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에떼_인터뷰

20여년간 만나볼 수 없었던 피에르 에떼의 영화가 이번 여름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  익살꾼의 매력을 지닌 그의 최후의 분발로, 짧고 강렬한 작품이다. 

이를 기다린지 20여년이다 : 1990년 이후로, 피레으 에떼는 그의 영화 소유권을 가진 제작사와의 마찰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의 친구와 공동시나리오 작가인 장-클로드 카리에Jean-Claude Carrière와 함께 이에 대한 끝없는 법적 분쟁 이후에 그는 이번 여름에 승소하였다. 그의 걸작품 Yoyo(1965) 는 다시 태어나 몇 번의 상영동안 이러한 불행을 떨칠 수 있었다 ; 사랑에 빠진 남자(1962), 위대한 사랑(1968) 이 두 장편은 저화질의 VHS로 재녹음하였다가 인터넷 상에 상영되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짧은 단편 축제의 나라(1969) 로 인해 이 영화인 에떼의 직업적 생명이 끊겼다.  
 프랑스 퐁피두 측과 프랑스 관광청의 중대합 협업으로 시작되어, 16미리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 남자 여자 의 온화한 노부인과 여름날의 소문  에 인터뷰의 한 꼭지를 삽입하였다. 우린 피에르 에떼를 이렇게 기다린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축제의 나라 가 그의 방식들과 단절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광대의 예술과 슬랩스틱의 유산이다. 별들을 뒤좇는 것이 에떼의 진정한 제작 방식이며 내 삼촌Mon oncle(1958)의 타티 와 긴밀한 협업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후에 그는 장-클로드 카리에와 공동 연출한 절교(1961) 과 행복한 생일(1962) 은 오스카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의 첫 장편, 사랑에 빠진 남자 (루이-들뤽 상prix Louis-Delluc)에서, 천문학 애호가는 결혼을 절박하게 매달리지만, 실망한다. 7년이 지나, 위대한 사랑 에서 다시 결혼을 주요 주제로 삼는다. 부르주아적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사건이 터지며, 다양한 형태로 어떤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 에떼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그는 이야기가 열광적이기보다 유머를 가지도록 하면서 비현실적으로 돌발적 요소(루이스 뷔뉘엘을 가로질러, 장-클로드 카리에의 견습 경험인 듯한 기계침대 위에서 꾸는 위대한 꿈)들을 조합한다.  우연의 미덕과 독신자들의 혼란을 동등하게 다룬다. 이 두 편의 영화, 우리가 건강한 상태인 한(1965) , 요요 에서 억만장자와 광대의 이야기는 아연실색케 하는 아름다움을 가진 혜성같은-영화이다. 그리고 다양한 관점으로 충만한 영화이다 : 코끼리는 꿈 속에서 어린이를 데려간다. 또, 마그리트의 몽상의 한 장면처럼 하녀가 계단을 내려오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커스의 말들이 저속으로 보여진다.
 축제의 나라 의 실패로 좌절한 그의 필모그래피는 여기에서 멈춘다. 하지만 에떼는 여기서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그는 아니 프라텔레니Annie Fratellini 와 1973년에 국립 서커스 학교école nationale de cirque 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텔레비전 분야에서도 활약(장-크로스토프 아베티Jean-Christophe Averty 쇼, 연극 각색, 합성 이미를 이용한 단편 등등...)하였다. 그리고 지오라마 상영관(1989년 옴니막스[각주:1]를 이용한 첫 작품)에까지 활동 분야를 넓혔다. 그는 영화 안(오시마[각주:2] 혹은 이오셀리아니[각주:3](1984)을 연출한다. 이 작품은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이때부터 베니스는 그의 모든 작품들에 대한 전시회장의 역할을 하게 된다. 1989년 <빛이 있었다(La Lumiere Fut)>로 이오셀리아니는 다시한번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다. 소련연방의 붕괴 후 계속 프랑스에서 작업하며 요지경 3부작으로 불리는 <나비사냥>, <불한당들>, <안녕, 나의집>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height=14 valign="top">, 카리우스마키[각주:4]의 영화)에서도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 제리 르위스Jerry Lewis의 미완성 영화, 울고 있는 광대의 하루 에서는 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에떼는 한편, 뎃셍화가로 그의 크로키 화집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요요가 부활한 영화, Miousik Papillon 의 장면에서 그림들을 볼 수 있다.
  이번 여름에, 에떼가 돌아오면서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카를로타 영화사Carlotta Film는칸에서 겨울의 서커스 행사 중 위대한 사랑 을 상영하였다. 또, 아르떼에서 그의 DVD 에디션을 발간하고, 라 로쉘 페스티발에서 그에 대한 오마주 공연(2010.07.02-11)이 있었다. 이번 기획으로 인해 스튜디오37(오랜지 시네마의 자회사로 에떼 영화의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다), 테크니컬러 재단Fondation Technicolor과 강 재단Fondation Gan이 춘계대청소를 한 셈이었다. 피에르 에떼의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    
 
1. 행복

■어린 시절에 무엇이 이렇게 유머, 광대, 익살꾼으로 당신을 이끌었나요?
 난 이사갈 때, 할아버지와 함께 광대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내 자신과 아주 가깝게 느꼈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면서 나갔습니다 :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저거야》. 그리고 그 사실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몇년이 지난 후, 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나 자신도 즐거워지기 위해 광대가 되기 위해 몇가지를 대본을 써봤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바뀌지 않은 확신은,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소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전 생애 동안 가진 신념이자 여전한 생각 중에 하나는, 난 내가 하는 일에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 기쁨까지도요. 문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서커스를 찾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 내가 서커스에서 봐왔던 어떤 것들을 다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아크로바틱, 마술, 곡예 등등 말입니다...

