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월_Jeff Wall
2011년 9월 11일까지, 브뤼셀의 팔레 드 보자르 에서 제프 월-The Crooked Path(commisaire : Joel Benzaki) 전시가 열린다. 이어, 2011년 11월 12일부터 2012년 2월 26일까지 생-자크-드-콩포스텔 Saint-Jacques-de-Compostelle, 갈레고 현대예술센터 Centro Galego de Arte Contemporanea(CGAC) 에서 그의 행보를 되짚어본다.
제프 월의 구부러진 길
이번 제프 월의 전시에는 그의 작품들과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연대기적이지 않지만, 10개의 전시실에 걸쳐,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전시 제목인 구부러진 길 Chemin sinueux 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첫 번째 전시실에는, 2점의 작품이 방문객을 반기고 있다. 전시제목과 같은 The Crooked Path 라는 작품에서는 제프 월의 절충주의적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르셀 뒤샹 1, 브루스 나우만, 이안 왈라스 2, 로드니 그래험 3, 크리스 버든 4이 그의 원고, 사진, 영상 들 사이로 교차되고 있다. 격자 장식을 한 모니터에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페트라폰칸트의 쓰디쓴 눈물 을 연상시키는 영상이 전파를 타고 있다. 이 영상은 1970년대 작품이다. 그리고, 전시실은 급격히 분위기를 바꾸어, 칼 앙드레를 연상시킨다. 1967년도의 4X25 Altstadt Rectangle (1) 5 의 작품이다(표면으로부터 정사각형으로 움푹 파인 벽). 이 작품은 제프 월의 Storyteller(1986)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 작품은 흑백이 지배적인 전시실에 유일한 칼라사진이다.
제프 월은 미니멀적인 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는 놀라울 정도로 회화와 사진 사이의 관계를 민감하게 감지한다 : 《나는 폴록, 드 쿠닝, 클라인, 뉴만과 로드코의 그림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의 색단계에 아주 영향을 받았죠. 그건 작품의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관객을 부르는 방법이죠[...]. 프랭크 스텔라, 칼 앙드레, 도날드 저드와 다른 작가들은 그보다 더 물질적이고 즉각적이죠[...]. 결과적으로 미학적 측면은 두드러졌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사진적 분위기에 미니멀적 면에 부분적으로 있는 것이죠.(2) 6서 다르덴 형제 7까지, 루이스 브뉘엘 8,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로베르 브레송 9, 스탠리 큐브릭이나 테렌스 멜릭까지, 그들의 영화적 특징을 따라간다. 제프월에게 영화는 세 가지 원칙의 합성어이다 : 회화, 연출, 그리고 사진의 재창조이다. 지난 20세기의 사진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짧지만 밀도있는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이다.《다큐멘터리》의 징후를 띄고서 말이다 ; 최근에, 제프 월은 이러한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듯 보인다. 으젠 앗제 10 까지, 아우구스트 잔더 11 와 라울 하우스만 12, 다이안 아버스, 헬렌 래빗 13, 다이안 아버스 14, 게리 위노그란드 15 등 현대 사진계에서 각자의 장르로 두드러졌던 거장들을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앙 전시실은 제프 월의 거대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후의 작품들은 영미권에서는 개념사진이나 후기-개념주의 사진으로, 프랑스에선 조형예술사진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그의 작품은 개리 위노그란드나 토마스 스트루스 16 와 함께 댄 그래험 17, 더글라스 후블러 18, 로버트 스미스슨 19, 한스-페터 펠드만, 한 차원 높은 다큐멘터리로 평가받기도 한다.
풍경 사진에서 색채의 두드러지는 현상은 이미 스테판 쇼어 20, 로이 아르덴 21, 안드레아스 거스키 22, 장-마르크 뷔스타만테 23, 토마스 러프 24 의 작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데이비드 클레어보트 25. 마크 루이스 26의 이중 노출촬영 비디오가 연상되기도 한다. 제프 월의 사진에서 종이 위에 다색으로 인화가 가능한 이래로, 흑백 은화 사진으로 돌아오면서, 그가 순간을 다루는 방식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의 관점은 항상 내러티브적이며 형식에 충실한 연출과 조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미지의 반대
■ 기자단과의 컨퍼런스에서, 당신은 작가이자 기획자로 소개되었었습니다.
난 기획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획자란 작품의 연구, 전시 준비, 미술관과의 협상 등에 집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경우는 아니죠. 난 내가 보고 싶어하는 작품을 염두에 두고 가정을 합니다. 칼 앙드레의 대형작품은 전시실의 너비와 관련해서 결정되죠. 난 콜롬비아에서 삼나무의 재 더미를 생각했었죠. 성공하진 못하고, 애만 썼었죠.
이 후에 더욱 박차를 가한 덕에, 두 미술관과 관련해서 아주 좋은 시기를 만났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도움을 줬죠. 기획자로서 기회를 주면서 후원을 한 거죠! 내 모든 경험을 동원해서,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었죠 : 아무도 내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맞아요, 기획자의 역활은 좀 복잡하죠. 하지만 겉치레만 한 건 아닙니다. 열정적인 고문이긴 하지만, 작가가 분명하죠.
프랭크 스텔라이나 칼 앙드레의 작품과 함께 전시된 공간을 보면, 이례적으로, 흑백사진입니다.
