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건 매춘행위다_행위예술가 카를로스 긴즈버그

파리의 백야 축제[각주:1] 이후, 지난 10월 3번가 갤러리에서 카를로스 긴즈버그가 퍼포먼스를 하였다. 바로 예술이란 무엇인가? 바로 매춘행위이다. 보들레르. 이번 사건에 대해, 마르셀라 라쿱이 본 지에 평론을 기고하였다. 조금은 당황스러운 인상을 받은 마르셀라 라쿱은 이 번 사건이 예술에 대한 인식의 심연 속으로 침투하여, 우리가 뒤로 젖혀놓은 즐거움을 다시 끌어들이는 이 행위에 대해 평론을 썼다.

■ 카를로스 긴스버그[각주:2]의 퍼포먼스 《예술이란 무엇인가? 바로 매춘 행위이다》는 보들레르가 한 말로 36여년 동안 4번에 걸쳐 나타났다. 처음은, 1974년 앙베의 ICC에서, 실제로 매춘행위가 이뤄지는 곳의 벽보였다. 한밤중에 사람들은 앙베의 문으로 섹스를 팔기 위해 들어오곤 했다.  손님들이 이 곳으로 찾아들어오는 데에 이 예술작품으로 변환된 벽보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 반대로, 그녀들이 전하는 바로는 손님들을 끌어들이곤 했으며, 예술작품으로써 위상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두번째는 2006년 필라델피아의 슬로웃 재단Slought Foundation에서였다. 이 때, 광고판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배우였다. 그녀는 창부와 유사하게 흉내를 내어 옷을 벗고 있었지만, 광고판을 가리개로 삼아 그녀의 성별도 그녀의 가슴도 감추고 있었다. 부에노스 아일레스의 국립예술재단Le Fondo Nacional de las Arte에서 세번째로 이 말이 사용되었다. 2010년 7월,  인용구가 쓰인 광고판을 제외하고, 이 끔찍한 직업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외형적으로 매춘행위가 이루어진 듯 했다. 이 아름답고 슬픈 눈을 가진 여인은 보들레르의 문장을 제 스스로의 것처럼 여기는 듯 했다.  이 매춘을 열망하는 광고판은 수정을 거듭하며 그 개념이 바뀔 때까지 변형되었다. 네 번째 이 문장은 2010년 10월 2일에 나타났다. 백야 축제에서, 파리의 3번가 갤러리에서였다. 대중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게, 갤러리스트는 스스로 매춘여성의 역활을 연기하였다. 그녀는 암스텔담의 홍등가를 연상시키는 유리창 너머에 앉았다. 이전의 3번에 걸쳐 드러난 모습은 벽보의 형태였다. 처음엔, 파리시 의회의 협조로 모두가 벽보를 무료로 볼 수 있었다. 퍼포먼스는 뉴욕의 화이트박스와 브뤼셀의 백야 축제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카를로스 긴즈버그는 이미 이전부터 철학과 인간과학에 의해 진보해온 예술에 대해 이론과 가설을 들어 논쟁하곤 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피가 흐르도록 잔인하고》건조한 문구로 변한 이 광고판의 시학을 거론하고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처음으로 이 작품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는 제안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난 현대 예술의 비책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이 인용구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통해 보일 수 있었던 《능력》은 매춘의 그것일 것이다. 필자는 남창의 입장이 아닌, 이 부당한 처우를 받는 행동이 가진 어떤 비판적 태도를 텍스트로 옮기기로 하였다. 필자가 이 비평문을 쓰는 것이 마르셀 뒤샹의 유명한 작품 샘 에 사용된 변기를 역사학자에게 설명하는 행동 만큼 무례한 것인지 자문하곤 했다. 물론, 터무니 없는 겸손을 떨며 이 것을 의문으로 남겨둘 수도 있었지만, 카를로스 긴즈버그는 이를 세차게 부인하였다. 우린 이 광고판에 쓰여진 문구를 보고 《매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왜냐하면 매춘은 다른 이들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기보다, 어떤 모욕의 말이기 때문이다. 구어체에서, 이 단어는 특정 행동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본래 상업적이지 않은 것이 팔리는 것을 말한다. 매춘은 영혼을 파는 것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노동종사자가 생각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성의 영혼은 그들의 섹스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퍼포먼스에서 사용된 요소는-예술과 매춘의 대립-바로 이것이다. 매춘과 예술의 진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지를 알아보고자 한 시도였다. 이를 위해, 궤변의 가설을 나타내도록 연출-예술이 매춘이기 때문에, 매춘도 역시 예술이다 -하였다. 그리고 예술작품으로 매춘을 변형하는 데 같은 언어를 쓰지 않았다. 또한, 난 이 요소들에 이상하게도 섞여들어갔다. 사실, 매춘행위에 대한 비판과 이론에 능하다는 사실은 동등하게 여겨진다. 이 텍스트는 그래서 작품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작품이 내포한 의미를 말하려는 것이다.
