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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독립 영화의 새로운 바람20_아벨 페라라Abel Ferrara_인터뷰(3)

뉴욕 독립 영화의 새로운 바람19_아벨 페라라Abel Ferrara_인터뷰(2)에 이어...

Little Italy 레스토랑의 지하에서 신작의 편집 작업 중인 뉴욕 독립 영화의 신화와 만났다.


미국에서, 감독이란, 불편한 타입일 뿐이다》
아벨 페라라와 편집감독인 안토니 레드맨 과의 인터뷰


●신작의 영상들이 매우 인상적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신건가요?
아벨 페라라 Abel Ferrara
: 난 별로 다른 걸 못느꼈는데. [안토니 레드맨을 보면서 :] 자네는 뭔가 다른 걸 느꼈나? 케니, 카메라 감독이 그렇죠. 나는 가장 위대한 카메라감독과 작업을 한 것이죠. 베스트는,보잔 바젤리 Bojan Bazelli [각주:1]였죠. 그와는 킹 오브 뉴욕 The King of New York 을 만들었어요. 그는 이탈리아인이고, 어느 정도라도 스토라로[각주:2] 학파죠. 그의 의견에는 항상 동의했죠. 베르톨루치[각주:3] 영화의 촬영을 맡았던 파비오 시안쉐티 Fabio Cianchetti와는 고고 테일즈 Go Go Tales 를 찍었죠. 함께 작업을 하면서도 진정한 팀이라고 생각했죠. 케니는 또 다른 스타일이 있어요. 우선, 그는 키가 크죠. 난 항상 인간의 척도로 높이를 생각해요. 내가 당신을 찍는다면, 당신의 눈높이에 카메라를 놓겠죠. 더 높거나 낮으면, 아마 달리 보이겠죠. 케니는 아주 크기 때문에, 사람들을 높은데서 내려다봐요. 그는 다른 촬영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와는 종종 의견마찰로, 논쟁을 하곤 했어요. 싸운 건 아니고...그가 직설적이었죠. 그는 예수회 수도사같이 녹색 베레모를 쓰곤 했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요? 아주 섬세한 남자라서, 그림이 될만한 것을 찾아서 촬영할 방법이 있죠. 그리고 개인적으로 보고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죠. 평소 내 방식하고는 아주 달랐어요. 카메라 감독이 되어서 영화를 설명해주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죠. 내 꿈이지. 이런 주제로 아이디어가 많지만, 케니처럼 하진 않을 겁니다. 그게 그의 의도같아요. 촬영할 때 보면, 내가 가질 수 없는 비전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게 뭐가 됐든, 그는 아주 순수하고 재치있는 것들을 찾아내죠. 피카소의 유명한 말을 인용할 수 있겠네요 : 《나는 추구하지 않는다, 단지 발견할 뿐이다.》 안토니처럼, 그는 편집할 때 아주 건조하죠. 로저 코먼[각주:4]이나 내가 모르는 어떤 스타일이요. 지금은 영화의 거의 막바지이죠. 우리가 촬영한 걸 처음 볼 때마다 난 혼잣말하죠. 젠장, 대체 뭘 촬영한 거야? 촬영감독인 케니, 안토니가 한 걸 이해해야 했죠. 누구도 내 맘같진 않죠. 시아쉔티Ciachentti 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완전히 순수한 채로 남아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서로의 작업 방식에 대해 말하지 않죠. 촬영감독이 무대감독과 함께 일하진 않아요. 동시에 일에 몰두하거나 서로 논쟁을 하죠. 여기 카메라감독은 그렇게 일해요.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죠. 아벨, 저기 테이블이 너무 흰색이야. 대신, 자네가 이렇게 찍기 원하면 좋아요, 갑시다. 말다툼에 시간을 소비하진 않죠.
