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Christoph Hochhäusler ⓐ
디지털로의 새로운 개발의 물결을 타고, 독일 감독인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가 촬영과 후반작업에 대해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였다.
영원한 실험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Christoph Hochhäusler 1
사람들은 촬영에 고단함을 기꺼이 여기며 자연스럽게 그것을 매력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며, 《걸작》을 위해 무거운 기계를 지고 다니며 희생을 한다...그와 동시에, 나는 낭만이란 명목 하에 이 모든 타협과 구식의 작업방식에 신물이 나며 혐오스럽다. 어떤 대안이 있겠는가?
나는 우리의 뇌에 각인되는 단순한 광고때문에 이 단어를 유행에 따라 사용할 것이 두렵다. 바로 영원한 젊음, 즉흥성이 그것이다. 물론 예측불가능하며 즉흥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포함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신뢰》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영화사는 즉흥성에 연관된 기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존 카사베츠 John Cassavetes 나 마이크 레이 Mike Leigh .장 르누아르 Jean Renoir 의 영화에서, - 그들은 방법이나 수단이 없어서가 아니라, 혹은 준비가 부족해서가 아닌 상황에서 장면을 발견하며 위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배우의 연기에서 자유로운 억양- 사실주의로의 변화를 인정하는 표현으로써 - 도 마찬가지로 내 관점에서 보면 편하지 않다. 예를 들어 그들은 자동으로 카메라앞에서 《다큐멘터리》같은 행동을 취하거나, 영화적 내러티브를 포기하는 듯 한다. 사람들은 이 《측정 불가능한 》연기를 보고 배우들이 측정가능한 언어로 말하기를,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보다 단순해지기를 바랄 지도 모른다.
물론, 합성의 수많은 시도가 이어지면서 궁극적으로 풍부한 연기가 절정에 이르지도 모른다. 마틴 스코세지 Martin Scorsese 는 이런 시도의 최고봉일 것이다. Les Affranchis(1990) 같은 영화에서 나 역시 관찰자이면서 결정자이다 : 한편으로, 그는 확고히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부는 배우들의 즉흥성에 맡겨버린다. 그래서 수많은 장면이 빛을 발했다.
나는 이 포용의 전략을 사용한 수많은 감독(카사베츠 Cassavetes 와 히치콕 Alfred Hitchcock , 브레송 Robert Bresson 2 과 오퓔스 3, 로셀리니 Rossellini 4와 미넬리 Minnelli 5) 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조직적인 촬영에 기대지 않았다. 그 반대였다. 그 누구라도, 이런 대조적인 방법을 독점하려면 가시적 노력에 비용이 많이 들며 단순해질 수 없다- 나로서는, 아직 연구중에 있다고 하는 게 낫겠다.
다른 상황에서, 나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Francis Ford Coppola 의 관점에 대해 텍스트를 쓴 적이 있다. 그는 영화 스튜디오를《영화 업데이트》의 의미로[ 다시 작업될 수 있는 영화, 그래서 형식은 언제라도 수정이 가능한, ndlr] 생각하였다. 그는 모든 준비과정에서 시간에 따라 기술적인 변화를 수용하였으며, 영화는 완성 직전까지 특수효과의 진전에 따라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게 진화하엿다. 제작과 후반작업의 과정은 그러므로 매우 유동적이었고, 편집실은 종착점으로써 《더많은 수정이 가능한》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치명적》인 전투는 가끔 놀라운 해결책을 낳았지만, 동시에 제일가는 편집자들의 권한을 침해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내가 듣는 것보다는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 하지만 예전의 제작과정은 매체를 완성해나가는 데에 불필요한 장애물이라 생각한다. 현재 시나리오를 위해 수년간의 작업을 하고 있다. 거기에서 이론이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나는 역활의 배분에 대해서도, 촬영지에 대해서, 그리고 얼마나 예산을 확보할 지, 기술적 여건이 어떻게 될지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단지 저자인 동시에 독자로써 글이 재미있는지 볼 뿐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다른 요소들, 구조와 대사, 인물들의 연기들에 집중한다. 