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있는 섬
밤새 웅크리고 있던 추위가 차츰 누그러지는 때 정오에 카페에 앉아 있는 나는 조금 낯설다. 카페에 드나는 지가 얼마되지 않아, 평소 커피값이 비싸다고 생각하지만, 장소를 이용하게 된 이후에 기꺼이 지불하고 있다. 자리에 앉아 ‘소립자’를 읽고 있다. 제목만으로는 과학 학술지 같지만, 1960년대 중심으로 급격히 변한 사회상과 개인사가 맞물리며, 진실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는 소설이다. 성에 대한 묘사가 탐닉적이기보다 굉장히 현실적이란 생각이다. 절대악도 절대선도 부재하다는 상당히 중립적인 입장이다.
3월 1일 아직 추위가 얄밉게도 가시지 않아 화가 나지만, 나는 추위가 너무, 너무나 싫다. 그 때문에 현실도 아닌, 그렇다고 꿈은 더군다나 아닌 중간지대에 피신을 하고 있는 것에 죄책감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마치 폴 오스터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자신의 고독한 일상을 기록하도록 사람을 고용했듯이(고독의 발명인가, 달의 궁전인가. 리바이어던인가...불분명하다.), 나는 익명의 무리 속에 섞여 역설적으로 존재감을 느끼며, 동시에 되도록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고 간간이 애쓰고 있다.
내가 처음 이 곳에 온 11시즈음만 해도 마치 이 곳은 도서관처럼 조용했다. 창가에는 짐을 잔뜩 꾸려놓은 여자 손님이 줄지어 앉아 있었고, 종업원들의 대화소리가 또렷이 들리는 정도였다. 차츰, 몇몇이 들어와 자리를 채우고 카페 특유의 정경을 지어낸다.
이곳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이 지역 주민이 아닌 이상 잘 모르는 위치라 조용한 편이다. 그런 매장의 성격을 다들 암묵적으로 알고 온 듯,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개인로스터리카페가 아닌 체인점이라 주인과 손님간의 거리에 부담이 없다. 조용한 미덕까지 갖추었다.
카페 안 사람들은 마치 바다에 한 가운데 독립적인 섬들처럼 존재한다. 60센티미터 직경의 원형 나무 탁자에 몸을 맡겨 심해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의지하고 있는 듯, 하지만 구조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난파되고 차가운 바다 위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사람들을 흘깃 거리며 그림을 끄적이느라 분주한 스스로가 가끔 유난을 떠는 것 같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어느새 내 두 눈은 좌우를 살피고 있다. 타인을 뎃셍할 때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민첩함, 찰나에 특징을 잡아낼 수 있는 예민함, 그림으로 표현할 때 서로 조화롭도록 하는 배려심 등등이 한꺼번에 몰려와 잘 어우러져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어느 순간은 상대와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그러면 시치미를 뗀다.
짧게 깎은 옆머리 때문에 남자의 귀는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작고 유순해 보이는 두 눈에 까만 사각 뿔테와 곤색 코트의 어깨 견장장식이 더해져 명석한 인상을 만든다. 커피잔을 들기 위해 구부러진 손목이 섬세해 보인다. 아이폰을 보며 검색에 한창이다.
한 곳에 붙어서 벽장식 한 몸이 된 것 같은 남자는 무언가를 탐독 중이다. 아무도 그가 여기에 왔다가 갔다는 사실을 모를 것 같은 그의 등은 완만한 둔덕처럼 굽어있으며, 둔해보이는 인상이다. 하지만 그의 뇌 속에는 무형의 신경물질들이 지적 작용을 하며 활발히 돌아다닐 것(써놓고 보니 지금 읽고 있는 ‘소립자’의 영향을 받은 문구인 듯)이다.
오늘 ‘소립자’를 다 읽어야겠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어 번역을 해야겠다. 원래 코엔형제의 새 개봉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지난 주 일요일에 ‘블랙 스완’을 봤기에 사치는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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