 로카르노에서, 난 Terri, Azazel 을 만든 사람과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L.A에서 촬영을 한 영리한 사람이죠. 그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파이널 컷을 찍지 않았으면, 다른 걸 찍게. 자네가 돈때문에 찍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돈을 좇아가게. 스스로 즐기고, 그걸로 편집을 해. 난 편집실에 가지 않는 감독들이 좋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게 바뀔 거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헐리우드란 항상 그래요. 가장 위대한 영화들도, L'Invasion des profondeurs de sépultures 도 재편집을 했죠. 만약 절대적인 파이널 컷이 없으면, 영화라고 할 수 없어요. 아니면, 파이널 컷밖에 없더라도 제작자가 이 장면은 좋다, 저 장면은 싫다라는 등등으로 이야기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 있죠. 매 장면마다 싫다,좋다라고 말하는 누군가와 같이 있다면, 저녁먹으로 간다하고, 빠져나오는 수 밖에!
 그리고 리뷰로 광대를 영웅으로 바꿀 수 있는 거죠! 트웬티스 센츄리 Twentieth Century, 폭스Fox , 그리고 모든 스튜디오도! 돈만 생각한다면, 에너지가 다 빠진 채, 영화가 개봉하는 겁니다! Cahiers같은 거라면, 히치콕 Hitchicock [각주:5]감독의 싸이코Psychose 의 경우같이 티비 영화로 방영될 때까지 어떤 개입도 할 수 없었어요. 티비 영화 시리즈 덕분에 슈퍼스타로 성장한 셈입니다. 셀즈닉[각주:6] 에게 좌우되기 전까지 그는 권한이 있었어요.
안토니 레드맨 Anthony Redman : 당신이라도 형편없는 감독의 전례를 따르고 싶진 않을 겁니다. 아벨은 극단적이예요. 그가mainstream 의 바깥에서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 그는 자신만의 분야를 파고들 뿐입니다.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을요.
 케니에 대해 말하지 않은 점은, 그가 아주 주제에 부합하는 본능적인 접근을 한다는 겁니다. DVD판에는 켄이 가진 냉혹함에 대해 말했죠 : 《마치 포르노같은데》이나《깨끗한 이미지를 원하는 거라면, 완전히 실패한 거요》라고 말하곤 했죠. 물론 상처받곤 하지만, 의례적인 말이예요. 난 항상 깨끗한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게다가 지금은 뭔가 유동적인 장면들을 위해 타협하곤 해요.
 아벨이 설명하려는 건, 예술적인 관점에서 통제를 한다는 겁니다. 그는 대부분 내가 바라는 지시를 주지 않지만, 항상 파이널 컷이 있어요. 모두가 자기의 것을 하길 바라죠. 아벨은 그걸 처음 시도한 사람일 겁니다. 이렇게 말하곤 하죠 : 《난 단순히 모든 순환체계를 제어할 뿐이야》자금을 찾고, 배우를 캐스팅한 다음에는 우리가 뛰어들죠. 좋은 점은 우리에겐 많은 자율권을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서부로 가진 않는 겁니다. L.A.의 내 동료는 나보다 3-4배 많이 돈을 벌어서 항상 자랑하곤 하죠. 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 《뭐, 하지만 난 돈을 하나도 못 벌어!》그러면 그들이 이렇게 말하죠:《하지만 영화, 영화가 남잖아!》 맞아요. 아벨과 나는 졸작을 만든 적이 없어요. 모든 작품에 자신하죠. 뉴 로즈 호텔 New Rose Hotel 은 좀 떨어지긴 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안그렇죠...블랙 아웃 The Blackout 를 본 사람이 없어요! 내가 사모하는 영화인데! 스네이크 아이즈 Snake Eyes요? 거기에선 뭔가 특별한 걸 이뤄냈죠. 마돈나가 처음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가 참여한 시나리오 상으로는 볼 게 하나도 없다고. 다른 영화마다 카세트를 리플레이시키면서 만들수도 있다고 아벨에게 말한게 실수였어요. 그런 방식을 거론한 게 실수였죠! 마돈나가 영화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 《토니, 내가 연기한 영화는 어디있는건가요? 》 

●왜 아벨 페라라의 영화는 잘 알려지지 않고 관객수가 적은 걸까요?
