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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2.14 니스와 코트 다쥐르의 지역 예술 ; 1951-2011_(1)

니스와 코트 다쥐르의 지역 예술 ; 1951-2011_(1)


1997년 여름에, 코트 다쥐르에서 니스지방에서 현대성이 도래함을 축하하며 1918년 부터-1958년까지의 예술적 흐름을 짚었던 전시가 열렸었다. 이번 여름, 코트 다 쥐르의 50여개 예술이 움트는 장소를 보려 한다. 코트 다쥐르의 현대예술- 실험적 영역, 1951-2011 이란 제목으로 역사적 전시를 되돌아본다. 베르나르 마셀리스는 아방가르드 운동 , 신 사실주의, 그리고 플럭서스에 이르기까지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 이《니스 학파》의 흔적을 좇는데 함께하게 되었다. 덧붙여, 이 야심찬 선언과 관련한 정보도 함께 수록한다.

모호함의 역사

■ 공통된 뜻을 보이기 위해 50여개의 장소를 아우르면서 이 사건들과 의식들이 모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이 된다. 1950년도부터 이어져온 창조적 실험은 개인성, 운동, 전시와 장소들을 매번 바뀌면서도 이어져온 주요 원칙이다. 그렇지 않으면, 6세기 이후에, 코트 다쥐르가 현실의 대척점, 그리고 불가피한 교류의 장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영역과 영속성의 이중의 문제는 항상 남는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에 지나지 않고, 당대 예술계에 참여의 문제이다-3가지 혁신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플럭서스, 신사실주의, 쉬포르 쉬르파스
[각주:1] 이다. 이러한 주요한 움직임들 중 상당수가 바로 코트 다쥐르부터 시작(되었거나 활발하였던) 되었다. 역사적으로 살짝 엿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이런 20세기 중반 열기는 그리 멀지 않은 이야기이다. 아직도 위대한 작가들 중 몇몇은 이 지방에 살고있으며, 계속해서 주변과 후배지에서 교류하고 있다. 니스와 베니스가 마티스[각주:2]와 관련한 것처럼, 앙티브와 발로리스가 피카소[각주:3]와 관련한것처럼, 비오에서 페르낭 레제[각주:4]가, 생-폴-드 방스에 샤갈[각주:5]이, 앙티브의 니콜라 드 스탈[각주:6]이나 한스 하르퉁[각주:7]가 있고, 이렇게 지역 마다 작가와 그들이 창조한 작품들이 얽혀있다. 예술사에 주요 획을 그은 그들의 작품은 단색화 미술관에 유산으로 보존되어 있다. 어떠한 현대예술의 간섭없이 말이다. 다른 상징적 장소는 앙드레 말로André Malaux가 참관한 아래(1)[각주:8]이다. 이 지역은 프랑스 내 곳곳의 미술관과 연계하여 창조물과 작가를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니스 학파L'école de Nice


이들을 니스학파라 통칭하는 건 실수일 수 있다. 1950년대 파리학파와 단절되면서 이루어진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중해연안의 도시들은 오랜기간 중심부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고유의 문화를 일구어나갔다. 러시아나 영국에서도 그들의 움직임은 뚜렷했다. 유사성과 혁신성- 은 지역주민들에 의해 풍부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은 1960-70년대를 결정짓는 특징이 되었다. 1977년 창단된 퐁피두 센터에서 이 니스학파의 전시가 열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후에 예술이 보다 개인적으로 녹아들기 전, 과거 전위예술 의 종식의 순간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이런 현상은 예술계에 불어닥친 세계화의 흐름과 겹친다(우리가 21세기 초부터 이야기해온  국제화나, 다른 용어 등등). 특정 예술가들은 보다 모호하지만, 니스 학파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당수 공통적인 부분을 가지고 다양한 시기에 걸쳐 나타났다. 물론 각자의 길을 걷는 이들도 있었다. 니스출신 역사적 갤러리스트인 자크 마타라소 Jacques Matarasso 는 이를 두고 가장 훌륭한 정의를 내렸다 : 《니스 학파는 이론도 아닌, 원칙이나 이념이 아니다. 하지만 경이롭게도 같은 지역에 모여있는 에술가들이 함께 그 것을 이뤄나간다(2)
[각주:9]》 
 

