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독립 영화의 새로운 바람19_아벨 페라라Abel Ferrara_인터뷰(2)

뉴욕 독립 영화의 새로운 바람18_아벨 페라라Abel Ferrara_인터뷰(1)에 이어...
 
Little Italy 레스토랑의 지하에서 신작의 편집 작업 중인 뉴욕 독립 영화의 신화와 만났다.


미국에서, 감독이란,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아벨 페라라와 편집감독인 안토니 레드맨 과의 인터뷰


크리스마스 Christmas 이후에 뉴욕에서 올로케이션한 첫 영화는 감독님이 편집했습니다. 어떻게 10년이 지나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건가요? 
아벨 페라라 Abel Ferrara
: 어떻게 10년 만에 뉴욕이 변하겠습니까? 어떻게 50년만에 뉴욕이 바뀌겠습니까?
 사실 난 여기에 가담하고 있어요. 그래서 돌아오게 된 겁니다. 처음엔, 레스토랑 지배인인 마르셀로가 이탈리에와서 나를 만났죠. 헐리우드에 싫증이 났었지만, 마르셀로는 이탈리아에서 헤밍웨이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죠. 그래서 그와 함께 떠났고,Go GO Tales , Mary, Napoli, Napoli, Napoli (2009) 와 할아버지에 관한 영화를 만들게 된 거죠. 해외로 가기에 좋은 시기였어요. 9.11사태 이후에, 헐리우드에서는 뉴욕에 대한 엄청난 편견이 생겼죠. 아마 당신이 베버리 힐즈에 저택을 가지고 있고, 자녀들이 베버리힐즈의 학교에 간다면, 이 더러운 도시로 올 이유가 없는 거죠. 해변가 저택과 체육관과는 거리가 먼, 호텔방에 살기 위해서요. L.A.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뉴욕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뉴욕을 좋아했다면, 거기에 있었겠죠. 나 역시 L,A를 좋아하지만, 그 쪽의 비지니스가 맘에 안들어요. 그래서 비지니스를 떠날 수 없는 거기에 살기가 싫은 겁니다.
한번은 L.A. 의 중심가에서 설문조사를 하더군요. 행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 《당신의 시나리오를 언제 끝내실 겁니까? 》20명중에 17명이 대답했죠! 《그런 질문을 한 것에 우선 감사드립니다. 두번째 버전을 거의 끝내가는 중이예요.》아주 좋아요. 하지만 그렇게 할 순 없어요. L.A.에서 일하는 건 멋질 수도 있어요 : 모든 게 자유롭고 잘 굴러가죠. 뉴욕에서는 모든 일마다 제로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카토네 Accatone 에서 파솔리니의 조수였던 베르톨루치 Bertolucco[각주:1] 가 말하길 당시 수중에 돈이 있었다고 합니다 : 교황이 카메라감독으로 온 경우같은 거였습니다. 그들이 한 여정은 영화사에서의 첫 여정이었습니다.
 좋아요, 뭐, 뉴욕으로 다시 돌아오죠. 2001년 이후에, 헐리우드는 너무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더군요. 난 정치인도 아니고, 겁쟁이처럼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단지 마르셀로가 기회를 준 겁니다. 모든 게 명확해요 : 모든 우리의 영화들이 독일에서,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등에서 투자를 받았습니다. 항상 유럽에서 나오는 자금이 L.A.의 은행을 거쳐갔죠. 1990년부터 1998년까지, 정말 단순하게, 금융계에서 투자한 자금으로 영화를 찍었어요. Maraval 이나 New Line 제작사와 손 잡고서 말이죠. 지금은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같이 일한 사람들 때문에 착각을 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장례식Nos funérailles, 어딕션The Addiction, The Blackout (1997) , 뉴 로즈 호텔 New Rose Hotel (1998) 그리고 크리스마스 Christmas 을 찍었죠. 시스템이 자리를 잡는 중이었어요. 이탈리아로 가서 영화를 만들었죠. 그게 나폴리 나폴리 나폴리 Napoli, Napoli, Napoli 입니다. 그 후에, 뉴욕 필름 페스티벌 New york Film festival 에서 20여년간 내 작품 중 단 한편도 선정되지 못했는데, 20년주기를 기념하며 뉴욕의 왕 The King of New York (1990) 를 상영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죠. 정말 중요한 일이예요. 그일로 다시 돌아왔고,아주 근사한 금발의 제작자와 함께 Chelsea on the Rocks ( 2008 )을 찍으려했죠. 나는 첼시호텔로 거처를 옮겼는데, 하루는 내게 방세를 안냈다고 하더군요. 이년동안이나요! 그래서 그 아래층에 있는 프로덕션에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했는데, 며칠전에 짐을 싸서 떠났다는 거예요. 그들이 날 뉴욕으로 오게 해놓고 정작 떠난 겁니다! 다행인 건, 그들이 돈을 내라고 발목을 붙잡진 않았어요! 그래서 이제 뭘 할지 생각했어요. 우선 뉴욕에 살 아파트를 구해야했죠. 