네, 맞아요. 아주 다채로운 색의 작품들을 제작하곤 했었죠.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칼 앙드레의 작품을 얻지는 못했어요. 그의 작품은 물질적인 동시에 색채가 두드러지는 작품이죠. 하지만 결국, 색채의 부재가 더 나았습니다 ; 댄 플래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엘로우-그린-레드를 고집하지 않았어요. 이 시기의 급진적 미니멀리즘은 아주 간결하거든요. 그리고 물질과 그 분위기에 의해 완벽히 해석되죠. 프랭크 스텔라의 알루미늄, 댄 플래빈의 백색, 그리고 로렌스 와이너의 작품-벽의 노출로 금속철제망의 순수성-이 있죠 ; 그건 아주 아름다워요. 《비-이미지》와 이미지의 대조는 아주 극적이죠. 사진만이 유일하게 다색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스토리텔러 로써, 사진들을 이 전시실에 선보이기로 했습니다. 주변의 작품들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다른 작품들은 그것이 가깝던, 멀던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이미지의 개념을 대체할 것들을 착조 있죠. 그것이 추상이든, 구상이든 말이죠. 이러한 이미지와 비-이미지 간의 대조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런 요소들간의 겹쳐지는 부분은 아주 적습니다. 아주 가까운 것들 사이에서는, 다른 점을 말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미지들이 점점 사라질 수록, 그의 존재감이 강해지는 거죠. 그래서 스토리텔러는 이미지인 겁니다. 다른 작품들에서 재현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일종의 내러티브로써 이미지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린 작품들의 전시작업에 매우 주의를 기울였어요. 로렌스 와이너의 맞은편에 있길 원했는데, 그의 회화가 어떤 방식에서는 가장 《반反-도상 》적이었기 때문이죠. 당신이 그림을 없애고, 그 벽을 없애면, 무엇이 나타날 것 같나요? 그건 바로 다른 그림일 겁니다! 이런 이미지 간의 반대개념은 근본적인 겁니다. 난 그걸 강렬하게 변형시키고, 관객이 그 대조와 아이러니를 느끼도록 하고 싶었어요. 바로 내가 한 쌍의 경험을 하는 것과 동시에 말이죠.
개념사진과 후기-개념주의 사진이 전시된 곳에서는 이 작가들의 초기 청년시기의 작품을 선택했더군요(가장 크기가 작은 작품들). 그들의 작품을 처음 발견한 시기와 맞기 때문입니까?
대체로 맞아요. 팔레 드 보자르에서, 고전전 양식의 사진들에 공간을 할애했었고, 이후엔 거대 전시공간에 그랬죠. 거스키의 작품은 거기에 있어야만 했어요. 내가 보여주려고 한 것 중에는 역사적으로 주요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엄격한 의미는 아니지만, 1960-70대에 내게 영향을 미친 작품들을 전시했죠. 그래험이나 스미스슨은 1960년대에, 한스-페터 펠드만은 1970년대, 그리고 뷔스타만테는 1970년대 말에 발견했죠-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멋진 장소에서요. 그리고 1980년대에는 스트러스와 거스키를 발견했죠. 그 당시 독일을 자주 갔었어요 ; 거기서 거스키가 전시장에 있었죠 ; 아마 처음 만난 장소일 겁니다. 또, 스테판 쇼어를 빠뜨리면 안되죠. 제임스 웰링의 바로 옆에. 이번 전시장은 1960년대와 1980년대 후반기 사이에 주요한 순간들을 포착하여 구성한 것입니다. 난 거기에 부분으로 참여했죠 ; 아마 다른 전시장에 그들의 최근작품을 추가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공간이 부족했죠.
다큐멘터리의 벽
당신이 이 작가들을 발견했을 때, 1980년대 조형예술에서 새로이 사진의 영역을 개척하는데 한참이었습니다. 이런 고전적 사진들을 선택한 건, 동시대의 작품들을 재평가하고, 동일한 시대정신을 공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세대의 문제가 아닌가요?
그런 축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부류가 있긴하죠. 사진의 전통적 미학에 묶여서 제작을 해야했던 세대가 있구요. 그래서 1960년대 말에 이러한 문제가 불거진 겁니다. 내 경우에는 이래요 : 로베르 프랭크의 작품을 알기 시작했을 때를 정확히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인들 은 1955년작이죠. 가장 대중에게 알려진 사진집일 겁니다. 이후에 앗제가, 워커 에반스가 더 유명해졌죠.
난 1956년에 10살이었고, 15살에 미국인들 을 보았죠. 당시 그림을 고집했었어요-프랭크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아서 1966-67년까지 뎃셍을 하고 그림을 그렸죠. 이 사진집은 아주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나중에 사진을 계속해서 배우기로 하고, 프랭크가 다큐의 형식을 극도로 밀어붙였다는 것을 알게됬죠. 그의 작업은 나같은 부류가 범접할 생각도 못하게 할 만큼 완벽했어요. 그래서 거기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죠. 바로 벽을 마주한 존재의 감정을 부각시키는 욕망을 가졌죠.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르포타주는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미니멀리즘이나 포스트미니멀리즘이 유행했고, 개념미술가들이 사진을 이용할 뿐이었죠. 하지만 난 내 회화를 보면서 희망을 다시 가졌어요. 내 다양한 관심사로부터 파생되는 것들을 알아볼 수 있었죠. 많은 다른 작가들이 방식이나 다른 면에서 망설였지만, 다른 방향에서 출발해야했습니다. 르포타쥬의 재검토도 예외가 아니었죠. 아직도 르포타쥬는 사진으로만 남겨야하는 거라고 여깁니다. 그건 이 분야입문자들에게 불문율이었죠. 그게 세대의 영향입니다. 하지만 그건 바뀌기도 하죠. 우린 전통을 바라지만, 새로운 것을 바라기도 하죠. 1980년대에, 새로운 혁신을 위해 오래된 사진을 버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았죠. 아무것도 버릴 건 없었어요. 정말로 새로운, 개인적 행보를 찾아야 했어요. 하지만 매체는 그 가능성만을 줄 뿐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원했던 것을 전혀 할 수 없었어요. 그 이후로, 회화가 형식을 화두로 삼기시작했고, 1950년대에는 기술적으로도 완벽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두 곳의 전시장에서 고전적 사진을 전시하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 관객은 르포타슈-사진의 존재와 그 미학을 강하게 느끼는 거죠. 현재의 20살의 작가가 로버트 프랭크의 작품에 벽을 느끼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그랬지만. 길이 막힐 위협을 느끼는 것은 나뿐이죠!
