해 변해나간다. <<완고함>>의 동의어로 <<고집>>을 더 선호하게 되거나, 말하자면 엔딩신에서 Yoav 가 머리로 문을 치며 열어달라 고집을 부릴 때, 과연 그 문은 열릴 것인가. 한편, 다른 씬도 그렇다. 카롤린의 연주회 씬에서, 무대 뒤에서 Yoav 가 열의없이 무기력하게 연주하는 단원들을 향해 연극적 톤으로 비난할 때, 우리는 그가 프랑스시민권 교육장에서 훈련받은 말들을, 아이러니한 말들을 내뱉으며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연설조의 이 말은, 그들을 향한 Yoav 의 메아리일 뿐 아니라, 시민권 교육에서 진행자가 언급했듯이, 자랑스러운 <<수탉>>들인 프랑스인들에게 자존감에 상처를 받는 말이다. 카롤린의 말마따나,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이스라엘 수탉>>- Yoav 를 가리키는 표현은 그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거부할 수 없는 그의 정체성이다. 그에 어울리지 않는 옷 차림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다시 벗어야 하는 것처럼.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백미는 이 모든 대척점들이 유머러스하게 맞부딪히는 부분일 것이다. 말하는 도중에 교대로 등장하는 신체, 춤추는 두 여인이 있는 바, 동료와 대화신, 테크노클럽에서 입에 빵을 물고 추는 춤. 개의 인생 Une vie de Chien, Chaplin, 1918 에서 채플린이 수염이 난 사내의 빵을 훔치는 씬이 연상이 된다. 같은 맥락인 것인가?
익살극의 주인공들은 정복자들에게 휘말려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자들이다. Yoav 는, 이스라엘인 Yaron이나, 파리지앵Emile 모두 에게 엑토르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실패자들을 예찬한다. 만약 그가, 이스라엘 적 에토스 <<지는 것을 금지하는>>를 거부한다면, Nadav Lapid 의 말마따나, 현 시대의 승자 의 초강력함도 거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복은, 릴케 Rilke가 그의 친구에게 썼던 글귀에도 있다 : <<잃는 것은 또한 얻는 것이다.>> ■
글 ; Paola Raiman
출처; page7-8, CAHIERS DU CINEMA, Mars 2019 #753
번역 ; plongeuse 잠수부
'★자료.번역(;Recherche > 매거진①까이에 뒤 시네마②ArtPress③BeauxArtsMagazin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컷 젬스 Uncut Gems 기사번역,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 #762 (2020.01.) (0) | 2020.02.12 |
---|---|
유리 감옥 안에서 (0) | 2019.07.26 |
Border, Ali Abbasi, 2019 (0) | 2019.02.01 |
독서노트_2018_12 (0) | 2019.01.14 |
BURNING, 진실의 화형대_libération 일간지 번역 (0) | 2018.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