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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의 본질과 건축물의 창조 ; ⓕ비디오와 신체의 영역


 60년대 중반에, 비디오의 발명은 상황을 직접적으로 변환시키는 도구로 여겨졌다. 전자 영상이 등장하면서 직접적인 권력은《소멸》되었다고 여겨지며, 이는 줄곧 실험영화의 주제로 다뤄졌다. 비디오는 시간(영상의 지연, 반복, 멈춤, 뒤로 재생, 플레이타임 등)을 조각하며 다른 매체처럼 하나의 조형 요소로써 다룬다. 비디오 영상은 가벼운 장비로 모든 장소의 전방위로 그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도록, 특히 창조자의 입장에서, 한다. 비디오 영상은 장소를 왜곡하며 그 자체를 표현하도록,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그 자화상의 영역을 표현하도록 한다. 각자가 외부세계를 통해 그만의 존재하는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현실은 신체적 영역이자 영혼과 기억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방향성으로 인해 자연과 쌓은 직접 경험은 항상 곧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영화는 《물질적 현실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더이상 강요되지 않는다. 지그필드 크라카우어[각주:1]의 유명한 표현을 빌자면 그렇다. 모든 허구에 신체적 영역이 가지는 복잡한 특성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알도 로시, 펠리니, 로셀리니와 비스콘티[각주:2]

 역사에도 잘 드러나듯이, 로시의 구상은 서로 이어지는 찰나의 경험에 전자적 에너지의 현실을 뿌리내리는 것이었다. 그의 수많은 원칙은 우주적 도시를 상기시킨다 : 흐름의 구성, 건축과 도시의 혼성, 도시의 변증법적 구조(영속적이며 예측불가능한 요소의 점진적 사용, 그리고 전 시민과 거주민들이 증가함에 따라 계속 진화하는 거주지) 가 그렇다. 하지만 우주적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알도 로시에게 그 것은 현존하는 찰나의 현실보다 기억에 의존한다. 장소는 과거를 떠오르게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도시의 지형에 새겨진 시간적 층위로  대지의 겉표면을 채운다. 이런 구조가 중첩되며 거주지가 생겨난다 : 이는 건축가의 말을 빌자면, 바로《자전적 지형학》이다. 장소의 현재에 얽힌 기억을 좇으며 창조를 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여기에 시간을 끌어들인다. 로시는 순간의《초월적 인상》에 대해 말한다. 그에 따르면, 기억이란 단지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가 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첫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그 곳과 연결된 경험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바로 기억의 장소가 쌓이면서 도시는 자연을 뛰어넘는다. 로커스는 기후로, 빛과 시간, 그리고 상상에 의해 정의된다. 그가 가진 지형은 인간적 건축의 또 다른 층위인 것이다 : 기법의 축적, 중첩과 퇴적 장용등에 의해서.
 

로시가 건축적 현실의 연장선상으로 최초로 영화계로 뛰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실은 바로 상상이 된다. 《사실주의 교육》이라고 이름붙이며, 로시는 비스콘티, 로셀리니와 펠리니가 《가장 진실에 가까운 이탈리아 풍경》을 표현했으며, 이를《소멸된 이탈리아의 고고학적 일람이나 영상으로 나타난》 신사실주의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개인적 경험은 영화적 기억과 혼재되어 나타난다. 1973년 그는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장식하기와 지우기 란 제목의 영화를 상영했다.  바로 아돌프 로스
[각주:3]의 유명한 작품 장식과 범죄 에 대해 부치는 것이었다. 기억과 찰나의 영화를 개발한 페티시 영화인들의 작품에 연이은 시퀀스들과 건축적 부착과 관련있다.
 펠리니는 찰나의 현실과 삶을 융해시킨다. 그의 기억과 유령은 이야기의 자전적 요소에서 발견된다(현실과 유령). 라 돌체 비타(La Dolce Vita, 1960) 펠리니 로마 (Fellini Roma, 1972) 가 그렇다. 새롭게 기억의 장소로 적용하는 방식은 매우 주요하다. 현실은 시네시타 스튜디오 안에서 연극적 장식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마찬가치로 로시니에게 자연은 더 이상
《도시의 건축》에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기억의 연장선상으로 현실이 필요할 뿐, 그곳엔 인공성이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렘 쿨하스와 쿠엔틴 타란티노

