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리베라씨옹 일간지 기사_70회 칸영화제

70회 칸 영화제 기사 번역
2017년 5월 23일 리베라씨옹



홍상수

애인의 연극

칸 영화제에서 24시간차를 두고 한 감독의 두 작품이 상영된 적이 이전에 있었던가?
필자의 기억으로는 없다. 홍상수 감독의 경우가 그렇다. 감독의 이번 영화를 보면, 몇년 전부터 프레티시모의 틀에 갇혀있던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밤의 새벽에서 혼자 On the beach at Night Alone 을 상기해보길) 벗어나 고유의 카덴짜에 도달한 듯 하다. 홍감독의 영화에는 일반적으로 한국영화에 잘 등장하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술자리, 서로 간의 은밀한 유혹이 오가는, 아니면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술주정이 난무하는 그런 장면이 나오거나, 하나의 모티브가 연속적으로 변주된다. 지난 해, 쉬케 거리rue du Suquet 에서 촬영된 장면이 나오는 클레어의 카메라 Claire’s Caméras 는 일요일 상영되었고,  지난 2월 한국에서 촬영된 흑백 영화 그 후 Le jour d’après 는 경쟁부문에 진출하였다. 두 작품을 연이어 보면, 한 작품에 다른 부분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하나는 일광에서의, 다른 하나는 암흑에서. 혹은 하나는 가벼운 비극을, 다른 하나는 무거운. 하지만 두 작품 모두에서, 우리는 감독의 역량을, 보이지 않는 뒷배경에서 일어나느휘청거리며 관객을 혼돈에 빠뜨리고는 다시 조각들을 이어붙이며 일루전을 만들어내는 그의 역량을 볼 수 있다.


클레어의 카메라 Claire’s Cameras는 농담처럼 시작한다, 혹은 홍상수 영화 처럼 시작한다 : 한 감독이 시골마을, 여기서 시골 마을은 칸, 에 도착한다. 지난 해, 홍감독은 폴 버호벤 감독Paul Berhoven 의 Elle엘 홍보 차 왔던 이자벨 위페르 Isabelle Hupert 과 함께, 모두 영화제에 시선이 쏠린 틈을 타서 칸의 뒷 골목거리를 프레임에 담는다. 그의 영화 속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수원이나 동경 거리처럼. 홍감독이 우리에게 왔다. 그의 영화를 찍기 위해서, 여기에서. 물론 프랑스인 전부가 아닌, 몇몇의 씨네필 로써는 극장 스크린에서 보기를 바라는 기적을 이룬 것이다.

 민희 (김민희 ) 는 영화제에서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데, 여사장(장미희)에게 부당하게 해고당한다. 여기서 마초적인 감독 소원수 (정진윤)가 등장한다. 그리고, 짠. 클레어 (이자벨 위페르) 의 등장. 음악선생이자 여가시간에는 사진을 찍는, 한손에는 쿠키를 다른 한 손에는 인탁스 카메라를 메고, 레몬색 조끼를 입은 그녀가. <<칸에 온건 이번이 처음이예요>>, 그녀가 처음 한 말이다. 극장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그녀의 순진한 어투가 한 몫 한 셈이다 : 위페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역에 적합해 보인다. 다른 나라에서  In Another Country 이후에, 홍감독과 위페르의 콜라보레이션은 그의 유머감각을 여실히 보여주는, 전작과 비교하여 보지못한, 작품이었다.

<<두 번 째>>
이 영화는 연속적으로 폭로한다. 클레어Claires가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거기에 따라 이야기를 말하는 가운데, 관객은 언어의 이중플레이를 즐겨야 한다. 클레어는 민희가 해고의 부당함을 말하며 단편적으로 끌어오는 기억들을 다시 짜집기 한다. <<뭔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입장으로 다시 보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감독의 이러한 주관은 Claire’s Cameras 클레어의 카메라 뿐 아니라, 그 후 Le jour d’après 에서 교차된다. 그 후 Le jour d’après 도 역시 폭로를 하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김민희는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이면서 격한 삼각관계의 증인을 맡는다. 출판사의 사장 봉완(권해효), 그의 부인 해주(조윤희), 그리고 그녀의 정부(김새벽). 여기서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홍감독은 현재 배우 김민희와 연인관계이다. 한국언론에서 가혹하게도 기사화가 되고 있지만, 그녀의 역활로 이 영화의 미덕이 더욱 빛을 발하는 건 사실이다. 애수어린 흑백장면, 그리고 엇박자의 리듬, 이 영화는 봉완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관객을 배려하지만, 이후로는 과거와 현재, 주관적 시선과 객관적 거리를 오가기를 반복한다. 봉완이 그에게 닥친 위기로 고통스럽게 흐느끼며 거리를 방황을 할 때, 우리는 깨닫는다. 이 모든 파편적 화법이 이미 내재되어 있던 역설을 말하기 위함이었음을. 물론 그러기엔 시간이 걸리지만. 영화의 후반부, 시선은 봉완의 이야기를 뒤엎는다. 무엇이 되었던 간에 결국 관객은 영화 속 인물의 비겁함과 여성비하 언행에 당황했다가, 기꺼이 그들을 용서를 하며, 이야기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반면 관객이 느끼는 진정한 단절감은 아마 각자 잠재적으로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최악의 것들을 수면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목소리의 울림>>

영화의 내러티브가 변주되는 것만큼, 아름이 봉완을 면전에 두고 절망의 차 내뱉은 말, <<괜찮아, 모든게 최고야>>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아름은 말의 힘을 믿는다. 봉완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기에서 클레어가 보다 큰 목소리로 인용한 말을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과 바라는 꿈, 혹은 실제 자신과 이상 속의 자신 사이에서 섞이고 결합되지 않는 성향이며, 우리가 행동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믿으셔야만 해요>>아름이 결연히 말한다.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세상의 이치예요>> 다시 화면은 암흑, 아름은 기절한다. 그녀는 세상을 믿었고, 우리도 믿는다. 홍상수의 꿈 속에 세계는 우리의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술에 관한 겸허한 정의를 내리는 이 영화야 말로 황금종려상을 받아 마땅하다.

출처; 
2017년 5월 23일 리베라씨옹
엘리자베스 프랑크 뒤마
ELISABETH FRACK-DU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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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