데이비드 클레어보트와 마크 루이스 가 마주하면서 완성되는 동선은 비디오에 대한 접근을 새롭게 합니다. 사물에 접근하는 인지와 시간의 분할에 관해서요. 당신의 작업의 어떤 부분이 여기에 관련있나요?
고정된 이미지와 유동적 이미지의 관계는 모든 전시에 나타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내가 가진 비디오에 대한 식견을 비난- 결코 비디오를 전시한 일이 없죠-합니다. 그런 생각을 바꾸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합니다. 난 그 작가들의 작업을 좋아합니다 ; 그리고 어떤 요소들은 바꾸어야만 하겠죠. 물론 움직이는 이미지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올겁니다. 이 두 전시실은 내 동맹, 내 지인들에게 할애한 곳입니다. 하지만 제일 우선하는 그룹은 아니죠. 다른 요소들로 관여할 수 있을겁니다. 난 사물의 수많은 이름에 대해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이미지, 그 묘사에 더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하죠. 브루스 나우만이나 크리스 버든이 영화의 대척점으로 주요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특히 그 장식적 분위기때문에 나우만의 작업을 연상케합니다. 그 둘이 공통점이 전혀 없는데도, 단지 분위기면에서요.
내가 작품을 연이어 낯설게 배치하는 방식은 그들의 작품을 보다 강렬하게 느끼게 하죠.■
제프 월의 구부러진 길
이번 제프 월의 전시에는 그의 작품들과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연대기적이지 않지만, 10개의 전시실에 걸쳐,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전시 제목인 구부러진 길 Chemin sinueux 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첫 번째 전시실에는, 2점의 작품이 방문객을 반기고 있다. 전시제목과 같은 The Crooked Path 라는 작품에서는 제프 월의 절충주의적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르셀 뒤샹 1, 브루스 나우만, 이안 왈라스 2, 로드니 그래험 3, 크리스 버든 4이 그의 원고, 사진, 영상 들 사이로 교차되고 있다. 격자 장식을 한 모니터에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페트라폰칸트의 쓰디쓴 눈물 을 연상시키는 영상이 전파를 타고 있다. 이 영상은 1970년대 작품이다. 그리고, 전시실은 급격히 분위기를 바꾸어, 칼 앙드레를 연상시킨다. 1967년도의 4X25 Altstadt Rectangle (1) 5 의 작품이다(표면으로부터 정사각형으로 움푹 파인 벽). 이 작품은 제프 월의 Storyteller(1986)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 작품은 흑백이 지배적인 전시실에 유일한 칼라사진이다.
제프 월은 미니멀적인 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는 놀라울 정도로 회화와 사진 사이의 관계를 민감하게 감지한다 : 《나는 폴록, 드 쿠닝, 클라인, 뉴만과 로드코의 그림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의 색단계에 아주 영향을 받았죠. 그건 작품의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관객을 부르는 방법이죠[...]. 프랭크 스텔라, 칼 앙드레, 도날드 저드와 다른 작가들은 그보다 더 물질적이고 즉각적이죠[...]. 결과적으로 미학적 측면은 두드러졌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사진적 분위기에 미니멀적 면에 부분적으로 있는 것이죠.(2) 6서 다르덴 형제 7까지, 루이스 브뉘엘 8,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로베르 브레송 9, 스탠리 큐브릭이나 테렌스 멜릭까지, 그들의 영화적 특징을 따라간다. 제프월에게 영화는 세 가지 원칙의 합성어이다 : 회화, 연출, 그리고 사진의 재창조이다. 지난 20세기의 사진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짧지만 밀도있는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이다.《다큐멘터리》의 징후를 띄고서 말이다 ; 최근에, 제프 월은 이러한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듯 보인다. 으젠 앗제 10 까지, 아우구스트 잔더 11 와 라울 하우스만 12, 다이안 아버스, 헬렌 래빗 13, 다이안 아버스 14, 게리 위노그란드 15 등 현대 사진계에서 각자의 장르로 두드러졌던 거장들을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앙 전시실은 제프 월의 거대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후의 작품들은 영미권에서는 개념사진이나 후기-개념주의 사진으로, 프랑스에선 조형예술사진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그의 작품은 개리 위노그란드나 토마스 스트루스 16 와 함께 댄 그래험 17, 더글라스 후블러 18, 로버트 스미스슨 19, 한스-페터 펠드만, 한 차원 높은 다큐멘터리로 평가받기도 한다.
