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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05 Georg Baselitz_게오르그 바젤리츠

Georg Baselitz_게오르그 바젤리츠

2011월 9월 30일부터 2012년 1월 29일까지 파리 현대미술관에서 게오르그 바실리츠의 조각 회고전이 열린다(기획 : 도미니크 가뉴Dominique Gagneux). 그는 지난 30여년간 ,아프리카 조각. 중세시대 목재들, 대중 미술, 신체, 전자기기 등에서 감흥을 받아 회화와 조각 분야에서 동시에 영역을 확장시켜왔다. 198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선보인 조각을 위한 모델(1979) 를 시초로, 최근의 기념비적 자화상(2009)에 이르기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이 두 시간의 경계에서, 서있는 신체와 조각난 신체, 두상들, 몸통들, 그 중에 특히 상징적인 드레스덴의 여인Femmes de Dresde 를 볼  수 있다. 에릭 페어하겐이 바비에르에 있는 그의 아틀리에에서 게오르그 바셀리츠를 만났다.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뮌헨으로부터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헤르조그 엔 드 므롱[각주:1] 의 건물이 있는 호숫가에서 몇년간 거주하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 곳에서 그는 아주 인상적인 도서관 주변에서, 두개의 작업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 중의 한 공간에는 강렬한 아프리카 예술품과 고대 조각품이 보존되고 있다. 그 공간에서 작가는 창조를 위해 그것들을 주시하며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야심차게 고증을 거듭하고 있다. 
 대화가 중단된 상태에서도, 그는 상냥한 화자이자 선동가였다. 모든 견고한 법칙에 반항하는 상황을 만들는 자로서 ; 그것은 급진적 자유의 상징이자 그의 기준에서는 담담한 표현이다. 그는 풍부한 지식과 교양을 토대로, 이론화를 거부하며, 그의 호기심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또한 그가 그의 젊은 동료들에 이례적으로 사려가 깊다는 것은 여러번 확인된 것으로, 아래 지면에 할애하지는 않을 것이다.
 에두아르 키엔홀즈[각주:2] 으젠 도데인느[각주:3], 토마스 후세아고[각주:4], 매튜 모나한[각주:5], 알레산드로 페솔리, 조나단 메스[각주:6], 의 작업을 이야기 할 때 바젤리츠는 열정에 넘친다.
 그의 30여년에 걸친 조각작품은  60여개로 요약된다. 그와 인터뷰를 할 당시(2011. 5월) 작가는 확답을 하지 않았었다. 그는 두 개의 통나무를 가지고 새로운 작업에 들어갈 참이었다.  
EV.


■ 《출발은 베니스 비엔날레[1980]여서였습니다. 안젤름 키퍼와 내가 독일관 작가로 선정되었죠. 이 독일관은 계속 파시스트적 건물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파시스트 정부 집권당시 건립된 것으로 정책적으로 이용되어왔었죠. 그 곳에서 나 이전에 수많은 조각 전시를 치렀었습니다. 회화전시에 적합하지 않았죠. 난 아직 조각을 하지 않았을 때였고, 동료들이 하는 조각에도 흥미가 없었어요. 난 다른 것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죠.》
 《당시에, 일종의 회화계에선 경쟁이 심했어요. 개념미술이나, "좌파적"인 자들이 실현되지 않은 프로그램을 제시했죠. 그래서 이후에야 조각을 하게 된겁니다. 난 조각의 "간결화"를 증명해보이길 바랬어요. 플래빈Dan flavin, 안드레Karl Andre[각주:7], 저드Donald Judd와 모든 주변상황이 친숙했었습니다(...). 우리는 조각은 회화보다 멍청하다라는 원칙에서 출발했어요. 그건 편견이죠. 그건 오브제의 문제와 접근성과도 관련되어 있어요. 오브제에 따라 조각을 이끌어내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바라던 그러지 않든, 저드는 육면체를 만들었고, 칼 앙드레는 입방체를 만들었죠. 회화로 추상을 할 수 있었지만요. 아마 회화는 보다 덜 정확하고,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보여주거나, 반대로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죠. 우린 백색의 캔버스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내가 조각을 하기로 결심한 순간, 방법을 어떻게 할지 막혔었습니다. 나는 모든"주변 환경"과 "형상"들에 멀어지는 방식으로 작업했는데. 회화를 해왔기 때문이죠. 난 내포된 의미를 나타내는 걸 믿지 않았습니다(...) 나는 찰흙과 석고로 작업을시작했어요. 그리고 모두 집어던져 버렸죠. 나무를 조각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대강 해치웠어요. 그 자체로 뭔가 나타내기 위해서요. 그 다음에 베니스에서 발표한 작품이 탄생한 겁니다. 그걸 조각을 위한 모델 이라고 이름붙였죠. 모델은 미완성이었죠. 그건 시도였어요. 실현과 혁신에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었죠(...)[결과는] 조롱을 실컷 받았죠. 여전히 의미의 문제로 남더군요. 작품이 이슈가 되었어요. 사람들은 히틀러식 경례의 몸짓을 연상하기도 했습니다. 난 그걸 아프리카조각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그저 비슷한 몸짓을 찾아내더군요.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죠. 그리고 우리 중의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진 않을 겁니다.(...) 언론에서는 나를 모순적이면서 공격적인 인물로 소개하곤 했습니다. 그런 이미지들이 베니스를 통해 얻어진 셈이죠. 이후에, 키퍼와 공동전시 이후에도 상황이 바뀌진 않았어요. 모든게 예측가능했죠. 독일식의 상투적인 묘사글 뿐이었죠. 비열한 나치라고 말이죠.
 우리가 좇거나 거리를 두는 것들 중에 대항하는 영향이 있어요(...). 난 항상 에술, 특히 독일 예술에 저항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타작가들과 비교하곤 합니다. 모든 것은 정보들과 관련이 있어요. 세계 대전이후에, 정보는 열악하고 오역되곤 했어요. 모든 게 감춰졌었죠. 도서관의 서고는 나치들에 의해 텅 비었었습니다. 폴 클레나 칸딘스키, 다리파[각주:8]에 관한 책을 찾아볼 수 없었죠.