스스로를 믿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단, 우린 세상에서 제일 가는 부자들을 상대해야 했으니까요. New Rose Hotel 처럼 집세는 껑충 뛰었더군요 : 우린 단지 하나의 침대, 샤워기 하나, 그리고 테레비전 한대가 필요했는데. 내 옆에 살고있는 인간은 월스트리트 사람같이 회사, 체육관을 오가면서 파티에서 새벽3시에 집에 올때도 7시에 직장에 가더군요. 그는 5명 분량의 에너지가 있었어요. 거의 안자던데요! 그에게 필요한 건, 뉴 로즈 호텔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난 다시 돌아왔어요. 로마에서 살 때 모든게 잘 풀렸지만, 우린 영화감독이고 다음 일을 해야했죠. 그래서 첼시로 다시 왔다가 그곳을 떠났어요-거주지로는 너무나 끔찍한 곳-. 하루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그날을 절대 못잊을 게, 스파게티와 미트볼 Spaghetti and meatballs 을 먹고 있었거든요. 스파게티와 미트볼은 특별히 준비할 게 없는 극도로 완성된 음식이죠. 그래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스파게티와 미트볼을 먹고 있었어요. 그 때, 뭔가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이제껏 봐왔던 것보다 가장 심각하게 증권 시세가 추락하고 있었어요. 2008년이었죠. 난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전문가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죠 : 저놈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몰라. 얼마 후에 전세계를 향해 이렇게 말하겠지. 당신은 지금 휴지조각같은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로 뭐라도 해야하지 않겠어요, 아닌가요?
 2008년에 그런 현상을 보면서도 내 자금상황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이탈리아나 어디에서도 마찬가지로 원하지 않는 돈까지 떠안아야하는 사람들에 내 일자리가 달려있었기 때문이예요. 니콜라 세인트 존[Nos funérailles, 어딕션The Addiction, Snake Eyes 의 시나리오 작가 ]이 견디기 힘들어 한 점은, 우리에겐 창 밖으로 돈다발을 버리려는 부유한 사람들이 필요하단 사실이었어요. 하지만 누가 달리 영화에 투자하겠습니까? 난 친구에게서 100달러도 꾸기 힘들어요. 그래서 당신에게도 묻지 않는 겁니다. 결국, 투자하길 원한다면, 기꺼이 받겠지만.
 증권가가 추락할 때, 이미 인터넷을 이용해서 저예산 영화를 제작중이었어요. 보다 빠른 방법으로요. 절대적인 제로의 상황에서 시작한 거죠. 뉴욕에서 일년간 영화가 촬영되지 않았었어요. 결국 난...누군가 작업을 시작할 거란 걸 알았지만, 상황은 끔찍했어요.   
안토니 레드맨 Anthony Redman : 2009년에도 2010년에도 작업을 안했어요. 아니, 정정할께요. 2009년에 5주간 일했군요. 2010년엔 단 하루도 일을 안했어요.
아벨 페라라 Abel Ferrara : 내 유일한 일거리는 디트로이트에서의 하찮은 것 뿐이었어요. 지금은 뉴욕에서 일거리가 넘쳐나죠. 국가에서 자금을 주면, 그 돈으로 디트로이트에서 뭔가를 하는 겁니다. 난 그들 무리들과 함께 있었어요. 절대로 영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웨슬리 스나입스가 나오는 시나리오는 웃음거리죠. 은행업자들은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내가 하고 싶은 바를 할 수 있을 거라구요.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았죠. 그러다가 6달 후에 거액의 수표를 받았어요. 일을 시작하고 나서 3주가 지나면 금방 싫증을 냈어요-그리고 필요할 때 부르라고 말하곤 떠났죠. 그리곤 연락이 없었죠. 갑자기 내 계좌에 돈이 들어온 겁니다. 웨슬리 스나입스 Wesley Snipes [웨슬리 스나입스는 세금문제와 연루되어있었음. ndlr. ] 와 함께 세금문제로 감옥에 가야하는 지 걱정을 했어요. 3일 뒤에 우리가 어디로 갔는 지 말 안해도 알겠죠. 디트로이트에는 카치노, 두 곳의 베이스볼 경기장, 호텔, 그리고 내가 있었죠. 공격적일 필요가 없는 곳이죠 : 사람도 없이 한적하죠. 비현실적인 곳이죠. 하루는 날 협박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보아하니 신발 한 짝이 없더군요. 뉴욕에서는 그런 비참한 존재를 본적이 없었어요. 알 파치노는 거기에서 6편의 다른 영화를 촬영했어요. L'Aube rouge[ John Milius , 1984 ] 의 리메이크도 거기서 찍은 겁니다. 밑겨져요? 미국을 침략한 러시아인들의 이야기로 멍청한 영화로 만든다게? 물론 20여년간 그런 일이 벌어졌고 더이상 러시아 놈들 이야기가 먹히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탱크들이 보이더군요. 야밤에 모든 게 이뤄진 겁니다! 그래서, 웨슬리 스나입스가 왔는데 촬영을 원하지 않았죠. 결국 물거품이 됬고, 난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어요.