 렘 쿨하스는 앞으로 환상의 건축으로 진전하며 의식을 확장시킬 것이다. 그의 상징적인 저서이자, 영화 시나리오로도 유명한 정신착란증의 뉴욕  을 보자. 이 작품은 60년대의 유토피아 건축을 본따서,  자연이 추방된 인공도시인 루나파크나 드림랜드를 묘사하고 있다. 그 곳에서 건축은 유령만이 살고 있는 현실을 구축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쿨하스는 전차를 타고, 재미와 오락이 가득한 서로 다르며 독자적인 단위를 무한히 연결하며 코니 아일랜드 투어를 떠나도록 한다. 각기 다른 채널로 서로 다른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상들 사이로 말이다. 전기적 기술이 전자적 기술을 앞지르는 셈이다. 이런 환상이 끝나는 때에 기술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놀이공원에 대한 해석은 맨하탄을 《대도시의 섬》이라고 부르며 마천루와 나란히 놓은 것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각각의 섬은 무한정한 사용이 가능한 플랫폼이 겹쳐지는 장소다. 그 곳에서 영구적인 변화가 일어나며, 프로그램이 무한정 확장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90년대에 쿨하스는 이러한 프로그래밍 정보과학을 더욱 복잡하게 한다. 그는 때로 계획을 동시에 중첩시키며 서로의 활동 영역이 겹쳐지도록 한다. 이런 혼재방식은 비디오영역에서 영상이 다른 영상을 대체하는 방식이다. 이는 여러 영상들의 전자기적 신호가 개입된다는 면에서 편집과는 구분된다.
 쿨하스의 아틀리에서 비디오는 이런 연구 매체로 사용된다. 자전적 요소를 사용하는 새로운 형식의 생-클라우드의 라 빌라 달라바(La villa Dall'Ava, 1985-1991) 에서 고전적 전통(로시)을 인용하지 않는다. 대신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나 장 프루베에 의해 제기된 모던 건축가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렘 쿨하스가 70년대에 20세기에서 놀이공원을 상기시키며 그의 이론을 강화했다면, 영화계에서 쿠엔틴 타란티노는 그의 청년기인 6-70년대 대중문화를 대중적 상상으로 연결시킨다. 정크 푸드, 정크 스페이스 는 슈퍼마켓과 공항, 정체성이 사라진 세계로 구성된 세

 

계이다. 물 만난 고기처럼, 타란티노의 등장인물은 비인격적 상황과 초연하고 진지하게 투쟁(로얄 치즈, 마돈나 등등.)하는  (쿨하스적) 도시에서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타란티노 영화의 기준은 그에 따르면 가장 자유롭고 창조적인 B급 무비시리즈의 《전반적 요소》이다. 타란티노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지낸 경험이 있는 만큼, 영화적 문화로 단련되어 있다. 펠리니라면, 그것은 현실을 상상계로 정의했겠지만, 타란티노는 클리세와 영상에 인생과 현실을 부여한 셈이다.

