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 아이디어의 기원으로


하이 컬쳐 : 제네럴 아이디어, 회고전 1964-1994이 (2011.2.11-4.30) 총 300 여점의 작품으로 파리의 현대미술관에 열렸다(전시 기획자 프레데릭 보네와 오딜 뷜뤼로). 이 그룹의 세  작가는 1970년대과 1980년대에 제너럴 아이디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발견이 시대를 앞섰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여기에, 에릭 트롱시가 질문을 던진다 :

우린 어떻게 그들이 역설적으로 주창했던 것들로 인해 포화상태에 이르렀는가?

■《이 것은 제너럴 아이디어의 역사이며 우리가 원했던 역사이다. 우린 유명해지고, 매력적으로 보이길 바라며,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그건 우리가 예술가가 되고 싶어한다는 걸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유명하고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린 예술가이며 그것을 이용할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대단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 대단한 예술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우린 위대한 예술은 유명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술가의 이미지는 쉽게 흉내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빈번히 나타난 것처럼, 모든 예술가의 신화에 관해서( 베레모, 붓, 팔레트, 의미가 없이 내뱉는 말들)빈 껍질처럼 그것은 사용하기 편리한 것이다...또한 우린 유명하며, 예술을 하며, 예술의 이미지에 의해 만들어졌다. 》잡지 필FILE(1972년부터 1989년까지 제너럴 아이디어에 의해 출간된 잡지로 26호까지 출간되었다[1][각주:1]) 출반부가 펴낸 저서 《글래머 이슈Glamour Issue》에 수록된 말이다. 이 선언은 그들이 이 지점을 출발점으로 정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어떤 말을 전하고 있다(그들의 작품들, 그들의 야망, 그리고 그들의 본바탕에서 예술가들은 수치심을 가져야 한다거나 아주 명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인가?) 파리의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적으로 》열리는 전시에서 그들의 예술적 프로젝트를 살펴볼 수 있다. 현대를 이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전시를 통해 그가 가진 복잡함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이러한 선언의 다양한 면면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몇몇의 변화의 시기를 걸쳐- 찬란한 죽음 이후, 부활과 소생에 이르기까지-, 1975년의 진술과 그보다 35년 이후 현재의 회고전에 이르기까지, 이제 그것은 거리가 먼 개념이 되어버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린 제너럴 아이디어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떤 점때문에 제너럴 아이디어의 작품들이《시대》정신을 표현한다고 보는 것인가? 《캐나다의 집단 정신》이란 단어는, 전시 기사와 현실적 관심사로 이용되는 학술적 용어로 이어진다. 그리고 1975년의 웃고 넘겼을 법한 문화 강연지의 한심한 연설에도 이용되었다. 제너럴 아이디어는, 그의 구성적이며 확실한 형태때문에 예술적 집단이라기 보다 예술적 실체에 가까우며, 그들이 대중과 보다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점은 그것이 유기적 진화했기 때문이 아닐까?

연극적 구성
 이 것은 제너럴 아이디어의 역사이다. 미카엘 팀Michael Tims(1946년 밴쿠버 출생), 론 가베Ron Gabe(1945년 위니페그 출생-1994 토론토에서 사망 ), 그리고 슬로보단 살라-레비Slobodan Sala-Levy(1944년 팜 출생, 1994 토론토 사망)이 그 일원이다. 처음으로 건축, 저서활동과 출판에, 그리고 두번째로 1960년대에 순수회화와 마니토브 대학에서의 연구를 하였다 ; 할리팩스Halifax 에서 영화와 연극, 건축이 그들의 세 번째 활동 분야이다. 제너럴 아이디어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의《연극적 구축》으로 그의 존재를 드러내기 이전에, 이 세 인물이 토론토의 한 집에 모여사는 것 이외에 아무런 독특한 상황은 없었다 :

