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독립영화의 새로운 바람8 _ 마리 로지에 Marie Rosier
프랑스 출신인 마리 로지에는 테네시 윌리암스Tennessee Williams 1의 서문을 영화와 연극으로 각색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고 뉴욕에 왔다. 17년이 지난 지금 더이상 글을 쓰진 않지만 그녀의 자리를 찾았다. 비자발급을 위해 회화수업을 마치고, 리차드 포먼 Richard Foreman 과 무대설치가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후 포맨, Kuchar 형제, 가이 마딘 Guy Maddin, 토니 코나 Tony Conard 와 함께 작업하면서 이력을 쌓아왔다. 그리고 이제 그녀만의 첫 장편 영화 제네시스와 레이디 제이의 발라드The Ballad of Genesis and Ladu Jaye 긴 여정을 마쳤다 : 인더스트리얼 락 그룹인 Throbbing Gristle과 Psychic TV를 만든 그리고 Lady Jaye을 만든, 제네시스 피-오리지 Genesis P-Orridge의 인생을 다룬다. 판타지와 도큐멘터리를 무한대로 뒤섞는 이 영화는 2011년 베를린에서 두 부문에 수상을 하고, 전세계 영화제에 줄지어 초대받았다. 프랑스에서의 개봉(10월 26일)을 앞두고 그녀가 모국을 방문했다. 수중에 볼렉스카메라는 없지만, 그녀는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영화 프로그램을 맡았다. 어퍼이스트사이드에 프랑스식 코메디의 수위를 조절하면서 영화는 그녀를 브루클린의 젊은 씨네필 대열에 합류하게 하였다.
N.E
●어떻게 제네시스와 레이디 제이의 발라드The Ballad of Genesis and Ladu Jaye 가 나온 겁니까?
제네시스 P-오릿지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 그의 음악이나 작품에 대해서요. 하루는 알란 베가의 콘서트에 갔는데, 제네시스가 게스트로 나오더군요. 그를 보고 잊혀지지 않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루 리드나 밥 딜런의 목소리와 조금 비슷했거든요. 그다음날 소호에 전시오프닝에 갔는데 누군가와 같이 들어가게 됬어요 : 돌아보니까 제네시스더라구요. 정말 뉴욕다운 만남이죠. 그렇게 일이 된겁니다. 우린 5분간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내게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일주일 후에 브루클린에 있는 그의 집에 갔어요. 레이디 제이와 그가 내게 엄청난 질문을 쏟아댔고, 제이가 나중에 이렇게 말하더군요 : 《그녀밖에 없어요, 우리 영화를 위해 기다려온 사람이 그녀예요. 》 카메라를 잡을 때, 난 경험이 없었어요. 이 주 후에 난 Psychic TV와 함께 귀가길에 버스를 같이 타고 있었죠. 그로부터 7년간 이어질 모험의 첫 시작이었죠.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볼렉스로 한번에 3분여를 찍었죠. 어떻게 할 지 몰랐기 떄문에, 종일 일했어요. 그래서 촬영을 위해 우린 계속 만났죠. 시간이 지나면서 단지 락그룹을 찍는 건 평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네시스와 윌리암 버로스 William Burroughs 2 저먼 3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들을 찾아냈어요. 나는 제네시스의 인생을 찍기 시작했고, 제네시스와 제이의 사랑을 담았죠. 그들이 서로 끼치는 영향과 그들의 양성성, 그리고 서로 닮기 위해 성형시술을 받으며 변해가는 모습들이죠. 내가 그들을 담는 첫 시도라는 생각에 무서웠지만, 그들의 무한한 사랑과 모든 면들을 우선으로 놓고 보았어요. 제이가 2007년에 사망했을 때, 영화같다고 생각했어요. 또, 거기서 영화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더이상 제네시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고 싶지 않았어요. 영화를 마쳐야 한다고 연락한 건 그가 먼저였습니다. 제이를 위해서요. 그녀의 죽음 만큼이나 영화를 미완성으로 남겨두는 건 비극이라구요.
