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han Pamuk 오르한파묵 인터뷰



나는 멜붓이다. 한 밤중 길거리를 걷고 있는.

인터뷰어 프레데릭 루셀Frédéric Roussel

오르한 파묵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섬중의 하나인 뷔야케다의 집, 거기에서도 반원형의 테라스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다. 작은 타일들이 또 다른 블록을 형성하는 새 소설을 집필 중이다. 테이블 위에는 터키의 길거리 상인을 찍은 흑백사진 커버의 또 다른 책이 놓여져 있다. 이 소설은 2014년에도 터키에서 출간이 되었고, 이번 달에 프랑스 내에 출간된다. 오르한 파묵이 칠월 초 이 책에 대해 말할 때 이야기의 주인공인 멜붓의 이름을 따서 책제목을 <<멜붓>>이라고 이야기했었다. 이야기는 그가 탄생한 1969년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이다. 빈민촌 아나톨리에서부터 보자 상인, 요거트 상인을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는 ㅣ스탄불의 지난 40여년간을 아우르는 장대하고 밀도있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2006년 노벨상을 수상한 이래로 콜롬비아 대학 교편을 잡는 순간까지 글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2007년도 작품 이스탄불이 자전적인 이야기와 시적 정서로 감흥을 주었듯이, 갈리마르 출판사는 이번에도 그러기를 기대해본다.

그의 주인공 멜붓은 문학의 큰 적족을 남기게 되었다. 이 가난한 보자 상인은 도시의 상업화 물결에 휩쓸려 그 빛을 보지 못한 채, 우리에게 그의 세계를 보여준다. 미소를 띈 채 글쓰기에만 몰두하는 그를 뷔위카다 섬에서 만났다.


멜붓은 어떻게 태어났나요?

처음엔 보자 상인에 관한 단편을 쓰고 싶었어요. 종종 간략한 담소식으로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소설로 시작했단 걸 상기시키고 싶군요. 그러다가 보자에 대해, 술에 대해, 술과 전통의 관계나, 그 반대의 상충되는 점들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었죠. 왜냐하면 이슬람에선 술이란 금기시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건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요. 한편으로 장사에 성공해서 주변으로부터 질투와 시기를 사는 한 인물에 대해 떠올렸죠. 그리고 그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로요. 수수께끼처럼 시작해서 거대한 서사시로 변해가는 형태였죠. 이 엠 포스터 같은 작가처럼, 인물들이 권력을 얻곤 하지만, 솔직히 그런 구상은 별로예요. 먼가 나 스스로부터 나오는 생각들을 좋아하죠...내 다음 소설, 붉은 머리 여인 은 철학과 상징으로 가득한 단편이예요. 하지만 멜붓은 조금 더 현실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이죠. 요거트가 담긴 도자기병이나 유리병 그리고 나무상자 등등, 미세 역사라 부르는 것들이죠.


이미 작가님은 미시역사를 넘어서지 않았나요?

서사시의 딜레마죠. 톨스토이가 거대한 파노라마를 묘사하는 데 더 자신있어 할까요 아니면 시정을 읊는 것에 더 자랑스러워 할까요 파노라마 소설에서 시정은 인물의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상징주의 서설이나 보르에스 단편에서는 다른 이야기죠. 파노라마 안에서는 인물간 차이점이나 다중성 등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는 요소드이죠. 소설은 맞아요, 일반적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죠. 이번에는 보다 톨스토이 Tolstoï 식의 구성을 추구했죠. 다시 말해서 40여년간 이스탄불과 그 속의 사람들이 어떻게 변모하는 지에 대해 파노라마의 정확한 묘사를 이야기하는 거죠. 혹은 시정이나, 내면의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이죠...


길거리 상인의 시점을 따르는 것이 어렵지 않았나요?

