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시 에민_인터뷰
당신은 책 이상한 나라에서 이렇게 기술한 적이 있습니다 : 《나무를 강하게 하려면 뿌리를 자르기를 계속해서 반복해라, 》이건 뭘 상징하는 건가요? 혹은 진실일까요?
물론 사실입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나무든 뿌리를 자른다면, 더 자랄 것이고 더 강해질 겁니다. 물론 제가 낙태를 여러 번 반복한 것을 말하긴 해요. 전 뿌리예요. 물론 제가 한 일이 유감스럽긴 하고, 어떤 여자도 낙태를 원하진 않아요 ;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해야만 하는 일 인거죠.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 개의 인격
‘당신’은 당신 예술의 주제인가요?
맞아요, 제가 고백하고자 하는 건 바로 저입니다. 하지만 여러 개의 인격이 있어요. 그것이 융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꿈 한 가운데 있다고 보겠어요. 여타의 주역들이 각각의 꿈이 있듯이 말입니다. 꿈 속에서, 나는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 간섭하는 광경을 지켜보죠. 내가 삶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질리지 않는 방법이죠. 사람들의 관점이란 계속 바뀝니다. 우리가 타인의 신임을 얻는 단계나 도덕체계, 윤리적 질서도 계속 바뀝니다. 하지만 40대 즈음 되면, 그들은 분열되기 시작하고 더 이상 믿음이란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여기에 아주 제 개인적인 해석을 내놓을 수 있어요. 마치 밀랍과도 같다는 겁니다 : 고체로 굳어있긴 하지만, 기후나 시간 같은 요인 때문에 형태가 바뀝니다. 바로 이거예요. 내 작업이 무엇을 바라는지요. 나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다른 이에 대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난 다른 사람은 잘 모르거든요.
당신은 오랫동안 《영 브리티쉬 아티스트》의 범주로 분류되었어요.
어쨌든 영국 작가이면서 데뷔한지 2년 즘 되었으니까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국가적 정체성을 보이려했나요? 어떻게 접근하였습니까?
전 페인팅, 뎃셍과 네온등을 설치했습니다. 그게 다예요. 전 조각이나, 담요, 자수, 텐트, 침대, 영화, 사진등을 전시하지 않았어요.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제가 직접 한 것입니다. 물론 네온에 직접 공기를 넣진 않았죠. 하지만 내 글씨체이긴 해요. 내가 그림을 그리거나 페인팅을 하는 것처럼 개인적 특성이 나타나죠.
내가 왜 고통스러운지 설명하다.
하지만 당신은 영국적 정체성을 상기시키지 않나요?
네, 전 처음에 터키에서 살았어요. 물론, 대영제국의 유산을 보여주기도 하겠지만, 그건 오늘날 수많은 영국성만큼 앵글로-색슨 적이지 않죠. 나는 비엔날레에 참가한 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어요. 10월 말이었죠. 이미 3달 동안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있었어요-내 단행본의 서명과 편집자가 요청한 여타 활동이 남아 있었죠. 10월에 예정된 전시가 있었습니다. 그건 거의 일곱달-11월부터 5월까지-이 베니스 비엔날레를 위해 남았었습니다. 그래서 내 전시작들을 상황에 맞게 각색하기로 했어요.
이 두 작품을 시작한지 2년 하고 반이 지났는데, 그 것을 11월 말에 끝낼 수 있었어요. 그것은 정말 훌륭했고, 어리석었으며, 숨 막히게 괜찮았지만 전혀 다른 시대에 맞는 것 같았고, 전혀 다른 이의 손을 거친 것 같았어요. 마치 드 쿠닝이나 싸이 톰블리의 작업 같았어요.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어요. 이성적으로 의도를 알려고 할수록 더 피곤해지거든요. 전 어떤 가설에서 출발하고 싶었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런 의도로 그림을 그려도 어느 순간 가설은 사라지고,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캔버스 이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트레이시 에민 박물관...
베니스에서 어떻게 하면 페인팅에서 작업의 맥락을 이어갈 것인가? 전 이렇게 자문하면서 12월을 보냈어요. 이 페인팅들을 이어주는 비밀스런 법칙을 알아야했어요. 그래서 계속 그리는 대신, 그것들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겼어요. 그리고 마지막 주 목요일에, 그에 대한 답을얻었습니다. 더 이상 작업을 이어갈 수 없었어요. 내 회의는 어쨌든 그림에 관한 것이지, 지적인 논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난 내가 하는 것과 왜 내가 그것을 하는지 설명하려고 할 뿐입니다.
당신의 첫 개인전이 이미 《회고전》이라고 불리는데요...
위대한 회고전!
네, 그리고 당신은 트레이시 에민 미술관이라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
신은 그러면 항상 기념비가 되고픈 생각이 있는 건가요?