이 가설의 종이는 또한 수년이 걸릴 지도 모르는 투자처를 찾는 데 기반이 될 것이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이러한 시나리오와 시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며 몇가지 수정하게 된다.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도록 작업하며, 그와 강한 연관성을 찾는다. 우리는 강한 압박감 속에서 촬영을 한다. 현실적으로 헤쳐나갈 방도가 없이 우선적으로 프로그램에 관한 문제에 맞닥뜨린다. 편집실에서 요행이란 없다! 추가 촬영은 심각한 기술적 결함이 아니라면, 예산 때문에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항상 이러한 문제들이 남는다. 전반적인 준비를 하면서, 자가 운용적인 과정에서 세번째 문제가 남는다. 대부분의 감독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항상 도구를 바꾸며 어떤 하나의 방법에 묶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바라던, 코폴라의 아이디어는 편리성을 추구한다. 기술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영화에 수정작업을 계속 가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장면을 실험하고, 증강시키면서, 버리곤 하는, 다시 말해 다른 모든 창조의 과정처럼 말이다. 나는 부분적으로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고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일시적이고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도 좋다. 나는 내 작업상자에 컴퓨터 프로그램이 담겨있지 않아도, 아주 심오하게 매체에 침투하여 늘 재시험해보기를 바란다. 이렇게 탐구하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실험을 하게 될 것이고, 어떻게 독자성을 유지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특수 효과 전문가들의《방향 전환》의 정신성과 분명히 구분되는 어떤 정수이다. 나를 건드리는 것은 아마 시네마-스튜디오의 신형태일 것이다. 영구적인 아틀리에로써 일시적이면서 보다 유연한 상위구조를 가진 형태로, 개인적으로는 이야기의 의미가 형식적으로는 도발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영화의 새로운 바우하우스일까? 알렉산더 클러지 의 Ulmer Dramaturgien 이 인사를 건넨다.
나의 단편인 Séance (2009) 에서, 나는 이 제작방식에 작은 반기를 들었다 : 그리고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자연적으로, 독보적인 촬영으로 이뤄진 해석불가한 영화였다. 영화는 우선적으로 사진으로 이뤄졌으며, 카메라는 책 속의, 벽에 있는 이미지를 시간 순서대로나 기이하게 배회하며 연결짓는다. 내가 놀란 점은, 이 두번째 사진들이 아주 직접적으로 이런 원칙을 생각나게 했다는 점이다, 《간섭하고 관여하기》한 번의 시도 후에, 똑같이 움직이는 영상들에는 더 이상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3명, 혹은 4명이나 5명끼리 다닌다. 베른하르트 켈러 Bernhard Keller 와 내가 영화를 만들 때, 베아트리스 슐츠 Beatrice schultz 는 관리를 맡았다. 그리고 아냐 콘래드 Anja Conrad 는 그 곁에서 같은 아파트에서 모여서 영상을 만들고 편집하곤 했다. 하루 종일 안드레아스 Andreas Mücke 나는 음향을 찾아다녔다. 우리는 영상의 어느 순간이라도 끼어들어서 촬영본을 제어하면서 수정해나갔다- 그리고 휴식시간에 점심을 불규칙적으로 먹기도 하였다. 아주 독립적인 방식으로, 일부분은 실험적이면서 가끔은 발견을 할 때도 있었다. 너무나 기쁜 순간이었다. 장편도 이렇게 촬영할 수 없을까?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Christoph Hochhäusler ⓑ 에 계속....
영원한 실험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Christoph Hochhäusler 1
사람들은 촬영에 고단함을 기꺼이 여기며 자연스럽게 그것을 매력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며, 《걸작》을 위해 무거운 기계를 지고 다니며 희생을 한다...그와 동시에, 나는 낭만이란 명목 하에 이 모든 타협과 구식의 작업방식에 신물이 나며 혐오스럽다. 어떤 대안이 있겠는가?