안토니 레드맨 Anthony Redman : 배급때문이예요. 바디 스내이쳐 Body Snatchers 를 보세요. 그건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엄청난 영화죠. 스튜디오는 이 영화를 혐오했죠. 그리고 아벨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엿먹으라 는 식으로 배급을 했어요. 그런 척 한게 아니라, 정말 영화를 버려버린 겁니다.[그 때, 아벨이 되돌아왔다] 지금 자네 영화가 왜 미국에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지 이야기하고 있었어...
아벨 페라라 Abel Ferrara : 그건 인기의 문제가 아니예요. 인기가 대체 뭐요? 킹 오브 뉴욕 The King of New York 을 보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죠. 하지만 밥 쉐이 Bob Shaye[ New Line Cinema 의 창립자이자 프레디 Freddy 와 반지의 제왕 Seigneur des anneaux 의 제작자 , ndlr. ]이 Lifetime Achievement Awards를 받았을 때, 5편의 영화를 보여줬는데, 그 중에 The King of New York도 있었죠. 그는 거기에 투자하지 않았고, 10번을 거절했어요. 뉴 라인은 미라맥스 Miramax 에 대항해서 음모를 꾸미느라 받아들인 겁니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어요. 사람들은 항상 과거의 좋았던 때를 말하지만, 아무도 킹 오브 뉴욕 The King of New York 을 보진 않더군요! 크리스마스 Christmas도 마찬가지였죠. 악질 경찰 Bad Lieutenant 은  의붓어머니의 신용카드를 긁는 어떤 플로리다 멍청이에게 팔렸죠. 그는 단번에 영화를 비평가들에게 보여줬어요 : 그리고 그의 곁에 앉아서 영화에 대해 말했어요. 아무도 하비 키틀 Harvey Keitel 인 걸 몰랐죠. Snake Eyes 를 보세요 : 마돈나는 그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부인했어요. 평가가 두려웠던 거죠. 악질 경찰 Bad Lieutenant 때에는 흥행했는데, 개봉 시기가 좋았어요.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5년 후에 이 영화로 높은 계약금으로 거래할 수 있었어요. 그의 의붓 어머니가 효과가 별로 없더라도 신문의 광고란을 사서 어디에든 영화를 홍보했죠. 그런 모든 게 영화를 탄생시킨 겁니다. 우리 영화를 한번이라도 본다면, 좋아하게 될 거예요.

왜 볼 기회가 없는 거죠?
아벨 페라라 Abel Ferrara : 우리가 헐리우드나 파라마운트 줄을 타고있지 않잖아요. 우린 경력쌓기보다 즐겁기 위해 일을 해요. 1994년에는 전략을 세우지 말자고 했죠. 그야말로 로큰롤이었어요. 당신이 좋은 영화를 만들면, 그게 남는 거죠. 우선, 배급망이 없고, 어떤 영화제에서도 초청을 받지 못하지만, 영화는 존재하는 겁니다. 100년은 갈 겁니다.
 우리 영화를 보고 싶어요? 그럼, 인터넷에서 찾아보세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훔쳐봐요. 이 구역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매춘부를 만나면 5분안에 10여명의 경찰이 나타날 겁니다. 농담이 아니예요. 쥴리아니 Giuliani[90년대 뉴욕 시長, 도시를 《청소해버리는》것을 공언했다, ndlr. ]이후에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2백만 달러로 내 영화를 훔치곤 하죠. 모두가 그렇게 해요. 내게 설명을 좀 해봐요. 내가 음악가라면, 샹송을 쓴거라면 레스토랑에서 울릴 때마다 돈을 받을 겁니다. 영화라면 더 간단할 수 있죠. 하지만 아니죠, 헐리우드의 사람들이 그들 수중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손잡고 싶어하기 때문이죠. 인터넷으로 경찰들은 당신이 아침을 무엇을 먹었는 지 알 수 있죠. 하지만, 사람들이 영화를 훔쳐보는 건, 왜 책임을 안지는거죠? 만약 불법 다운로드받아서 접근권한을 잃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모든게 바뀌겠죠. 미국에선 지적재산권이란 말이 농담같이 취급되지만, 유럽에서는 불법이죠. 단지 모나리자 La Jaconde 를 샀다는 이유만으로 거기에 턱수염을 그릴 수 있단 말은 아니죠.