 

로즈마리 오넬리 Rosemary O'neill 는,《니스 학파는 작가집단으로 묶일 수 있다. 그들이 시각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다르기만, "혁신적인 전환점"을 꾀하였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의 비판적 감각과 긴밀한 협력작업으로 그들은 자율적인 세대로 남게되었다(3)
[각주:10]》.
 이제 우리는 더이상 그 당시, 그 지역의 갤러리들, 서점, 카페, 상점, 전시, 축제등을 볼 수 없지만, 그들의 과단한 행동성은 예술적 실험을 널리 퍼트려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는 것이다.

 

전위예술


 

특별히 지난 20여년간, 니스 예술계가 수많은 예술가 각자가 드러났다면,이후의 세기는 해외나 프랑스에서 그룹이나 집단이 그 뒤를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사실주의가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움직임이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피에르 레스타니 Pierre Restany 의 지지아래, 이브 클라인[각주:11], 아만[각주:12], 마르샬 레스[각주:13] , 세자르[각주:14], 이 참여한다. 이런 움직임이 알려지면서 지엽적인 것을 떠나 세계적으로 그 영역을 넓혀나갔다 : 니스의 국제항공의 등장도 생기면서, 실제적으로 문화교류가 많아졌고, 예술가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마티스의 유산은 대서양 바깥으로, 팝아트와 누보레알리즘은 동등하게 여겨졌고, 미국으로 쏟아지던 현대예술에 대한 관심이 니스에도 드러났다(4)[각주:15]>를 볼것,(presses du réel 출판사, JRP ringier" height=14 valign="top">. 이브 클라인은 미국에서 전시를 열었고, 아만은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베르나르 브네[각주:16]에 의해 개념미술가로서 첫 발을 딛게 된다. 장 뒤피[각주:17]도  잠시 머물렀었다.
 

 

반대로 미국인 예술가인 조지 마키나우스
[각주:18]와 조지 브레히트[각주:19]는 니스에서 벤이 주최한 플럭서스 해프닝과 콘서트에 참가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계속해서 알려졌으며, 우리가 익히 알고있듯, 그들은 콘서트를 시적감흥이나 영감으로 해석하였다. 
 코트 다쥐르의 예술가들은 회화나 조각 뿐 아니라, 끊임없이 그 한계를 실험하고 간섭하여 퍼포먼스와 음향 부분에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유산이 1950년대 플럭서스의 짧은 시기동안에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빌라 아르슨[각주:20]과 여러지역의 융합의 장소로 이 지역은 현대예술 창조의 초석이다. 빌라 아르슨에서 두 번의 전시가 있었다 : 에릭 뒤카에트 와 아르노 라벨-로쥬의 퍼포먼스를 향한 벤과 필리우의 행위  le temps de l'action(de Ben et Filliou aux performances d'Eric Duyckaerts et Arnaud Labelle-Rojoux ) , le Temps de l'écoute 의 메아리가 울려파진다.
 프랑스 예술사에서 최후의 전위 예술은 쉬포르/쉬파스Support/Surface(1969-1972)는 10여년간 니스에서 펼쳐졌다. 누보 레알리즘 재단이후에, 그와 상이하게 펼쳐진 운동이다. 쉬포르/쉬파스는 기존의 회화적 틀을 깨부수고, 기존의 재현방식으로 만들어지던 구상화와 회화의 목적성을 거부하였다. 외부의 전시와 비공식 전시(1969년 코아라제 Coaraze 마을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캔버스와 회화의 프레임을 파괴하고 새로운 회화적. 조각적 실험(Noel dolla, Toni grand, patrick saytour, andré valensi, claude viallat )을 하였다. 그래서 루이 칸 Louis Cane, 마

 

크 드바드 Marc Devade, 다니엘 드쥐즈 Daniel Dezeuze 주변으로 곤고했던 이론파들과 충돌하곤 하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충돌로 수많은 출판물과 논평이 쏟아지면서 이런 움직임이 공식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Groupe 70은 1970년과 1973년 사이에 막스 샤볼렌, 루이 샤칼리, 비비엔 이나르, 그리고 그의 지인들로 구성되었다. 회화와 건축의 가능성에 집중했으며, 그들은 보다 지엽적으로 활동했다.

