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딜롱 르동 Odlon Redon-비관주의자

오딜롱 르동의 전시가 그랑 파리 Grand Paris(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열린다. 이번 전시를 두고 베르나르 뒤푸르[각주:1]가 암흑의 다른 《거장》들을 소개한다.  

□ 19세기 중반에 4명의 작가가 있다 : 로돌프 브레스뎅[각주:2](1822-1885), 에드가 드가[각주:3](1834- 1917), 오딜롱 르동(1840- 1916), 조르쥬 쇠라[각주:4](1859- 1891). 모두 비관주의를 담은 작가들이다. 브레스뎅은 가죽을 파서 검은색 유성잉크를 사용하였고, 르동은 그보다 석판화를 이용했다(르동은 브레스뎅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쇠라는 검은 목탄, 검은 파스텔이나 콩테를 앵그르지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드가는 단색의 그라스 잉크를 사용하였다.
 브레스뎅은 로베르 드 몽테스키외 Robert Montesquiou 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뎃셍화가로밖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종이보다 가죽에 새김질로 뎃셍을 하거나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작업을 하였다. 가죽에 산을 부어 불규칙적인 침식 현상을 이용하였다. 브레스뎅의 작품은 보쉬적인 괴물의 형상보다 판타지를 연상케 하였다. 몇 마리의 새를 제외하고는, 모든- 도시, 숲, 집, 건물 내부, 사냥하는 장면, 낚시하는 장면- 은 현실과 공존하면서도 비현실적이다. 꿈도 아닌, 악몽도 아닌 상태. 변형된 현실이거나 과장된 현실이었다. 어떤 장면도 이미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 뎃셍은 분명히 아카데믹한 특징이 있지만, 장면의 세부적 요소들, 사건, 현실감등을 보면 마치 아카데미를 조롱하는 듯하다.
 오딜롱 르동은 브레스뎅보다는 대중에게 잘 알려져있다. 그는 늘 추앙을 받았으며, 모사가들에게 모작의 대상이었다 : 그의 조각에 머리카락 표현을 보면 브레스뎅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빠르게, 그는 뛰어난 석판화작품을 발전시켜나갔다.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각주:5] 는 그에게 흑백의 석판화를 사들였다. 볼라르는 그에게 채색판화를 요구했지만. 르동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무의식적이 이어지도록 하였으며 일련의 정교함, 섬세함으로 작품을 이어갔다.
 한편, 채색된 작품들, 파스텔이나 유화에서 현실의 인물들(그의 아내, 자녀, 친구들)을 주제로 한  구상적 표현이 보인다. 그리고 풍경화에서 꽃병에 담긴 꽃다발은 이례적으로 정확하며, 생동감 있다. 그래서 마치 부드럽고 온화하게 리얼리즘을 표현한 듯, 마치 거울을 비추는 듯한 것이다. 아니면 반대로, 괴이한 잔인성으로, 바라는 삶인 유토피아나 불가능한 낙원의 상징으로 그 소재들을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인물의 얼굴, 눈의 부분적 표현을 보면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하거나 세기말에서 출현할 법하다. 그래서 관객은 작가가 가끔 비참한 현실이나 잔인한 현장들을 직접 보고 구성했다고 추측케 한다. 이런 인상은 불투명한 기층과 돌무더기에 짙게 깔린 검은색 잉크로 배가된다.
 르동의 석판화를 보면 : 일광 La lumière du jour , 1891, 유리창에 비친 역광에서 나무와 녹음진 잎사귀들이 보인다. 그리고 벽은 완전히 검고, 바닥도 검다. 목가적인 풍경인가? 왼편에는 백색의 화환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두 개의 검은 구멍이 뚫려있다 : 바로 해골이다!