풍경 사진에서 색채의 두드러지는 현상은 이미 스테판 쇼어 20, 로이 아르덴 21, 안드레아스 거스키 22, 장-마르크 뷔스타만테 23, 토마스 러프 24 의 작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데이비드 클레어보트 25. 마크 루이스 26의 이중 노출촬영 비디오가 연상되기도 한다. 제프 월의 사진에서 종이 위에 다색으로 인화가 가능한 이래로, 흑백 은화 사진으로 돌아오면서, 그가 순간을 다루는 방식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의 관점은 항상 내러티브적이며 형식에 충실한 연출과 조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미지의 반대
■ 기자단과의 컨퍼런스에서, 당신은 작가이자 기획자로 소개되었었습니다.
난 기획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획자란 작품의 연구, 전시 준비, 미술관과의 협상 등에 집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경우는 아니죠. 난 내가 보고 싶어하는 작품을 염두에 두고 가정을 합니다. 칼 앙드레의 대형작품은 전시실의 너비와 관련해서 결정되죠. 난 콜롬비아에서 삼나무의 재 더미를 생각했었죠. 성공하진 못하고, 애만 썼었죠.
이 후에 더욱 박차를 가한 덕에, 두 미술관과 관련해서 아주 좋은 시기를 만났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도움을 줬죠. 기획자로서 기회를 주면서 후원을 한 거죠! 내 모든 경험을 동원해서,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었죠 : 아무도 내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맞아요, 기획자의 역활은 좀 복잡하죠. 하지만 겉치레만 한 건 아닙니다. 열정적인 고문이긴 하지만, 작가가 분명하죠.
프랭크 스텔라이나 칼 앙드레의 작품과 함께 전시된 공간을 보면, 이례적으로, 흑백사진입니다.
네, 맞아요. 아주 다채로운 색의 작품들을 제작하곤 했었죠.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칼 앙드레의 작품을 얻지는 못했어요. 그의 작품은 물질적인 동시에 색채가 두드러지는 작품이죠. 하지만 결국, 색채의 부재가 더 나았습니다 ; 댄 플래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엘로우-그린-레드를 고집하지 않았어요. 이 시기의 급진적 미니멀리즘은 아주 간결하거든요. 그리고 물질과 그 분위기에 의해 완벽히 해석되죠. 프랭크 스텔라의 알루미늄, 댄 플래빈의 백색, 그리고 로렌스 와이너의 작품-벽의 노출로 금속철제망의 순수성-이 있죠 ; 그건 아주 아름다워요. 《비-이미지》와 이미지의 대조는 아주 극적이죠. 사진만이 유일하게 다색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스토리텔러 로써, 사진들을 이 전시실에 선보이기로 했습니다. 주변의 작품들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다른 작품들은 그것이 가깝던, 멀던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이미지의 개념을 대체할 것들을 착조 있죠. 그것이 추상이든, 구상이든 말이죠. 이러한 이미지와 비-이미지 간의 대조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런 요소들간의 겹쳐지는 부분은 아주 적습니다. 아주 가까운 것들 사이에서는, 다른 점을 말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미지들이 점점 사라질 수록, 그의 존재감이 강해지는 거죠. 그래서 스토리텔러는 이미지인 겁니다. 다른 작품들에서 재현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일종의 내러티브로써 이미지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린 작품들의 전시작업에 매우 주의를 기울였어요. 로렌스 와이너의 맞은편에 있길 원했는데, 그의 회화가 어떤 방식에서는 가장 《반反-도상 》적이었기 때문이죠. 당신이 그림을 없애고, 그 벽을 없애면, 무엇이 나타날 것 같나요? 그건 바로 다른 그림일 겁니다! 이런 이미지 간의 반대개념은 근본적인 겁니다. 난 그걸 강렬하게 변형시키고, 관객이 그 대조와 아이러니를 느끼도록 하고 싶었어요. 바로 내가 한 쌍의 경험을 하는 것과 동시에 말이죠.
개념사진과 후기-개념주의 사진이 전시된 곳에서는 이 작가들의 초기 청년시기의 작품을 선택했더군요(가장 크기가 작은 작품들). 그들의 작품을 처음 발견한 시기와 맞기 때문입니까?
대체로 맞아요. 팔레 드 보자르에서, 고전전 양식의 사진들에 공간을 할애했었고, 이후엔 거대 전시공간에 그랬죠. 거스키의 작품은 거기에 있어야만 했어요. 내가 보여주려고 한 것 중에는 역사적으로 주요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엄격한 의미는 아니지만, 1960-70대에 내게 영향을 미친 작품들을 전시했죠. 그래험이나 스미스슨은 1960년대에, 한스-페터 펠드만은 1970년대, 그리고 뷔스타만테는 1970년대 말에 발견했죠-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멋진 장소에서요. 그리고 1980년대에는 스트러스와 거스키를 발견했죠. 그 당시 독일을 자주 갔었어요 ; 거기서 거스키가 전시장에 있었죠 ; 아마 처음 만난 장소일 겁니다. 또, 스테판 쇼어를 빠뜨리면 안되죠. 제임스 웰링의 바로 옆에. 이번 전시장은 1960년대와 1980년대 후반기 사이에 주요한 순간들을 포착하여 구성한 것입니다. 난 거기에 부분으로 참여했죠 ; 아마 다른 전시장에 그들의 최근작품을 추가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공간이 부족했죠.