그건 좀 다른 문제예요. 제 방대한《회고전》은 1993년 미국의 화이트 규브에서 열렸습니다. 당시는 와이트 큐브가 첫 걸음마를 시작하는 단계였죠 : 4X4.5m 넓이의 백색 공간에서 작품을 쌓아놓았고 1982년부터 1992년까지 했던 작업 중에 작은 크기의 것들만 전시했었습니다. 그때 전 이렇게 말했어요 : 《이건 내 첫 전시이면서 마지막이 될 수 있겠다. 왜냐면 이게 들어맞는지 모르겠어.》저를 담당하는 갤러리스트 제이 조플링은 사람들이 내 작업에 대해 염려스러운 태도를 보일 때 아주 곤혹스러웠다고 해요 : 《이 다음에 그녀가 어떤 작업을 할 거지?》그리고 그가 대답했다고 해요 : 《난 그런 반응을 무시합니다 ; 그녀 스스로도 모릅니다》전 예술세계에서 왜 그것을 하고 있는지 대답을 찾는 것에 환멸감을 느낍니다. 또, 왜 그것이 중요한지, 왜 예술이 존재하는 지에 대해서도 답을 찾으려고 하죠. 이런 전시에서, 전 개인적 물건들을 보였습니다. 수많은 관객들이 그건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거나, 유발시키려고 노력해요; 내 하찮은 구상에서 벗어나는 무언가를 추구하죠.
트레이시 에민 미술관은 원래 워털루 가에 있는 부티크였었어요. 전 아틀리에가 없고, 제 아파트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공간보다 훨씬 작아요; 전 거기서 작업을 했었고, 제 텐트를 놓았었고, 그를 제외한 여분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거기서 끼니를 먹었어요. 전 더 이상 여기에서 계속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이르렀지만, 달리 아틀리에를 찾을 방법이 없었어요. 당시 그 부티크에서 일주일에 120에서 150파운드로 세를 놓는다는 공고를 보았죠. 나로선 너무, 너무 비쌌어요 : 전 돈이 없거든요. 하지만 미술관이 있으면, 그 가격은 제가 받아들일 만큼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 이 공간을 빌렸고, 트레이시 에민 박물관이라고 부르기로 했죠. 에민 채권이란 명목으로 그것을 팔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걸로 이 미술관의 주주가 될 수 있고, 구매자는 그의 아이디어를 말할 수 있어요. 전 이 브랜드를 16000파운드에 판매했어요. 몇 년간의 집세를 충당하고도 다른 생활품들을 살 수 있었어요. 미술관은 일주일에 2일을 대중에게 개방합니다. 목요일, 금요일예요.
...그리고 에민 채권.
채권구매자들은 단지 그 명분만을 산 것인가요?
그들에게 배분하되, 소규모 채권과 주류 채권이 있었어요. 주류 채권은 500파운드고, 소규모 채권은 50파운드예요. 가격차이가 꽤 적당했습니다. 소규모 채권은 A5사이즈의 종이 위에, 주류 채권은 A3사이즈의 종이에 제 그림과 함께 인쇄했어요. 머지 않아 그 채권소유자가 일 년간 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해요. 만약 그 채권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환불할 것입니다 : 하지만 종이는 사실상 의미없이 중립적일 뿐이예요. 제가 만약 미술관에서 처음 선보이는 뎃셍이 약 800파운드가량이라면, 주류 채권 소유자는 500파운드에 살 수 있어요. 약 300파운드를 절약하는 셈이죠. 제시된 가격표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두 달이 지나면, 뎃셍은 1000파운드로 오를 수도 있어요. 채권을 소유하면 500파운드로 충분히 즐거울 수 있어요. 왜냐면 나중에 그림을 두 배로 비싸게 다시 팔 수도 있으니까요.
명백함과 공간감
베니스에서 당신의 새로운 작품에 다시 돌아옵시다. 당신이 쿠닝하고 연관이 있다고 이야기 했는데, 당대의 화두라기 보다 추상에 가깝다는 것을 상징하는 겁니까?
아니요. 전 표현주의적 행위나 그 성격 때문에 쿠닝이나 톰블리를 언급했어요. 베니스에서, 전 줄곧 생각했죠 : 《세상에 더 나은 것이 어딘가에 있을까? 그래, 분명 더 나은 것은 있다, 하지만 어디에,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있을까?》베니스에 가고 싶었고, 전시장을 보곤 이렇게 혼잣말했죠 《아아아아!》 ; 전 베니스에서 무엇인가를 얻기를 바랬고, 근사한 감각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단순하게 그것들을 포기했어요. 그리고 자문했죠 : 《예술은 어디에 있나?》내 전시장은 예술이 될 것이다 ; 그것은 명백하면서 공간감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갇혀있거나 구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피하기 위해 단 몇 초라도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전 정신성이 오염되는 것을 혐오합니다. 정말 날 괴롭히는 거죠. 전 제 전시가 우아하기를, 동시에 사람들이 숨막혀 하기보다 이해하기 쉽다고-알지 못하는 거지만 이해하기를- 말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생각하고,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Tracey Emin
1963년 런던 출생
-2007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2005 언제 내가 섹스를 생각하는지...화이트 큐브, 런던; 리만 모팽, 뉴욕
2004 플랫폼 가란티 콘템퍼러리 아트 센터, 이스탄불
2003 뉴 사우스 웨일즈 아트 갤러리, 호주
2002 스테데익 미술관, 암스텔담 ; 쿤스트 하우스, 윈헨 ; 모던 아트 옥스퍼드
기사: Barry Schwabsky
번역: zamsoobu
'★자료.번역(;Recherche > 예술가(;les artist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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