파토스의 부재
 우리는 다음 비관주의자의 산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는 조르주 쇠라이다. 그는 19세기말 1891년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보다 일찍, 드가가 1834년 태어나 이후 1917년 사망하였다. 
 쇠라는 1880년경에 앵그르지에 콩테로 뎃셍을 하여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 : 랑시의 돌 부수는 사람 Casseur de pierres au Raincy  이다. 필자는 이 작품이 샤를 네그르의 1851년 사진작품인 걸어가는 굴뚝청소부 Ramoneurs en marche 와 같은 시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비록 실루엣이 움직이는 듯 하면서, 또 회색조의 단조로운 건물들의 풍광에서 흑색이 분명히 두드러더라도 말이다. 쇠라와 네그르는 공통된 현실의 관심을 공유했다. 그리고 자아와 파토스를 상실한 점도 그들의 공통점이다. 쇠라는 콩테의 효과를 증강시키면서, 장면을 단순화시켜, 인물표현도 제한하였다. 그는 백색의 거대한 배경에 대조적으로 검은 풍경을 구성하면서 섬세한 회색조를 띄면서 종이의 거친 질감을 연마시켜 표현하였다. 샤를 네그르의 사진처럼, 이 쇠라의 뎃셍은 현실의 삶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들은 늘 준비가 되있었다. 각각의 작품 속 인물들은 다른 작품 속의 하나의 활기를 주는 구성요소가 되곤 했던 것이다.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도 그렇다. 《활기를 주는》이란 단어는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틀렸다. 왜냐하면  쇠라의 걸작은 활력이 넘치지 않도록 신중히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드가는 그의 생에 후반부인 1880년대에 비관주의가 극대화되었다. 그는 조각에 이미 정통해 있었으며, 검은색 유성 잉크증의 아연이나 가죽판을 다시 덮으면서 빛을 재창조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숲을 표현하거나, 쉬폰천을 이용하여 넓은 부분을 처리하곤 했으며, 그리고 수성잉크로도 작업하였다. 가로 세로 너비가 42X59 센티미터의 판화에서, 그는 나체인 여인의 몸이 비치는 거울을 표현하며, 어두운 방의 내부를 보여준다. 왼편의 두번째 여인은, 쇼파 위에 벗은 채로 길게 몸을 뉘어있다. 그녀의 다리는 엉덩이를 데우기 위한 듯 벌러져있다 ; 세번째 여인, 오른편에 있는, 도 벗은 채이다. 모든 빛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 마치 드가의 모든 것을 불에 태웠다는 흔적이라는 듯, 강렬하다.
 검은 빛의 비관주의자들을 따르면서 우리는 이곳저곳으로 다니게 된다. 폭설과 오래된 마을, 그리도 매음굴, 선술집등으로. 고야와 렘브란트는 테이블에 앉아 흑백의 유리 판화를 하였다 ; 그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음화된 흑색은 아직도 미스테리이다.  ■   


출처 : 80-81page, ARTPRESS #380
기사 : Bernard Dufour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Bernard Dufour (born 1922 in Paris) is a French painter. He was notable for abstract painting after the Second World War, and later for portraits and human figures. [본문으로]
  2. Rodolphe Bresdin프랑스의 화가. 13세 때부터 손대고 있었다는 판화 시리즈 《쉬앵카유 Chien-Caillou》가 작가 상플루리(1821∼1889)의 창작의욕을 자극하여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같은 이름의 소설을 쓰게 했다. 기술적으로는 약간 치졸하면서도 착잡한 부조리의 환상적 세계를 그려 뛰어난 매력을 보여 준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프랑스 몽트를레 주요작품 《쉬앵카유》 본문 몽트를레 출생. 일찍이 파리로 나와 거의 독학으로 공부를 하고 13세 때부터 손대고 있었다는 판화 시리즈 《쉬앵카유 Chien-Caillou》가 작가 상플루리(1821∼1889)의 창작의욕을 자극하여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같은 이름의 소설을 쓰게 하였다(1847). 여러 곳을 방랑하는 동안 보르도에서 O.르동을 만나 캐나다까지 다녀왔다. 기술적으로는 약간 치졸하면서도 착잡한 부조리의 환상적 세계를 그려 뛰어난 매력을 보여 준다. [출처] 로돌프 브레스댕 [Rodolphe Bresdin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3. 프랑스의 화가.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아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했다. 인물동작의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해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했다[출처] 에드가르 드가 [Edgar Degas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4. 조르주 쇠라 [Georges Pierre Seurat, 1859.12.2~1891.3.29] 요약 신인상주의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연구하여 그것을 창작에 적용해 점묘화법을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로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을 그렸다. 인상파의 색채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한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P.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미술 출생지 프랑스 파리 주요작품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1883∼1884) ↑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 쇠라의 1885년 작. 207х308cm.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캔버스 위에 유채. 전작품의 수법을 한층 더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본문 파리 출생. 1878년 파리의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H.레만의 지도를 받다가, 다음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브레스트의 해안에서 병역을 마쳤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고전 작품을 연구하고 소묘에 힘을 쏟는 한편, 셔브뢸, 헬름홀츠 등의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연구하여, 1881년경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를 해명한 글을 발표하여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이론을 창작에 적용하여 점묘(點描)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 Une Baignade, Asnières》(1883∼1884)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884년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하였으나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일을 인연으로 평생 화우(畵友) P.시냐크와 사귀게 되었다.1885년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제작하여 다음해에 열린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전작(前作)의 수법을 한층 더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밖에 《포즈를 취한 여인들 Les Poseuses》(1888) 《기묘한 춤 Le Chahut》(1889∼1890) 《화장하는 여인》(1890) 등의 작품이 있다. 모두 인상파의 색채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한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P.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요절하였다[출처] 조르주 쇠라 [Georges Pierre Seurat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5. Ambroise Vollard (3 July 1866, Saint-Denis, La Réunion – 21 July 1939 in Versailles, France) is regard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dealers in French contemporary art at the beginning of the twentieth century. He is credited with providing exposure and emotional support to numerous notable and unknown artists, including Paul Cézanne, Aristide Maillol, Renoir, Louis Valtat, Pablo Picasso, André Derain, Georges Rouault, Paul Gauguin and Vincent Van Gogh. He is also well-known as an avid art collector and publisher.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