 타란티노는 인물들이 우선적으로 살고 있는 영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영화를 찍는다. 70년대 상징으로 넘치게 연출을 하는 것은 그 당시의 특성을 가리키는 시나리오적 화법이며 시간적 구조이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은 폐기된다. 대신에 실마리를 점점 찾기 힘들 정도로 독립적인 세계가 마치 우연처럼 연이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해체의 방법은 어떠한 순간에도 침투할 수 있는 비디오테잎 녹화기의 사용과 관련있다. 액션 도중에 바로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다. 어떤 우주적 논리나 분명한 시간성이 없이 서로 다른 세계가 포개지며 이중화되는 것은 섬광이나 급변, 재생이 일어나며 때때로 횡설수설한 영적 세계와 닮아 있다. 동시에 그런 점은 이야기 전부와 삶의 《진정성》이 해체되는 듯한 내밀한 이야기들을 아우르는 미분화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타란티노는 4가지 주요 수단을 이용한다.  거의 실시간으로 롱테이크로 촬영하며 시간을 지체한다 ; 중요하지 않은 일상의 세부적 사항을 기록하고, 배우의 연기를 뒤흔들어놓는다 ; B급 무비적 요소가 없는 주인공의 인생과 내면을 좇는다 ; 결국 《역동적인》신체를 가진 배우를 선택하고, 잔인성을 더욱 표출시킨다.
 타란티노는 쿨하스의 거울이다 ; 첫 째, 그것은 도시의 내부에 환상계를 명백히 드러낸다는 점이다 ; 둘 째, 팝 문화의 환상적 세계에 처한 현실과 인생의 순간을 불시에 깨닫게 한다는 점이다.

장 누벨과 빔 벤더스

 90년대 초에, 장 누벨은 영상과 단절된 건축계의 한 측면을 개발하였다. 그에 따르면,《건축은 영상으로 만들어진다》. 그는 현실에 접근하기 위해 허구를 키워나간다. 건축가는 건물을 통해 영상의 이차원적인 측면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전자 영상에 의해 픽셀화된 전차를 본보기로 삼아, 건물의 표면을 통해 영상의 물질성을 보다 구축적으로 실현시킨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빛은 건물의 부피를 연상시키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재료를 해체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런 새로운 건축적 조건을 활용하면서 그는 관심사(비디오)와 찰나에 찬사를 바친다. 누벨은 각각 프로젝트에서 찰나를 《고정시키는》 수단을 사용한다. 결국 그가 사용한 단어 그대로, 건축은 상상적 순간과 현실의 의지를 석화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장 누벨의 건축은 보다 요소 간의 모호함을 이용하여 더욱 혼동시킨다. 건물의 표면(미세전차, 질감, 단색, 그래픽 사인)은 그 자체로 표면-영상을 떠올리게끔 건축 재료를 초월한다. 그가 이렇게 현실을 영상으로 변환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데팡스의 상단 시공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다. 이 구조물은 지평선의 《천》과 같이 촉각을 느끼게 하는 거대한 지형학적 구조이다. 알루미늄 재질의 정밀한 이 구조에서, 골조는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를 반영한다. 기상 상황, 우천 상황등이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영상을 보는 듯 하다.
 건축적 표현은 《공유 영역》이 되었다. 누벨은 이 두 세계를 연결짓는 텔레비전 영상의 특질을 묘사한 폴 비릴로(Paul Virillo)의 논리를 차용한다. 문제는 더 이상 이 영상의 공간을 장식하거나 일치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전자적 이미지의 침투로 영상의 어느 순간이더라도 인물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누벨의 건물은 문이 보이지 않고,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통로가 시작되는 건물정면-표면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상호작용의 공간이다. 아랍지역에 건설된 협회 지사의 정면은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매 순간 내부에서《표면을》느끼게 한다. 정면은 두 세계를 분리하는 겉껍질이며 동시에 하나에 다른 하나를 수

반한다. 이 인터페이스는 더 이상 두께를 가지지 않는다.

 누벨은 사용자의 정신적 심상을 고려하며 건설하려 한다. 다양하게 지평선을 파헤치며 그가 지칭하는《상황의 시정》을 도시 환경과 관련하여 떠오르게 한다. 19세기의 인간계계가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면 현재의 인간계는 텔레비전과 영화의 도시적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프로젝트를 보면 장소와 함께 프로그램에서 유래하며 허구를 창조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인이요? 어떤 면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사람들이죠》라고, 누벨은 영화를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미분화계로써 상기시킨다. 빔 벤더스는 이런 의미에서 페티시 영화인인 것이다.
 

