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는 갈수록 늘어간다
눈이 오는 날은 맑은 날을 고대하며,
맑은 날에는 눈이 오는 날을 추억한다.
배가 고프면 무언가 먹고 싶어서 허기에 두 눈이 멀고,
배가 부르면 게워내고 싶은 만큼 포만감에 부대낀다.
주거지를 떠난 '타지'에서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하루가 10분 같기도 하며, 10분이 10년 같기도 하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내게 길을 물어볼 만큼 현지인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스스로는 대화할 때 '겉으로만 그런 척', '알아듣고 이해하는 척'하고 있을 때가 많다.
이렇게 생존 본능에 따라 눈치는 하루 하루 늘어간다.
어제는 auchan 에 가서 '장보기'에 한참 동안이나 빠졌다가 겨우 헤어나와 정신을 차리고,
오후 늦게 즈음 집을 나섰다.
처음으로 찾아간 Sacre-coeur, Montmarte 언덕. 하지만 이 곳은 가혹하게 비를 내린다.
물론 우산은 없다.
심지어 '몽마르트'에 도둑들이 우글거린다길래, 땡전하나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Sacre-coeur 성당에서 바라보는,
6시를 너머 어둑해지면서 비에 젖은 파리의 정경은 온갖 감정을 자아낸다.
스산함, 따뜻함, 우울함, 신비로움, 환상과 몽상, 축축하면서 따뜻한 입김까지...
모든 감정이 한층 한층 겹을 쌓아간다.
어딜가나 관광지에는 호객꾼이 있기 마련, 어느 추레한 남성이 내 옆구리를 찌른다.
취기에 올랐던 감정들이 흐트러진다.
귓가에 COLD PLAY 의 음성이 들여온다.
지금 이 순간과 미치도록 궁합이 맞는 음악이다!
계단을 서둘러 내려간다. 저 구석에 검은 피부의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길가에는 할로겐등의 노란 빛이 비에 젖은 바닥의 돌들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크레페를 굽는 달달하고 시큼한 냄새가 솔솔 피어난다.
Paris je t'aime 라고 쓰여진 조악한 가방들과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여기 와서 놀란 점은 프랑스 '관광지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비싸고 형편없는 취향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잠시나마 비를 피하고, 언 손을 녹이기 위해 가게의 온기를 빌리기 위해 들어가서
물건을 고르는 척한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할 짓이 못된다.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이제 완전히 어둠이 내렸다.
약속 장소로 이제 가보자.
이 어둠과 빗속을 뚤고 가고 나서 그 끝에 어줍잖은 실망만 한다발 안게 되더라도
거기에서 무너지지는 말자.
이 것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며 한껏 스스로를 고무시키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 간다.
빗물이 두 눈 안에 들이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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