 좋아요, 뭐, 우린 열심히 달려야해요. 마지막 질문이 뭡니까?

●신작의 투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누가 파트너인가요?
아벨 페라라 Abel Ferrara : 예산을 산정하긴 어려워요. 윌렘 데포의 가치는 얼마인가요? 그는 2백만 달러를 보수로 여러편 찍었어요.
그가 1백만 달러를 투자한 작품에도 출연했죠-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았어요? 소수를 위해 대다수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한 겁니다. 우린 최대치를 해낸 겁니다. 제작자들 중 한 명은 칠레인, 두명의 프랑스인이었죠. 프랑스인은 : 벵상 마라발 Vincent Maraval 과 이전에 나를 도와주었던 와일드 번치 Wild Bunch , 그리고 퍼니 발론 Funny Balloons 피터 대너이죠. 칠레인은 후안 드 디오스 로렌 Juan de Dios Larrin 인데, 내가 좋아하는 영화 포스트 모템 Post Mortem 를 제작한 사람이죠. 파블로 로렌이 만든 영화죠.
 우리가 정상적으로 편집한다면 디지털은 효력이 있을 겁니다. 안토니와 일하려면 열명 가량이 필요하죠. 하지만 디지털 촬영으로 바뀌는 건 없어요. 물론 휴대폰으로도 촬영을 하겠지만, 어떨 것 같습니까?
 결국 우리가 뭘 좋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난 다소 지저분한 이미지가 좋아요. 디지털이 팀원을 줄이고 촬영을 보다 빨리 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죠. 웃기죠, 사람들이 디지털 촬영때문에 더 시간이 단축되었다고 믿는다구요?  좋은 영상을 위해 우린 항상 시간과 공을 들여요. 적절한 밝기를 찾죠.
 어떻게든 단축시킬 방법을 찾지는 않아요. 맞아요. 우린 종일 촬영하죠. 악질 경찰 Bad Lieutenant 때에, 18일 동안 촬영했어요. 그것도 하나의 방식이죠. The Driller Killer 는 60여일 걸렸어요. 당시, 우린 파솔리니처럼, 세상의 선봉에 선 것같았죠. 어떻게 투어를 할 것인가? 우린 악질 경찰 Bad Lieutenant  를 최소한의 기간에 를 찍을 수 있단 걸 알았죠. 그래서 우린 중요한 건, 반복이라고 이야기했죠. 하지만 받침대가 최악이었죠. 생소한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들을 보죠. 그건 마치 시나리오를 처음보는 것같은 여운을 남겨죠. 그리고 편집에서...헐리우드에선, 개봉일에 맞춰서 편집하죠. 예정된 개봉일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1억 달러라도 쓸 겁니다. 단 6주만에요. 그들은 빠르게 일하고 즉각적인 결과를 원하죠. 할리우드에선 반복이란 불가능해요. 내가 알 파치노에게 지불하면, 그에게 다시 한번 가자고 할 수 없죠. 만약 당신이 알 파치노에게 지불하면, 촬영하변 그게 다죠. 안젤리나 졸리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면을 두번만에 찍었죠. 우린 하루나 이틀 내내 생각해 본다음에 다시 새롭게 찍어야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우디 알렌 도 그에 걸맞게 존중을 하죠. 그리고 재촬영은 예산 안에서 해결합니다. 그는 촬영하고, 검토 후에, 생각하고, 다시 재촬영할 거란 걸 알아요.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감명을 받은 뒤라면, 어떻게 그렇게 흥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시간을 쏟아부은 거죠! 그의 사방을 둘러봐도 경쟁자는 없어요. 작업대 위로 올라가는 편집자도 없죠. 헐리우드에선, 빛이 바뀔 때까지 3일을 못기다려요. 베르톨루치가 마지막 황제 Le Dernier Empereur 에서 처럼요. 모든게 90년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더이상 아니예요.
