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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7.26 유리 감옥 안에서

유리 감옥 안에서

유리 감독 안에서

Sthéphane du Mesnildot

번역 ; 잠수부 plongeuse

전염벙을 연상시키거나 외계의 동물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Parasite 기생충 은 현 한국사회를 배경으로한 야심찬, 블랙 소사이어티 코미디이다. 두편의 해외 공동 제작 (설국열차 Snowpiercer, 옥자 Okja ) 의 10년 이후에, 본국으로 돌아온다. 그의 충실한 배우 송강호와 함께, 그리고 이선균( 하드데이)을 포함한 삼대로 구성된 두 가족으로 말이다. 걸작인 괴물 Host, 살인의 추억 Memories of Murther 의 모습이 겹치는 이번 영화 기생충 Parasite 는 불확실로 가득찬, 초조와 긴장감이 감도는, 예측 불가능한 영화이다. 많은 인명피해를 발생시킨 사건(세월호 난파), 와 정치적 위기(박근혜 스캔들), 퇴보하는 시대적 사건( 문화영역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한 블랙리스트) 까지, 10여년간 대체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한층 더 심해진 빈곤층과 이기적인 부르주아층, 그들 사이에 사회에 평등은 무너진건가? 이창동 Lee Chang -dong 의 Burning 에서 젊은 <<개츠비 Gatsby>> 는 그들과 한 세상에서 공존할 수 없었다. 절대로 화합이 불가한 사회의 지경에 몰린 것인가? 감독 봉준호는 두 지역으로 나뉜 한국, 안전지대로 보호된 구역과 자연재해로 무너져버린 구역을 마주보게 한다. 이 모든 것은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플란다스의 개 Barking Dogs Never Bite 의 배경은, 경비원, 그의 창고, 보다 어두운 역역, 아파트 주민들 등등은, 혼잡함과 사회적 낙오에 대한 두려움으로 연결되어있다. 설국열차 Snowpiercer 에서는 , 수직적 움직임이 수평적 움직임으로 변환된다. 서울의 하늘을 치솟는 아파트가 이 영화에서는 끝없는 겨울을 지나는 시베리안 열차로 가로지르게 된다. 열차의 꼬리에 있던 거지들이 열차의 머리부까지 진격하게 된 셈이다. 기생충 에서 김씨 가족은 더러운 반지하에서 햇살 가득한 잔디정원과 통창으로 탁 트인 거실이 있는 거대한 저택으로 옮겨간다. 그의 집주인인 박사장은, 전형적인 <<신 한국인>>, 20세기 이후로 정보산업과 통신사업으로 인해 신흥 부자가 된, 으로 나온다. 대립적인 가속의 수직적 재구성은 표현과 이면의 토대로 보았을 때, 조단 필레 Jordan Peele 의 US 를 복수심에 가득찬 민심을, 연상케도 한다. 단지 그의 영화가 중산층의 분노라는 시대적 상황을 물어붙인 것이라면, 감독 봉준호의 영화는 미국판보다 모호하고 불규칙적이며, 암묵적이다. 인물들은 한국사회를 반영하였고, 그들의 성인 박씨와 김씨는 가장 흔한 성씨이기 때문에, 사건은 폭력을 배제한, 물론 처음에 계획했던 바와는 달리 극은 전개되지만, 조심스러운 침략이다 : 김씨 가족은 판에 장기말을 두듯이 하나씩 하나씩 전략을 진행시킨다. 가정교사, 혹은 미술심리치료사, 가정부, 운전사 역으로 각각의 자리에서 박사장이 그들이 한가족이라는 의심을 전혀 하지 못하도록 일상으로 잠입한다.

외부인의 가정으로의 침투는 한국 모더니티의 중심축이었던 감독 김기영 Kim ki-young 의 영화 하녀 La servante (1960) 에 오마주이기도 하다. 한 촌부가 가족을 점령하는, 그녀의 에로틱한 면과 공포심으로 말이다. 반면, 그의 영화에서 사디스트적이거나 악마적인 면모는 부재했다. 결국, 고장이 나서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 사회적 승강기를 고쳐보려는 인물들일 뿐인 거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부의 세습이 이뤄지고, 상류층은 그들의 재산을 후대에 물려주기를 바란다. 이미 오랜기간 끊이지 않고 이어져내려온, 더욱 더 줄기가 질겨진 덩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김씨 가족이 변변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벌인 고군분투의 노력은 실상 거짓말에 불과했고, 그러한 행위들이 사회를 썪게 만드는 원인이다. 어느 순간까지 그들의 식객노릇이 가상해보이기 까지도 한다.