■당신은 스스로 광대가 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영화는 기분전환거리입니까?
 사람들은 어렸을 때 영화는 오락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에, 난 스스로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난 영화가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서커스를 보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매력이 있죠. 처음 본 코미디 영화는, 학교에서 커튼을 스크린으로 대체해서 본 것이었는데, 바로 해롤드 를로이드 였습니다.  교실은 참을 수 없는 웃음바다가 되었고, 난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광대의 친척 즈음으로 봐도 되죠. 하지만, 영화를 찍고 싶은 생각은 나중에 들었습니다. 이런 질적으로 우수한 영화를 보면서 어떤 영화의 계보, 예를 들면 Fernandel의 영화 바나베Barnabé와 연결시켜보았습니다. 지금 그것을 다시 보면, 난 무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점이 내게 영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슬랩스틱의 전통과 아주 거리가 먼 어떤 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 어떤 코미디 영화감독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버스터 키튼[각주:5] 은 완전히 사람들로부터 잊혀졌었습니다. 아버진 그에 대해 항상 말하곤 했지만, 우린 샤를로[각주:6] 밖에 볼 수 없었죠. 샤를로 는 매혹적면서 편집적이엇습니다. 난 조그맣게 콧수염을 만들기 위해 할머니의 모피를 잘랐었죠. 하지만 아버진 항상 키튼에 대해 그가 불꽃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어요. 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 키튼이 그렇게 좋았다면 그는 잘했던 거야. 난 로렐이나 하디[각주:7], 해롤드 [각주:8]를 보면서 자랐습니다. 난 모던 타임즈 를 봤죠. 영화 속 등장인물에 공감하면서 아주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어둠에 대해 생각하며, 울곤 했었죠 : 《샤를로는 불행해...》그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린 보통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고 생각했지만, 샤를로는 불행했고, 그의 웃음조차 더욱 그랬습니다. 나의 첫 단편을 완성한 이후에 나중에서야 키튼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15일 동안 매일밤 울름 가의 입구에서 그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의 시네마테크가 키튼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었거든요. 그건 충격이었습니다. 난 이렇게 혼자 말했죠 : 《끝났다, 난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을거야.》라고 말입니다. 만약 당신을 뒤휘드는 것이 있다면, 그걸 계속 하는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당신이 영화를 찍기 시작할 때, 타티 스타일의 개그를 참고하면서 고유의 당신만의 세계를 위해 구상한 방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연출을 할 때, 어떤 영화적 문법을 토대로 하십니까?
 샤브롤은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8일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영화는 모국어인 셈이죠 : 그 모국어라는 것은 그 고유의 언어를 모두 이해하진 않아도 동시에 그것들 쓸 수 있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사고입니다. 난 내 영화를 내 스타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난 뮤지컬과 서커스를 광대였던 니노Nino와 함께 했습니다. 난 무대나 장면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연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클로드 카리에와 만나 두 편의 단편을 공동집필하였죠. 단절과 행복한 기념일 이었죠. 난 텍스트와 연출, 그리고 해석을 별개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하나의 단일체였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건 어릿광대의 것이었죠. 광대는 존경할 만한 연출가나 창조자가 없습니다. 분석할 만한 텍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죠. 그들은 단지 개성을 가지고 무엇을 할 지 아는 자들입니다 : 춤, 아크로바틱, 음악, 곡예 등등...난, 별로 수완이 좋지 않습니다. 왜냐면 독학으로 배웠기 때문이죠.

하지만 코미디 영화는 특별한 노하우를 필요로합니다. 왜냐면 카메라 위치가 좋지 않으면, 개그가 안 먹히기 때문이죠. 어떻게 카메라 무빙을 계획했습니까? 그리고 편집이나, 로케이션이나 그외의 것들은 어땠습니까?
 타티를 통해 배운 후에 모든 것에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처음 봤을 때, 무엇인지 모르지만 내게 계획을 전해주는 듯했습니다. 자유롭게 내게 말했죠. 그가 가끔 《영상》에 대해 상상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난 스토리보드와 비슷하게든 아니든 뎃셍으로 기록하곤 했습니다. 아마 스치는 아이디어들을 붙잡는데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당신으로선, 프레임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였나요?
 아니요. 왜냐하면 유년시절부터, 내가 다른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사고력을 이용하는 것보다 뎃셍이나 영감에 의해 자극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뎃셍에서 구성은 중요합니다. 색깔들, 선들 간의 리듬...내게 그림그리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 큐비스트 화가였습니다. 아버진 그가 나를 가리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캐리커처 양식을 싫어했거든요. 그는 어느날 내게 피카소의 광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백색과 흑색의 균형감을 보라고 하였고, 그건 분명히 와닿았었죠. 난 그게 마치 어제일 같습니다. 난 훌륭한 유리세공인과 함께 작업을 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때 받았던 수업은 영화가 내게 미친 것과 유사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난 항상 프레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비율로 촬영된 영화가 그와 다른 비율로 상영될 때 참을 수가 없어요. 난 1:3.3 비율이 좋다고 봅니다.