다큐멘터리의 벽
당신이 이 작가들을 발견했을 때, 1980년대 조형예술에서 새로이 사진의 영역을 개척하는데 한참이었습니다. 이런 고전적 사진들을 선택한 건, 동시대의 작품들을 재평가하고, 동일한 시대정신을 공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세대의 문제가 아닌가요?
그런 축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부류가 있긴하죠. 사진의 전통적 미학에 묶여서 제작을 해야했던 세대가 있구요. 그래서 1960년대 말에 이러한 문제가 불거진 겁니다. 내 경우에는 이래요 : 로베르 프랭크의 작품을 알기 시작했을 때를 정확히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인들 은 1955년작이죠. 가장 대중에게 알려진 사진집일 겁니다. 이후에 앗제가, 워커 에반스가 더 유명해졌죠.
난 1956년에 10살이었고, 15살에 미국인들 을 보았죠. 당시 그림을 고집했었어요-프랭크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아서 1966-67년까지 뎃셍을 하고 그림을 그렸죠. 이 사진집은 아주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나중에 사진을 계속해서 배우기로 하고, 프랭크가 다큐의 형식을 극도로 밀어붙였다는 것을 알게됬죠. 그의 작업은 나같은 부류가 범접할 생각도 못하게 할 만큼 완벽했어요. 그래서 거기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죠. 바로 벽을 마주한 존재의 감정을 부각시키는 욕망을 가졌죠.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르포타주는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미니멀리즘이나 포스트미니멀리즘이 유행했고, 개념미술가들이 사진을 이용할 뿐이었죠. 하지만 난 내 회화를 보면서 희망을 다시 가졌어요. 내 다양한 관심사로부터 파생되는 것들을 알아볼 수 있었죠. 많은 다른 작가들이 방식이나 다른 면에서 망설였지만, 다른 방향에서 출발해야했습니다. 르포타쥬의 재검토도 예외가 아니었죠. 아직도 르포타쥬는 사진으로만 남겨야하는 거라고 여깁니다. 그건 이 분야입문자들에게 불문율이었죠. 그게 세대의 영향입니다. 하지만 그건 바뀌기도 하죠. 우린 전통을 바라지만, 새로운 것을 바라기도 하죠. 1980년대에, 새로운 혁신을 위해 오래된 사진을 버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았죠. 아무것도 버릴 건 없었어요. 정말로 새로운, 개인적 행보를 찾아야 했어요. 하지만 매체는 그 가능성만을 줄 뿐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원했던 것을 전혀 할 수 없었어요. 그 이후로, 회화가 형식을 화두로 삼기시작했고, 1950년대에는 기술적으로도 완벽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두 곳의 전시장에서 고전적 사진을 전시하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 관객은 르포타슈-사진의 존재와 그 미학을 강하게 느끼는 거죠. 현재의 20살의 작가가 로버트 프랭크의 작품에 벽을 느끼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그랬지만. 길이 막힐 위협을 느끼는 것은 나뿐이죠!
데이비드 클레어보트와 마크 루이스 가 마주하면서 완성되는 동선은 비디오에 대한 접근을 새롭게 합니다. 사물에 접근하는 인지와 시간의 분할에 관해서요. 당신의 작업의 어떤 부분이 여기에 관련있나요?
고정된 이미지와 유동적 이미지의 관계는 모든 전시에 나타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내가 가진 비디오에 대한 식견을 비난- 결코 비디오를 전시한 일이 없죠-합니다. 그런 생각을 바꾸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합니다. 난 그 작가들의 작업을 좋아합니다 ; 그리고 어떤 요소들은 바꾸어야만 하겠죠. 물론 움직이는 이미지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올겁니다. 이 두 전시실은 내 동맹, 내 지인들에게 할애한 곳입니다. 하지만 제일 우선하는 그룹은 아니죠. 다른 요소들로 관여할 수 있을겁니다. 난 사물의 수많은 이름에 대해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이미지, 그 묘사에 더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하죠. 브루스 나우만이나 크리스 버든이 영화의 대척점으로 주요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특히 그 장식적 분위기때문에 나우만의 작업을 연상케합니다. 그 둘이 공통점이 전혀 없는데도, 단지 분위기면에서요.
내가 작품을 연이어 낯설게 배치하는 방식은 그들의 작품을 보다 강렬하게 느끼게 하죠.■
Jeff Wall
1946년 벤쿠버 출생.
2007 Deutsche Guggenheim, Berlin ; MoMA , New Ro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 SF MoMA, San francisco
2008-2009 Marian Goodman Gallery, New York
2010 Marian Goodman Gallery, Paris
2011 Palais des Beaux-Arts, Bruxelles, jusqu'au 11 septembre
CGAC, Saint-Jacques-de-Compostelle
1946년 벤쿠버 출생.
2007 Deutsche Guggenheim, Berlin ; MoMA , New Ro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 SF MoMA, San francisco
2008-2009 Marian Goodman Gallery, New York
2010 Marian Goodman Gallery, Paris
2011 Palais des Beaux-Arts, Bruxelles, jusqu'au 11 septembre
CGAC, Saint-Jacques-de-Compostelle
출처 : 36- 40 page, ARTPRESS #361.