 


현재의 창조역사


 니스 예술계에 대해 더욱 잘 알려면, 이 프로젝트들이 (5)[각주:21] 다방면으로 펼쳐지는 전시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해, 이 프로젝트는 무엇보다 예술가 각자와, 그들의 다양한 실험을 결정지은 움직임들과 순환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상이한 장소와 상이한 주제로, 이 예술계의 시초에 대해, 그리고 현재에까지 이어지는 예술적 모험을 살피고 있다. 단지 한명이나 몇명으로 한정짓지 않고, 그 교차점과 통과하는 여정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 전시의 수많은 작가들이 다른 방법의 회화, 다른 방법의 조각(이 문서의 끝부분에 기록되어있는 프로그램) 으로 작업하며, 앞서가는 색(니스의 Mamac ) 을 보여준다. 이 야심찬 프로젝트에서 50여명의 작가들이 초대되었다. 역사적 거장들(뒤피, 마티스, 레제, 피카소, 샤발, 스타엘, 하르퉁)과, 단색화의 거장들(클라인, 켈리Kelly, 뷰리 Burri, 오네거 Honegger, 브네venet), 급진적이며 파괴적 화가들(케인 kane. 돌라 dolla , 세이투흐saytour, 비알라 viallat)등이 다른 방법의 회화 에 대한 고찰과 혁신성이 깃든 작품을 선보인다. 지난 60여년간 위대한 예술작품들이 다양한 방향과 힘을 가진 것들이다. 
 작가들, 수집가들, 기관이나 단체에서 새로운 규칙을 만든 10여명의 작가들(6[각주:22])이, 코트 다쥐르의 수집가들 전시에 초대받았다. 수집가들을 위한, 지정 아틀리에에서 생산한 특별한 작품들은 바로 소장품이 된다. 이 프로젝트는 창조에 있어 필수적인 수집가들의 역활에 대해 되묻는다. 전시는 코트 다쥐르예술계의 주인공들 사이의 《연합》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또한 제 2의 중대한 선언을 하게 된다 : 코트 다쥐르의 지휘자들은 복합적으로 제안을 한다. 사람들은 20여개 지역에서 40여개가 생길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역사의 잣대로 전시의 주제를 단절시키는 가 하면, 어떤 이는 그로부터 독립적이다. 고유의 존재감, 창조의 진정한 잣대로 예술을 확산시킨다. 예를 들면 카뜨린느 이세르 갤러리 galerie Catherine Issert 가 그렇다. 이 갤러리는 생-폴-드-방스에서 35년 주년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 갤러리의 프로그램은 코트 다쥐르 지역의 성격을 결정짓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지역과 국가, 국지성과 세계성은 서로 상호간섭적이다(7)[각주:23]. 니스 학파와 빌라 아르슨, 그리고 여타의 정신, 다른 문화적 맥락이 프랑스 뿐 아니라 세계의 흐름 속에서도 지역 예술계를 계속 유지케 하는 요소들이다. 
 이번 전시로 인해, 이미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첫 장을 쓰기 시작했다. ■  


   