2.행복한 결혼생활

사랑에 빠진 남자를 만들 때, 윌로씨[각주:9] 나 말렉, 혹은 샤를로 같은 반복적 인물을 창조했나요? 그리고 어떤 점때문에 당신은 인물의 모자와 우아한 의상으로 신중하고 눈에 띄는 인물의 겉모습을 선택했나요?
 반복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인물의 외모에 대해선, 뮤지컬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 난 아주 큰 조끼, 주름바지, 콧수염등을 단골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즐기곤했습니다. 선술집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죠. 어떤 날씨가 좋았던 날, 선술집인 황금말의 주인장이 내게 물어왔습니다 : 《티노 로씨[각주:10]가 단골로 사용하는 것처럼 당신이 단골로 쓰는 게 있나요?》티노 로씨는 당시에 부자연스러운 옆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건 아주 강렬했죠...난 담배를 요청했고, 그걸 내 방식으로 다시 피웠는데, 단번에 사람들을 웃게 했죠. 셔츠의 소매가 너무 길거나 의상이 너무 크거나 하는 요소들에 관객은 놀라지 않아요. 어떤 한 사람이 실수한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데, 관객이 그걸 보는 상황에서 웃음이 터지는 것이죠. 이런 사소한 설정들로 인해 점점 인물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난 인물을 만드는 데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뮤지컬에서 날마다 하는 것들이었으니까요.  
 
사랑에 빠진 남자 에서, 위대한 사랑 과 유사한 드라마적 역학이 있습니다 : 여자와 얽힌 복잡한 이야기, 결국엔 기대와 어긋나도록 구체화된 초현실적인 아름다움, 거세를 하려는 무시무시한 어머니의 형상 등등에서 그렇습니다...
 영화들은 전적으로 구별됩니다. 분명, 사랑에 빠진 남자 위대한 사랑 간에 있는 관계는 우연이 아닐 겁니다. 우린 항상 기억에 영감을 받습니다. 타티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개그를 위해 적용될 수 있는 요소들을 그들의 생활에서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단지 역학적인 어떤 요소들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변화를 일으키긴 어렵습니다. 이 두 영화에서 내 인생의 어떤 한 부분을 다루고 싶었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겠죠. 난 이혼을 겪은 탓에 인생에서 아주 어려운 시기를 보냇습니다. 난 이것을 견딜 수 없었고, 보드빌의 싸움장면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 한 남자가 보다 젋은 여성을 만나고,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대본을 쓰던 중에 아프기 시작했고 거의 8달 동안 우울증을 겪었습니다. 아주 힘들고 지독한 병마때문에, 난 부글리온 서커스단과 함께 유랑을 떠났습니다. 이 서커스철동안 다시 걷기 시작했고, 다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난 모든 요소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고, 위대한 사랑 을 집필했습니다. 아주 힘겨운 시간을 보내며, 어떤 우스꽝스러운 것들을 이끌어 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슬랩스틱을 섞어 영화에서 보드빌적 줄거리를 썼습니다.

■ 영화 요요 에 복도신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 의 한 장면과 위대한 사랑 에서 몽상신에서 나온 여인들이 나옵니다. 당신은 공간들을 뒤섞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를 위해 단지 문을 여는 것만으로 충분한 듯 합니다...그건 마술적 이야기, 혹은 눈속임의 기술입니까?
 절대적으로 아닙니다. 혹시라도 이런 속임수로 효과가 일어나야한다면, 난 그것을
《영화의 것》-특수 효과, 실험적 트릭-이라고 부르고 싶군요. 그건 내게 흥미가 없습니다. 내가 흥미를 가지는 것은, 예를 들어 요요 에서처럼 이미지를 뒤짚어 촬영하는 것등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난 만족했고,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난 뚱뚱보 애버클[각주:11] 의 영화를 보았는데, 이런 장면이 있었죠. 그가 양쪽으로 여는 문을 다리로 열고 들어와, 커다란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냅킨과 물잔. 그 외에 것들을 꺼내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반대로 상황이 펼쳐집니다 : 냅킨 등을 집어들고, 뒷걸음질쳐서, 발로 다시 문을 닫고 갑니다...그걸 보며 난 매우 즐거웠습니다. 이 역시도 영화인 것입니다. 바로 마술이었습니다. 난 마술을 자주 부립니다. 그리고, 영화도 마법적인 것이죠. 사람들은 더 이상 영화에서 마법적인 어떤 것들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균형을 잃었습니다. 아바타 는 모든 특수효과가 통제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난 환상적인 등장인물 뒤편에 배우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중요합니다. 영화에서 그런 점이 재미있고, 연출이 재미있습니다.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에서도 아주 아름답고 매력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머리 속에 구상중인 아이디어만으로는 재미가 없습니다 : 영화인이 되는은 같은 것들을 마침내 이뤄내야 하는 셈이죠.
 
당신은 아바타 같은 영화를 기술적인 혁신으로 보시나요?
 네. 내가 지오라마 상영환에서 첫 영화를 상영할 때, 《거짓말》이라고 말했습니다. 영화는 흥행하지 못했지만, 당시에 실험적이고 위험할 수 있는 과정을 밟았다는 것에 만족해있었습니다.루는,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두번째, 세번째 카메라를 사용했습니다. 동시에 고장난 카메라가 3개를 가지게 되었죠. 적어도 준비하는 데에 6개월이 필요했습니다. 난 15일 밖에 여유가 없었죠...카메라 감독으로 앙리 알칸Henri Alekan이 있었는데, 그는 불쌍하게도 이렇게 계속 말하곤 했죠 : 《하늘이 엉망이야》. 난 그에게 하늘은 우리의 기대 밖이라고, 우리가 설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건 영원한 충돌이 었습니다.