 

기생충 Parasite 은 이미 블랙 코미디로써 훌륭하지만, 부자연스러운 부르지아지와 이면공작에 가까운 프롤로그로 거의 이탈리아인의 그것과 같은 심술궂고 영악한 정서가 있다. 이미 초반부터 대조적인 사회계층을 미장센으로 구현해 낸 것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믿기지 않는 정확한 묘사와 놀라운 파노라마의 연쇄작용, 자유자재로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물의 동선, 완벽한 구성 등은 과장된 힘을 보여주는 것인가, 자랑스러워할 만하지 않나? 감독 봉준호는 이 영화를 통해 감독 Park Chan-wook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Mademoiselle 의 중첩되는 형식에 대적하는 것인가? 영화 괴물 Host  에서는 카메라가 제 6의 인물이었다. 그들의 미친 질주를 쫓아갔으며, 거의 인물들에 밀착하여 하나의 기관처럼 움직였으며, 생동감과 용맹함을 생생하게 전했다. 이 영화 기생충 Parasite 에서는 보다 거리를 두고 조물주의 역을 자처한다. 마치 인물들이 침투하도록 진두지휘하며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사실상, 미장센은 감독의 염세주의적 관점을 반영한다 : 위대한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대저택은, 정작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들의 유리감옥에 지나지 않는다. 김씨 가족과 박씨 가족 모두 이러한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구조에 벗어나지 못하고 상황에 말려든다. 집에 더 가까이 갈 수록 효과적이라고 믿었던 전략들이 점점 그들 자신들을 옥죄어 오는 것이다. 김씨 가족은 빈곤에서 또 다른 형태의 줄을 갈아탄다. 사회는 마치 거대한 몸체와 같이, 각각의 층에 문제가 있다 : 김씨 가족이 급전이 양식이, 혹은 공간에 대한 결핍을, 박씨 가족은 신경쇠약이나 불안을 나타낸다.

 

아버지는, 범속한 티비드라마에서 나오듯, 회사나 가정 이외에 여타의 삶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바깥 세상은 그의 운전기사의 여정으로 보여질 뿐이다. 어머니를 보면, 보다 더 고립되어 단지 정원 의자에 기절하듯 누워 잠이 들거나, 아이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일 뿐이고, 우스꽝스러운 미술 치료 수업을 강요한다. 그들 삶을 위협하는 공포를 그렇게 배출시킨다. 놀랍도록 잘 구현해낸 배우 조여정 을 보면, 봉 감독의 전작 괴물 Host 에서 자식을 힘껏 끌어안는 괴물이나, 마더 Mother 에서 보았듯, 비틀리고 광기어린 모성에 대한 고찰이 드러난다.  신경이 곤두선 유머, 성에 대한 공포감도 마담 박이 맡은 바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다른 기생충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 미국 문화는 한국 사회에 비교적 깊게 자리잡아있는데, 이러한 정신적 침투는 영화 속 대화씬에서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녀에게 영어 개인수업을 하게 하는 것 말이다. 마치 미국 문화에 완전히 종속되지 못한 것을 만회하려는 것 처럼. 이러한 80년대 캘리포니아 판타지는 한국의 신부르주아들이 주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늘 위생적이고 안온한, 이질적인 문화를 유지하며, 울타리를 치도록 한다. 

 

김씨 가족 구성원들간은 끈끈하게 이어져있지만, 그들은 집 내부에 또다른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이미 침투해있던 이 에 대해 겨우 이름만 알았을 뿐, 그는 가난의 또 다른 형상에 불과하다. 살인의 추억 Memories of Murder 에서는 붉은 색, 흘러간 가요, 그리고 비내리는 날 등이 살인의 전조로 보여진데, 이 영화에서는 박 사장이 혐오하는 냄새가 주요 단거로 작용한다. 남편은 그것을 지하철을 탄 사람들에게서 나는 특별하고, 불쾌한 냄새라고 말한다.  이러한 가운데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이 냄새는 두 부르주아 커플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며, 쾌락의 유희를 하게 한다. 이러한 공포에서 열락으로의 전환은 우리가 비천하다고 칭하는 것들에 대한 모호한 매료이다. 박씨는 그들의 고용인들이 땀이 많이 나며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기생충은 우리가 그렇다고 믿는 것들이 아닌 셈이다.

 

이 두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 의 멸균된 실내장식을 연상케한다. 포스터에서도 인용하고 있는대로 미국판 잡지에서나 나올 법한 초현실주의적 저택이다. 박씨 가족도, 김씨 가족도 이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이 집은 치명적이며 불가능한 소유물에 대한 집착의 상징적 존재일 뿐이다. 설국 열차 Snowpiercer 에서, 객실간에 일어나는 오디세이에서는 영웅은 반란 이후에 본인이 새로운 지도자, 노예들의 지주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김씨 가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집의 새주인이 되는 것을 상상하며, 그 집에 종속되는 또다른 노예가 될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자본주의가 그 줄기를 이어가는 방식이며, 비현실적 욕망을 부추기는, 그러한 욕망을 빛나게 하는 점인 것이다. 거기에 치러야 할 댓가는 누군가의 죽음이다. 김씨가 잃어야 할 것은 그의 영혼이며, 얻는 것은 가족으로 뭉치게 했던 감정으로부터 멀어지는 고독감이다. 영화 기생충 Parasite 을 통해 봉 감독은 한국인 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가 끝이 없음을 말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유령과 싸우는 중이다. 과거의 아픔을 담고 있는 블랙박스의 그것처럼 봉 감독은 슬쩍 영화 속으로 이 상징을 밀어넣는다. 그리고 그 상자를 열고 안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을 물리치기 위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 자신의 기생충, 그리고 검고 깊은 어둠에의 매료에서 스스로 해방되기 위해 분투하는 봉 감독 스스로의 블랙박스일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