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번역_까이에 뒤 시네마CahiersDuCinema_734


 옥자 , 
봉준호

애완 괴물

기사 ; 조아킴 르파스티에

봉준호는 매번 영화에서 괴물을 선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살인의 추억 에서는 잡히지 않는 살인자와, 괴물 에서는 거대한 파충류의 괴물과, 마더 에서는 숨막히게 하는 엄마와, 스노우 피어싱 에서는 오웰식 기차에서. 옥자, 이번 영화에서는 큰 귀에 하마와 닮은 <<슈퍼 새끼 돼지>>, 착한 괴물이다. ET 나 이웃집 토토로 가 한국의 산 중턱에서 꿈틀거린다.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 12살의 미자의 보호 아래에서. 미자는 얼마있지 않아 뉴욕의 미란도로부터 <<그린워싱>> 을 명목으로, 옥자를 끌어들이도록한다.
봉준호에게 있어 괴물은 또 다른 인물과 같다. 풍자와 액션영화, 환상적 판타지를 어우르는 그의 영화의 또 다른 모델인 것이다. 옥자에서는, 사실적인 충격을 주기 보다 상상력으로 보다 완화 된 버전으로 7세에서 77세까지의 아우를 수 있게 되었다. 항상 엇박자와 정박자를 자유로이 오가는 방식의 봉 감독은 각각의 시퀀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 바로 언덕의 비탈길을 질주하는 괴물 덕분에 예측하기 힘든 리듬으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에, 공동작업의 불협화음이나 아이와 동물간에 흐르는 애가의 서정적 감정씬 등등.

이 첫번째 씬이 이토록 생생한 것은, 봉감독이 새로이 처한 국면, 미국의 대형 미디어와 손을 잡은 그의 상황과도 겹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와 짐승이 서로 닿는 씬이 반복되는 것은 비단 디지털 효과의 노하우를 보여주기 위함만은 아니다. 도축장과 종의 학살 사이에 극단성을, 아이와 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동등한 운명의 고리를 보다 우아한 방식으로 조금씩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돌려 말하는 방식이 영화 자체가 가진 유머를 희석시키진 않는다. 이제는 흔한 주제가 되어버린 <<자본주의의 폐해>> 를 도를 지나치지 않게 풍자하면서도, 고유의 활력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유머는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우선, 작품 자체의 처지가 그렇다. 스트리밍 서비스로 귀결되는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를, 그의 작품 자체를 액자 형식으로  취한다. 여기서 미란도가 넷플릭스 라면, 봉준호 그 자신은 <<유기농 자영업자>>가 될 것이다. 그는 예술적 체면을 이렇게 챙긴 것인가? 칸에서 펼쳐진 드라마같은 작은 소동을 생각해보면, 아직 게임은 절반도 진행된 것 같지 않다.

한편, 또 다른 유머는 영화 속, 어느 순간 아주 인공적인 면에서 볼 수 있다. 탈지역적인 배경으로 봉감독은 그만의 스타일을 완성시킨다; 바로 서스펜스 가득한 액션 씬의 코메디의 퓨전, 원칙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그런 스타일 인 것이다. 여기에는 어리버리한 인물이 나온다. 여기에는 킹콩 처럼, 도시를 너무 손상시키지 않는 괴물, 옥자도 나온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옥자 는 봉감독을 닮았다. 두 존재 모두, 거대하고, 부드러운 유연함을 가지고. 언제나 다른 형상으로 변태할 수 있다. 결국 친절하게도, 공격적이지 않으면서 모든 면에서 승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옥자는 그저 반체제적인 풍자를 하는 그저그런 오락영화로 남을 것인가? 현재로서는 오히려 그 반대로 보인다. 봉감독은 강하게 동물에 감정 이입하도록 하며, 동시에 익살스러운 촌극을 연출한다. 이건 마치 영화 괴물 에서  괴물이 꽈당하며 넘어질 때 관객이 느꼈던 쾌감을 감독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결국 이 영화, 옥자 에서도 옥자는 기르기 적당한 ‘친절함’과 ‘온순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은 어느 편으로 규정짓기 쉽지 않다. 영화 자체가 탈지역화(넷플릭스 와 같은 거대 제작사, 국제적 캐스팅) 되어서만은 아니다. 봉감독은 언제 어디서건, 그가 그 자신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로테스크한 면에서. 그리고 특별히 미묘하다는 면에서. 봉 감독에 대적할 만한 감독은 없어보인다(이번 칸 영화제에서도 보았듯, 하네케 감독이나 폴란스키 감독은 이 ‘과감한’ 장르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너무 심각하게 무게잡지 않고도 이렇게 유쾌한 코미디를 볼 수 있는 건 확실히 흔치않다.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의 찡그린 주름에서, 제이크 질렌할 Jake Gyllenhaal의 거친 숨소리에서, 폴 다노 Pau Dano 의 경박함 속에서 끊임없이 관객은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어떤 채식 행동주의자의 말 속에서 뜻밖의 말을 듣게 된다, 어떤 명제같은. <<번역은, 신성한 거야>> 이 문장은 익살스럽게, 그리고 조금 심각하게, 반복된다. 그게 마치 봉감독이 이 영화와 함께 거쳐온 힘든 여정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영화의 운명이 이미 어디에서든 보여질 수 있도록 지워진(미국과 한국, 극장과 인터넷 등등) 것처럼, 봉감독은 만국공통어를 초월하여, 봉준호 감독은 그 고유의 이데올로기(액션과 감성, 그리고 환경과 경제를 주제로 한 의식적인 가벼운 터치)를 펼치려한다. 휴, 번역때문에 손해만 본 건 아니다.

기사원문 카이에 뒤 씨네마 cahiers du cinéma
Joachim Lepastier
기사번역 plonge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