 16세에, 이탈리아 미래주의 화가들의 흑백의 카달로그 일러스트에 빠져버렸습니다. 믿기지 않는 정보의 원천이었죠. 갑자기, 미래주의에 빠진 겁니다. 아프리카의 경우에 그랬듯이, 나는 모든 낯선 것들에 맞서려했어요. 나치가 후원한 예술, 피카소, 추상과 미래주의의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어요. 협소한 정보와 이 전의 세대들에 의해 곡해된 상황 속에서 뭔가 더욱 개발해야 했습니다. 동-베를린에서 재학시절에는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었죠. 체코와 폴란드 기사가 있었어요. 폴란드는 프랑스와 연관되어 있었고, 프랑스 예술은 폴란드 잡지에 소개되곤 했죠. 파리 학파에 관해서요. 이후에, 서-베를린으로 친구와 여행을 가게 되었어요. 우린 서점에가서 흥미로운 회화 엽서를 훔쳐달아났죠. 당시엔 출판물이 아주 귀했던 시대라는 걸 잊어선 안됩니다. 아주 드물었던 흑백의 시대였죠.
 난 항상 다른 이의 근본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내 길을 가야겠다고, 나의 것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직관적으로, 난 학교에 아주 회의적이었어요. 호기심이 왕성했죠. 현재에도 그렇지만, 처음으로 내 길을 가게 된 이유이죠. (...) 
 내가 조각을 처음 구상할 때[1979], 이미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쿠닝이나 자코메티를 봐왔었죠. 또, 피카소나 마티스, 키르히너[각주:9]와 슈미트-로틀루프[각주:10]도요(...). 제로에서 시작해야 했어요. 그들과 따로 떨어져서요. 내겐 항상 그문제가 중요했습니다. [서독에서] 담임 교수는 모나 하툼을 지지했었죠. 당시에 추상화는 자유를 상징했기 때문에 더 중요했죠. 이어서, 그들은 다음세대에서 그 자유를 이어가길 바랬죠. 나 역시 칸딘스키나 말레비치가 한 것처럼, 그림을 일년여간 그렸었죠. 하지만 난 모범생이 아니었어요. 독일 예술은 항상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것에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죠. 서독에서, 모범적 예술을 하려면 모범생이 되어야 했어요. 담임 교수는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뒤쳐진 거라고 이야기했죠. 시대에 맞지 않는다구요.
 그래서 1999-2000, 베를린에서 알트 뮤지엄에서 [Die Gewalt der Kunst]전시를 하게 된겁니다. 20세기의 예술이 암흑기였다는 걸 보여주었죠. 첫 전시실에는 어둠 속에 내 작품이 걸렸고, 아돌프 히틀러의 회화도 걸렸습니다. 빛으로 주장하려했던 겁니다. 물론 정치적 의도가 있었죠. 미치지 않았다면, 그게 파시스트를 표현하는 거라는 걸 알았을 겁니다. 모든 것이 불행을 암시했죠. (...) 
당신이 작가라면, 희망찬 미래를 열망하며 희망이 되기 위해 작품을 하는 체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난 RDA[각주:11]의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를 불렀습니다. 난 별로 하고싶진 않았지만, 노래엔 의미가 있었죠. (...) 난 존재의 가치를 탐구하는 가장 좋은 예는 아닙니다. 예술의 나아갈 방향을 위해 투쟁하는 게 아니예요. 단순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뿐입니다. 납득할 수 있는 것을 하죠. 당신이 어떤 도덕적 강령을 느낀다면 ,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대중 미술
내가 조각과 예술사에서 몇년간 흥미로웠던 것은 그 둘의 단절입니다. 처음에, 내가 어디로 가는 지 모르고 이리저리 헤맸죠. 지금은, 내가 대중미술을 하고 있는 걸 압니다. 조각이나, 회화가 지난 세기동안 우리가 소위 대중 미술이라고 부르는 분야에서 근원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문화의 틈 사이에서 뿌리가 흔들린 거죠.
 난 그런 상황에 고양되었습니다. [독일 장벽이 붕괴된 이후에], 부인과 함께 [구]독일 연방공화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살았었던 지역으로요. 그리고 마을의 유명한 조각들을 사진으로 찍었죠. 앙드레 말로[각주:12]도 역시 이러한 선언적 조각에 관심이 있었죠. 그의 여러 논평에서 그런 점을 발견했죠. 그런 류의 조각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난 16세기와 17세기의 작센의 조각에 관심이 갔습니다. 그것이 다른 것들과 달라보였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이러한 긴밀한 관계를 위해 중요한 셈이죠. 난 확실히 모든 것에 관심있지만, 실제로 난해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밀어붙이진 않습니다. 대중예술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늘 함께하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은 굉장히 조그맣습니다. 때때로, 농부들은 내 아버지에게 와서 그들이 본 것을 보여주곤 했었습니다. 난 내 조각을 고고학적 행위로 생각합니다.》