출처 : arptress#380
기사 : 베르나르 마셀리스 Bernard Marcelis
번역 : PLONGEUR (zamsoobu 잠수부)
  1. 1970년대 프랑스 전위적 미술단체. 또는 그 기법."회화를 혁신하고 혁명을 그리는 것"이라는 마르크 데바드의 주창처럼, 캔버스의 프레임, 서명, 제작일, 타이틀 등을 제거 고정관념을 바꾸고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자 함. 형식적으로는 온건함. 회화를 물질적 형태로 보려함. 프랑스적인 미니멀 아트로의 전개양상으로 해석됨.주요 작가로 마르크 디바, 뱅상 비 울레, 다니엘 드죄즈,패트릭 세투르, 앙드레 발랑시, 클로드 비알레 등등. [본문으로]
  2.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2.31~1954.11.3] 요약 프랑스의 화가. 그가 주도한 야수파(포비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보색관계를 교묘히 살린 청결한 색면효과 속에 색의 순도를 높여 확고한 마티스 예술을 구축함으로써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다[출처]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3.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y Picasso, 1881.10.25~1973.4.8] 요약 스페인 태생이며 프랑스에서 활동한 입체파 화가. 프랑스 미술에 영향을 받아 파리로 이주하였으며 르누아르, 툴루즈, 뭉크, 고갱, 고흐 등 거장들의 영향을 받았다. 초기 청색시대를 거쳐 입체주의 미술양식을 창조하였고 20세기 최고의 거장이 되었다. 《게르니카》, 《아비뇽의 처녀들》등의 작품이 유명하다[출처]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y Picasso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4. 페르낭 레제 [1881.2.4~1955.8.17] 요약 프랑스의 화가. 자연과 인간생활의 큰 구도를 즐겨 다루면서 단순한 명암이나 명쾌한 색채로써 대상을 간명하게 나타냈고, 기하학적 형태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기계문명의 다이나미즘과 명확성에 이끌려 그것을 반영한 다이내믹 입체파의 경지를 이루었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프랑스 아르장탕 주요작품 《곡예》《자전거 타기》 본문 아르장탕 출생. 처음에는 캉의 건축사무소에서 견습생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1903년 파리의 미술학교에 들어가, 제롬과 페리에에게 사사하는 한편, 루브르나 아카데미 쥘리앙에 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초기에는 인상파와 신인상파의 감화를 받았고, 마티스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1907년경 세잔의 작품을 계기로 화면구성이나 공간표현을 연구하게 되었다. 1910년 피카소와 브라크, 아폴리네르, 들로네 등과 사귀어 입체파(큐비즘)운동에 참가하여, 대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특히 들로네와 같이 정물화다운 제재(題材)보다 자연과 인간생활의 큰 구도를 즐겨 다루면서 단순한 명암이나 명쾌한 색채로써 대상을 간명하게 나타냈고, 원통형 등의 기하학적 형태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기계문명의 다이나미즘과 명확성에 이끌려 그것을 반영한 다이내믹 입체파라는 경지를 이루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이 전쟁의 체험을 통하여 기계와 인간의 공동작업이라는 새 시대의 주제에 눈을 떠 명쾌한 포름과 순색(純色)의 평도(平塗) 등 기계적인 표현으로 나아갔다. 르 코르뷔지에와 몬드리안 등과 사귀어 추상주의에도 관심을 보여, 회화와 건축, 인쇄 ·영화 ·연극 등과의 관련에 관심을 보여 현대 사회생활의 요구를 반영하고 생활의 실감을 존중하는 제작을 의도하였다.유채화 ·소묘 ·판화에서 벽화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태피스트리 등에도 손을 대어 폭넓은 활동력을 발휘하였다. 1920년대에는 전위영화 《발레 메커닉》(1924) 등 무대장치와 영화 ·발레 관계 일에 종사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곡예》나 《자전거 타기》 등을 제작하였다. 1945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1946년 아시교회의 정면을 모자이크로 장식하였고, 오댕쿠르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도자기나 태피스트리 등 광범위한 일에 종사하여 간명하고 힘센 평면적인 표현을 통하여 기계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을 추구하였다. 1960년 프랑스 남부 코트다쥐르의 비오에 레제미술관이 개관되었다[출처] 페르낭 레제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5.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1887.7.7~1985.3.28] 요약 프랑스의 화가. 유화·판화·벽화·스테인드 글라스·조각·도기(陶器) 제작을 비롯하여 무대 장식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초기 작풍은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슬라브의 환상감과 유대인 특유의 신비성을 융합시킨 독자적인 개성을 강하게 풍겼다. 소박한 동화의 세계나 고향의 생활,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즐겨 다루었고,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풀어주는 매력이 있다.