 

이런 현실과 영상에 관해 또달리 떠오르는 문제는, 빔 벤더스의 영화에 종종 등장하듯 파리 텍사스(Paris, Texas ,1984) 의 핍쇼에서 창유리나, 자동차의 앞 유리창의 예처럼, 인물들이 자발성을 빼앗긴 채 늘 이동중에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마치 신체의 연장선으로, 연속적인 전이현상으로 인해 시야가 전이된 기계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벤더스에게 《현실》은 속이 빈 개념이다. 인물들은 영상으로 채워진 세계에서 살고, 폴라로이드나 사진에서 존재하며 나타난다. 한편 로버트 벤추리는 이런 인쇄물, 상징과 신호로 영상의 두 세계, 소통의 세계와 소비의 세계의 내부로 침투하며 이를 대립시킨다. 빔 벤더스는 자연을 공허함으로, 반대로 사막을 각각의 개인이 구원받는 공간으로 그린다. 왜냐하면 인물들이 존재하는 영상 속에 이미 그들은 《어디에도 없기에》. 순간의 불가시성과 변이, 개방과 공격성에 보다 침잠하여, 그들은 황량한 환경에서 그 고유의 정체성의 방향을 바꾼다.

 영상이 쉽게 사라지는 가운데 외부성과 내부성은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한다. 누벨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내부와 외부의 세계는 현실과 외부 이미지가 비춰지는 건물 표면에서 만난다. 벤더스와 누벨은 모든 상황을 바꾸는 그 자체로 바꾸는 비디오 영상으로 고유의 물질성과 전자층을 또한 영상으로 변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창조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의식이 직접적으로 현실과 연결되어 있는 상호작용과 소통의 세계, 그리고 찰나의 세계를 발견하고자 한다. 현실은 영상의 세계가 되며, 영적 세계와 기억의 세계가 된다. 또한 이렇게 후기현대건축계에서 자연의 실종으로 우리는 텔레비전과 비디오의 영상으로 초래된 상상력을 새롭게 재인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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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ARCHITECTURES N˚ 196,  2010.12, 46-50page.
번역:  Plongeur ( zamsoobu )


  1. Siegfried Kracauer *(1889-1966) 사회학자, 기자, 문화 비평가, 영화이론가. [본문으로]
  2. Aldo Rossi (1931-1997) 건축가. Federico Fellini(1920-1993)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난폭한 연예인과 백치 처녀와의 내면적 편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길》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이후 《절벽》, 《카비리아의 밤》, 《달콤한 생활》등 많은 작품을 만들며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출처] 펠리니 [Federico Fellini ] | 네이버 백과사전 Rossellini(1906-77)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으로 기록적인 수법을 활용한 새로운 리얼리즘적 수법의 묘사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무방비 도시》, 《로마에서의 밤이었다》 등이 있다. [출처] 로베르토 로셀리니 [Roberto Rossellini ] | 네이버 백과사전 Luchino Visconti, 1906.11.2~1976.3.17]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으로 《강박관념》을 연출하여 초현실주의의 기초를 닦았으며 대부분의 영화에서 이탈리아의 현실문제를 다루었다. 대표작은 《대지는 흔들린다》, 《여름의 폭풍우》, 《백야》 등이 있다. [출처] 루키노 비스콘티 [Luchino Visconti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3. 아돌프 로스 [Adolf Loos, 1870.12.10~1933.8.23] 요약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미국에서 기능주의 건축양식을 배운 후, 귀국하여 근대 합리주의에 입각한 건축물을 제작했다. 파리의 차라 저택, 프라하의 뮐러 저택 등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출처] 아돌프 로스 [Adolf Loos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