요요위대한 사랑사랑에 빠진 남자 에 비해서 보다 덜 현실적입니다. 꿈의 세계나 진정한 관념/개그/이미지인 듯-보다 이상화에 가까운-합니다. 당신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 보다 현실과 인생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나옵니다. 요요 와 다른 영화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키튼과 채플린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써, 난 영화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건 내가 다룰 수 있는 의자를 내버려두는 것이죠. 하지만 그건 아직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난 손님을 끌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시대에도 존재할 수 있지만 현재에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티로부터 배운 것은 그가 항상 말했던 것, 자신이《허풍쟁이》에 지나지 앟기를 바라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내 영화들이 과거지향적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마 어떤 면으로는 유리합니다. 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더 후회되는 것은 더 멀리가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나무에서 떨어질 때 보다 과감하지 못했습니다. 요요 로 다시 돌아와서, 이 영화는 되는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로스칠드Rothchild 은행과 관련있는 영화사와 작업을 했었고, 부자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하루는 제작사가 내게 와서 그의 아들이 생일인데, 자바타Zavatta를 보고 싶어한다고 하더군요. 엘리 드 로스차일드는 그의 저택의 정원에 서커스단을 초대했습니다. 난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거기에서 영화와 서커스를 합칠 구상이 떠올랐습니다. 그 강렬한 인상을 다각화시키고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내 아내가 아버지의 부고를 전했습니다. 그때 제가 30세였는데, 마치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끔찍했죠. 나중에야 그런 사건이 요요 란 영화 시나리오를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아버지/아들 간의 관계에 관한 영화입니다. 결국에는 영화를 한다기보다 우린 인생을 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자서전은 아닙니다. 보다 표현의 도구로써 이야기들이 필터를 거치기 때문이죠. 영화의 스타일을 결정짓는 것은 주제입니다. 같은 시기에, 사랑에 빠진 남자 이후에, 내가 저지른 모든 실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타티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소용없는 계획은 절대 촬영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  《그게 단지 문이 열리는 것을 보여주려고 촬영할 필요는 없다.》 요요 에서, 난 항상 관객들이 보고 즐길만한 요소들이 있는지 염려를 했습니다. 하지만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난 길을 가는 사람들을 잠시 멈추는 것 뿐 아니라, 당대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영화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를 보고, 영화 건강이 최고야 에서 반영했어요. 난 혼잣말로 이렇게 말하면서 촬영을 했습니다. 어느 순간에 관객이 극장으로 들어오더라도, 그들은 목표대상이 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당신의 영화는 극장에서 잘 전달이 안됩니까?
 사랑에 빠진 남자 는 가능했지만, 관객의 호기심 덕분이었습니다. 요요 는 불가능했죠. 골드핑거 와 같은 날 개봉했죠. 두 영화는 샹젤리제의 마주하고 있는 극장 두 군데에서 상영되었습니다...이 실패는 나로선 아주 힘들었습니다. 왜냐면 내 사생활도 당시 힘들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두번이나 혹평을 했지만 이 영화에 대해 호평을 한 제리 루이스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난 영화 비평계에선 선전을 했었지만, 관객은 동의하지 않았었습니다. 

3.웃어요, 당신에게 하는 말  

감독님은 건강이 최고야 를 찍을 당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웃기 바라면, 내가 그렇게 해줄까요?
 맞습니다. 난 이 영화를 조롱삼아 만들었지만, 열심히 만든 작품입니다. 날 연이어 덮친 우울을 예견했던 것입니다. 난 최대한 간소한 장치로 촬영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모든 광고물의 시퀀스는 채색판으로, 구성적인 장식으로 했습니다. 모든 자연적 장식을 이용했습니다. 보다 거대한 장식을 생각할 때, 이끼에 뒤덮인 것을 떠올렸습니다...많은 이미지들이 떠올랐습니다...모든 것이 갑작스럽게요! 

단편 중의 하나는 관객을 불편하게 합니다. 개그 시리즈 중에, 모두가 웃고 있는 가운데, 《웃으세요!》라는 팻말이 보입니다. 이건 이상합니다. 
  가끔 개그는 곤란한 구석이 있습니다. 당시에는《계속 웃으세요》라고 자동차에 메시지를 써붙이고 다녔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교통법을 위반하면, 이 자동차를 먼지등으로 덮어야 할 것입니다 :  《계속 웃으세요》. 이 말은 불편한 말이죠. 그리고 전혀 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난 보다 이것을 이용하기로 하였어요. 사람들이 코미디를 볼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경우를 보면, 그런 기준들은 통하지 않기 때문이죠.

광고물의 기준은 영화 코카인의 나라 에서 중요한 테마로 작용합니다. 마치 장 르누아르감독의 소극장 을 연상시킵니다. 어떻게 당신은 비웃음을 당할 수도 있는 부담감을 안고 영화에 이런 시간을 초월하는 요소들을 끌어들였습니까?
 요요의 실패 는 보다 현실적이며 현대적인 영화를 내게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단지 기쁨을 주기 위한 영화는 아니었죠. 난 모든 시퀀스에 슬랩스틱적 구성을 유지하였으며, 광고물에도 그랬습니다. 당시의 광고물들을 패러디한 요소들이 있었죠. 