[출처]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6. 니콜라 드 스탈 [Nicholas de Staël, 1914.1.5~1955.3.16] 요약 러시아 출생의 프랑스 화가. 서정추상의 한 경향인 앵포르멜 미술을 추구하며 전후 유럽 추상미술을 대표하였다. 후기에는 추상에서 구상으로 옮겨갔지만, 궁극적으로 그의 작품은 관찰된 사실과 추상적 구성간의 같음을 상기시킨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요작품 《추상 구성 Abstract Composition》(1949), 《바닷가의 인물》(1952), 《아그리젠토 풍경》(1953), 《정물-과일 Nature Morte-Fruits》(1954), 《마르티그 Les Martigues》(1954) 본문 1914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귀족가문 출신으로 1919년 러시아혁명 당시 폴란드로 추방당했다. 고아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브뤼셀에서 성장하였다. 1932년 브뤼셀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해 미술 수업을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고 1934년 파리에 정착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외인부대에서 복무하였다. 1943년 파리로 돌아와 브라크(Georges Braque)와 교류하고, 레제(Fernand Léger)의 사사를 받았다. 그는 넓은 의미에서의 서정추상(Abstraction Lyrique)의 한 경향인 앵포르멜 미술(Art Informel)을 추구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유럽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하였다. 커다란 색면과 두터운 물감층으로 풍경이나 정물을 묘사하였으며 때로는 인물이나 인물군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비재현적으로 간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암시하면서 형태에 대한 촉각적 감각을 드러냈다. 1950년대 초부터는 재현적인 구상 작품을 주로 하였다. 태양, 바다와 같은 자연의 형태를 단순화한 그의 회화는 추상과 구상의 균형을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다. 말년에는 더욱 유동적이고 투명한, 그러면서 윤곽이 약화되는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파격적인 재료와 양식으로 격정적인 내면의 형상을 관찰된 대상에 담아냈다. 그는 1955년 프랑스 앙티브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주요 작품에는 《추상 구성 Abstract Composition》(1949), 《바닷가의 인물》(1952), 《아그리젠토 풍경》(1953), 《정물-과일 Nature Morte-Fruits》(1954), 《마르티그 Les Martigues》(1954) 등이 있다.[출처] 니콜라 드 스탈 [Nicholas de Staël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7. [/footnote]이 있는 것처럼, 망통에는 콕토[footnote]콕토 [Jean Cocteau, 1889.7.5~1963.10.11] 요약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다방면에 이른 활동을 겸하며 문단과 예술계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시집 《알라딘의 램프》, 극본《에펠탑의 신랑 신부》, 소설 《Le Potomak》 외 다수의 작품을 많은 장르에서 선보였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프랑스 파리 근교 메종라피트 주요저서 《희망봉》(1919), 《포에지》(1920) 본문 파리 근교의 메종라피트 출생.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일찍부터 파리 사교계에 출입하였고, 20세 때에는 처녀 시집 《알라딘의 램프 La Lampe d’Aladin》(1909)를 출판하였다. 콕토는 러시아 발레단의 S.P.디아길레프, 작곡자인 스트라빈스키, 화가인 피카소, 시인인 G.아폴리네르 등 전위적인 예술가들과 교유하면서, 《옥상의 황소》(1920) 《에펠탑의 신랑 신부 Les Mariés de la Tour Eiffel》(1924) 등 발레단의 각본을 썼는데, 이 시도가 엉뚱하다고 하여 문단과 예술계에 물의를 일으켰다. 《희망봉 Le Cap de Bonne-Espérance》(1919) 《포에지 Poésie》(1920)는 새로운 감각을 곁들인 참신한 형식의 시집이었으며, 《수탉과 알캉》(1918) 《직업의 비밀 Le Secret professionnel》(1922)은 그의 시집같이 경묘하고 깔끔한 평론으로 꼽힌다. 그는 포에지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하고, 그것은 꿈 ·기적 ·초자연 ·죽음 등과 이웃하고 있는 세계라고 자답하였다.다방면에 이른 그의 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세대의 새로운 세계관을 반영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여기서는 19세기적인 문학관의 파산이 구체적으로 선고되었다. 소설 《Le Potomak》(1919) 《그랑 데카르》(1923) 《사기꾼 토마 Thomas l’imposteur》(1923) 등에서는 모두 젊은이들의 사랑과 꿈과 죽음이 주요 테마이며, 이 작품들은 관념적인 요소가 매우 짙게 풍긴다. 