●어느 장면이 사실에 가깝거나 , 연출에 의한 건가요?
나는 항상 초상화를 그리는 것처럼 작업을 해요. 주제를 놓고 인터뷰를 할 때, 이미지가 머릿 속에 떠오르죠. 제네시스는 로큰롤 가수지만, 그를 멜리에스 4 방식대로 새나 물고기로 촬영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가 완전히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은 불가능했어요. 나와 그 사이에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었죠. 그가 연기하는 걸 보면 어떤 마술같아요. 내면세계가 나타나거든요.
●영화는 자체제작으로 되었나요?
네, 장학금 받은 얼마하고 종일 근무로 돈을 좀 모았어요. 나 혼자 다 했죠 : 연출, 편집, 기타 등등이요. 마틴 마케 Martin Marquet 와 스티브 홀름그렌Steve Holmgren 이 영화가 끝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제작자의 직함을 전해주고 싶어요. 이 제작자들은 돈을 입에 올리기 싫어하죠. 그들은 합법적으로 도와준 거예요. 난 비지니스에 젬병이거든요. 첫 장편 영화를 만드는 건 정말 복잡한 일이예요. 그럴때마다 그들은 내게 어떤 일도 할 필요없다고 나를 안심시켰어요.
●뉴욕에 자급자족으로 장편을 찍은 또 다른 감독이 있나요?
내가 알기론 실험적 단편영화를 찍는 제임스 베닝 5 이나 요나스 메카스 6 는 아네스 베 7 가 현재 후원을 하고 있고, 구겐하임 미술관 같은 큰 재단이나 미술관이 후원을 하죠. 투자금을 찾는 데 애걸복걸하지 않았어요 : 영화 거리가 있으면 언제라도 찍었죠. 지금은 더 멀리가보고 싶어요. 처음으로 피곤함을 느낍니다. 촬영, 편집, 이 모든 일들은 아주 고된 일이예요 : 수많은 이메일들, 웹사이트 등등... 내가 다 잘할 순 없어요. 나보다 어느 부분은 잘하는 누군가 있을 겁니다.
●뉴욕의 실험영화계를 어떻게 묘사하시나요?
항상 그들에게서 영감을 받죠. 돈이 없기 때문에 경쟁의식이 심하지 않아요. 공생관계처럼 좋은 관계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폐쇄적 집단을 위해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어요. 내 작업물은 여기서 보인 적이 없어요. 내 영화에는 가능하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들로 넘쳐있어요. 스파게티나 물고기 치마를 입은 덩치 큰 남자들이 나오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죠. 실험 영화계의 거물들 속에서 젊은 여자애가 들어갈 자리를 찾는 게 어려웠죠. 포럼Forum 이나 베를린의 키노 아스날Kino Arsenal에서 밖에 내 영화를 상영할 수 밖에 없었고, 나에게 주어진 공간이었죠. 발라드 The Balad...는 상업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보기 불편할 수 있어요. 하지만 두터운 팬층도 있어요. 아르헨티나 프랑스에서 인더스트리얼 록음악 팬들이 있었거든요.
●감독님이 필름영화를 고집하듯이, 많은 젊은 감독들도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난 필름 영화, 그리고 볼렉스의 3분짜리 롤로 찍는 시스템에 익숙해요. 그건 내가 무거운 카메라를 들 수 없는 체력과도 관련이 있죠. 난 팀을 이뤄서 하는 것 보다 혼자 찍는 걸 좋아해요. 필름은 내게 적합해요. 그림같거든요. 비디오는 플랫하죠. 나는 필름에 빛이 닿아서 태우는 걸 좋아해요. 비디오로는 내가 찍고 싶은 것을 찍을 수가 없어요. 볼렉스로는 미리 편집하는 것도 가능하죠.
●뉴욕의 서로 다른 예술적 형태들을 혼합한 것인가요?