기사 : 베르나르 마르셀리스 Bernard Marcelis
번역 : PLONGEUR (zamsoobu)
기사 : 베르나르 마르셀리스 Bernard Marcelis
번역 : PLONGEUR (zamsoobu)
- [Marcel Duchamp, 1887.7.28~1968.10.2] 요약 프랑스의 미술가. 현대 미술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로의 이행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팝 아트에서 개념 미술에 이르는 다양한 현대 미술사조에 영감을 제공하였다. [출처]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born 1943) in Shoreham, England, is a Canadian artist based in Vancouver. He won the 2004 Governor General's Awards in Visual and Media Arts.[1] Wallace had tremendous impact on the Vancouver art scene and is considered the father of the Vancouver School of photography[2] which includes notable photo conceptualists such as Vikky Alexander, Jeff Wall, Rodney Graham, Ken Lum and Stan Douglas. [본문으로]
- Rodney Graham (born January 16, 1949) is an artist and musician born in Abbotsford, British Columbia. He is most often associated with the Vancouver School. He is married to the artist Shannon Oksanen and lives in Vancouver. [본문으로]
- [Chris Burden, 1946~] 요약 미국의 잔혹 미술가. 1970년 대 초에는 자신의 몸에 위험을 주는 1인 공연을 하였고 자신의 팔에 총을 쏘게 하는 등 점차 위험 수위가 높은 작품을 발표하여 '미술계의 악마'라고 불린다. 별칭 미술계의 악마 국적 미국 활동분야 예술 주요작품 《벨벳의 물》(1974) 《책형 Transfixed》(1974) 《중성자탄을 위한 동기》(1979) 본문 미국의 대표적인 잔혹미술가이다. 1971년 4월에 졸업작품으로 캘리포니아대학 사물함에 몸을 구겨넣은 채 5일간 물만 마시며 지낸 것을 시작으로, 관람객이 자기 몸에 핀을 꽂게 하거나, 콘크리트 계단에서 두 번에 날아서 내려오는 행위, 배에 핀을 꽂고 로스앤젤레스 거리에서 타르를 칠한 방수포 아래에 눕기도 했으며, 자신의 몸에 쇠사슬에 감은 채로 전선과 물양동이 사이에 누워 만일 물이 쏟아지기라도 하면 전기 감전사하도록 설치한 작품도 발표하였다. 이처럼 1970년대 초에는 주로 신상에 위험을 주는 1인 공연 작품을 발표하였다. 1974년 5월 7일 시카고미술학교에서는 물이 가득한 세면기에 얼굴을 담그고 질식해 기절할 때까지 계속 물고문을 하면서 관람객은 벽으로 격리된 채 모니터로 그 행위를 지켜보게 한 《벨벳의 물》을 발표하였다. 또, 폴크스바겐 자동차의 지붕 위에 자신의 손을 못으로 박아 고정시킴으로써 예수의 책형을 흉내낸 《책형 Transfixed》(1974)을 발표하였으며, 《중성자탄을 위한 동기》(1979)에서는 5만 개의 니켈 동전 위에 성냥을 고정시켜 동유럽 전선에 배치된 소련의 탱크 숫자를 상징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렇듯 잔혹한 행위로 얻은 그의 별명은 '미술계의 악마'이다. 별명에 걸맞게 그의 행위예술은 위험수위가 더욱 높아져 TV 생방송 프로그램에 뛰어들어 진행자를 인질로 잡는가 하면 총잡이에게 자신의 팔에 총을 쏘게 하여 총알이 근육을 관통하여 살점이 떨어져나가게 하는 행위예술을 하였다.《The B-Car》(1975) 《Shoot》(1975) 《Doorway to heaven》(1976) 《Hell Gate》(1998-1999) 등의 작품이 있다.[출처] 크리스 버든 [Chris Burden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footnote]은 1960년도의 프랭크 스텔라의 회색 모노크롬과 소통하는 듯하다. 보다 멀리, 댄 플래빈의 흑색 네온(1963) 과도 닿아있다. 완전히 반대되는 두 작품을 잇는 연결사의 역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는 로렌스 와이너[footnote]Lawrence Weiner (born February 10, 1942) was a central figure in the formation of conceptual art in the 1960s [1] His work often takes the form of typographic texts. [edit] Life and career Weiner was born in the Bronx, New York. His work in the early 1960s included six years of making explosions in the landscape of California to create craters as individual sculptures.[2] He is also known during his early work for creating gestures described in simple statements leading to the ambiguity of whether the artwork was the gesture or the statement describing the gesture: e.g."Two minutes of spray paint directly on the floor.." or " A 36" x 36" removal of lathing or support wall..." (both 1968). In 1968, when Sol LeWitt came up with his Paragraphs on Conceptual Art, Weiner formulated his "Declaration of Intent" (1968): 1. The artist may construct the piece. 2. The piece may be fabricated. 3. The piece need not be built. Each being equal and consistent with the intent of the artist the decision as to condition rests with the receiver upon the occasion of receivership. Weiner created his first book Statements in 1968, a small 64-page paperback with texts describing projects. Published by The Louis Kellner Foundation and Seth Siegelaub, "Statements" is considered one of the seminal conceptual artist's books of the era. He was a contributor to the famous Xeroxbook also published by Seth Siegelaub in 1968. Since the early 1970s, wall installations have been Weiner's primary medium, and he has shown at the Leo Castelli gallery. Nevertheless, Weiner works in a wide variety of media, including video, film, books, sound art using audio tape, sculpture, performance art, installation art, and graphic art. In 2007 he participated at the symposium “Personal Structures Time-Space-Existence” a project which was initiated by the artist Rene Rietmeyer. In 2008 an excerpt from his opera with composer Peter Gordon – The Society Architect Ponders the Golden Gate Bridge – was issued on the compilation album Crosstalk: American Speech Music (Bridge Records) produced by Mendi + Keith Obadike. In 2009 he participated in the art project Find Me, by Gema Alava, in company of artists Robert Ryman, Merrill Wagner and Paul Kos. Weiner is represented in New York City by Marian Goodman Gallery,[3] in London by Lisson Gallery, in Paris by Yvon Lambert Gallery,[4] in Los Angeles by Regen Projects, in Reykjavik by i8 Galleri, and in Tel Aviv by Dvir Gallery.[5] [본문으로]