그는 언뜻 보기에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매사에 호기심을 불태우는 작가처럼 생각되기 쉬우나, 지나치게 기교를 구사하여 진실미가 결핍되었다고 지적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외관(外觀) 뒤에서 질서로의 희구, 신비에 대한 동경, 비극성으로의 기울어짐이 그의 작품에 숨어 있다. 로마가톨릭 철학자 J.마리탱과의 왕복 서한에 잘 나타나 있듯이 콕토는 한때 로마가톨릭에 접근한 때도 있었다. 소설 《무서운 아이들 Les enfants terribles》(1929)은 그가 문단에 데뷔시켜 준 천재 작가 R.라디게의 요절을 슬퍼하여 아편 중독자가 된 자신이 이 악습에서 빠져나오기 위하여 쓴 것으로, 이것은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인 세계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희곡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1926) 《오르페우스 Orphée》(1926) 《오이디푸스왕 Oedipe-Roi》(1928) 《지옥의 기계 La Machine infernale》(1934) 《쌍두(雙頭)의 독수리 L’Aigle á deuxtêtes》(1946) 및 《바쿠스 Bacchus》(1952) 등이 있으며, 이 중 몇 편은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처음부터 영화로 제작된 것으로는 《시인의 피》(1930) 《비련 L’Eternel retour》(1943) 《미녀와 야수 La Belle et la Bête》(1945) 《오르페우스의 유언》(1960) 등이 있다. 이 중의 대부분은 그리스 신화, 중세의 이야기등에서 소재를 구한 것이 었지만, 이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점은, 시(詩)는 희망 없는 종교이며 모랄이라 생각하고, 작품은 영혼의 수련장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기본적인 예술관일 것이다. 이 밖에 그는 데생과 무대 장치,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까지 시도한 다각적인 예술가였지만, 그의 본질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순수한 시인이었다. [출처] 콕토 [Jean Cocteau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8. [/footnote] 창단한, 마그재단 미술관[footnote]마그재단 미술관[ Fondation Maeght , ~財團 美術館 ] 설립설립연도 1964년소재지남프랑스 생 폴 뒤 방스에메마그(Aimé Maeght, 1906~81)에 의해서 1964년 남프랑스의 생 폴 뒤 방스에 설립되었다. 마그는 제2차대전 전 보나르나 마티스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전후 파리에 마그 화랑을 개설하고는 거장 이외에도 전후파인 바제느, 탈 코아트, 타피에스, 리오펠, 아다미, 모노리(Jacques Monory, 1934~ ), 티튀스 카르멜(Gerard Titus Carmel, 1941~ )에 이르기까지 여러 화가를 발탁했다. 더불어 시인들을 옹호하고 『데리에르 르 미루아르 (Derrière le Miroir』지(誌)를 비롯해서 출판활동에도 힘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활동이 발전해서 재단으로 성장하고, 전시 ∙ 매매 외에도 잡지 『에페메르 (Ephémère)』나 단행본 출판까지 광범하게 손을 대어 근 ∙ 현대미술의 적극적인 수집 ∙ 전시활동을 행하고 있다. [본문으로]
  9. (2)Jacques Matarasso, L'école de Nice 전시 카달로그에서, 1997년 알렉상드르 갤러리,,(Francoise Armengaud, ...(... [본문으로]
  10. (3)28쪽, op. cit., dans la préface de l'école de nice.Paroles d'artistes [본문으로]
  11. Yves Klein (French pronunciation: [iv klɛ̃]; 28 April 1928 – 6 June 1962) was a French artist considered an important figure in post-war European art. He is the leading member of the French artistic movement of Nouveau réalisme founded in 1960 by the art critic Pierre Restany. Klein was a pioneer in the development of Performance art, and is seen as an inspiration to and as a forerunner of Minimal art, as well as Pop art. [본문으로]
  12. Arman (November 17, 1928–October 22, 2005) was a French-born American artist.[1] Born Armand Pierre Fernandez in Nice, France, Arman is a painter who moved from using the objects as paintbrushes ("allures d'objet") to using them as the painting itself. He is best known for his "accumulations" and destruction/recomposition of objects [본문으로]
  13. 마르샬 레스 [Martial Raysse, 1936.2.12~] 요약 프랑스의 신사실주의(Nouveau Réalisme) 미술가. 1960년대 초 앵포르멜 미술에 대응해서 일상의 오브제와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들을 미술에 적극 수용하였다. 작품을 창작하기보다는 차용을 통해 작품이 삶의 일부가 되게 하였으며 팝아트와도 맥을 같이 한다.[출처] 마르샬 레스 [Martial Raysse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14. [/footnote], 니키 드

