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비너스Vénus Noir, Abdellatif Kechiche,2010

Vénus Noir,,2010
감독 :  Abdellatif Kechiche(60'출생.)
등장인물: Yahima Torres,André Jacobs,Olivier Gourmet

당신은 비너스를 알 것이다. 그렇다면 호텐토트의 비너스는?

■그녀가 다르게 생긴 것, 그녀의 무리에서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검고 무뚝뚝한 얼굴을 봐야하지만 지루하거나 따분하지않다. 그녀의 절망에 깊이 이입되었기 때문일까?

하나의 관점에서만 보면 분명 다르다는 것은 위험요소이다. '무리'의 하나로 타인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에 대한 강한 의지이다. 거기에는 나와 익숙한 것, 친근한 것, 비슷하거나 같은 것은 안전하다는 생각이 먼저한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보장할 수 있나?

블랙 비너스는 영화에서 아프리카의 한 종족으로 사르키를 가르키며, 그녀는 호텐토트 비너스란 이름으로 괴물쇼를 한다.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 야만종으로 연기를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 대해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치는 불행을 어쩌지 못할 뿐이다. 동물의 연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도 그처럼 타인의 통제를 받아야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가 쇼의 한 순서로 아프리카 춤을 추는 장면은 더욱 극적으로 보인다. 벗어나지 못하도록 둘러쳐진 철창을 의식하지 않은 채, 부드러운 몸을 유연하게 놀리면서, 온 몸의 근육과 살점들이 요동치며 장단에 호응하는 모습은 그녀의 전체적 생의 비극이 찰나의 희극과 교차된다.

■극장신에서 관객은 동전 몇 푼에 쇼를 보러 온다. 그리고 그 관객을 보는 현재의 관객도 역시 돈을 내고 기꺼이 어두운 극장 안으로 들어온다. 시선은 교차되고 100여년의 시간을 두고 서로 다른 생각이 그렇게 한 공간에서 부딪힌다. 시선과 공연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메타영화의 면모가 슬쩍 드러난다. 스크린 없이 영화 속 공연은 영화보다 연극에 가깝다. 또는 서커스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 속 구경꾼이나 현재의 관객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모두 허구임은 분명하다. 아니, 그조차도 이 [블랙 비너스]에서는 모호하지만... 주인공의 공연과 삶은 닮아있기 때문이다.
 공연은 삶보다 압축적이며 더욱 명확하고 과장해보인다. 그리고 자신이 허구임을 교묘히 감추며, 관객은 거기에 기꺼이 동참한다. 
 영화 속 공연은 거기에 윤리적 측면까지 더한다. 그러나 영화 속 100여년 전 구경꾼들은 자신들이 이것들을 즐기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그저 고단하고 지리멸렬한 일상의 한 순간에 두려움, 신기함, 놀라움등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불한 돈에 걸맞는 재미를 느끼고 싶어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내는 동안, 현재의 관객은 그들이 놓친 죄책감을 대신 가진다. 한 인간이 가지는 권리, 그리고 가질 수도 있었던 행복에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낀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었을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몇몇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시인하기도 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기에 바쁜 우리를 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다고 가정하면, 과연 우리는 이런 도덕적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실화에 근거한 픽션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에서 손놓고 바라보기만 하는 방관자로서 우리는 정당한가? 아니 그보다, 영화 속 구경꾼이 비윤리적이라고 탓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책임이 없다면, 이 비너스의 비극은 그저 자신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요소가 우연으로 만나면서 하나의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유라도 그녀의 죽음으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살아있었을 때 최소한의 자존감으로 남겨두었던 치부를 죽어서야 드러내면서, 이후 석고입상으로 제작되면서, 또 다른 관객( 인류학회 )에 드러나기 위해 몸을 둘러싸고 흰 천이 드리워진 그녀는 죽어서도  편히 눕지 못했다.
 그것은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무아지경의 상황에서 관객도 잊고, 마치 발 아래 호화스러운 카펫이 아니라 검붉은 흙이 있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 대신에 아들과 딸, 남편, 친구들, 가족들이 있듯이 춤을 추는 장면이 눈에 밟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