당신은 1960년대 코미디 영화로 성공하였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실현시킬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까?
 환경이 열악한 가운데에서도 명백히, 난 끝을 외쳤습니다. 그런 예들이 한 둘이 아니지만, ㅇ요요 촬영 당시 제작자가 코끼리는 마르세이유에 있는 로스차일드 가에서 일어났던 사고 때문에 위험하다며 데려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코끼리는 추위에 아주 약했죠. 코끼리 대신에, 그는 염소를 원했습니다! 나는 코끼리를 위해서 투쟁해야 했습니다. 난 자주 수단이 열악한 탓에 중요한 장면을 포기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돈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은 부당합니다. 정당한 이유들은 너무 비싸죠...난 내 영화들을 볼 때, 마치 나 자신처럼 천천히 늙어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지 않고 복원하거나 실험하려 할때 연민을 느끼기도 하죠. 이번 여름에, 관객들이 이 영화들을 어떻게 볼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사람들이 아직 그것을 보며 흥미를 가진다면, 나로선 아주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난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불행히도 코카인의 나라 에서 내 운명은 더욱 아빠졌습니다.  

■  감독님이 보기에 프랑스 영화는 어떻습니까? 누벨 바그 는 열광적인 시기에 대해서도요...
 《파리 엉덩이의 털poil de cul de mouche》의 타티와 함께 영화를 개봉하였습니다. 약 1년이나 2년 동안 지속되었을 때, 끔찍했었습니다.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 를 봤을 때, 난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와는 다른 세계였고,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었습니다. 프랑스 영화의 누벨바그  시대에, 난 완벽히 관심 밖이었습니다. 내 범주 안에서만 실험을 해왔죠 : 《영화인, 넌 누벨바그의 빈 구멍의 일부분이다》.  까이에 뒤 시네마는 나를 전적으로 무시했었습니다. 그리고 코미디는 항상 부차적 예술로 취급되어왔습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타티는 당시에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축제일jour de fête(1949)는 지역적 색깔로 흥행했지만, Les vacances de Monsieur Hulot윌로씨의 바캉스 는 프랑스에서 흥행하지 못했었죠. 나중에야, 루이-들뤽 상을 수상하고 재평가받았지만, 당시에 타티는 소홀한 대우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내 삼촌Mon oncle 에서 내러티브를 가지도록 결정을 했던 것이죠. 트뤼포는 내 영화들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 사실을 너무 늦게 말했어요. 어느 술집에서 그를 만났을 때, 쥘 앤 짐 을 위한 뮤지컬을 써달라고 부탁했죠. 《제1막 토마토》이렇게요. 왜 토마토 막입니까? 난 모르겠습니다. 이후에, 그는 생각을 바꿨고, 내게 더 이상 소식을 전하지 않았죠.

4. 빌어먹을 코카인  

■  1960년대에, 당신은 아주 빠르게 촬영하곤 했습니다. 코카인의 나라 에서, 계속하기에 어떤 방해요인이 있었나요?
 완전히 그렇습니다. 제작자는 내가 추락하도록 방관했죠. 코카인의 나라 이후에, 난 압박감에 짓눌려서 다른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한 시도들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놀라운 영화는 현재와 비교해서 같은 방식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프랑스 사회의 저변층의 투르 드 프랑스나, 여가, 바캉스 같은 문화를 비꼬는 초상입니다. 
 장-루이 보리 는 그것이 피마자유와 독설을 섞은 것이라고 이야기했죠. 난 유럽의 한 부분을 알리려고 한 것입니다. 난 제 목소리를 가진 생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했습니다. 어떻게 한 정육점 주인이 가수가 되는지, 가수의 하루 일상을 촬영하기 위해 내일도 도시에 남아있을 거라고 혼잣말하곤 했습니다. 난 포디움 유럽 1을 본적도, 투르 드 프랑스나 기타 광고물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캠핑장이나 해안가를 본 적이 없죠. 난 시상대에 오르는 사람들은 가증스럽다고 생각하며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들에 대한 첫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난 겁을 먹었죠. 그들 중 몇몇과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말에 난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에게 순수한 의도로 질문을 하면, 그들은 그것에 살을 붙여서 확대시키곤 했습니다. 그래서 난 아ㅖ 무례하게 질문을 하거나 불성실하게 굴었죠. 난 그들에게 달에 가는 사람들, 에로티즘, 결혼 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물었는데,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죠. 그건 4만 미터가량의 필름이었는데-20시간 상영가능한-그것을 모두 보고나서, 거기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때문에 비극적이다라고 되뇌었습니다. 난 편집담당자를 불렀고 그는 내게 가수를 위주로 하여 시작하라고 조언했죠. 난 거의 7달 하고도 보름동안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점점, 음향적 요소들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내 제자와 어시스턴트가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영화에 주제가 있는 지 여부를 인터뷰했죠. 대부분 대답은 《화면 밖의 소리》로 대체되었고, 사람들은 내게 그것이 허구이든 현실이든 즐기면서 쓰라고 조언했습니다. 분명 현실에 발붙인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것때문에 영향력이 없는 우스운 영화를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죠.
  