     

    생팔
    [footnote][Niki de Saint-Phalle, 1930.10.29~2002.5.21] 요약 프랑스의 누보레알리슴 조각가. 1961년 전시장에서 관객에게 총을 주어 캔버스 위에 매단 물감 주머니를 쏘게 하여 무작위적인 추상화를 연출하는 '슈팅 페인팅' 작업을 하였다. 본문 누이이 출생.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헤어져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 탓인지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이었다. 18세 때 모델로 일하다가 20세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1952년부터는 신경쇠약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평범한 여성으로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세계에 대한 욕구와 사회의 모순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1961년에 '슈팅 페인팅 shooting painting'으로 누보레알리슴 작가로서 이름을 얻었다. 슈팅 페인팅이란 마을 축제와 같은 전시장에서 관객에게 총을 주어 캔버스 위에 매달아 놓은 물감 주머니를 쏘게 함으로써 무작위적인 추상화를 연출하는 것이다. 또 사격조각의 모체가 되었던 《내사랑의 초상화 Portrait of my Lovers》(나무, 셔츠, 타이, 타깃, 화살, 채색, 72×55×7㎝, 1961)는 여성에 대해 무책임한 남성들을 상징적으로 죽이는 작품으로, 표창을 던질 표적과 남성용 셔츠에 타이를 매어 나무에 붙이고 표창을 던짐으로써 남성에 대한 증오심을 치료하였다. 또 낡은 장난감, 그리스도 수난상, 폐품 등을 모아 놓고 전체를 금색으로 칠한 부조물을 만들어 종교예술에 대한 공격적인 패러디를 보이기도 했다.한편 《나나 NaNa》 시리즈에서는 밝게 채색된 그로테스크한 조각상이 등장한다. 낙천적이고 맵시 없이 과장되게 부푼 모습들은 밝고 재미있는 색채를 띠어 활기차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인간의 약점이나 두려움, 불확실성 등에 대한 역설적인 상상을 하게 만든다. 스톡홀름 미술관에 거대하게 세워진 《혼 Hon》(1966)은 여성의 육체를 본떠 만든 조각품으로, 어느 남성보다 크고 강한 조각품을 만들고자 하여 만든 것인데, 그 몸 속에 유원지를 연상케 하는 환경을 설계하여 영원한 정신적 안식처로서의 여성을 말하였다. [출처] 니키 드 생팔 [Niki de Saint-Phalle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15. "(4)이 [본문으로]
  16. [Bernar Venet, 1941.4.20~] 요약 프랑스 출신의 개념주의 미술가. '비결정적인 선 Indeterminate Line'을 통해 철 조각의 전통적 규범에 도전하였으며 현대조각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철이 가지는 무게감을 이용해 강하면서도 유연한, 역동적이면서도 침묵하는 조형세계를 보여준다.[출처] 베르나르 브네 [Bernar Venet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17. Jean Dupuy (born November 22, 1925) is a French-born artist. He is a pioneer of work combining art and technology.[1] He works in the fields of conceptual art, performance art, painting, installations, sculptures and video art. In the 1970s he curated many performance art events involving different artists from Fluxus, the New York's avant-garde and neo-dada scene. Many of his works are part of important collections such as Centre Pompidou in Paris and Musée de Nice. [본문으로]
  18. [George Maciunas, 1931.10.8~1978.5.9] 요약 리투아니아 출신의 미국 행위예술가이자 전위예술인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1962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처음으로 '플럭서스-국제 신음악 페스티발'을 열고 공식적으로 플럭서스 그룹을 출범시켰으며 1977년 시애틀에서 마지막 플럭서스 페스티발을 열었다. 별칭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국적 미국 활동분야 전위예술, 플럭서스 출생지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본문 1931년 10월 8일 리투아니아 남부의 카우나스에서 건축가·엔지니어인 아버지와 발레 댄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스위스에서 보낸 뒤, 1944년 소련군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하자, 가족과 함께 독일로 피신해 헤센주(州)의 하나우에서 피난민들을 위한 중등학교에 다녔다.194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부터 1952년까지 쿠퍼유니온미술학교에서 미술·그래픽·건축을 전공하고, 1960년 피츠버그에 있는 대학에서 건축·음악 학사 학위를 받은 뒤,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뉴욕대학교에서 시각미술(유럽·시베리아 중세미술)을 전공하였다.1960년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그해 '플럭서스'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이 무렵 플럭서스를 이끌어 갈 동료들인 브레치(George Bretch)·히긴스(Higgins)·카프로(Allan Kaprow) 등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하였다. 1961년 매디슨 애비뉴에 갤러리 AG를 열고 이 갤러리에서 케이지(John Cage)·오노 요코[小野洋子]·히긴스 등의 문학·음악·영화 작품들을 선보였다. 