 유럽에서, 난 마에스트로, 사람들이 날 존중해요. 내가 열심히 하거나 아니거나 존중하죠. 왜냐하면 난 영화예술인이니까요. 마치 화가나 음악가에게 가지는 그런 존경심이죠. 미국에선, 웃긴일이예요. 사람들은 돈다발을 가져다주는 영화를 존중합니다. 나라고 여기에 반대하진 않지만, 뭐 그런거죠. 우리 영화는 항상 그랬으니까. 드릴러 킬러The Driller Killer 킹 오브 뉴욕 The King of New York 도 그랬죠. 그 영화들은 존재하고 있어요. 어느 작품이라도 대중에게 팔 수 없죠. 그들고 알아요. 우리가 빛을 찾으면, 그들이 아기였을 때부터 봐왔던 대중들에게도 보여질 겁니다. 당신이라도 그걸 가질 순 없어요. 극장에 오면 잠시 가질 수 있겠지만, 스크린 앞에 앉아있을 때 뿐이겠죠. 아니면 너무 늦을 겁니다. 영화가 좋아서 티켓비를 지불하는 거와는 달라요. 상상해봐요 : 극장에 들어가려고 2달러를 냈는데, 15분동안 보고는 좋아서, 2달러 이상을 내고, 또 15분 마다 그러는 겁니다.
 뉴 로즈 호텔 New Rose Hotel 이 개봉했을 때, 배급망이 없었어요. 극장주가 노발대발하더군요 : 《당신들 문제가 대체 뭐요? 망한 영화를 틀어야 한다니, 그리고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내내 불평하는 걸 들어야 한다니. 그들이 이건 영화가 아니라고 환불을 요구한단 말이오. 영화를 어떻게 만드는 지 몰라? 가서 매뉴얼을 보던가! 》■

8월 14일, 뉴욕에서
스테판 들롬    & 니콜라 엘리오뜨


 

출처 : 103-105쪽, cahiers du cinéma Nº 2011.9
기사 : Stéphane Delorme & Nicholas Elliott
불한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Bojan Bazelli is a Montenegrin cinematographer and music video director born in Herceg Novi, Montenegro.[1] His credits include the films The Ring, Mr. & Mrs. Smith, and director Adam Shankman's Hairspray,[2] as well as Mariah Carey's music video "Vision of Love". Other feature credits include The Rapture, Deep Cover, King of New York, Kalifornia, and Dangerous Beauty [본문으로]
  2. 비토리오 스토라로 [Vittorio Storaro, 1940.6.24~] 1940년 6월 24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기술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한 뒤 이탈리아 시네마그래픽 트레이닝 센터(Italian Cinemagraphic Training Centre)와 공립영화학교에서 영화촬영을 공부하였다. 20세 때 처음으로 보조 카메라맨 일을 시작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문학, 조각, 회화, 음악 등 여러 가지 예술의 표현방법에 대해 공부하였다. 1966년 처음으로 베르톨루치 감독의 ≪Before the Revolution≫을 촬영하였으며 1970년 ≪거미의 계략 La Strategia del ragno≫으로 베르톨루치 감독과의 오랜 협력관계가 시작되었다. 이후 작품의 고유한 환경을 감성적으로 포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 베르톨루치로부터 화가의 손을 지녔다는 찬사를 받았다. 1980년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으로 아카데미상 촬영상을 수상하였고 1981년 워런 비티 감독의 ≪레즈 Reds≫로 두 번째 아카데미상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마지막 황제≫로 세 번째 상을 수상하였다. 이와 함께 이탈리아 촬영감독협회(AIC) 회장으로 일하였으며 20개가 넘는 유럽영화 촬영조직연합을 설립하였다. 최근작으로는 ≪자파타 Zapata≫(2004), ≪엑소시스트: 더 비기닝 Exorcist: The Beginning≫(2004) 등이 있다.[출처] 비토리오 스토라로 [Vittorio Storaro ] | 네이버 백과사전[출처] 비토리오 스토라로 [Vittorio Storaro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3. Bernardo Bertolucci, 1940~] [출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Bernardo Bertolucci ] | 네이버 백과사전1940년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태어나 지적 분위기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영화를 보러 다녔던 그는 15세에 첫 단편영화를 찍었다. 