●왜 신작으로 세계의 종말을 주제로 선택하신 건가요?
아벨 페라라 Abel Ferrara
: 앨 고어가 환경에 관한 10분 짜리 영화를 만들 연출자를 찾으면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 오존층, 세계의 종말 등이요. 우리는 2만6천 년이란 정확한 수치보다 백만년이란 애매한 수치로 세상의 종말을 말하죠. 하지만 오늘 저녁 세상이 종말할 거라고 말하면, 그들은 뭔가 하겠죠. 난 로마 제국의 아첨꾼 없이도 뭔가 영화가 될만할 것들을 원했어요. 파솔리니 정권의 최후시기인, 1975년을 보여줄 저예산 영화이었기 땨문이었죠. 당시, The King of New York의 프리퀄을 준비중이기도 했어요. 동시대의 다른 영화였죠. 프렌치 커넥션2 French Connection2 같이 그 시대의 몰락을 다루고 싶었지만 결국, 바보같은 계획이었고, 차안에서 기다리던 도중에 그걸 포기했어요. 하지만 그 계획때문에 뜻밖의 수입이 있었어요. 복수의 립스틱 L'Angel de la vengence (1981 ) 의 첫 장면은 한 사내가 단지 커피를 마시는 거였는데, 그 장면을 위해 시대를 보여주는 5대의 차가 필요했어요. 그리고 그 시대의 옷을 입은 500여명의 인원도요[그 때, 베네치아 출신의 매력적인 종업원이 왔고, 그녀를 영화제의 4:44 Last Day on Earth 상영회에 초대하였다. ]
 우린 영화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갈겁니다. 뉴욕 영화를 꿈꾸며 머물러있거나 뉴욕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

●영화감독으로서, 뉴욕에 애착을 가지신 게 아닌가요?