이 소설은 황폐한 곳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나처럼 서구화되거나 무신론자의 경우가 아니죠. 어떻게 보자를 준비하나, 그리고 닭요리는, 어디서 살 수 있나, 1969년에 그의 마을에서 이스탄불까지 어떻게 올 수 있었나, 그의 아버지와 삼촌과 함께 어떻게 집을 지을 수 있었나 등등. 나는 보자상인, 닭요리 상인, 전기 검침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를 수집하기 시작했죠. 아나톨리 마을에가서 요거트 상인을 만나기도 했죠. 좋은 기억이예요, 지난 10년 동안 인터뷰 <<뱅크>>를 구축한 셈이죠. 예를 들면, 택시 운전사들의 증언들도 모으곤 했으니까요. 나는 그것들을 내 가방 속에 잘 싣고, 미국으로 이동했을 때에도 가지고 다녔죠. 개인적으로 디지털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왜 그런 다성적 조합을 하는 건가요

대도시의 낙후한 지역에 사는 저소득 계층을 다룬 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처녀 시도하는 디킨스 식의 소설이예요. 반면에 디킨스 소설의 멜로적 요소는 싫어하기 때문에, 유머로 웋회해서 표현했죠. 1850-60년대 처럼 쓰기로 결정했어요. 플로베르의 소설처럼, 화자가 신하인 경우죠. 하지만 방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했기에, 그런 식의 쓰기는 불가능했어요. 그서 포스트 포크너 세대로써, 뭘 할 수 있을 지 자문했죠. 그래서 새로운 형식을 만들기로 한 겁니다. 멜붓은 절대 <<나>>라고 지칭하지 않아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3년 반즈음 지나, 앞으로 6년간은 더 써야 되겠단 계산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제 3자와 주인공을 조합하는 실험을 하기로 했죠. 내 생각이 맞았어요. 이론적인 필수사항은 아니었고 선택사항이었죠. 필요에 의해서요. 인터뷰들이 생명을 얻었어요, 언어적이면서 유머러스한 현명함이 빛을 발했던 거죠. 또  제 3자가 <<맬붓이 이렇게 말했어>>,<<멜붓이 이렇게 했어>>...라고 말하는 방식은 소설에 힘을 불어넣는 영향이 있었어요. 700페이지 동안 독자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되죠...


3여년 동안, 멜붓은 사미하에게 연애편지를 보내지만 라이하가 받는데요. 사랑에 대해서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었나요?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시인보다 인류학자가 더 와닿는 면이 있어요. 멜붓은 이슬람 지역에서 왔죠. 남자는 결혼 전까지 배우자를 만날 수 없어요. 성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유일하게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경우는 사촌의 결혼식이었죠. 연애편지를 쓰는 것은 그의 결심을 보여주는 거죠. 내가 어렸을 적에는, 연애편지를 쓰기 위해 책을 뒤적여보곤 했어요. 멜붓의 편지에선 오토만 연가의 클리세를 볼 수 있죠. <<당신의 눈은 내 눈을 멀게 하네요>>...하지만 결국 새드엔딩이예요. 여자는 편지를 보지 못하거든요. 사랑이 무너지는 순간 승화되는 무언가가 있죠.


이스탄불의 정치적 흐름도 언급하는데요.

멜붓에겐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있죠. 극우주의의 사촌도 존재하죠. 그래서 우파쪽도, 빈민촌의 마르크스주의자들쪽도 둘러보게 되었죠. 스탕달의 적과 흑 에선, 주인공인 줄리엔 소렐이 서로 다른 사회를 오가면서 대조적인 파노라마를 펼쳐보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소설은 아니예요. 이슬람 정치는 눈(2002) 에서 주제였어요. 왜 낙후한 계층이 국가주의로 돌아서는가? 왜 전통주의자나 이슬람주의자들이 가난한 이민자들을 더 잘 수용하는가? 아마도 몇가지에 대한 답은 한것 같군요...


멜붓은 낯선 감정을 느끼는데요. 왜 그런가요?

나는 멜붓과 동일시 했어요. 어두운 밤길 한 가운데, 그림자들이 겹치고, 사나운 개가 위협하는 가운데를 혼자 걷다보면 어느순간 나는 멜붓이 되죠. 소설적 상상력이 작용하는 신비로운 순간이라고 할 ㅅ 있죠. 처음부터 이 책 제목을 정했어요. 내 유년 시절에 또 군복무 시절에 친구들이 내게 말하곤 했어요. <<오르한, 너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애야>>. 윌리암 워드워즈 의 시에서 같은 단어를 발견했죠. <<낯선 감정>>, 그래서 언젠가는 내 책 제목에 써야 겠다고 생각했죠. 당시엔, 멜붓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가끔 집필하면서, 또는 후에 편집자와 검토하면서 제목을 정하죠. 개인적으로 제목을 정하는 건 사회적인 도구로써 어떤 권한을 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거예요. <<맬붓은 바로 나다>> 이 제목 역시 책을 가지기 위한 시도 중의 하나였죠.