우린 서로 다른 사람들과 살고 일합니다. 사실 전세계의 모든 사람이 제너럴 아이디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무리 중에 한 명이 떠나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더라도, 여전히 이 것은 제너럴 아이디어 일 겁니다. 우린 《예술 집단》과 거리가 멀고 문화부로부터 고발 당할 때까지 열광적으로 활동하는 편이 아니다. 》,1991년에 그들이 한 말이다. 이를 생각하면 개리 인디아나의 작품 속 LOVE단어(1964)를 AIDS단어로 바꾼 작품(1987)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은 제너럴 아이디어가 20세기 예술에 두드러진 허구적 스펙타클의 기원을 지키려 하는 것을 조롱하고, 예술가들이 이 동기를 잊지 않으려는 것을 도상의 차원에서 조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원은 제너럴 아이디어의 정수이며 잊혀질 수 있는-그것이 우리 시대에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에-제너럴 아이디어의 형태, 미학의 차원이다. 전시회에서 드러나는 히스테리에 대한 저항으로 부를 수 있다. 또한 이는 역사적으로 의미를 재구성하는 하는 것이다. 

  과감하고 폭력적이어야 한다 : 지금 제너럴 아이디어의 전시를 보면, 그들은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을 법한 시간을 보여주기로 한듯하다. 클로드 모네가 건초더미에 나타나는 빛의 변화를 연구했던 방식처럼 말이다. 또한 1975년 선언한 그들의 《우리는 유명하고, 매력적이고, 부유하기를 원했다》라는 말을 빌어, 제너럴 아이디어는 너무도 무례한 형태로 현재의 이순간, 현대 사회의 어떤 예술가가 호화롭게 인생을 즐기는 것을 거북하게 느끼도록 한다. 그리고 우린 거의 인식할 수 있는 범위의 바깥에 놓여 있다.

 제너럴 아이디어의 3인의 작가는(처음에 메일을 이용하여 작업하는 데 전념하였던) 《적극적인》유토피아의 잔해들을 버리면서 모였다. 이는 그들이 (《개인 작가》) 구성하는  《한 개체》이다. 그들조차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싶어한다. AA Bronson, Felix Partz Jorge Zontal 을 위해 그들의 시민권을 버리면서 말이다. 그들의 역사에서 《General Idea》는 제너럴 모터스를 연상시키기 위해 선택한 단어이다 : 우린  이 것이《탈 것》-이 경우에는 저급한 욕망이 아닌-을 생산하기게 될 것을 예측했던 예술적 실체의 상징을 잊지 않을 것이다.

뷰티 콘테스트
 미인대회를 암시 하는듯한 작품(1970년 미스 제너럴 아이디어 뷰티 콘테스트)이 발표될 당시는 워홀이 공격적이지 않은 익살꾼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 세명의 선한 남자는 좋지 않은 시기에 훌륭한 직관력을 가지고 있었다. 잘 하면 익살꾼의 아주 퀴어 적인 의미로 그렇다. 당시에 라이 보워리[2[각주:2]]는 당시 9세였다. 그가 레이디 가가가 2010년 MTV Video Music Awards에서 기꺼이 입었던 《고깃덩어리》치마를 입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87 년 야나 스터벡[각주:3]이 미술관에서 전시한 지 한참 지나서의 일이다. 미스 제너럴 아이디어 건물은 분명히 현대 문화 요소들을 고려하면 수수께끼가 되었다. AA Bronson은 이 구조에 대해 회고한다 : 《그것은 5개의 요소를 수반한다 : 제너럴 아이디어는 작가로써; 미스 제너럴 아이디어 패전트는 창조 과정으로 ; 미스 제너럴 아이디어는 효과적 예술적 작업으로, 미술관이나 갤러리들이다 ; 그리고 매체와 공감을 보여주는 기준계로써는 필File 매거진 이 있다. 우리는 모든 작업을 이런 구조로 집중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술과 우릴 둘러싼 미디어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었다. 이 구조는 1970년과 1971년 사이에 작동하기 시작했고, 1975년에 전적으로 가동될 수 있었다(Journal of Contemporary arts잡지에서 Joshua Decter와의 인터뷰 중 )》.
 창고에 직물들을 넣어두듯 허구적 요소들을 쌓으면서, 제너럴 아이디어는 미스의 허구적 실체에 집중한다. 미인대회에 연결시키면서 말이다-그리고 1984년까지 함께 하며 히스테리컬한 결정을 한다. 《우린 13여년간 함께 작업해왔다. 다르게 말하면, 이건 결혼의 의식과도 매우 닮아 있다. 바로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Jorge Zontal, 1991 ).  이 《작은 건물》을 마치 여염집으로 이용하며,  미스 제너럴 아이디어의 건물 은 몇몇의 파편으로 보여진다.  부티크로 시작하였다가, 달러 모양의 은행 등으로 말이다(그들은 암시적 방법으로 행동하고, 필 매거진에 기고한 바와 같이, 예술적 대상의 물질성을 다시 활성화시킨다[3][각주:4]">). 그래서 이 저택은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 건물이 철거되는 모습이 보여지더라도 말이다. 《이 것은 환타지적 건물의 한 종류이며, 우린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 아니, 우린 이 건물을 세우지 않을 것이다 ; 이 건 파괴될 것이다'. 난 우리가 현재 이 건물 안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 갤러리들, 미술관들, 그 등등. 공공의 범주, 그 것이 바로 이 저택인 것이다》(Felix Parz, 1991).