같은 해 독일로 건너가 독일·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이듬해 헤센주(州)의 비스바덴에서 처음으로 '플럭서스-국제 신음악 페스티벌'을 열고, 공식적으로 플럭서스 그룹을 출범시켰다. 이 그룹에는 히긴스·패터슨(Benjamin Patterson)·보스텔(Wolf Vostell)·윌리엄스(Emmett Williams)·백남준(白南準) 등이 참여하였다.1963년 뉴욕으로 돌아와 플럭서스 본부를 창설하고, 1968년부터 플럭서스 본부 건물을 세우는 데 전념하였다. 1970년 다시 행위예술에 관심을 쏟기 시작해 1975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같은 해 고릴라의 공격을 받아 눈을 잃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였다. 1977년 9월 시애틀에서 마지막 플럭서스 페스티벌을 연 뒤, 1978년 암 진단을 받고 그해 5월에 세상을 떠났다[출처] 조지 마키우나스 [George Maciunas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19. George Brecht (August 27, 1926 – December 5, 2008), born George Ellis MacDiarmid, was an American conceptual artist and avant-garde composer as well as a professional chemist who worked as a consultant for companies including Pfizer, Johnson & Johnson, and Mobil Oil. He was a key member of, and influence on, Fluxus, the international group of avant-garde artists centred around George Maciunas, having been involved with the group from the first performances in Wiesbaden 1962 until Maciunas' death in 1978. One of the originators of 'participatory' art,[2] in which the artwork can only be experienced by the active involvement of the viewer, he is most famous for his Event Scores such as Drip Music 1962,[3] (see [2]) and is widely seen as an important precursor to conceptual art.[4][5][6] He described his own art as a way of “ensuring that the details of everyday life, the random constellations of objects that surround us, stop going unnoticed.” [7] [본문으로]
  20. The Villa Arson, also referred to as the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Arts à la Villa Arson (National School of Fine Arts at the Villa Arson), is a French art museum, elite school and research institution for contemporary art, located in Nice, France.[1] It is home to the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Arts de Nice (National School of Fine Arts of Nice) and the Centre Nationale d'Art Contemporain (National Centre for Contemporary Art), and was created under a ministerial charter in 1972 by the Ministry of Culture.[1][2] Contents [hide] [본문으로]
  21. (5)알프스-해안 20세기 국립미술관.(니스의 마르크 샤갈 미술관, 비오의 페르낭 레제 미술관, 발로리스의 피카소 미술관)과 최근 확장한 éco parc de Mougins,망통의 장 콕토 미술관, 방스의 le chateau de Villeneuve, 니스 국립현대미술관(MAMAC), 니스의 빌라 아르슨 국립현대미술센터(centre national d'art contemporain de la Villa Arson) [본문으로]
  22. (6) 이 작가들 중에 몇몇을 이야기하자면, Céleste Boursier-Mougenot, D.Castellas, S.Lorenzi, Pinaud,F.Pugnaire,D.Raffini,D.Tatah, C.Teisserire [본문으로]
  23. (7) au programme, citons des oeuvres de Ben, j-c,Blais, BP,P,Broccolichi, P.descamps, E.Dietman, R.Filliou, K.Ghelloussi, A.Hamu, B.pages, P.Pinaud ou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