로마대학교에서 근대 신학을 공부한 뒤 아버지의 친구였던 파솔리니의 데뷔작 《아카토네 Accattone》(1961)의 조감독을 거쳤다. 1962년 시집 《미스터리를 찾아서 In cerca del mistero》로 프레미오 비아레지오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2년 로마에서 촬영한 데뷔작 《죽음의 신 La commare seca》(1962)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감독으로 인정받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1964년 24세에 젊은 좌파 지식인들의 패배감을 다룬 《혁명전야 Prima della rivoluzione》를 만들어 칸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그러나 거듭 흥행에는 실패하고 제작비를 확보하지 못하자 잠시 동안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세르지오 레오네와 함께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의 시나리오 집필에도 참가했다. 누벨바그 영화에 고무된 그는 1968년 고다르의 형식을 흉내낸 《동반자 Il Sosia》를 찍었다. 1960년대 말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70년 《순응주의자 Il Conformista》를 발표하면서 존경해 마지 않던 고다르식의 영화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이 영화는 그가 과거에 적이라고 생각했던 거대 자본 패러마운트 영화사와 손잡고 만든 것이다. 또 보르헤스의 소설을 각색한 《거미의 계략 La Strategia del ragno》을 통해 정치문제를 영화와 결합시키는 제작자들을 비판했다.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Ultimo tango a Parigi》(1972)는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파격적인 성행위의 묘사로 몇 달 뒤 상영이 금지되었다. 에로티시즘 논쟁을 폭발적으로 불러일으킨 이 영화 때문에 그는 두 달간 투옥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아 5년간 투표권을 잃었다. 1988년에야 무죄를 인정받았다. 이 영화가 벌어들인 돈으로 그는 4시간이 넘는 대작《1900년 Novecento》(1976)을 완성시켰다. 1980년대 들어 동양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그는 중국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자서전 《나의 반생》을 영화화한 《마지막 황제 L'ultimo imperatore》(1987)를 찍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영화제에서 9개 부문상을 모두 휩쓸었으나 서구 중심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5년 만에 이탈리아로 돌아간 그는 1968년 정치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 혁명과 자유에의 희구를 지녔던 사람들의 실패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영화 《스틸링 뷰티 Io ballo da sola》를 만들었다. 그 밖에 《루나 La Luna》(1979), 《어리석은 사나이의 비극 La tragedia di un uomo ridicolo》(1981), 《리틀 부타 Little Buddha》(1994) 등 많은 영화가 있다. 이러한 작품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제6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는 명예 황금사자상을, 2011년 제 64회 칸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출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Bernardo Bertolucci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4. Roger Corman, 1926.5.5~] 1926년 5월 5일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출생하였다. 스탠퍼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영화계에 뛰어들어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들과 스토리 분석가들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메신저 일을 시작하였고 곧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사가 마음대로 뜯어 고치자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첫번째 연출작 《바다의 마루로부터 Monster from the Ocean Floor》(1954) 이후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코먼은 B급 영화의 대부(大父)로 불리며 자신만의 독특한 제작시스템을 확립하였다. 