                                                                                                 -에릭 베르하겐[각주:13] -


 

게오르그 바젤리츠

1938  Deutschbaselitz 에서 출생.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거주 하며 작업.

2010  Statilche Kunsthalle , Baden-Baden ;  Helsinki Art Museum ;
Galerie Thaddaeus Ropac, Paris ; Forum Wurth,
Arlescheim ; Pinacoteca , Sao Paolo
2011  Michel Werner Gallery , New york;
White Cube, Londres; Thaddaeus Ropac , Saixbourg;
Musee Cantini, Marseille ; MAM de la Ville de Paris


출처  :  44- 50page , artpress n#.381. 
기사  :  Erik Verhagen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Herzog & de Meuron Architekten, BSA/SIA/ETH (HdM) is a Swiss architecture firm, founded and headquartered in Basel, Switzerland in 1978. The careers of founders and senior partners Jacques Herzog (born 19 April 1950), and Pierre de Meuron (born 8 May 1950), closely paralleled one another, with both attending the Swiss Federal Institute of Technology (ETH) in Zürich. They are perhaps best known for their conversion of the giant Bankside Power Station in London to the new home of the Tate Modern. Jacques Herzog and Pierre de Meuron have been visiting professors at the Harvard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Design since 1994 and professors at ETH Zürich since 1999. In 2001, Herzog & de Meuron were awarded the Pritzker Prize, the highest of honours in architecture. Jury chairman J. Carter Brown commented, "One is hard put to think of any architects in history that have addressed the integument of architecture with greater imagination and virtuosity." This was in reference to HdM's innovative use of exterior materials and treatments, such as silkscreened glass. Architecture critic and Pritzker juror Ada Louise Huxtable summarized HdM's approach concisely: "They refine the traditions of modernism to elemental simplicity, while transforming materials and surfaces through the exploration of new treatments and techniques."[1] In 2006, the New York Times Magazine called them "one of the most admired architecture firms in the world."[2] HdM's early works were reductivist pieces of modernity that registered on the same level as the minimalist art of Donald Judd. However, their recent work at Prada Tokyo, the Barcelona Forum Building and the Beijing National Stadium for the 2008 Olympic Games, suggest a changing attitude.[2] HdM's commitment of articulation through materiality is a common thread through all their projects.[clarification needed] Their formal gestures have generally progressed from the purist simplicity of rectangular forms to more complex and dynamic geometries. The architects often cite Joseph Beuys as an enduring artistic inspiration and collaborate with different artists on each architectural project. Their success can be attributed to their skills in revealing unfamiliar or unknown relationships by utilizing innovative materials.[citation needed] [본문으로]
  2. Edward Kienholz (October 23, 1927 – June 10, 1994) was an American installation artist whose work was highly critical of aspects of modern life. From 1972 onwards, he assembled much of his artwork in close collaboration with his artistic partner and wife, Nancy Reddin Kienholz. Thoughout much of their career, the work of the Kienholzes was more appreciated in Europe than in their native United States, though American museums have featured their art more prominently since the 1990s. [본문으로]
  3. Eugène Dodeigne (born 27 July 1923, Rouvreux, near Liège) is a French sculptor living and working at Bondues [본문으로]
  4. Thomas Houseago (b. 1972 in Leeds, Great Britain) is a contemporary visual artist. He currently lives and works in Los Angeles, California. He is a figurative sculptor who uses lo-fi materials such as plaster[1] and plywood.[2] His work references genres such as Cubism and Futurism and plays on the history and tradition of statues.[3] Thomas Houseago studied at Central Saint Martins in London and the Ateliers in Amsterdam. After completing his studies, he lived and worked for several years in Brussels before moving to Los Angeles. During the past year, the work of Thomas Houseago has been shown in Glasgow, Los Angeles, London, Paris, Milan, Berlin, Arnhem (Sonsbeek 2008) and Brussels. [본문으로]