 이 퍼포먼스는 매춘을 예술작업으로 바꾸기 위해, 그리고 인용구에 내포된 예술의 여러 가설들을 다양하하려는 목적으로 단계적으로 실험을 한 것이다. 최근에 언어를 매우 난해하게 표현한 것은 이런 연출을 통해 실험을 거쳐 파기되거나 인정되는 요소들을 더 잘 구분하고자 함이었다. 예술가의 이런 행위는 해부학책을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책에 기술되어 있는 바를 알기 위해, 독자는 시체를 분석하고 매달려야 한다. 하지만 이런 《분류》를 하려 할 수록, 문제적 광고판의 인용구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연출에 사용된 매춘의 요소들은 인용구에 내포된 예술의 가설들을 명확하게 하는 듯하다. 사실, 이 두 문구의 대립은 더욱 의미를 모호하게 한다. 이 광고판의 문구(예술이란 무엇인가? 매춘행위이다)는 정확히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문제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

대중이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우린 예술품 거래에 있어 상황들이 예술을 매춘으로 변형시키지는 않나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분석은 예술가와 창부의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작가는 매춘을 하는 공동집단 일지도 모른다 : 그들은 금전적 가치보다 더욱 값진 것이다. 예술가가 이 간단한 의미를 이 문장에 부여해서, 우린 그들이 반박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이 매춘 행위를 보면서, 그것이 진실이든 허구이든 중요하지 않고 예술가들이 창부가 아니란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카를로스 긴즈버그는 매춘이란 단어를 보들레르가 상징으로써가 쓴 방식이 아니라, 사전적 의미 그대로 쓴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 만약 당신이 예술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매춘을 상징적으로 쓴다면, 그것이 동시에 사전적 의미를 나타내는 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예술적 공연이 법적으로 가능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작가는 이 상징을 정당한 듯 이용하면서, 우리가 더이상 언어 유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우리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단어들을 말할 때 적절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들레르는 《예술가는 창부이다》라고 쓴 적이 없다. 또, 《예술가는 창부같은 특징이 있다》라고 말한 적도 없다. 단지 이렇게 말했다 : 《예술은 매춘 행위이다》라고 말이다. 전자와 후자의 간극은 분명하다. 이를 더 잘 알기 위해서, 이 인용구가 기술되어 있는 분출 항목과 연관지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런 문구이다 : 《사랑은, 매춘의 한 욕구이다. 고결한 열락은 매춘에 결코 적용될 수 없다. 무도회같은 광경을 보면 모두가 즐기고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매춘행위이다. 무리 속에 한 존재로서 겪는 희열은 신비롭다. 희열은 다수에 있다. 또 그것은 개인에게도 있다. 도취된 이는 많다(...) 사랑은 일반적 감정으로 표출된다 : 매춘의 성향이 그렇다 : 소유에의 욕구에 의해 타락할 뿐이다. 》(전편, 플레이야드, p.649).
 보들레르의 영향으로 예술과 매춘 행위는 동등하게 되었다. 그것은 《각자가 모두 즐기는》때에,《무리 속의 하나의 존재가 되는》희열이다. 대중의 열락은 보들레르 이후에, 마을의 비스트로에 댄스공연, 운문이나, 연극작품, 기도문 등에서 동등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희열을 개인적으로 누리는 것과, 남편이란 포식자의 기쁨에 반대한다. 바로 대중을 차단시키며 소중한 가능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중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처음에는, 누구라도 가능하다. 전시공간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대중이다. 마치 이는 창부에게 섹스를 요구하러 들어가는 손님과 같다. 여성의 신체를 보거나 전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단지 돈을 지불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다양한 것들을 살 수 있는 돈, 그것은 만국공통의 가치인 것이다 : 성경을 보면 이집트를 여행할 때, 빵 한조각, 감동적인 책 한권이 책을 대신한다고 한다. 가끔, 대중들은 창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람료를 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접근하는 상황이 개인화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나 가고 싶은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공간인 것이다. 공공 회사나 개인에 의해 후원받은 전시들과 파트너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창부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창부라는 결론은 그에게 섹스를 요구하며 지불하는 돈때문이 아니다. 대신, 창부는 모든 이에게 보여진다는 사실, 이를 보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나 원하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보여진다는 사실이 이런 결론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때문에, 예술가는 대중을 즐겁게 하지만, 이들은 일반의 범주를 벗어난 독특한 대중이다. 창부를 찾는 손님과 미술관의 방문객이 즐거움을 찾는 이들이란 점이 독특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여성들은 온 세상에 자신들을 맡긴다. 그녀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거절하면서 무엇이 되었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지켜보는 우리들을 대중으로 변환시키면서 말이다. 
