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장 뤽 몽테로소(Jean-Luc Monterosso) MEP(메종 유럽 포토) 회장
《메종 유럽 포토를 창설하면서 장 뤽 몽테로소는 이번 인터뷰에 참여하였다. 비밀스런 사나이를 만나보자.》
멋진 소년의 외모 뒤엔 꽤 혼란스런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장 뤽 몽테로소이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부드럽고 친절했으며 권위적이기보다 창조적인 인상이었다.
〈만약 다른 직업을 가졌었더라면, 거기서 기껏 2년 혹은 3년은 버텼을 겁니다. 매순간 다른 곳으로 나갈 궁리를 했을 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수많은 사진가들을 보고싶어하는 관람객들을 친절히 이끈다. 〈이건 사교계의 업무같아요. 친목을 강조하죠. 정치적이면서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시스템이 따라주지 않는것에 화를 내기 보다는 거기에 적용하는 편이죠. 일일이 의미를 따지면서 흔들리는 일은 없습니다〉초조함, 변화무쌍함, 신중함이 뒤섞인 그의 개성은 쉽게 파악하기 힘들다. 〈우리가 보는 곳에는 정신적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죠. 그래서 예술가들에게 다가갈 때는 항상 신중합니다.〉그의 동료, 도미니크 구타드Dominique Gutard는 말한다. 바로 그와 함께, 2010년도 루앙에서《인상주의와 비디오아트》를 기획했었다.
토리노 출신의 교사인 어머니와 모자이크 복원기술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몽테로소는 철학을 전공하였다. 하이퍼칸/칸을 수업한 후, 퐁피두 센터에 입성한다. 이후 그는 매거진Bis를 창간하고 시청각영역에 전념한다. 그리고 앙리 샤피에Henri Chapier이 편집장으로 있던 파리의 일상Quotidiene de Paris매거진의 시평담당자로써, 사진가로써 참여하게 된다. 당시, 그는 필름을 현상하려는 젋은 영화학도들을 돕고자 하였다.
모험정신
1988년경, 당시 총리였던 자크 시락Jacque Chirac의 후원으로 진정한 사진박물관에 대한 구상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립미술관이라는 간판대신, 메종(협회 또는 회사)이라는 간판을 선택하며 1996년 마레지구에 그 문을 열었다.〈이 것은 미술관이 아닙니다. 신정화의 장소가 아닙니다. 하지만 집입니다. 예술가들이 바로 그들의 집처럼 여기는 곳이죠. 하지만 새로운 발견의 장소이고 실험의 장소입니다. 독일학교에서 사람들은 베허부부les Bechers와 그의 제자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블루메Blume, 레이건Leigen 클라우케Jurgen Klauke의 전시를 여는 겁니다. 제 역활은 구르스키Andreas Gursky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집이란 개념이 좋아요. 〉
처음부터 몽테로소는 여러 프랑스 사진작가를 소개하면서 파리-뉴욕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였다. 유럽에서 이탈리아 혹은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함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일종의 모험정신이랄까요. 우린 이런 믿기힘든 플랫폼에 아무 고무되어있어요. 모든 것이 열려있습니다.〉메종 유럽 포토의 전 책임자 안드레아 홀저Andrea Holzherr는 당시를 회고한다. 그는 매그넘에서 전시책임자가 되었다.
에스파냐 여관
그로부터 15년 후, 메종은 에스파냐 여관에서 쓴 맛과 단 맛을 동시에 경험한다. 그것은 연줄과 동정에 휘둘려 일관성이 없는 기획이었다. 그래서 제안하는 바도 없었다. 사실은 이 여러과일맛 아이스크림에서 몽테로소의 개인취향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그것은 흑백사진의 전통에 가까웠습니다. 흑백사진에서는 인간과 감정을 강하게 느낄 수 있죠. 건조하거나 구성주의적 실험은 그렇게 흥미가 당기지 않더군요. 〉라고 말한다. 이에 사진가 말레리 벨린Valérie Belin은 이렇게 말한다.〈아주 다른 것들을 좋아할 수 있어요. 콘셉에서 키치적이것들이죠.〉알랭 플레이셔Alain Fleischer의 입장은 이렇다.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유리합니다. 유명해지려는 예술가들을 위해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은 예술가들을 위해서요.〉마티알 세리에Martial Cherrier 바디-빌더Body-Builders나 프랑수아-마리 바니에
François-Marie Banier의 초상사진의 예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사진가는 가장 유명한 10명의 프랑스 중 한명입니다.〉몽테로소는 여기에 확신한다. 〈그는 매일을 불꽃처럼 일합니다. 나는 우리가 상업적인 사진에 전념할 것이 두렵습니다.모든 가능성을 두고 보여주기를 좋아합니다.〉어쩌면 존경심은 가끔 그의 한계로 작용한다. 11월에 계획한 전시 '마지막 순간in extremis'을 포기했다. 주요 사진가 중의 한명이 법정사전으로 인해 신변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중앙집권화작업은 건물의 주요 핵심으로 남는다. 몽테로소가 공공기관과의 협력을 위해 기증을 받고있으며, 아직 관리감독에 서툴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위임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것들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도 모릅니다.〉그의 측근은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더 나아지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결국, 계획대로 되지 않죠. 사람들이 그들의 에너지와 희망을 빠르게 잃어가는 중에,그는 작은 태양왕처럼 행동합니다. 한 사람의 꿈과 다른 사람들의 꿈은 깨지고 있습니다.〉
매종 유럽 포토의 책임자는 앙리 샤피에Henri Chapier-루마니아출생의 기자.비평가.애니메이터-없이 짝궁을 만들었다.〈장 뤽 몽테로소는 예술가들의 세계에 푹 빠졌습니다. 전, 정부나 시청과의 다소 완화된 창조적 관계에 주력하고 있죠. 〉2006년에 검열때문에 베티나 레임스Bettina Rheims의 전시 'I.N.R.I'가 중단될 위기에, 샤피에가 앞장 서 해결사를 자처했다.