나는 우리의 뇌에 각인되는 단순한 광고때문에 이 단어를 유행에 따라 사용할 것이 두렵다. 바로 영원한 젊음, 즉흥성이 그것이다. 물론 예측불가능하며 즉흥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포함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신뢰》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영화사는 즉흥성에 연관된 기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존 카사베츠 John Cassavetes 나 마이크 레이 Mike Leigh .장 르누아르 Jean Renoir 의 영화에서, - 그들은 방법이나 수단이 없어서가 아니라, 혹은 준비가 부족해서가 아닌 상황에서 장면을 발견하며 위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배우의 연기에서 자유로운 억양- 사실주의로의 변화를 인정하는 표현으로써 - 도 마찬가지로 내 관점에서 보면 편하지 않다. 예를 들어 그들은 자동으로 카메라앞에서 《다큐멘터리》같은 행동을 취하거나, 영화적 내러티브를 포기하는 듯 한다. 사람들은 이 《측정 불가능한 》연기를 보고 배우들이 측정가능한 언어로 말하기를,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보다 단순해지기를 바랄 지도 모른다.
물론, 합성의 수많은 시도가 이어지면서 궁극적으로 풍부한 연기가 절정에 이르지도 모른다. 마틴 스코세지 Martin Scorsese 는 이런 시도의 최고봉일 것이다. Les Affranchis(1990) 같은 영화에서 나 역시 관찰자이면서 결정자이다 : 한편으로, 그는 확고히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부는 배우들의 즉흥성에 맡겨버린다. 그래서 수많은 장면이 빛을 발했다.
나는 이 포용의 전략을 사용한 수많은 감독(카사베츠 Cassavetes 와 히치콕 Alfred Hitchcock , 브레송 Robert Bresson 2 과 오퓔스 3, 로셀리니 Rossellini 4와 미넬리 Minnelli 5) 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조직적인 촬영에 기대지 않았다. 그 반대였다. 그 누구라도, 이런 대조적인 방법을 독점하려면 가시적 노력에 비용이 많이 들며 단순해질 수 없다- 나로서는, 아직 연구중에 있다고 하는 게 낫겠다.
다른 상황에서, 나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Francis Ford Coppola 의 관점에 대해 텍스트를 쓴 적이 있다. 그는 영화 스튜디오를《영화 업데이트》의 의미로[ 다시 작업될 수 있는 영화, 그래서 형식은 언제라도 수정이 가능한, ndlr] 생각하였다. 그는 모든 준비과정에서 시간에 따라 기술적인 변화를 수용하였으며, 영화는 완성 직전까지 특수효과의 진전에 따라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게 진화하엿다. 제작과 후반작업의 과정은 그러므로 매우 유동적이었고, 편집실은 종착점으로써 《더많은 수정이 가능한》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치명적》인 전투는 가끔 놀라운 해결책을 낳았지만, 동시에 제일가는 편집자들의 권한을 침해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내가 듣는 것보다는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 하지만 예전의 제작과정은 매체를 완성해나가는 데에 불필요한 장애물이라 생각한다. 현재 시나리오를 위해 수년간의 작업을 하고 있다. 거기에서 이론이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나는 역활의 배분에 대해서도, 촬영지에 대해서, 그리고 얼마나 예산을 확보할 지, 기술적 여건이 어떻게 될지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단지 저자인 동시에 독자로써 글이 재미있는지 볼 뿐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다른 요소들, 구조와 대사, 인물들의 연기들에 집중한다. 이 가설의 종이는 또한 수년이 걸릴 지도 모르는 투자처를 찾는 데 기반이 될 것이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이러한 시나리오와 시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며 몇가지 수정하게 된다.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도록 작업하며, 그와 강한 연관성을 찾는다. 우리는 강한 압박감 속에서 촬영을 한다. 현실적으로 헤쳐나갈 방도가 없이 우선적으로 프로그램에 관한 문제에 맞닥뜨린다. 편집실에서 요행이란 없다! 추가 촬영은 심각한 기술적 결함이 아니라면, 예산 때문에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항상 이러한 문제들이 남는다. 전반적인 준비를 하면서, 자가 운용적인 과정에서 세번째 문제가 남는다. 대부분의 감독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항상 도구를 바꾸며 어떤 하나의 방법에 묶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바라던, 코폴라의 아이디어는 편리성을 추구한다. 기술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영화에 수정작업을 계속 가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장면을 실험하고, 증강시키면서, 버리곤 하는, 다시 말해 다른 모든 창조의 과정처럼 말이다. 나는 부분적으로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고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일시적이고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도 좋다. 나는 내 작업상자에 컴퓨터 프로그램이 담겨있지 않아도, 아주 심오하게 매체에 침투하여 늘 재시험해보기를 바란다. 이렇게 탐구하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실험을 하게 될 것이고, 어떻게 독자성을 유지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특수 효과 전문가들의《방향 전환》의 정신성과 분명히 구분되는 어떤 정수이다. 나를 건드리는 것은 아마 시네마-스튜디오의 신형태일 것이다. 영구적인 아틀리에로써 일시적이면서 보다 유연한 상위구조를 가진 형태로, 개인적으로는 이야기의 의미가 형식적으로는 도발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영화의 새로운 바우하우스일까? 알렉산더 클러지 의 Ulmer Dramaturgien 이 인사를 건넨다.