 보들레르는 예술과 매춘이 공유하는 강력함과 거대함, 아름다움을 거절한 것이다. 그리고 개인성, 인격이 사라진 관계와 열락의 질을 따지지 않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예술만큼이나 매춘행위에서도 각자가 모두 즐기거나 스스로 다수 중의 한명으로써 즐긴다. 이 보들레르의 문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 작품판매상인, 창부가 아니라 손님이며, 관람자, 방문객, 독자이다. 매춘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소비하는 사람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증명하려는 우리가 열락의 기본 특성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즐기는가?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즐거운가? 보들레르는 예술적 열락의 관점에서 어떤 신화를 무너뜨리고자 하는가? 예술적 감정은 작품을 읽는 방식이 독특한만큼 일반적 감정과 조금 상이하다. 우린 생각한다 : 《프루스트는 이 부분에 대해 나만큼이나 쓰지 못했다 》,《이 문장에 맞는 사람은 나 이외에는 없다.》
 우린 가끔 이런 부류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것에 다가가면서, 영화를 보고 조형적 작품을 보는 그러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이 한 모든 관객이나 독자가 약탈자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이들이 오지 못하도록 막으며 작품을 훼손시키는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내 그 사실을 잊는다. 우리는 다행히도 선택받은 자들이며, 몇 초나 몇 시간, 혹은 여러날동안 다른 작품이 우리를 기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들레르가 분출 에서 말했듯이,사랑은 이런 맥락에서 매춘행위이다. 우린 상호관계의 한 개인으로 참여하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감정을 느끼며, 경험만을 하며 동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감정때문에 진지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생각해 낸 것은 우리와 함께 태어나고,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매춘부를 찾는 손님의 감정상황을 느끼면, 그들이 무엇으로 즐거운지 스스로 알수 있다. 최후에 남은 자는 그의 의자에 앉아, 누구도 볼 수 없는, 개인적으로 아무런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는,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그의 익명성을 즐긴다. 창부를 찾는 손님은 이런 점, 개인성이 없는 비-인격성을 위해 지불을 한다. 고객은 그 내면의 가장 깊은 것을 상기시키는 어떤 행동을 하여, 그 개인성을 없애기 위해 지불을 한다. 그들이 입에 올리며 즐기는 것이 섹스가 아닌 것이다. 섹스는 한 존재의 소멸을 말하는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양한 도취상태가 되는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이 퍼포먼스로 돌아오자. 보들레르의 문구가 맞다면, 카를로스 긴즈버그는 우리가 예술작품을 바라보면서 즐기고 있고, 이렇게 바라보면서 즐기는 같은 점때문에, 예술은 매춘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 퍼포먼스는 관람객을 매음굴의 고객으로 바꾸어 놓는다. 퍼포먼스는 우리를 예술작품의 소비자인 동시에 창부의 손님으로 이종 혼합시킨다. 이런 실험을 통해 자본주의자의 약탈자란 이유로, 변태성욕자, 강간범, 범죄자란 이유로 우리를 비난하며 스스로 고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카를로스 긴즈버그는 반대로 관람객들이 우리가 전시를 보거나 퍼포먼스를 보는 동안 우리를 창부의 고객들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자리로 인도한다. ■




출처 : 54-60page, artpress 376
기사 : Marcela lacub[각주:3]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Nuit Blanche 프랑스의 예술축제. 미술관, 공공갤러리, 또는 개인갤러리, 다른 예술행정기관들이 연합하여 음악, 영화, 춤, 퍼포먼스 아트 등의 활동을 함. [본문으로]
  2. 1946.아르헨티나 출생. [본문으로]
  3. 마르셀라 라큅은 법학자이자, CNRS에서 연구총괄책임자이다 :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