그가 연출한 영화들의 대부분이 한 달 이내의 제작기간과 10만 달러 이하의 예산으로 제작되었다. 1960년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en Poe)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어셔가의 몰락 Fall of the House of Usher》이 성공을 거두자 코먼은 계속해서 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8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이 갈수록 시들해지자 재빨리 방향을 전환하여 젊은이들의 문화를 반영한 《와일드 엔젤스 Wild Angels》(1966), 《트립 Trip》(1967), 《블러디 마마 Bloody Mama》(1970) 등을 제작하였다. 코먼은 이 시기에 프랜시스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로버트 타운 등의 재능있는 영화학도들을 발굴하여 그의 작업에 참여시켰고, 잭 니컬슨, 로버트 드 니로, 데니스 호퍼 등이 코먼의 영화를 통해 스타로 발돋움하였다. 1970년대 들어 코먼은 자신의 제작사인 뉴 월드 필름스(New World films)를 설립하여 미국에서 가장 큰 독립영화제작사로 키워 나갔고, 프랑스와 트뤼포, 잉마르 베리만, 페데리코 펠리니 등이 감독한 유럽의 예술영화를 수입하여 미국에 배급하였다. 1983년 코먼은 뉴 월드 필름스를 매각하고 새로운 영화사를 설립하여 유선방송용 영화의 제작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출처] 코먼 [Roger Corman ] | 네이버 백과사전[출처] 코먼 [Roger Corman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5. Alfred Hitchcock, 1899.8.13~1980.4.29]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런던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1920년 영화사에 입사하여 각본가 ·미술감독을 거쳐 1925년 영화감독이 되었다. 영화에 유성영화가 도입될 무렵 《공갈(恐喝)》(1929)을 제작하여 주목을 끌었고, 《암살자의 집》(1934) 《39계단》(1935) 등 심리적 불안감을 교묘하게 유도하는 독자적인 연출방법을 확립하여, ‘히치콕 터치’를 창출하였다. 1939년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레베카》《해외특파원》(1940) 《단애(斷崖)》(1941) 《의혹의 그림자》(1943) 등으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여 스릴러 영화라는 장르를 확립하였고, 그 분야의 제1인자가 되었다. 그후의 작품으로 《백색의 공포》(1945) 《나는 고백한다》(1952) 《다이얼 M을 돌려라!》《이창(裏窓)》(1954) 《하리의 재난》(1955)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사이코》(1960) 《새》(1963) 《토파즈》(1969) 등이 있다. 모두가 공포와 불안을 순수하게 추구하는 스릴러 영화이다. 1955년부터는 자신이 직접 사회를 맡은 텔레비전 영화 히치콕극장 시리즈의 방영으로 인기를 모았고, 잡지 《히치콕 미스터리》를 내기도 하였다[출처] 히치콕 [Alfred Hitchcock ] |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히치콕 [Alfred Hitchcock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6. [David Oliver Selznick, 1902.5.10~1965.6.22][출처] 데이비드 셀즈닉 피츠버그 출생. 컬럼비아대학교를 나와 아버지의 셀즈닉영화사에서 제작·흥행을 맡았다. 그후 MGM, 패러마운트픽처스, RKO를 거쳐 MGM 부사장이 되어 1937년 셀즈닉인터내셔널을 창립하였다. 《데이비드 코퍼필드 David Copperfield》(1935),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935), 《스타탄생 A Star is Born》(1937), 《젠다성의 포로 Prisoner of Zenda》(1937), 《톰소여의 모험 The Adventures of Tom Sawyer》(1938),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1939), 《레베카 Rebecca》(1940)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1949년 여배우 제니퍼 존스와 결혼한 후 은퇴하였으나 그후에도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를 남겼다. 영국 에든버러예술제 영화부문에 셀즈닉상(賞)이 제정되어 있다. [출처] 데이비드 셀즈닉 [David Oliver Selznick ] | 네이버 백과사전[David Oliver Selznick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