아벨 페라라 Abel Ferrara
:: 뉴욕에 대해 말하는 영화가 있다면 그렇겠죠. 내가 만약 Lawrence d'Aribie 를 찍는다고 하면, 어떤 애착을 가져야 하는 겁니까? 사람들은 살면서 그가 이해하는 장소에 대해 영화를 찍어요. 뉴욕에서 산다면, 그곳을 이해하겠죠. 우리가 디트로이트에 간다면, 사람들이 보여주는 장소들 밖에 알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은 장소를 배회하면서 알아보려 할 겁니다. 뉴욕이 다른 장소와 달리 특별히 더 중요한가요? 아뇨, 대도시는 거의 비슷해요 : 로마, L.A. , 모스코바 등등. 나로선 친구들이 살고있는 로마가 더 가깝게 느껴지죠.
 그래도 한 가지는 있어요 : 뉴욕은 24시간 내내 열려있고 움직인 다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돌아가는 도시는 내가 알기론 나폴리 밖에 없어요. 사람들은 새벽4시부터 10시까지 일해요. 로마나 L.A. 에서, 당신이 만약 4시에 서있는다면 이미 범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겠죠 : 《저 놈이 뭐 때문에 저러지? 뭐하려는 거야? 불면증인가? 경찰에 연락해야겠어!》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바뀌긴 힘들어요. 뉴욕은 관광도시이고, 지금이 가장 좋을 때죠[당시 거의 자정이었다, ndlr.] 모든 걸 빠르게 할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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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101- 103쪽, cahiers du cinéma Nº 2011.9
기사 : Stéphane Delorme & Nicholas Elliott
불한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Bernardo Bertolucci, 1940~] [출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Bernardo Bertolucci ] | 네이버 백과사전1940년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태어나 지적 분위기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영화를 보러 다녔던 그는 15세에 첫 단편영화를 찍었다. 로마대학교에서 근대 신학을 공부한 뒤 아버지의 친구였던 파솔리니의 데뷔작 《아카토네 Accattone》(1961)의 조감독을 거쳤다. 1962년 시집 《미스터리를 찾아서 In cerca del mistero》로 프레미오 비아레지오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2년 로마에서 촬영한 데뷔작 《죽음의 신 La commare seca》(1962)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감독으로 인정받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1964년 24세에 젊은 좌파 지식인들의 패배감을 다룬 《혁명전야 Prima della rivoluzione》를 만들어 칸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그러나 거듭 흥행에는 실패하고 제작비를 확보하지 못하자 잠시 동안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세르지오 레오네와 함께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의 시나리오 집필에도 참가했다. 누벨바그 영화에 고무된 그는 1968년 고다르의 형식을 흉내낸 《동반자 Il Sosia》를 찍었다. 1960년대 말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70년 《순응주의자 Il Conformista》를 발표하면서 존경해 마지 않던 고다르식의 영화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이 영화는 그가 과거에 적이라고 생각했던 거대 자본 패러마운트 영화사와 손잡고 만든 것이다. 또 보르헤스의 소설을 각색한 《거미의 계략 La Strategia del ragno》을 통해 정치문제를 영화와 결합시키는 제작자들을 비판했다.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Ultimo tango a Parigi》(1972)는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파격적인 성행위의 묘사로 몇 달 뒤 상영이 금지되었다. 에로티시즘 논쟁을 폭발적으로 불러일으킨 이 영화 때문에 그는 두 달간 투옥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아 5년간 투표권을 잃었다. 1988년에야 무죄를 인정받았다. 이 영화가 벌어들인 돈으로 그는 4시간이 넘는 대작《1900년 Novecento》(1976)을 완성시켰다. 1980년대 들어 동양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그는 중국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자서전 《나의 반생》을 영화화한 《마지막 황제 L'ultimo imperatore》(1987)를 찍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영화제에서 9개 부문상을 모두 휩쓸었으나 서구 중심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5년 만에 이탈리아로 돌아간 그는 1968년 정치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 혁명과 자유에의 희구를 지녔던 사람들의 실패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영화 《스틸링 뷰티 Io ballo da sola》를 만들었다. 그 밖에 《루나 La Luna》(1979), 《어리석은 사나이의 비극 La tragedia di un uomo ridicolo》(1981), 《리틀 부타 Little Buddha》(1994) 등 많은 영화가 있다. 이러한 작품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제6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는 명예 황금사자상을, 2011년 제 64회 칸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출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Bernardo Bertolucci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