왜 감독님은 우습다라고 하십니까?
 왜냐하면 영화는 편집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피하지않는 장난기와 결코 만나지 않고 서로 반대하는 우스움이 있습니다. 난 항상 사람들에게 그들을 촬영할 수 있을 지 물어봅니다. 그들은 내게 말하곤 하죠 : 《티비에 나오는 거요?》나는 그들에게 대답합니다.《아니요, 영화에 나올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망하죠 : 《자...그래도 시작해봅시다》. 하루는 영화가 끝나고, 나를 위해 뭔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아들이 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 묻더군요. 어떤 이는 동정이 가지만, 어떤 이는 아주 어리석어 보이고, 어떤 이는 무례하다구요. 특별히 어떤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결말이예요, 그리고 섬세함과 심오하면서 시적인 면이예요》. 그래서 나는 어떤 부분에서 사람들이 내 의도를 오해하는지 밝히기 위해서, 해변에 거대한 엉덩이가 있는 이미지를 만들었죠. 난 이런 노골적인 농담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런 유사요법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사람들이 그걸 보면, 남다른 코미디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난 내가 웃기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었습니다. 타티가 말한 것처럼, 내가 즐기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었죠. 

감독님이 다큐멘터리에 이끌린 이유가 무엇인가요?
 난 해보지도 않았고, 그것이 상황에 달려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난 이상한 것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영화의 종말을 말하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상에 늘 경이로움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난 항상 본질적인 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영화가 모더니즘에 아주 가깝다고 하지만, 난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렇게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내가 편집에 전념하지 않았다면, 영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매순간 스스로 말하길, 내가 하고 싶었던 것과 멀어지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죠.

■  영화가 개봉할 때 당신은 어떤 마음이었나요? 실패할 것을 알았습니까?
 아니요. 우린 리뷰 를 보고 영화가 아주 흥행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몇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언론은 나를 죽이곤 했죠. 유럽 1(라디오 방송국)은 11명의 변호인단을 이 사건을 위해 고용했었죠. 사람들은 나를 개인적으로 공격했고, 실제로 비방이었습니다. 대중은 언론에 의해 움직이기 마련이죠. 하루는 시사회를 위해 극장안으로 겨우 들어갔을 때, 누군가가 이렇게 외치더군요 :  《화장실에나 가라!》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확실한 사실이었습니다. 다른 영화들에 비해서, 지금에 봐도 구식이 아닙니다. 나는 관객을 웃게하기 위해 북돋고 싶었지만, 다른 무기를 들고서가 아니라 평상시와는 다른 무기로써 하기를 바랬습니다. 영화는 아주 빠르게 잊혀져갔고, 이후에 나는 서커스로 돌아갔고 모든 것을 잊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사람들이 영화가 훌륭했다고 생각하죠. 스트립 티즈 의 작가는 이 영화에 영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난 그가 영화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트립-티즈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코카인의 나라 에서 내가 틀린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절대 그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  당신은 사람들이 코카인의 나라 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연스럽게 찍은 요소들로 이뤄진 농담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반대로 높이사는 편입니다. 난 항상 코미디 영화가 관찰에서 출발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유머러스한 상황과 겹치도록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건 다루는 방식에 달려있습니다. 거기서, 또 이는 편집에 따라 달라지곤 합니다. 어떤 캠핑장 관리인이 우스운 농담을 말할 때, 내가 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도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하면, 캠핑장에서의 그의 위치를 상기시킬 겁니다 《여기 있은지 11년이 되었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오두막집에 앉아 있는 이미지를 상상할 수도 있죠.11년 동안 내내 앉아있었는가? 우린 또 다른 것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코카인의 나라 때문에 어떤 프로젝트들이 무산되었습니까?
 코카인의 나라 이후에도 분명히 바벨 프로젝트를 위해 계속 작업하였습니다. 제리 루이스와 함께 촬영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아무것도 이뤄진 것이 없었죠. 영화는 연출가를 부추기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죠. 제리 루이스는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타워에서 촬영을 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수준에서 만들었는데 결국 행성이 큐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리 루이스를 보러 간 제작자는 허구의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현실의 제작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을 지켜보고 관여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엔 또 광대가 있고, 물론 그 광대는 나입니다. 누군가가 난처해 질 때, 영화인은 광대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리고 그에게 충고하죠. 예를 들면 제작자는 연출가에게 영화에서 관객을 암시하라고 요구합니다. 제리 루이스는 이렇게 묻죠 : 《하지만 어떻게 말입니까?》 그래서 광대가 이미지를 회전시키면, 제작자의 등이 보이면서 사람들은 스크린에 비친 극장을 보게 됩니다. 모든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건 코미디 영화가 늘 그랬듯이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영화를 만들지 못한 것이 큰 후회로 남는군요.
  
■ 또 다른 프로젝트가 있었나요?
 다른 바벨이라...3개 정도 있었습니다. 포스트 라고 이름붙였는데, 동시진행되는 상황의 구노드 오페라였습니다. 하지만 오페라의 전개양식을 놓치지는 않도록 하였죠. 또 다른 작품으로 신의 이름 이란 것이 있는데, 엤 선조에서부터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성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죠. 를로슈는 이 계획의 위대함을 알고 후원처를 찾아다녔지만 모두가 이 영화에는 무비 스타가 없다라며 거절했었죠. 나한테 코미디 자체가 스타인데도 말입니다. 하루는 콜루슈를 테레비젼에서 보고,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그에게 말했더니, 이렇게 답했죠. 《난 타티감독과 작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라면, 시나리오를 읽을 필요도 없이 계약서에 사인을 하겠습니다》 그는 푸케에서 다음날 정오에 만나자고 하였죠. 그는 내가 도착하기 15분 전에 와있었습니다. 그에게 시나리오를 주고 그는 내게 한 달 후에 다시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한 시간 동안 통화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럴수가 있을까요, 그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이틀 전에 사망했습니다. 콜루슈는 아주 멋진 사람이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난 절망에 빠졌죠.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난 이 신의 이름 때문에 쿠르브와에 있는 영화포스터를 만드는 작은 스튜디오에서8여년간 작업을 해왔습니다. 모든 것을 혼자 도맡았죠. 촬영과 동시에 진행되는 트릭으로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또 다른 영화 프로젝트로는, 서로 사랑하십니까? 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찍을 수 없었다는 것에 너무 아쉬움이 남는군요...