길거리 상인에게 이런 낯선 감정은 예기치 않은 것이 아닌가요?

왜냐하면 소설의 기술은 휴머니티에 대한 아주 작은 디테일이나 취약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 있으니까요. 소시민계층에게 집중하는 건, 진정성이 필요하죠.   
 보통 사람들은 그들을 대할 때 연민이나 동정 밖에 할 수 없어요. 소설의 역사를 통틀어 그런 계층에 대해 복합적 묘사를 한 경우는 드물어요. 전통적으로 중간에 매개자가 있기 마련이죠. 보통은 기자가 많이 등장하죠. 거기에 대해 영문판 편집자인 파버와 이야기했죠. <<오르한, 그래도 소설 안에 지식인이 나오나요?>> 아니요, 중간  매개자는 없어요. 기자역이 나오면 경험을 전달하고, 소통을 더욱 쉽게 만들겠죠. 


그런 인물에 대한 구상은 어디서부터 시작된건가요?

톨스토이로부터요. 인물이 매우 빈약할 때, 가장 최상으로 변모시킬 수 있죠. 인물이 너무 훌륭할 때, 가장 최악으로 변모시킬 수 있죠. 좋은 소설가는 그 자신과 완전히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죠. 좋든 안 좋든, 정치적이든, 무정부주의자든, 어리석든, 그 소설가 자신도 받아들 이기 힘든 인간 유형마저도. 내 첫 도전은 <<눈>>에서 근본주의자 인물을 묘사할 때 였어요. 라줄리였죠. 악인의 전형으로 묘사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완벽한 근본주의자로 묘사하고 싶었던 거죠. 당신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휴머니티적인 점을 찾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근본주의자에게 휴머니티를 묻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다른 소설 작가로 누구를 참고하시나요

가장 동경하는 작가들은 톨스토이Tolstoï , 도스토프예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토마스 만 Thomas Mann, 프루스트죠Marcel Proust. 그들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배웠어요. 도스토프예스키에서는 인간 존재는 자신과 정반대의 것들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점을 배웠죠. 작가가 되기 위해선, 휴머니티에 입각해서 인간을 묘사해야 해죠. 첫 걸음이죠.


터키에서 이 소설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요.

<<멜붓>>은 내 소설 가운데 터키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예요. 내 이름은 빨강(1998) 다음으로요. 내 이름은 빨강 의 20여년간 누적 판매량을 이 소설은 20여주 만에 달성했죠. 왜냐구요? 이 책은 <<터키스러움>>으로 넘쳐흐르거든요. 멜붓은 변하죠. 처음에는 행복하고 미래에 대해서 긍정적이었죠. 마지막에 가서, 그가 분노하냐구요, 아니예요. 나와 같이 그의 기억들을 다시금 느끼게 되죠. 그가 열정을 다해 구축했던 도시는 해체되기에 이르는 거죠.


왜 용감한 여성형을 선택했나요

출간이 되면서, 여기저기에 초대받았어요. 사람들이 내 소설 속 여성인물들을 좋아한다고 했죠. 그래서 이렇게 설득당하기에 이렇죠. <<50여년이 지나는 동안 어느정도 페미니스트가 된 것 같아요. 터키에서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모순이 아니라면 계속 할 생각이예요>> 모두가 웃었죠. 첫번째 열에 앉아있던 여성독자들은 박수를 쳐주었죠...


용감한 여성이긴 하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데요...

내 첫 소설에서 어쩔 수 없이 여성은 피해자로 묘사되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감춰진 분노를 드러내지 않죠.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점에 대해 주의깊게 살펴보게 되었죠. 점점 여성 인물들에 대해 쓰는 게 좋아졌어요. 남성들이 나누는 허세가득한 대화와 비교해서 여성들이 나누는 대화의 아이러니와 유머가 좋았죠. 어머니, 내 누이들이 재잘거리면서 남편들에 대해 말하는 걸 듣곤 했죠. 함께 수다를 나누면서, 서로 돕고 그런 모습을죠.



당신의 페미니즘은 급진적이네요. 