소닉 유가 실험 영화 상영에 참여한 것같은 거죠. 하지만 모든 것이 섞이는 곳은 아주 드믈죠. 또, 갤러리에서 16mm영상을 설치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죠. 난 폭넓게 영역을 넓혀갈 겁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겠죠. 토니 코나 같은 음악, 영화, 퍼포먼스 등등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요.
●어떤 뉴욕 영화를 좋아하시나요?
Maysles형제나 D.A.Pennebaker 의 다큐멘터리예요. 그들은 비록 뉴욕에서 촬영을 한 건 아니지만, 이곳에서 영화를 만들고 늘 여기와 닿아 있죠. 그리고 요나스 메카스 Jonas Mekas 의 월든Walden 이 있죠. 최근에,Safdie형제의 Lenny and the Kids 가 있죠. 거기엔 내가 아는 70년대의 뉴욕이 보였어요. ■
8월 17일, 뉴욕에서
니콜라 엘리오뜨
니콜라 엘리오뜨
출처 : 81- 82page, cahiers du cinéma 2011.9
기사 : Stéphane Delorme & Nicholas Elliott
번역 : Plongeur ( zamsoobu )
기사 : Stéphane Delorme & Nicholas Elliott
번역 : Plongeur ( zamsoobu )
- Thomas Lanier "Tennessee" Williams III (March 26, 1911 – February 25, 1983) was an American writer who worked principally as a playwright in the American theater. He also wrote short stories, novels, poetry, essays, screenplays and a volume of memoirs. His professional career lasted from the mid 1930s until his death in 1983, and saw the creation of many plays that are regarded as classics of the American stage. Williams adapted much of his best known work for the cinema. Williams received virtually all of the top theatrical awards for his works of drama, including a Tony Award for best play for The Rose Tattoo (1951) and the Pulitzer Prize for Drama for A Streetcar Named Desire (1948) and Cat on a Hot Tin Roof (1955). In 1980 he was honoured with 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by President Jimmy Carter and is today acknowledged as one of the most accomplished playwrights in the history of English speaking theater. Theater scholar Charlotte Canning, of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where William's archives are located, has said, "There is no more influential 20th-century American playwright than Tennessee Williams... He inspired future generations of writers as diverse as Suzan-Lori Parks, Tony Kushner, David Mamet and John Waters, and his plays remain among the most produced in the world."[1] [본문으로]
- 미국 소설가. 15년 동안이나 마약중독이 되었던 체험을 바탕으로 《마약환자》를 썼으며 대표작《벌거벗은 런치》에서 마약환자의 환각과 공포를 산문시풍으로 그렸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비트파(派) 문학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세인트루이스 출생.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후, 유럽 각지를 여행하였다. 귀국 후에는 신문기자 ·사설탐정 ·해충구제업자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다가 작가생활을 시작하였다. 15년 동안이나 마약중독이 되어 있었는데, 그 체험을 《마약환자 Junkie》(1953)에 썼으며, 또 대표작 《벌거벗은 런치 The Naked Lunch》(1959 파리, 1962 미국)에서 마약환자의 환각과 공포를 산문시풍으로 그렸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비트파(派) 문학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 밖의 작품으로 《해충구제업자》(1960) 《소프트 머신 The Soft Machine》(1961) 《죽은 손가락은 말한다 The Dead Fingers Talk》(1963) 《노바 익스프레스 Nova Express》(1964) 등이 있다. [출처] 윌리엄 버로스 [William Seward Burroughs ] | 네이버 백과사전[출처] 윌리엄 버로스 [William Seward Burroughs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아버지가 군인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영국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는 좋은 성장 환경에서 자연스레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화가가 되려고 슬레이드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졸업 후 오페라단과 발레단의 무대 디자이너로서 경력을 쌓았다. 그후 영국 영화계의 D.H.로렌스라고 일컬어지는 켄 러셀 감독의 영화 《악마들》(1971)의 세트 디자이너로 참여하여 감화를 받고 슈퍼 8mm로 만든 첫 단편영화 《브로큰 잉글리시 Broken English》(1972)로 연출작업에 뛰어들었다. 저먼은 슈퍼 8mm 카메라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개척자였다. 