형태는 허구를 따른다.

 이 것은 제너럴 아이디어의 역사이며, 무엇보다 그들이 맹렬히도 낯설게 굴었던 시기의 역사이다. 그리고 현재의 서로 그 근원지가 다른 소리들을 내보내는 사건들에도 영향을 미치는 과정의 그것이다.  이《세명의 연인》(전시 카달로그 평론에 쓰인 엘리자베스 르보비치의 용어를 인용하여  )이 함께 생존했던 시대에 그들은 같은 활동을 하면서 미인 대회의 반복적 구성과, 잡지의 출간, 《퍼포먼스》의 명목으로 성급하게 그룹지었던 행동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비디오 촬영, 또는 연작으로 생산된 예술적 오브제(Art Metropole, 1974)의 배급구조와 생산구조 등 여러 요소를 변화시키며 활용하였다. 
 이 것은 다른 허구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였던 허구의 역사이다.  바로 형태는 허구를 따른다 라는 공식(1973년 제너럴 아이디어 에서 나타난)에 의해서 말이다. 바로 현대 건축의 학설인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를 역설한 것이다. 최대한 현실과 동떨어지게 야심적으로 이러한 건축을 암시했다. 추가적으로 기억나는 바는, 앙드레 말로가 침묵 속의 목소리 에서의 말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세계를 그대로 옮겨쓰는 이가 아니다, 그들은 거기에 맞서는 이들이다》.
 이 투쟁은 우리가 알다시피 1980년대 후반에 보다 확실해졌다. 제너럴 아이디어는 에이즈라는 현실의 치명적인 고통을 작품속에 도입하였다. 

 

제너럴 아이디어
마이클 팀(1946, 벤쿠버 출생)
론 가베(1945위니페그 출생-1994)
슬로보단 살라-레비 (1944-1994)

전시
2007-08 《제너럴 아이디어 에디션 : 1968-1995》
Henry Art Gallery, 시애틀, 미국 (순회전시); Centro Andauluz de Arte
Contemporaraneo, Seville ; Stamp, Bâle
2009 ArtBasel 40, Bale : Glaerie  Frédéric Giroux, Paris; 
Esther Schipper Gallery, Berlin ; Mai 36 Galarie ,Zurich,
《General Idea : Work 1968- 1975》,Esther Schipper,
Berlin ; General Idea : Work 1987-1994》,
Mai 36 Galerie, Zurich ; 《The 1984 Miss General Idea Pavillon》, AGYU , Art Gallery of York University
2010  《General Idea : Editionen und Multipies》,
Helga Maria Klosterfeld Edition, Berlin
2011  General Idea》,Art Gallery of Ontario , Canada
 《Haute Culture : General Idea 》,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Paris (2.11-5.30) 

 

출처 : artpress 48-53쪽, #375. 2011.2
기사 : éric Troncy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1)커버그래픽은 유명 미국 잡지를 연상케 했다. [본문으로]
  2. Leigh Bowery예술가. 행위예술가. 루시안 프루이드Lucien Freud의 모델이었으며 크로스-드레싱의 전문가. [본문으로]
  3. Jana Sterback1955.3.출생캐나다 작가. [본문으로]
  4. "6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