이 메종의 또 다른 취약점은 대외적 협력처의 수가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2012년에 협회가 구성되고, 비엔나에서 로버트 마펠스로프Robert Mapplethrorpe와 알베르티나Albertina 의 회고전이 있을 예정이지만 말이다. 〈거기에 대해선 아주 유감입니다. 의욕이 부족한 탓이겠죠.〉지켜보던 이는 말한다. 〈더 의욕적인 국제적 프러젝트를 진행하는 자신감이 부족해서 인 것 같습니다. 도전과 초조함에 맞서는 의지의 부족이겠죠.〉요약하자면, 아직 실행단계 전이라는 이야기다. 행정당국은 하지만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나 윌리암 클라인William Klein의 주요작품을 엽서로 제작해서 몽테로소가 수년간 그의 수작들을 선보이려했던 도서관에서 판매할 계획이다. 미술관은 또한 헬뮤트 뉴턴Helmut Newton의 후원금을 받은 드문 경우이다. 〈게다가, 구매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어요: "작품을 산지 5년이 지났어요. 더이상 구매하지 않을 것입니다."〉장-뤽 몽테로소는 이렇게 자문한다. : "구매를 한 이래,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것을 보는 게 흥미롭습니다." 그는 예술가들의 행보를 따른다. 알랭 플레이셔는 강조한다. 그는 어떤 위대한 명성도 놓치지 않습니다. 아마 덜 중요한 것들을 구매할 지도 모릅니다. 퇴색된 탓에 일상적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걸작의 구성은 어떤 미술관에서라도 두드러집니다. 20년 후에, 아마 70%의 손실이 있을 겁니다.〉
이번 해에, 몽테로소는 사진의 달에서 해양박물관과 기금을 평가하고자 하는 좋은 계획을 가졌습니다. (2010년 11월 11일부터 2011년 2월 28일 국립 해양 박물관,'바다, 아카이브'). 2011년도 초에 전시도록의 서문부터, 6권에 이르는 카달로그를 검토했다.
새로운 불꽃
메종 유럽 포토의 콜렉션이 빛을 보는 계획이 있다면, 그는 사진의 달이 이번해로 3주년을 맞은 것을 축하한다. 비록 부진하지만 성적에도 말이다. 장 빌라Jean Vilar의 아비뇽 페스티발에 영감을 받은 전시가 샤피에와 몽테로소는 사진을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예술이라 말한다. 〈모든 규정은 그것이 적용될 만한 장소를 찾습니다.〉〈사진의 달의 성공은 작품들과 대중들과의 만남에 달려있습니다. 미술관과 갤러리의 한계를 깨는 사람들에 의해서죠.〉세계의 30여개의 도시에서 모방된, 어쩌면 가짜모피에 가까운, 이런 주장은 아직 가치가 있을까? 〈아비뇽 페스티발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 지 자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중이 이런 매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죠.〉알랭 플레이셔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당신이 약 60만명의 관람객을 맞이한다면, 그건 시들시들한 게 아니죠. 리오 브랑코Rio Branco나 블루메Blume의 전시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을 몰랐을 겁니다.〉앙리 샤피에는 덧붙인다. 몽테로소는 가끔 연관된 장르에서 새로운 혜성을 찾는다. 아르트방송Arte의 비디오아트의 밤을 주관하거나 사진가나 비디오작가들을 선택하면서 말이다. 〈아마 우리는 사진게토에만 머무를 수 없을 겁니다. 더 성장하려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정화해야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1957 토리노 출생
1974 퐁피두 센터 건립준비위원회 참여
1980 파리, 사진의 달 창설
1988 메종 유럽 포토의 준비위원회
1996 메종 유럽 포토 창설
2004 유럽 사진의 달 발표
2010 사진의 달 30주년
기사출처 : Le Journal des Arts Nº334. Du 5 Au 18 novembre,2010
기사작성:록사나 아지미Roxana Azimi
번역: 잠수부zamsoo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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