- [/footnote]》
프랑수아 트뤼포에[footnote]François Roland Truffaut (February 6, 1932– October 21, 1984) was an influential film critic and filmmaker and one of the founders of the French New Wave.[1] In a film career lasting over a quarter of a century, he remains an icon of the French film industry. He was also a screenwriter, producer, and actor working on over twenty-five films. [본문으로] - Brothers Jean-Pierre Dardenne (born 21 April 1951 in Liège, Belgium) and Luc Dardenne (born 10 March 1954 in Liège, Belgium) are a Belgian filmmaking duo. They write, produce and direct their films together. The Dardennes began making narrative and documentary films in the late 1970s, but they first came to international attention in the mid-1990s with La Promesse (The Promise). They won their first major international film prize when Rosetta won the Palme d'Or at the 1999 Cannes Film Festival. All their films since have played at the Cannes main competition and won one of the major prizes. In 2002, Olivier Gourmet won Best Actor at Cannes for the Dardennes' 'Le Fils' ("The Son") In 2005, they won the Palme d'Or a second time for their film L’Enfant (The Child), putting them in an elite club of only 6 with the likes of Francis Ford Coppola. Their film, Le silence de Lorna (Lorna's Silence), won Best Screenplay at the 2008 Cannes Film Festival and was released in Europe in the fall. Their latest film The Kid with a Bike premiered In Competition at the 2011 Cannes Film Festival.[1] [본문으로]
- Luis Buñuel Portolés (Spanish pronunciation: [ˈlwiz βuˈɲwel]; 22 February 1900 – 29 July 1983) was a Spanish-born filmmaker — later a naturalized citizen of Mexico — who worked in Spain, Mexico, France and the US.[1]. [본문으로]
- Robert Bresson (pronounced [ʁɔbɛʁ bʁɛˈsɔ̃] in French; 25 September 1901 – 18 December 1999) was a French film director known for his spiritual, ascetic style. [본문으로]
- [/footnote] 에서 하인리히 질[footnote] Heinrich Zille (January 10, 1858 - August 9, 1929), German illustrator and photographer, was born in Radeburg near Dresden, as the son of watchmaker Johann Traugott Zill (Zille since 1854) and Ernestine Louise (born Heinitz, daughter of a miner from the Ore mountains). In 1867, his family moved to Berlin, where he finished school in 1872 and started an apprenticeship as a lithographer. In 1883, he married Hulda Frieske, with whom he had three children. She died in 1919. [본문으로]
- August Sander, 1876~1964.4.20] 독일의 사진가. 사회주의 예술론의 영향을 받았고 평생 인물사진만을 찍으며 사회구조 속의 인간상을 표현하였다. 1929년 우리시대의 얼굴 이라는 사진집을 펴냈고, 1958년에는 독일사진협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1961년 문화상을 받았다.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독일의 사회상을 다양한 초상사진들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그려낸 사진가이다. 1876년 독일의 탄광촌 헤르도르프 안 데이지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였고 아우구스트 잔더도 어려서부터 광부일을 하였다. 슈멕(Schmeck)이라는 사진가가 광산촌의 풍경을 찍기 위해 이 고장을 찾았을 때 그의 심부름을 해주면서 사진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후 오스트리아 린츠에 사진관을 차렸고 1910년부터 1914년까지는 독일 쾰른에서 사진관을 경영하였다. 잔더는 사회주의 예술론의 영향을 받아 동시대인들을 사회적 부류별로 폭넓게 찍어나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독일 민중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인물사진 촬영을 계속하였다. 이후 1910년부터 1930년까지 무려 2,500점이 넘는 인물사진을 완성하였다. 1927년 개인전을 열어 이러한 작업을 발표하고, 1929년 《우리 시대의 얼굴 Antlitz der Zeit》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하였다. 이어 1936∼1939년에 《독일의 국토, 독일의 민중 Deutsche Lande, Deutsche Menschen》 시리즈를 계속 펴내었다. 그는 이 계획을 45권 총서로 계속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나치정권하에서 사상불온자로 지목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51년부터 잔더는 비로소 독일 사진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하여 1958년에는 독일사진협회 명예회원이 되었고, 1961년 문화상을 받았으며 1964년 4월 20일 사망하였다. 1969년에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잔더는 평생 인물사진만 찍었는데, 그는 그 사진들을 통해 거대한 사회구조 속에 놓여 있는 인간상을 파악하려 하였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인물을 사회라는 조직 속에서 저마다 맡고 있는 사회적 역할로 파악했기 때문에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고유한 이름 대신 농부, 변호사, 군인, 벽돌공 등 직업명이 사진제목으로 되어 있다. 또한 잔더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독일 민중 전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거대한 계획을 갖고 추진함으로써 그의 사진들은 역사적인 영원성을 갖게 되었다.[출처] 잔더 [August Sander ] | 네이버 백과사전[출처] 잔더 [August Sander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Raoul Hausmann, 1886. 7. 12~1971. 2. 1] 오스트리아 태생의 다다이즘 예술가. 1918년 조지 그로스, 존 하트필드 등과 함께 베를린 다다를 결성하였으며, 정치적이고 풍자적인 성향을 띤 포토몽타주 기법을 창안하였다.[출처] 라울 하우스만 [Raoul Hausmann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Helen Levitt (August 31, 1913 – March 29, 2009)[1][2] was an American photographer. She was particularly noted for "street photography" around New York City, and has been called "the most celebrated and least known photographer of her time."[3] [본문으로]
