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니치 Hermann Nitsch_ 인터뷰

 

《연극은 저절로 이뤄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진정한 환상을 이용해 악질적 취향과 에로틱한 욕망, 야생성, 공상, 삶의 이상향과 잔혹성 등이 뒤섞인 꿈의 침전물들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적이거나 환영적인 그림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흘러나온다.》 앙투완 아르토가 
잔인성의 연극(1932)에서 말했던 바는 그보다 20년 뒤 헤르만 니치가《디오니소스와 비밀의 연극》에서 표현한 바와 일치한다. 아르토처럼, 작가는 신화와 음악을 뒤섞으며, 《우리를 각성시키는 연극 : 신경과 마음》,《매순간 단절되는 생의 경련》,《잔혹성과 영혼의 정수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이야기한다. 그의 시끌벅적한 바쿠스제는 관객이 더럽다고 느끼기도 전에 피와 내장을 꺼내어 보여주며 우스꽝스러움을 강하게 느낀다...그의 빈정대는 눈과 살찐 몸은 사형수를 희화하기보다 프란츠 할의 그림으로 피신한 쾌락주의자를 희화하는 것에 가깝다.
 헤르만 니치는 5세에 이르러, 예술에 뛰어났던 할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이후에 그래픽 학교에 입학하였지만 15세기 거장의 작품과 프랑스 상징주의 등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교회의 장식가가 되길 꿈꾸었고, 카톨릭의 교리와 신학에 침잠했다. 사실, 디오니소스와 비밀극장은 1957년 그가 초석을 닦은 것이다. 그것은 장식된 도자기이기보다 교회의 예배식에 가까웠다.《오랫동안 이어진 종교에서는 예배란 곧 예술입니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적이죠. 전 보다 미사같은 연극을 구상하고, 존재자체가 미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살면서 긍정하며 '네'라고 말하기를 원합니다.》긍정 역시 바로크적 희열이며 일종의 명암의 대비법이다. 생 에티엔느의 현대미술관장인 로랑 헤기[각주:1]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의 내면에는 근본적으로 오스트리아적 기질이 내재되어 있다. 고통과 처벌로부터 억압된 심리가 행동주의자처럼 프로이드의 학설에 의해 설명된다. 연쇄살인범의 욕망을 자극하는 인류를 연구한 결과를 미술관에 전시한 곳은 오스트리아 뿐이다.》 


신성모독으로 인해 투옥되다
 
1962년, 니치는 집의 창고에서 양을 절단해 그의 십자가에 처형시킨다. 어시스턴트는 참수된 동물의 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이 연출은 카톨릭의 속죄의식과 정신분석학적 카타르시스를 일깨운다. 《나는 나와 나의 에고의 점진적 상황에 관심이 있다. 나는 우주 안에서 자유로운 반면에 에고는 고립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은 우주 전체를 느끼는 것이다.》라고 니치는 말한다. 《난 의식이 변하는 추이를 전하고 싶다. 내 연극작품은 그것을 자유롭게 펼쳐보인다.》분명히, 그가 개인적으로 속박상태를 원해서 이런 상태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포르노그래피와 신성모독 혐의로 3번의 투옥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예술적 행보는 종종 전후과계가 모호하기에 정치적이라 할 수 없다. 《내가 6살 때, 난 "하이, 히틀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후에 러시아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이후엔 러시아어가 서툰 미국인이 주둔했습니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가 싫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난 정치란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린 바깥 세상이 바뀌길 원하지만, 우리 스스로 바뀌어야만 합니다》라며 니치는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감옥의 차가운 철망도 그가 지속적으로 하는 퍼포먼스도 막지 못했다. 20여분의 지속되는 의식으로 시작한 후, 6일간  3마리의 황소를 절단하기때문에 동물보호연맹으로부터 제지를 받았다. 《그들은 싸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듯했습니다. 난 극작가입니다. 난 단지 과정을 보여줄 뿐이며, 예술을 보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 연극을 보면, 죽음이란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대해선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행위예술에 참가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경험이 신명재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각주:2]는 이렇게 회상한다.《1975년에 참여했을 때, 퍼포먼스는 90시간여동안 지속되었었습니다. 12시간이 지났을 때, 난 애초의 동기를 상실했어요. 피냄새로 인해 역겨움을 참을 수 없었죠.》