1978년, 《축제 Jubilee》가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을 받고 지명도가 높아졌으며, 그뒤에도 계속 슈퍼 8mm와 16mm로 영화를 찍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가정용 비디오카메라로까지 영화를 찍었다.1976년 《세바스천 Sebastian》으로 데뷔했는데,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영국 영화계의 무서운 아이'라고 불렀다. 그는 반항심이 퇴색될까봐 35mm 극영화 제작을 꺼렸는데, 실존화가 카라바조의 일생을 담은 《카라바조 Caravaggio》(1986)는 35mm 극영화로 만들었다. 이것은 저먼의 영화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후원자의 요구와 자신의 예술적·성적 충동 사이에서 갈등하는 카라바조의 삶을 조명하면서 저먼은 결국 화가의 미학적 욕망과 성적 욕망은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흥미로운 암시를 준다.저먼은 자신의 영화를 기록영화로 여겼다. 문화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입장을 개인적으로 분석한 기록영화라는 것이다. '기존정치나 매체는 결코 진실을 말해본 적이 없다.' 1987년에 발표한 《영국의 종말 The Last of England》은 이런 기만감·상업주의에 물들어 정체성을 상실한 당대의 영국 문화에 대한 저먼 자신의 분노와 탄식으로 충만되어 있다. 1989년에 발표한 35mm 극영화 《전쟁 레퀴엠 War Requiem》도 비관적인 영화였다. 그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토리 없이 이미지만으로 2시간의 영화를 끌어나가는 작업 스타일은 당혹스럽고 어지럽기까지 하다. 저먼의 후기작 《블루 Blue》(1993)는 저먼의 영화 가운데서 가장 파격적이다. 푸른색으로 칠해진 화면을 보면서 우리는 목소리와 음향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동성연애자였던 그는 1989년 에이즈 환자로 판명되었고, 증세가 악화되면서 시각을 잃어 시각적인 마술사의 칭호를 듣던 그의 재능도 무너졌다[출처] 저먼 [Derek Jarman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 Georges Méliès (8 December 1861 – 21 January 1938), full name Marie-Georges-Jean Méliès, was a French filmmaker famous for leading many technical and narrative developments in the earliest cinema. He was very innovative in the use of special effects. He accidentally discovered the stop trick, or substitution, in 1896, and was one of the first filmmakers to use multiple exposures, time-lapse photography, dissolves, and hand-painted color in his films. Because of his ability to seemingly manipulate and transform reality through cinematography, Méliès is sometimes referred to as the First "Cinemagician."[1] [본문으로]
- James Benning (born 1942 in Milwaukee, Wisconsin) is an American filmmaker. He is the son of German immigrants and studied film at the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1975) under the tutelage of David Bordwell. Working as an independent filmmaker, Benning's films focus on a sense of place, and are often built from long, unedited takes. He used to work in Chicago but in recent years has been based on the West Coast. In 2003, Reinhard Wulf made a 90 minute documentary about Benning and his films called James Benning: Circling the Image. In 2007, the Austrian Film Museum published a book of texts on his work. In addition to his film work, Benning has held professorships at Bard College and Northwestern University, and since 1987, he has taught film-making and experimental sound at the 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His daughter is experimental filmmaker and musician Sadie Benning. [본문으로]
- Jonas Mekas (Lithuanian pronunciation: [ˈjonɐs ˈmækɐs]; born December 24,[1] 1922) is a Lithuanian-born American filmmaker, writer, and curator who has often been called "the godfather of American avant-garde cinema." His work has been exhibited in museums and festivals across Europe and America. [본문으로]
- (born Agnès Andrée Marguerite Troublé, 1941 in Versailles) is a French fashion designer. She is known for her self-named brand, which includes fashion and film interest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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