  5. Matthew Monahan (b.1972, Eureka, California) is a United States artist based in Los Angeles. He is represented by Anton Kern Gallery in New York, and Fons Welters in Amsterdam. Monahan studied at the Cooper Union School of Art in New York and the Gerrit Rietveld Academie in Amsterdam. Monahan has shown his sculptures at various galleries, collections, and museums, including the Los Angeles Museum of Contemporary Art, the Chinese European Art Center in Xiamen, Bureau Stedelijk in Amsterdam, The National Center for Art in St. Petersburg, Russia, The Royal Academy and the Saatchi Gallery in London, and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The Stedelijk Museum and the Fries Museum, all in the Netherlands. In 1999, Monahan participated in both the Liverpool and LA International Bienniales. [본문으로]
  6. Jonathan Meese (born January 23, 1970, Tokyo/Dessau) is a German painter, sculptor, performance artist and installation artist based in Berlin and Hamburg. His (often multi-media) works include collages, drawings and writing. He also designs theater sets and wrote and starred in a play, "De Frau: Dr. Poundaddylein - Dr. Ezodysseusszeusuzur" in 2007 at the Volksbühne Theater. [본문으로]
  7. [Carl Andre, 1935. 9. 16~] 요약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 조각은 반드시 수직성을 가져야 한다는 관념을 깨고 수평조각의 개념을 도입하여 조각에 대한 놀라운 인식 전환을 가져왔다. 바닥에 정방형으로 똑같은 크기의 철판을 깔아놓은 작품으로 유명하다[출처] 칼 안드레 [Carl Andre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8. Die Brücke (The Bridge) was a group of German expressionist artists formed in Dresden in 1905, after which the Brücke Museum in Berlin was named. Founding members were Fritz Bleyl, Erich Heckel, Ernst Ludwig Kirchner and Karl Schmidt-Rottluff. Later members were Emil Nolde, Max Pechstein and Otto Mueller. The seminal group had a major impact on the evolution of modern art in the 20th century and the creation of expressionism.[1] Die Brücke is sometimes compared to the Fauves. Both movements shared interests in primitivist art. Both shared an interest in the expressing of extreme emotion through high-keyed color that was very often non-naturalistic. Both movements employed a drawing technique that was crude, and both groups shared an antipathy to complete abstraction. The Die Brücke artists' emotionally agitated paintings of city streets and sexually charged events transpiring in country settings make their French counterparts, the Fauves, seem tame by comparison.[2] [본문으로]
  9. Ernst Ludwig Kirchner, 1880.5.6~1938.6.15] 요약 독일의 표현주의화가·판화가로 독일 중세의 목판화와 동양의 풍속화, 아프리카·오세아니아 원주민의 원시미술과 뭉크의 영향을 받았다. '브뤼케(Die Brucke:다리)'를 창설했고 잡기《폭풍우Der Strum》 및 청기사 운동에 참가하여 표현주의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했다.[출처]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10. [Karl Schmidt-Rottluff, 1884.12.1~1976.8.9] 요약 독일의 화가 ·판화가. 고흐, 고갱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 운동은 독일표현파의 최초의 물결로서 심한 원색주의가 특색이었다. 1910년부터 집중적으로 목판 ·석판에 손을 대고, 디 브뤼케그룹에서 제일 먼저 인체를 입체파(cubism)풍의 포름(forme)으로 환원하였다. 이듬해 베를린으로 이주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종군 후에는 색채의 격렬함이 누그러지고 형체도 다소 부드러워졌다.[출처]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midt-Rottluff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11. 독일 민주공화국République démocratique allemande [본문으로]
  12. André Malraux (pronounced: [ɑ̃dʁe malʁo]) DSO (3 November 1901 – 23 November 1976) was a French adventurer, award-winning author, and statesman. Having traveled extensively in Indochina and China, Malraux was noted especially for his novel entitled La Condition Humaine (Man's Fate) (1933), which won the Prix Goncourt. He was appointed by General Charles de Gaulle as Minister of Information (1945–1946), then as Minister of State (1958–1959), and the first Minister of Cultural Affairs, serving during De Gaulle's entire presidency (1959–1969). [본문으로]
  13. 에릭 베르하겐 Valenciennes 대학에서 현대예술사를 가르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