언젠가는 화자가 여성인 소설을 쓴다면 정말 재미있을 겁니다. 죽기 전에 써보고 싶군요.



글쓰는 습관은 어떻게 되시나요

하루종일 쓰곤 해요. 나는 상상속에서 사는 걸 좋아해요. 어느 작가는 글쓰는 게 괴롭다고 하죠. 나는 글을 쓸 때 행복합니다. 쓰지 않을 때, 불행하죠. 현실에 있는 게 만족스럽지 않아요. 글을 쓸 때, 긍정주의자가 되죠. 가끔 스스로 낙서증이 있는 가 자문하죠. 이탈로 칼비노 가 스스로를 정의내린 것처럼요. 뷔이카다에서 부인은 7시 반에 일어나고, 18시에 다시 오죠. 거의 10시간을  같은 자리에서 글쓰죠. 딸이 가끔 날 보러오죠. 딸은 첫 소설을 집피 중이예요. 가끔 지인들이 오거나 해서 옆 자리에 앉아있곤 하죠. 누군가 옆에 있을 때, 글을 쓰면 행복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항상 수기로 말이죠...

펜과 잉크로요.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죠. 나는 예술가가 되기를 바라고. 펜은 내게 아주 중요한 요소죠. 컴퓨터가 도입이 되었을 때, 자문했죠. <<종일 이 모니터를 볼 것인가 아니면 펜으로 종이더미 속에 있을 것인가>> 그래서 계속 손으로 쓰기로 결심했죠.


독서도 많이 하시나요

2만여권을 소장하고 있지만...이전만큼 읽지는 않아요. 17세부터 35세에까지 스스로 단련하기 위해 많이 읽었어요. 가끔 변화를 하기 유도하기 위해 스스로를 고문하죠. 지금은 내 소설을 위해서, 또는 행복하기 위해서 읽어요. 내 딸에게 이렇게 말하죠.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 방법을 찾기 위해 읽어라. 내 나이가 되면, 끝내야 할 것이 산더미죠. 채점해야 할 것도 쌓여있고, 써야할 책도 마찬가지예요. 내 죽음이 오기 전에 끝내야 하죠.


정치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내게 정치적 상황에 대해 언급을 원합니다. 개인적으로 내 소설에 대한 인터뷰를 원할 뿐이예요. 내 인생의 6년을 쏟아부었으니까요. 그런데 첫 질문이 이거예요 <<에도르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움베르토 에코 에게 이렇게 푸념을 했어요. 터키의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구요. 그가 내게 답했죠 <<아니야, 사람들은 내게 벨루스쿠니에 대해서 항상 질문해>>라구요. 당신이 6년 동안 650페이지의 노동을 하고 난 후 받은 질문이, <<에도간?>> 이라면요. 하지만 터키는 이탈리아가 아니죠. 상황은 더 안좋아요.


어느 방향으로요?

더이상의 표현의 자유가 없어요. 극도로 강압적인 권력구조 때문이죠. 전재주의적 권력이던 아니던 국민투표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하죠. 이런 구조에서 몽테스키외가 주창한 권력의 분배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죠. 특히 헌법부에서 더 하죠. 에르도안  대통령이든 차기 지도자든 헌법부와 행정부 양측의 권력을 동시에 가지게 되죠. 더 이상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아요. 13만 명이 해임되고, 4만명이 수감되었어요...민주주의를 위한 자리는 협소한 상황이예요. 내 소설의 외적 세계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겠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해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극염세주의자는 아니지만, 한 가지 말할 게 있어요. 국민투표가 있기 2주전에 카디코프의 아시아지구에 선박을 타고 간 적이 있어요. 부두가에 중앙광장 즈음에 이미 찬성을 축하하는 플랭카드가 장식을 하고 있었어요. 반대를 말하는 카드는 거의 드물었죠. 그 지구에서 실제로 80퍼센트가 반대를 하고 있음에도 말이죠. 그나마 조금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죠.


다음책은 어떤 작품이 될까요

플라그의 밤 이예요. 알베르 카뮈의 작품처럼 페스트를 진압하는 이야기죠. 하지만 오토만 제국 시대의 이야기예요. 곧 나올겁니다. 지금 쓰고 있는 중이죠.


출처 리베라씨옹 2017년 8월 27일자. 

번역 잠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