■ 영화의 제목이 좋습니다.
 이 영화가 있었다면, 난 아주 좋아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오늘날의 사회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죠. 그것은 하루에서 다음 날까지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가 부랑자가 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건 몽매한 사회에 벌어지는 폭력성에 대한 영화입니다. 각각의 차들은 교통체증 때문에 꼼짝못하고 있고, 자동차 안에는 어떤 우스우면서 비극적인 요소들이 있죠. 그래서 어떤 무대 장식이 없이 오직 자동차들만 있는 겁니다. 자동차의 물결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죠. 결말은 아주 아름다웠을 겁니다. 상자에 이런 글귀가 있죠 :  《그러면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겁니까?》그렇게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이죠. 한 명의 부랑자요. 왜냐하면 모두가 기꺼이 불꽃 속에 있어쓰니까요. 부랑자는 마치 부티크를 지나는 것처럼 이 상자앞을 지나면서,  그것을 들추어봅니다. 그리고 거기엔 아무도 없는 무인지대가 있죠. 그는 그 무인지대로 들어가죠. 그건 현대 사회의 일종의 반영이죠. 이 사회의 초현실적인 부분말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초현실적인 것들을 향해서 가고 있죠. 이런 사회에서 더 이상 지엽적인 거란 없죠, 그건 행성입니다.

■ 당신이 좋아하는 유머는 무엇입니까?
 잘 모르겠군요...아마도 브뉘엘의 천재적인 영감일 겁니다. 이런 이유때문일 겁니다 : 비행접시가 착륙을 하고, 사람들이 그걸 보기 위해 몰려들죠. 그리고 거기서 초록색 작은 인간, 마치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작은 화성인이 걸어나옵니다. 등에는 손이 달려있고, 갑자기...그는 십자가를 흔들죠! 브뉘엘은 진지한 영화계에서 최고의 개그민일 겁니다.■