공식 예술가
 대화를 할 때 금기가 있다면, 그건 다른 비엔나 행위예술파, 오토 뮐[각주:3],귄터 브라스[각주:4], 루돌프 슈바르츠코글러[각주:5]이다. 《각자가 자신의 행보가 있습니다.그건 좋은 일이죠. 난 그룹을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나만의 작업이죠》니치는 대답을 회피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의 극장에 대해 말하고 그의 퍼포먼스에 위치해 있기를 원한다. 이런 호언장담으로 그는 다른 예술가들의 자기 중심주의와 중요도를 언급하는 것을 기피하는 듯 보인다. 찰스 사치가 그의 작품을 대량으로 구매한 이후에 니치는 연작을 제작하는 듯하다. 전시 이전에 구매를 원하는 상인들과 거리를 두면서 말이다. 그가 작업의 이해를 돕는 주요한 실마리와 구상의 정수를 보여준다면, 그의 수많은 스플래터 페인팅 은 순수하게 표현적 작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잉은 아무도 후원하지 않는 그의 연극작품을 위해 필수적이다. 《난 이제 72살입니다. 누군가 내 작품 중 하나를 사면 행복하고 그들이 "유행을 앞서는"사람들이란 점을 이해하죠.》 실용주의자의 말이다. 《난 사치갤러리 측과 좋은 계약관계를 맺었습니다. 왜 내가 작품이 판매되거나 구매되는 것을 바라지 않겠어요? 젊었을 때에, 난 수도원에서 살기를 꿈꾸었고 그런 모습을 그렸었죠. 하지만 난 적은 수의 친구들도 원합니다...당신이 아트마켓을 보면, 많은 예술가들 중 나보다 덜 중요한 사람들이 나보다 더 비싸게 작품을 팔곤 합니다.》
 지하에 있을 뿐이었던 이 나쁜 남자 는 대중의 머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정부와 대주교에 의해 기사로 서임되었다. 그리고 2009년 비엔나(오스트리아)에 그의 재단이 설립되었다! 억압적 면이 희미해진 그의 작품에 어떤 의미가 더해질 수 있을까? 《행위예술은 더이상 까칠하지 않아요. 시대는 변했고, 더 이상 스캔들이나 의미의 전복은 없습니다. 그게 보통이죠. 그건 보다 고전연극에 가까워요.》마리나 아브로마비치의 말이다. 페어분트의 비엔나 재단장 가브리엘 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니치는 정부의 지원 하에 공식적으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괴물과 신화의 연극은 전시가 되고, 대중에게 공개가 되었습니다.》그의 원시주의적 측면은 때론 고풍스럽다. 그리고 폴 메카시[각주:6]가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다른 젊은 세대에 미친 그의 존재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러나 작가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슈트델미술학교에서 20여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현 세대의 수많은 작가군들 중 스타는 더이상 시류에 장단 맞추지 않고, 그가 1971년부터 거주한 프란첸도르프 성과 그의 행보를 밟을 뿐이다. 가브리엘 스코는,《그의 방법은 매우 독립적입니다. 그의 모든 어시스턴트가 모두 작가입니다. 예술에 대한 그들 고유의 구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을 얻습니다. 어떤 작가도 그의 이름에만 그치지 않을 겁니다.》 라고 말한다.
 로랑 히기는 보다 강한 어조로 말한다. 《어떤 행위예술파도 다른 작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작업이 아주 독특하기 때문이며, 시대나 맥락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젊은 세대에게는 누군가가 시대를 마감하려 하거나, 또 다른 이가 새롭게 열어보이려하는 것처럼 보이겠죠.》
헤르만 니치 재단장인 마이클 카레르는 여전히 생각을 훈련하는 중이라고 밝힌다. 《헤르만은 내가 성장하도록 했습니다. 저를 우주와 연결되도록 하는 매우 특별한 상황에 놓이도록 한 그의 노력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뉴 에이지를 상기시키는 그의 말이다. 3주간의 반복이 필요한 1998년 유명한 6일간의 퍼포먼스에는 놀랄만한 자유로움이 있다. 그의 연극의 구성이 견고하고 치밀한만큼 말이다. 《화재 앞 에서 소방관이 반복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경우에도 같아요. 무용도 있고, 총체적 이동도 있습니다》라고 니치는 주장한다.
 음악적 부분으로 인해 그의 작업이 보다 오페라를 상기시킴에 이견이 없어보인다. 그가 무엇을 준비하든 놀랍지 않을 것이다. 올해의 마지막, 헤르만 니치는 뮌헨에서 메시앙 오페라의 무대장식을 맡아 선보이게 된다.

헤르만 니치
1938  비엔나 출생(오스트리아)
1957  신화 극장 설립(괴물과 신화 극장)
1972  도큐멘타 카셀(독일) 참가
1998  프란츠도르프(오스트리아) 에서 8일간의 퍼포먼스
2009  비엔나에 헤르만 니치 재단 설립
2010  《괴물과 신화극장의 건축가로서 뎃셍》전시, 생 에티엔느 현대미술관
출처:  Le Journal des Arts #336. 2010.12.03-16
기사: Roxana Azimi
번역: zamsoobu

  1. 미술 평론가 겸 아트디렉터 [본문으로]
  2. Marina Abromavic(1946-),유고슬라비아 출생, 행위예술가 [본문으로]
  3. Otto Muehl(1925.-)오스트리아 [본문으로]
  4. Günter Brus(1938-) [본문으로]
  5. Rudolf Schwarzkogler(1940-1969) [본문으로]
  6. Paul McCarthy(1945.-)미국현대예술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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