- [/footnote], 위지[footnote]Weegee, 1899.6.12~1968] 미국의 사진가. 《벌거벗은 도시》라는 사진집을 내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인간성에 대한 냉정한 비판이 담긴 사진을 주로 찍었다. 《위지의 비밀들》, 《위지의 창조적 카메라》, 《위지 바이 위지》 등을 출간하였다[출처] 위지 [Weegee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Garry Winogrand, 1928~1984] 미국의 사진작가. 리 프리드랜더와 더불어 1960년대 현대사진을 이끌었던 대표주자이다. 삶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생생한 현장을 담아냈던 그는 생의 격정적인 순간의 리얼리티를 추구했다. 과감한 앵글과 뛰어난 순간포착으로 가장 미국적인 도시풍경을 남겼다.[출처] 게리 위노그랜드 [Garry Winogrand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Thomas Struth, 1954~] 요약 독일의 사진작가. 유형학적 사진의 모태가 되는 '베허 학파'의 제 1세대 작가이다. 도시 공간에 깃든 엄격한 유형성과 현대인의 다층적인 삶의 요소를 독특한 미감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1990년대 초 뮤지엄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출처] 토마스 슈트루트 [Thomas Struth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Dan Graham (born March 31, 1942), is a conceptual artist now working out of New York City. He is an influential figure in the field of contemporary art, both a practitioner of conceptual art and an art critic and theorist. His art career began in 1964 when he moved to New York and opened the John Daniels Gallery. Graham’s artistic talents have wide variety. His artistic fields consist of film, video, performance, photography, architectural models, and glass and mirror structure. Graham especially focus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his artwork and the viewer in his pieces. Graham made a name for himself in the 1980s as an architect of conceptual glass and mirrored pavilions [본문으로]
- [Douglas Huebler, 1924~1997] 1960년대 개념미술의 발전을 이끈 미국의 개념미술가. 초기에는 전위적 액션페인팅을 통한 상업미술을 했으나 1960년대 중반에 기하학적 미니멀 조각에 관심을 가진 이후 경험을 중시하는 방향의 작업을 했다[출처] 후블러 [Douglas Huebler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Robert Smithson (January 2, 1938–July 20, 1973) was an American artist famous for his land art. [본문으로]
- Stephen Shore (born October 8, 1947) is an American photographer known for his deadpan images of banal scenes and objects in the United States, and for his pioneering use of color in art photography. [본문으로]
- Roy Arden (born 1957) is a Vancouver artist.[1] Arden has had solo exhibitions at the Ikon Gallery, Galerie Tanit and Vancouver Art Gallery. Other exhibitions at the Kunstmuseum Basel, and the Museum of Modern Art, Antwerp (Museum van Hedendaagse Kunst). His work is included in the collection of the Museum of Modern Art - was featured in their inaugural exhibition after their expansion. [1] New York, Vancouver Art Gallery, and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본문으로]
- Andreas Gursky (January 15, 1955) is a German visual artist known for his enormous architecture and landscape color photographs, often employing a high point of view. Rhein II, an image by Gursky, fetched $4.3m (£2.7m) at Christie's New York on 11 November 2011, becoming the most expensive photograph ever sold.[1] [본문으로]
- Jean-Marc Bustamante (born 1952) is a French artist, sculptor and photographer. He was born in Toulouse. He is noted as a conceptual and installation artist and has incorporated ornamental design and architectural space in his works. He has also worked with film (as assistant of William Klein). From 1983 to 1987 he and Bernard Bazile operated under the joint name BazileBustamante. He teaches at ENSBA in Paris. [본문으로]
- Thomas Ruff (born 10 February 1958 in Zell am Harmersbach) is an internationally renowned German photographer who lives and works in Düsseldorf [본문으로]
- David Claerbout (born 1969, Kortrijk, Belgium) is a Belgian artist working in the media of photography, video, sound, drawing and digital arts, though perhaps he is best known for his large scale video installations. His work exists at the meeting point between photography and film, and is at the forefront of this contemporary dialogue. Claerbout studied at Nationaal Hoger Instituut voor Schone Kunsten, Antwerp from 1992-1995. He trained as a painter, but became more and more interested in time through investigations in the nature of photography, the still and the moving image (Bergson's duree echoed in Gilles Deleuze Cinema 1 and Cinema 2). “ I have been painting and drawing since I was seven, and I must blame the art academy for perpetuating the idea that only painting could be art. That’s too heavy for me. I was looking for an art that didn’t consist of objects, so I taught [본문으로]
- Mark Lewis (born 1958) in Hamilton, Ontario is a Canadian artist. Noted for his film installations, Lewis represented Canada at the 2009 Venice Biennale.[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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