출처 : Cahiers du cinéma 2010. 06
기사 : Jean-Philippe Tessé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어안 렌즈를 써서 거대한 영사 화면에 165° 각도로 영상을 영사하고 고음질의 음향을 제공해 관객으로 하여금 가상현실의 효과를 느끼게 한다 [본문으로]
  2. Nagisa Oshima새로운 형식의 실험과 날카로운 주제의식을 겸비한 일본 영화감독. 《백주의 살인마》, 《교사형》 등 독특하고 주제의식이 뚜렷한 작품을 내놓았다. 1970년대에 접어들며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의 도덕과 성애의 문제에 중점을 두어 《감각의 제국》, 《열정의 제국》등을 만들었다.1932년 태어났다. 교토대학교 법학부에서 정치사를 전공했으나 연극과 학생운동에 전념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1954년 영화제작사에 입사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좌파적 시각을 견지하며 정치선전의 색채가 강한 영화를 만들었다. 데뷔작인 《사랑과 희망의 거리 愛と希望の街》(1959)와 더불어 《일본의 밤과 안개 日本の夜と霧》(1960), 《청춘 잔혹이야기 靑春殘酷物語》(1960), 《태양의 묘지 太陽の墓地》(1960) 등이 바로 그 당시 작품들이다. 학생운동 세대로 영화 인생을 시작한 그는 1965년 독립 영화사를 설립하고 이후의 문제작들을 만들어낸다. 영화적 표현력의 가능성을 크게 진전시킨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작품 《백주의 살인마 白晝の通り魔》(1966)와 재일 한국인에 대한 편견을 다룬 《교사형 絞死刑》(1968), 《신주쿠 도둑일기》(1969)와 《의식》(1971) 등 자신이 탐구했던 문제인 소외받는 민족과 개인의 자유라는 주제의식이 분명한 영화들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연출노선은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의 도덕과 성애의 문제에 더 중점을 두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실화사건을 바탕으로 한 포르노그라피 《감각의 제국 愛のゴソ─ダ》(1976)과 "성과 죽음"이라는 철학적 화두를 시적 영상으로 담아내고 있는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열정의 제국 愛の亡靈》(1978)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 戰場のメリクリスマス》(1983)와 프랑스가 제작비를 전액 지원해 침팬지와 외교관 부인의 사랑을 그린 《막스, 내 사랑 Max, mon amour》(1986) 등을 발표하였다.그가 즐겨 다룬 소재는 젊은이들의 방황과 고뇌, 재일교포 문제 등과 같은 일본 내 차별, 국가권력의 폭력성, 좌절한 이상주의 등이다. 그는 TV 토크쇼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한편 영화탄생 1백 주년 기념으로 영국에서 기획한 세계영화 다큐멘터리에서 "일본편"을 담당, 《일본영화백년100 Years of Japanese Cinema》(1994)을 제작하기도 하였다.[출처] 오시마 나기사 [大島渚(대도저) ] | 네이버 백과사전[출처] 오시마 나기사 [大島渚(대도저)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3. "Otar [본문으로]
  4. Aki Kaurismaki 핀란드의 컬트 영화감독. 작품세계의 폭이 넓은 감독으로도 유명하며, 수많은 마니아 층을 지니고 있는 감독이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과거가 없는 남자》등의 작품이 있다카우리스마키는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한 적이 없다. 우체부로 시작하여 접시닦이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청년기를 보냈다. 그러다 영화에 흥미를 가지면서 영화잡지에 종종 글을 기고하기도 한 그는 이 시절을 자신의 인생 중에서 가장 비창조적이었던 시기라고 말한다. 그를 영화현장으로 끌어들인 것은 이미 영화감독이었던 형 미카 카우리스마키였다. 두 사람은 영화의 황무지였던 핀란드 영화를 살려내기 위해 영화사를 차리고, 그들이 좋아했던 장뤽 고다르가 만든 SF영화 《알파빌》(1965)의 제목을 따서 '빌-알파(도시-알파)'라고 지었다. 그후 그들은 1980년대 핀란드 영화의 5분의 1을 만들어냈다. 두 편의 단편영화에서 출발해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코미디로 각색한 《죄와 벌》(1983)로 데뷔한 이래 거의 매년 한 편 이상의 영화를 발표하고 있다. 작품세계의 폭이 넓은 감독으로도 유명한 그는 고전문학을 새롭게 각색한 《죄와 벌》(1983), 《햄릿, 장사를 떠나다》(1987)와 '프롤레타리아 3부작'이라 평가받는 《천국의 그림자》(1987), 《오징어 노동조합》(1985), 《아리엘》(1988) 등을 만들었다. 계급적 위치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이 3부작의 공통된 주제이다. 1989년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라는 록밴드와 함께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를 만들었다.그러나 카우리스마키 자신은 "실베스터 스탤런의 영화를 제외하고 영화사상 최악의 영화"라고 평가하며 《성냥공장 소녀》(1989)를 전혀 다른 스타일로 만들어서 많은 그의 지지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지만 그의 영화 중 가장 걸작으로 꼽히며 유럽의 의식있는 관객들에게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시나리오작가로 유명한 노장 세자르 자바티니도 "이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네오리얼리즘 정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대임을 증명했다"며 감격해 했다.카우리스마키의 개인적인 작업이라고 불리는 3부작 《그날들》(베를린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 1992),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모세를 만나다》(1993), 《발라이카 쇼》(1994)를 만든 후 작은 소품 《손수건을 잘 간수해라, 타티아나》를 완성한 후 잠시 휴식기를 가진 그는 1996년에 만든 《저 멀리 구름은 걷히고》를 통해 더욱 간결해졌으면서도 소시민들의 일상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통찰력의 깊이가 생겼음을 보여 주고 있다. 《과거가 없는 남자》(2002,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에서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홈리스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렸으며 《황혼의 빛》(2006,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에서는 사회에서 소외된 채 고독에 신음하며 몰락해 가는 남자 이야기를 그려냈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지금까지 한 번도 미국 메이저 영화사를 통해 배급된 적이 없다. 그는 뉴욕·맨해튼·파리·베를린, 동경의 영 시네마 포럼 등에서 거의 '숭배' 차원으로 열광하는 팬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의 진정한 실체는 핀란드와 헝가리의 보헤미안 전통일 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출처] 카우리스마키 [Aki Kaurismaki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5. Buster Keaton1895년 10월 4일 미국 캔자스주(州) 피쿠아(Piqua)에서 출생하였다. 부모는 보드빌에서 활동한 연극배우였다. 키튼은 부모를 따라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무대에 섰고, 21세 때 고액의 출연료를 주겠다는 뉴욕 흥행사의 교섭을 거절하고 영화계에 들어갔다. 전 세계의 인기를 끈 미국의 키스톤(제작회사 명) 희극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채플린이나 로이드에 버금가는 인기배우가 되었다. 그가 활약한 시기는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이며 그가 연출한《세 가지 시대 The Three Ages》(1923), 《우리의 환대 Our Hospitality》(1923),《셜록 주니어 Sherlock Jr》(1924), 《일곱 번의 기회 Seven Chances》(1925), 《서부로 가라 Go West》(1925), 《싸움꾼 버틀러 Battling Butler》(1926), 《제너럴 The General》(1927) 등은 무성영화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는 무표정과 얼빠진 듯한 표정으로 연기하였지만 인물의 내면적인 표현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그의 연기는 퇴색되었고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66년 2월 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폐암으로 사망하였다.[출처] 버스트 키턴 [Buster Keaton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6.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영화 속 등장인물. [본문으로]
  7. Stan Laurel and Oliver Hardy.20세기 코믹 듀오.수많은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에서 익살스러운 연기를 펼침. [본문으로]
  8. Harold Clayton Lloyd1893년 미국 네브라스카 출생.미국 코미디 영화 배우.감독이자 제작자. [본문으로]
  9. 자크 타티의 영화 속 인물. [본문으로]
  10. Tino Rossi1907-1983프랑스 샹송가수. 배우 [본문으로]
  11. Roscoe Conkling Arbuckle (1887-1933)미국 무성영화 배우.큰 몸집때문에뚱뚱보란 별명으로 불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