나의 단편인 Séance (2009) 에서, 나는 이 제작방식에 작은 반기를 들었다 : 그리고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자연적으로, 독보적인 촬영으로 이뤄진 해석불가한 영화였다. 영화는 우선적으로 사진으로 이뤄졌으며, 카메라는 책 속의, 벽에 있는 이미지를 시간 순서대로나 기이하게 배회하며 연결짓는다. 내가 놀란 점은, 이 두번째 사진들이 아주 직접적으로 이런 원칙을 생각나게 했다는 점이다, 《간섭하고 관여하기》한 번의 시도 후에, 똑같이 움직이는 영상들에는 더 이상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3명, 혹은 4명이나 5명끼리 다닌다. 베른하르트 켈러 Bernhard Keller 와 내가 영화를 만들 때, 베아트리스 슐츠 Beatrice schultz 는 관리를 맡았다. 그리고 아냐 콘래드 Anja Conrad 는 그 곁에서 같은 아파트에서 모여서 영상을 만들고 편집하곤 했다. 하루 종일 안드레아스 Andreas Mücke 나는 음향을 찾아다녔다. 우리는 영상의 어느 순간이라도 끼어들어서 촬영본을 제어하면서 수정해나갔다- 그리고 휴식시간에 점심을 불규칙적으로 먹기도 하였다. 아주 독립적인 방식으로, 일부분은 실험적이면서 가끔은 발견을 할 때도 있었다. 너무나 기쁜 순간이었다. 장편도 이렇게 촬영할 수 없을까?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Christoph Hochhäusler ⓑ 에 계속....
출처 : CAHIERS DU CINéMA #672. 2011.11
기사 : Sophie Herr
번역 : PLONGEUSE ( 잠수부 ).[작성. 2013.03.07]
기사 : Sophie Herr
번역 : PLONGEUSE ( 잠수부 ).[작성. 2013.03.07]
- Christoph Hochhäusler (born 10 July 1972) is a German film director and screenwriter. His film Falscher Bekenner was screened in the Un Certain Regard section at the 2005 Cannes Film Festival.[1] His film The City Below was screened in the Un Certain Regard section at the 2010 Cannes Film Festival.[2] [본문으로]
- 로베르 브레송 [Robert Bresson, 1907.9.25~1999.12.18] 요약 프랑스 영화감독. 작풍은 점차 간결해지고 《불로뉴 숲의 귀부인들》 이외에는 거의 아마추어 연기자를 등장시켜 독특한 영상(映像)의 순수성을 지켜 나갔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영화 주요수상 프랑스 영화상(1967), 파나마영화제 대상(1968) 주요작품 《소녀 무셰트》(1966) 본문 파리의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영화감독 R.클레르의 조감독으로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포로가 되어 수용소 생활을 한 뒤 1943년 처녀작 《죄의 천사들 Les Anges du péché》을 제작하여 신의 은총을 그린 깨끗한 영상으로 주목을 받았다. 작풍은 점차 간결해지고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디드로(1713∼1784)를 현대화함으로써 사랑과 죄를 응시한 작품 《불로뉴 숲의 귀부인들》(1954)에 스타를 기용한 이외에는 거의 아마추어 연기자를 등장시켜 독특한 영상(映像)의 순수성을 지켜 나갔다. 1950년 《시골 사제(司祭)의 일기 Le Journal d’un curé de campagne》는 신앙의 확신으로 살아나간 젊은 사제의 생애를 감명 깊게 묘사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후 《사형수가 도망쳤다 Un Condamné à mort s’est échappé》(1956) 《발타자르 어디로 가나 Au Hasard Balthazar》(1966)《소녀 무셰트 Mouchette》(1966, 프랑스 영화상 1967, 파나마영화제 대상 1968) 등을 감독하였다. 과작이지만 극도로 단순간결한 이미지를 살려 ‘충실한 신조(信條)로 살아가는 자의 행복’이라는 테마를 엄격한 창작태도 속에 실증하였다. [출처] 로베르 브레송 [Robert Bresson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Max Ophüls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Jump to: navigation, search Max Ophüls Born Maximillian OppenheimerMay 6, 1902(1902-05-06)Saarbrücken, German Empire Died March 25, 1957(1957-03-25) (aged 54)Hamburg, Germany Occupation Director, Writer Years active 1931–1957 Spouse Hildegard Wall (1926-?) Children Marcel Ophüls Maximillian Oppenheimer (6 May 1902, Saarbrücken, Germany – 26 March 1957, Hamburg, Germany[1]) — known as Max Ophüls — was an influential German-born film director who worked in Germany (1931–33), France (1933–40), the United States (1947–50), and France again (1950–57). He made nearly 30 films altogether, those from the last period being especially noted: La Ronde (1950), Le Plaisir (1952), The Earrings of Madame de... (1953) and Lola Montès (1955). [본문으로]
- 로베르토 로셀리니 [Roberto Rossellini, 1906.5.8~1977.6.3] 요약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으로 기록적인 수법을 활용한 새로운 리얼리즘적 수법의 묘사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무방비 도시》, 《로마에서의 밤이었다》 등이 있다.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영화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주요작품 《무방비 도시》(1945) 《로마에서의 밤이었다》(1960) 본문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무솔리니 치하의 파시즘 시기에는 주로 기록영화 제작에 종사하였다. 파시스트 정부 몰락 후, 독일군 점령하의 로마의 생생한 현실을 수록한 필름을 바탕으로 《무방비 도시 Roma città aperta》(1945)를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전화(戰火)의 피안(彼岸) Paisà》을 제작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두 작품 모두 독일점령군에 대한 이탈리아 민중의 저항운동을 그렸다. 기록적인 수법을 최대로 활용한 새로운 리얼리즘적 수법의 묘사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고, V.데 시카와 더불어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창시자로 일컬어졌다. 그 후의 작품으로 《프란체스코신(神)의 어릿광대 Francesco, giullare di Dio》(1950) 《고독한 여인 Viaggio in Italia》(1953) 《로베레장군 Il generale della Rovere》(1959) 《로마에서의 밤이었다 Era notte a Roma》(1960) 등이 있다. 1964년 이후 영화계를 떠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텔레비전 연출가로 활약하였다. 여배우 안나 마냐니와의 이혼 및 잉그리드 베리만과의 결혼과 이혼 등, 사생활로도 자주 화제에 올랐다. 1968년부터 영화인 교육기관 ‘영화실험센터’의 소장이 되었다. [출처] 로베르토 로셀리니 [Roberto Rossellini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빈센트 미넬리 [Vincente Minnelli, 1910.2.28~1986.7.25] 요약 미국의 영화감독. 무대 조감독 ·미술감독을 거쳐 뮤지컬 쇼의 연출가가 되었고 뮤지컬 영화 《파리의 아메리카인》등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국적 미국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미국 시카고 주요수상 아카데미 작품상(1951), 아카데미 작품상 및 감독상(1958) 주요작품 《파리의 아메리카인》(1951) 《사랑의 첫걸음》(1958) 본문 시카고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아역으로 무대에 섰다가 후에 무대 조감독 ·미술감독을 거쳐 뮤지컬 쇼의 연출가가 되었다. 1943년 영화계에 들어가 뮤지컬 영화 《파리의 아메리카인》(1951)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고, 《사랑의 첫걸음》(1958)으로 역시 아카데미 작품상 및 감독상을 받았다. 이 밖에 《신부의 아버지》(1950) 《밴드 왜건》(1952) 《불의 사나이 고흐》(1955) 등의 작품을 남겼다. [출처] 빈센트 미넬리 [Vincente Minnelli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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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0.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